SF 생태주의
<퍼시픽 림>이 보여주는 현란한 생체 발광들 본문
흔히 사람들은 소설이나 영화, 비디오 게임이 이야기를 담는다고 말합니다. 소설과 영화, 게임에서 이야기는 핵심적인 재미가 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소설과 영화와 비디오 게임이 이야기를 만드는 방법들은 서로 다릅니다. 소설 <로드>, 영화 <칠드런 오브 맨>, 비디오 게임 <라스트 오브 어스>는 멸망한 인류 문명을 이야기합니다. 멸망한 인류 문명 속에서 어른 남자는 아이와 함께 머나먼 방랑을 떠납니다. 이런 관점에서 <로드>와 <칠드런 오브 맨>과 <라스트 오브 어스>는 서로 비슷하죠.
사람들은 <로드>에서 남자와 소년을 이야기하고 <칠드런 오브 맨>에서 테오와 카를 이야기하고, <라스트 오브 어스>에서 조엘과 엘리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남자와 테오와 조엘과 소년과 카와 엘리를 서로 비교하거나 대조할 수 있죠. 사실 이런 비평들은 아주 흔합니다. 하지만 이런 비평들은 오직 내용만을 이야기할 뿐입니다. 여기에는 형식이 없죠. 소설과 영화와 비디오 게임은 서로 다른 매체들입니다. 따라서 형식들은 서로 다르고, 소설과 영화와 비디오 게임은 서로 다른 방법들로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방랑하는 어른과 아이를 묘사합니다. 좋은 비평은 이런 것들을 포착할 수 있어야 하겠죠.
소설은 글자들을 이용해 이야기합니다. 영화는 영상 중심적인 매체입니다. 비디오 게임은 영상을 중시하고 동시에 쌍방향 소통이죠. <라스트 오브 어스>를 플레이할 때, 게임 플레이어는 조엘이나 엘리를 조종할 수 있습니다. <로드>를 읽고 <칠드런 오브 맨>을 관람할 때, 독자와 관객은 그저 일반적으로 읽고 관람할 뿐입니다. 독자와 관객은 소설과 영화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죠. 하지만 게임 플레이어는 직접 게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요. 이건 게임 플레이어가 비디오 게임을 완전히 장악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무리 게임 플레이어가 애를 쓴다고 해도, 결국 정해진 결말을 향해 조엘과 엘리는 달립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게임 엔딩을 바꾸지 못해요. 게임 플레이어는 평화로운 세상에서 조엘과 엘리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엔딩을 만들지 못합니다. 독자와 관객처럼 게임 플레이어는 게임 엔딩을 일방적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독자와 관객보다 자주 게임 플레이어는 게임에 직접 참가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건 게임이 선사하는 근본적인 재미죠. 아무리 너티 독이 감동적인 게임 엔딩을 연출한다고 해도, 그건 근본적인 재미가 아닐 겁니다. 그게 근본적인 재미라면, 다들 게임을 구매하지 않고 오직 공략 동영상만을 감상했을 겁니다. 하지만 게임 플레이어들은 게임에 참가하기 원합니다.
소설은 글자들을 이용합니다. <로드>를 읽을 때, 독자는 다양한 여백들과 짤막한 문단들, 따옴표 없는 대사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로드>는 남자가 드러내는 표층적인 심리를 묘사하죠. <로드>에서 소년을 비롯해 다른 등장인물들은 심리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이 소설은 남자가 무슨 꿈을 꾸고 뭐라고 생각하는지 묘사하나, 다른 등장인물들은 그런 것들을 드러내지 않아요. 이런 것들은 멸망한 문명과 방랑하는 남자의 고뇌, 적막한 세상, 참혹한 혼돈을 표현합니다. 만약 <로드>가 길다란 산문이나 다중적인 시점이나 요란한 대사들을 이용했다면, 독자는 완전히 다른 느낌을 받았겠죠.
