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거대 괴수가 유치하다는 편견 본문
[이런 겉모습은 유치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거대 괴수가 정말 아무것도 상징하지 못할까요?]
"거대 괴수? 그건 너무 유치해. 거대 괴수가 진지한 논의가 될 수 있을까? 거대 애벌레가 도시를 짓밟는 장면은 너무 우스꽝스러워. 누가 이런 장면으로 진지하게 논의할 수 있겠어? 거대 괴수는 유치하고 비현실적인 소재야."
아니, 거대 괴수는 진지한 논의가 될 수 있습니다. 멀리 갈 필요가 없이, 여기 <SF 생태주의>는 거대 괴수가 진지한 담론이라고 논증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거대 괴수가 유치하다고 비웃습니다. 거대 괴수는 유치합니다. 몇 십 미터짜리 야생 동물이 도시를 짓밟고 현대 병기들을 씹어먹고 엄청난 생명력을 자랑한다면, 다들 그게 비현실적이라고 비웃을 겁니다. 다들 거대 괴수가 우스꽝스럽고 유치하다고 생각하겠죠. 하지만 누군가가 거대 괴수를 좋아한다고 해도, 그건 취향입니다. 사상의 자유가 있는 것처럼, 취향에는 우열이 없습니다. 취향들은 그저 서로 다를 뿐입니다.
철수가 <죄와 벌>을 좋아하고 영희가 <모스라>를 좋아한다고 해도, 철수는 영희가 유치하다고 비웃지 못할 겁니다. 철수와 영희는 서로 취향을 존중해야 하겠죠. 하지만 사람들은 계속 거대 괴수가 비현실적이라고 따질지 모릅니다. 몇 십 미터짜리 야생 동물이 존재하지 못하고, 그런 야생 동물이 현대 병기들을 씹어먹지 못하고, 그런 야생 동물에게 엄청난 생명력이 없다고 사람들은 따질지 모릅니다. 좋습니다. 거대 괴수는 비현실적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현실이 뭔가요? 현실이 뭐죠? 왜 사람들이 비현실이라고 들먹이죠?
관점에 따라서 현실은 얼마든지 비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거대 괴수를 비웃는 수많은 사람들은 주말 멜로 드라마들을 아무렇지 않게 시청할 겁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거대 괴수가 비현실적이라고 비웃는 동시에 주말 멜로 드라마들을 재미있게 시청하겠죠. 하지만 주말 멜로 드라마가 정말 현실적인가요? 이런 연애 이야기가 정말 현실적인가요? 숱한 연애 소설들, 연애 만화들, 연애 드라마들에는 재벌과 서민이 나옵니다. 만화 <치즈인더트랩>을 보세요. <치즈인더트랩>에서 재벌 남자와 서민 여자는 서로 사랑합니다. 여기에서 재벌과 서민,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라는 계급 관계는 아주 핵심적인 소재입니다.
만약 남자 주인공이 재벌이 아니었다면, 만약 남자 주인공이 부르주아 계급이 아니었다면, <치즈인더트랩>은 아주 많은 내용들을 바꿔야 했을 겁니다. 아니, 만약 남자 주인공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이었다면, 심지어 <치즈인더트랩>은 시작하지 못했을 겁니다. 순끼 작가는 아예 이 만화를 연재하지 못했겠죠. 왜 만화 속에서 그렇게 남자 주인공이 광범위한 영향력을 퍼뜨릴 수 있었을까요? 왜 수많은 학생들이 남자 주인공을 떠받들고 왕자처럼 남자 주인공이 행세할 수 있었을까요? 왜 여학생들이 남자 주인공을 동경할까요? 외모 때문에? 아, 남자 주인공은 잘생겼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남자 주인공이 잘생겼다고 해도, 막강한 재력이 없었다면, 왕자처럼 남자 주인공이 행세할 수 있었겠어요?
따라서 <치즈인더트랩>에서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관계는 아주 핵심적인 소재입니다.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관계가 사라진다면, <치즈인더트랩>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관계가 현실적인가요? 이게 정당한가요? 이게 아주 당연한 현실인가요? 아니, 그건 절대 아닙니다. 오직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부르주아, 자본가 계급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사라진다면, 자본가 계급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나타났을까요? 왜 자본주의가 발달했을까요? 16세기~19세기 세계 역사를 살펴본다면, 우리는 참혹한 식민지 수탈이 자본주의를 뒷받침했음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유럽 문명은 참혹하게 식민지들을 수탈했고, 막대한 부를 얻었고, 그것을 이용해 자본주의를 발달시킬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19세기 유럽이 시도한 복지 국가조차 식민지 수탈에서 비롯했습니다. 왜 사회주의를 자처하는 독일 사회민주당이 1차 세계 대전에 찬성했을까요? 독일 사회민주당은 강력한 복지 국가를 꿈꿨습니다. 복지에는 재원이 필요하고, 독일 사회민주당은 재원을 식민지들에서 가져오기 원했습니다. 결국 독일 사회민주당은 1차 세계 대전에 찬성했어요. 그래서 복지 국가는 꽤나 위험한 대안입니다. 그래서 그 자체로서 자본주의는 정당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관계는 수탈에서 비롯한 관계입니다.
[이게 '현실'적인가요? 재벌이 '현실'적인가요? 자본주의가 '현실'적인가요?]