<로드>를 읽을 때, 독자는 비단 내용만이 아니라 이런 형식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겁니다. 적어도 <로드>가 형성하는 분위기를 파악하고 싶다면, 독자는 소설 형식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겠죠. <칠드런 오브 맨>은 <로드>와 <라스트 오브 어스>와 다릅니다. <칠드런 오브 맨>은 영화이고, 영화는 배우들을 직접 보여줍니다. 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은 얼마나 클라이브 오웬이 열심히 연기하는지 주목할 겁니다. 클라이브 오웬이 보여주는 시선, 표정, 몸짓, 발성, 연기는 영화 분위기를 형성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조명, 무대 세트, 의상, 시각 효과, 배경 음악, 효과음 역시 중요하겠죠.
<로드>와 <칠드런 오브 맨>과 <라스트 오브 어스>가 비슷한 내용을 담았다고 해도, 세 소설과 영화와 비디오 게임은 이런 차이들을 드러냅니다. 누군가가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방랑하는 어른과 아이를 이야기하고 싶을 때, 그 사람은 무슨 매체가 가장 좋은지 선택할 수 있을 겁니다. 사유와 심리와 추상적인 사고 방식과 상징을 표현하고 싶다면, 그 사람은 소설을 선택할 겁니다. 처절하게 연기하는 배우와 배우의 표정과 발성과 시선을 담고 싶다면, 그 사람은 영화를 선택하겠죠.
게임 플레이어가 직접 참가하기 원한다면, 그 사람은 비디오 게임을 만들 겁니다. 비디오 게임을 플레이할 때, 어떤 게임 플레이어는 온갖 탄약들을 동원해 좀비들을 해치우기 원할 겁니다. 어떤 게임 플레이어는 전투 없이 몰래 좀비들을 지나치기 원하겠죠. 비디오 게임은 그런 선택들을 제안할 수 있어요. 소설과 영화와 비디오 게임이 똑같은 내용들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형식들은 완전히 다를 겁니다. 하지만 종종 사람들은 형식에 상관하지 않고 오직 내용만을 말합니다. 그게 훨씬 쉽기 때문이겠죠. 형식을 살피고 싶다면, 사람들은 매체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어쩌면 영화 <퍼시픽 림> 역시 비슷한 사례일지 모르겠습니다. <퍼시픽 림>이 뭘까요? 많은 사람들은 <퍼시픽 림>이 거대 로봇 영화이고 동시에 거대 괴수 영화라고 대답할 겁니다. 네, 맞습니다. <퍼시픽 림>은 거대 로봇/괴수 영화입니다. 그래서 다들 어떻게 거대 로봇이 거대 괴수를 물리치는지 떠듭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요? 거대 로봇과 거대 괴수를 이야기한다면, 사람들이 <퍼시픽 림>을 제대로 비평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이 오직 거대 로봇과 거대 괴수만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그런 비평에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비평은 <퍼시픽 림>의 다양한 측면들을 살피지 못하겠죠.
영화라는 형식을 들여다본다면, 관객들은 <퍼시픽 림>을 좀 더 풍성하게 바라볼 수 있을지 모릅니다. 둘째 문단에서 저는 영화로서 <칠드런 오브 맨>이 배우에 집중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칠드런 오브 맨>과 달리, <퍼시픽 림>이 영화라고 해도, 영상 중심적인 매체로서 <퍼시픽 림>은 배우에 별로 집중하지 않습니다. <칠드런 오브 맨>은 배우를 이용해 등장인물들이 느끼는 고통과 슬픔과 사유를 표현하기 원하나, <퍼시픽 림>은 그런 것들보다 거대 로봇들과 거대 괴수들에게 치중합니다. 어떻게 영상 중심적인 매체로서 <퍼시픽 림>이 거대 괴수들을 이야기할까요?
영화로서 <퍼시픽 림>이 드러내는 가장 커다란 특징들 중에서 하나는 화려한 색감들입니다. <퍼시픽 림>은 화려합니다.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야간 풍경을 바탕에 깝니다. 대낮 장면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야간 풍경들입니다. 사방이 어두울 때, 도시는 화려한 불빛들을 장식할 수 있습니다. 사방이 어두울 때, 거대 괴수들은 생체 발광들을 현란하게 드러낼 수 있습니다. 사방이 어두울 때, 거대 로봇들은 각종 불빛들과 플라즈마를 번쩍일 수 있습니다. 주요 무대는 바다이고, 거센 물결들은 이런 불빛들을 반사하거나 일그러뜨립니다. 집시 데인저와 나이프 헤드가 싸우는 도입부부터 심해 브릿지에 닿는 결말까지, <퍼시픽 림>은 이런 화면들을 계속 보여줍니다.
<클로버필드>나 <고지라>나 기타 다른 괴수 영화들에는 이런 색감들과 조명들이 없습니다. 어떤 관객들은 길예르모 델 토로가 너무 야간 장면들을 많이 찍었다고 불평합니다. 하지만 감독은 일부러 야간 장면들을 선택했을지 모릅니다. 사방이 어두울 때, 거대 괴수들이 훨씬 요란하게 생체 발광들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퍼시픽 림>은 그저 거대 괴수만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퍼시픽 림>은 거대 괴수들을 이용해 요란한 생체 발광들을 보여줍니다.
이건 커다란 시각적인 츨거움이죠. 그래서 <퍼시픽 림> 팬 아트를 그리는 과정은 즐겁니다. <퍼시픽 림> 팬 아트를 그릴 때, 사람들은 생체 발광들과 각종 불빛들과 야간 풍경을 즐겁게 고민할 수 있겠죠. 이런 팬 아트를 보세요. (링크) 게다가 생체 발광과 전기 불빛은 다릅니다. 만약 거대 괴수들이 나오지 않았다면, <퍼시픽 림>은 생체 발광들을 보여주지 못했을 테고, 질척거리고 꿈틀거리고 반짝거리는 느낌들은 사라졌겠죠. 아무리 <트랜스포머> 같은 영화가 요란하게 시각 효과들을 동원한다고 해도, <트랜스포머>는 이런 느낌을 살리지 못합니다. 이 영화에는 거대 괴수가 없고 생체 발광이 없죠.
해양 자연 다큐멘터리들은 다양한 해양 생명체들을 보여주고 얼마나 생체 발광들이 신비롭고 아름다운지 강조합니다. <퍼시픽 림>은 거대 괴수들을 이용해 그런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을 모방합니다. <퍼시픽 림>은 거대 괴수들을 이용해 생체 발광들을 현란하게 휘두릅니다. 이건 애니메이션 <모아나>에서 타마토아가 생체 발광을 번쩍이는 특징과 비슷할지 모릅니다. 타마토아는 바다 괴수(거대 소라게)이고 심해 생명체처럼 생체 발광들을 번쩍이죠. 이 부분에서 <퍼시픽 림>과 <모아나>는 비슷하게 바다 괴수를 이용해 화려한 생체 발광을 보여주는 영상 중심적인 매체가 됩니다.
아쉽게도 속편 <퍼시픽 림: 업라이징>에는 이런 연출이 없고, 그래서 어떤 관객들은 속편을 싫어합니다. <퍼시픽 림: 업라이징>은 밝고 쨍쨍한 화면을 보여주나, 여기에는 현란한 생체 발광들이 없어요. 영화적인 완성도와 상관없이, 어떤 관객들은 이런 시각적인 재미가 아쉽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사실 <퍼시픽 림: 업라이징>의 가장 커다란 장점과 단점은 그것일지 모르죠. 많은 사람들이 인정한 것처럼, 이런 영화에서 거대 괴수는 줄거리나 이야기보다 훨씬 중요할 겁니다. 관객들이 이런 특징에 주목한다면, 좀 더 다른 시각에서 관객들은 <퍼시픽 림>을 감상할 수 있겠죠. 거대 괴수 영화에서 거대 괴수는 그저 거대 괴수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영화라는 매체가 어떻게 거대 괴수를 이용하는지 관객들은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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