자, <치즈인더트랩>이 이런 참혹하고 폭력적인 관계를 언급하나요? <치즈인더트랩>이 부르주아, 자본가 계급이 착취적인 계급이라고 말하나요? 이 만화가 자본가 계급을 강렬하게 부정하나요? 아니,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치즈인더트랩>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 눈꼽만큼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재벌, 실업, 해고, 무한 생존 경쟁, 가난한 아이들, 고된 생계, 각종 범죄들. <치즈인더트랩>은 이런 것들을 이야기합니다. 이런 것들은 <치즈인더트랩>을 뒷받침하는 핵심적인 소재들입니다. 하지만 <치즈인더트랩>은 왜 그런 것들이 나타나는지 눈꼽만큼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치즈인더트랩>에서 재벌은 당연히 재벌이고, 실업자는 당연히 실업자이고, 무한 생존 경쟁은 당연히 경쟁이고, 가난한 아이들은 당연히 가난합니다.
<치즈인더트랩>에서 모든 것은 당연합니다. 아무도 그게 이상하다고 의심하지 않습니다. 실업과 해고 때문에 사람들이 자살한다고 해도, <치즈인더트랩>은 절대 그걸 의심하지 않습니다. 죽은 놈은 그냥 시체입니다. 해고 노동자가 자살한다고 해도, 그 놈은 그저 뒈질 뿐이죠. 이게 너무 거친 표현일까요? 이게 너무 험악한 표현일까요? 하지만 해고 노동자가 자살하는 문제는 아주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이건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이건 '현실'입니다. 그래서? 재벌을 열심히 떠드는 <치즈인더트랩>이 얼마나 많이 그런 '현실'에 관심을 기울이나요?
물론 <치즈인더트랩>은 그저 웹툰에 불과합니다. 웹툰에는 창작과 표현의 자유가 있습니다. <치즈인더트랩>이 비현실적인 상황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그건 창작과 표현의 자유입니다. <치즈인더트랩>에게는 현실을 그려야 하는 의무가 없습니다. 이 만화를 비롯해 수많은 연애 이야기들은 얼마든지 비현실적인 상황들을 그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비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사람들은 <치즈인더트랩>이 현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치즈인더트랩>이 비현실적인 상황을 묘사함에도, 사람들은 이 만화가 현실이라고 착각합니다. 사람들은 거대 괴수가 비현실적이라고 조롱하는 동시에 <치즈인더트랩>이 현실적이라고 말하죠.
하지만 거대 괴수는 연애 이야기보다 훨씬 현실적일 수 있습니다. <치즈인더트랩>은 자본주의에 눈꼽만큼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나, 10월 22일 게시물(링크)이 이야기한 것처럼, 1961년 <모스라>는 식민지 수탈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모스라가 제3세계(인펀트 섬)의 모성적이고 생태적인 괴수이기 때문에 <모스라>는 에코 페미니즘을 이야기할 수 있어요. 21세기 초반 인류 문명에게 기후 변화는 가장 심각한 폭력이고, 이런 폭력을 성토하기 위해 우리는 에코 페미니즘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모스라>는 그럴 수 있죠.
물론 1961년 <모스라>에는 근본적인 고민이 없습니다. 이 영화의 생태 철학은 아주 피상적입니다. <모스라>가 식민지 수탈을 비판하고 에코 페미니즘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해도, 그건 그저 잠재력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모스라>에게는 잠재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좀 더 깊게 파악한다면, 우리는 <모스라>에게서 식민지 수탈 비판과 에코 페미니즘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치즈인더트랩>에는 아예 잠재력이 없죠. 이건 <모스라>가 <치즈인더트랩>보다 우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창작과 표현의 자유에서 우월과 열등이 있겠어요. <치즈인더트랩>이 재벌을 미화한다고 해도, 그건 <치즈인더트랩>의 잘못이 아닙니다.
문제는 사람들의 시각입니다. <모스라>가 <치즈인더트랩>보다 훨씬 풍부한 생태적인 잠재력을 품었음에도, 사람들은 그걸 무시합니다. 왜 사람들이 그걸 무시할까요? 사람들이 멍청하기 때문에? 그건 아니죠. 사람들은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잃었습니다. 학교 교육들, 언론 매체들, 문화 예술들은 오직 자본주의 만세를 외칩니다. 아이들이 자본주의가 무조건 옳다고 배운다면, 아이들이 제대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까요?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적어도 이런 설정은 제3세계 식민지 수탈을 비판하는 가능성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고민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학교 교육들이 임금 노예들을 양산하는 상황에서, 먹고 살기 힘든 상황에서, 사람들이 고민하고 성찰할 수 있을까요? 그건 불가능해요. 그래서 완전히 보편적인 기본 소득은 대안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사람들은 노동 시간을 줄이고 여유 시간에 고민하고 성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보편적인 기본 소득 역시 계급 투쟁을 수반해야 하나, 적어도 우리는 기본 소득을 당장 실행할 수 있을 겁니다. 적어도 완전한 노동자 평의회 국가보다 기본 소득은 훨씬 쉬운 문제(처럼 보)입니다. 기본 소득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평등하게 여러 문제들을 논의하고 해결할 수 있겠죠.
그때 사람들은 거대 괴수가 현실적인 맥락에 접근하는 잠재력을 품었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겁니다. 따라서 거대 괴수를 조롱하기 전에 사람들은 현실이 무엇이고 거대 괴수가 무엇인지 고민해야 할 겁니다. 안타깝게도 수많은 거대 괴수 담론들은 이런 주제를 간과합니다. 자본주의 체계가 거대 괴수 팬들을 세뇌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모스라에게 잠재력이 있음에도, 모스라는 날개들을 활짝 펼치지 못하죠. 하지만 잠재력이 있기 때문에 언젠가 거대 괴수 여신은 우아하게 창공으로 날아갈 수 있을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