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파피용> 독자들이 오해하는 인간의 본질 본문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쓴 소설 <파피용>은 세대 우주선 이야기입니다. 지구 인류에게 더 이상 희망이 남지 않았기 때문에 이브 크라메르와 가브리엘 맥 나라마는 파피용이라는 거대한 세대 우주선을 만듭니다. 파피용은 수많은 사람들을 태우고, 지구를 탈출하고, 머나먼 외계 행성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파피용 건조와 항해, 도착에는 온갖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외계 행성에서 새로운 문명을 이룩하기는 절대 쉽지 않겠죠. <파피용>은 어떻게 사람들이 세대 우주선을 건조하고, 지구를 떠나고, 우주를 항해하고, 외계 행성에 도착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지 보여줍니다.
소설 분위기는 별로 희망적이거나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우주선 건조부터 외계의 새로운 삶까지, 소설 분위기는 비판적이고 냉소적입니다. 파피용 건조를 계획한 이브 크라메르와 가브리엘 나라마가 별로 희망을 느끼지 때문에, 소설 끝까지 그런 분위기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새로운 삶은 희망으로 이어져야 하겠으나, 세대 우주선 속에서 사람들은 갈등과 싸움을 반복하고, 이건 심지어 외계 행성의 새로운 삶까지 엉망으로 물들입니다. 지구, 세대 우주선, 외계 행성에서 사람들은 언제나 야비하게 싸우고, 질투하고, 죽입니다.
이 소설을 읽은 이후, 많은 독자들은 '인간의 본질'을 이야기할 겁니다. 지구와 세대 우주선과 외계 행성에서 사람들이 계속 갈등과 싸움과 분열을 반복하기 때문에 독자들은 인간의 본질이 이기적이고 탐욕스럽다고 말할 겁니다. 인간의 본질이 탐욕스럽기 때문에 심지어 외계 행성에서조차 사람들은 갈등과 싸움을 멈추지 못합니다. 독자들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인간의 이기적인 본질을 제대로 꼬집었다고 느낄 겁니다. 국내에서 여러 독자들은 <파피용>이 인간의 본질과 현실을 풍자적으로 반영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세계 곳곳에는 온갖 분쟁들이 있습니다. 북반구부터 남반구까지, 동양부터 서양까지,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은 크고 작은 분쟁들을 일으킵니다.
강자는 약자를 짓밟습니다. 약자는 또 다른 약자를 짓밟습니다. 그 약자는 다시 더 약한 약자를 짓밟습니다. 강자들은 서로 싸우고, 그런 싸움은 다른 약자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힙니다. 그런 피해 속에서 약자들은 서로 괴롭힙니다. 국가 정상들부터 어린 학생들까지, 수많은 사람들은 끊임없이 서로 갈등하고 싸우고 괴롭히고 죽입니다. 이런 수많은 싸움들은 절대 사라질 것 같지 않습니다. 소설 <파피용>을 읽은 이후, 독자들은 <파피용>이 이런 추악한 현실을 반영한다고 느낄 겁니다. 그리고 독자들은 인간의 본질 운운할 겁니다.
하지만 이건 꽤나 모순적인 발언입니다. 인간의 본질? 어떻게 우리가 인간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습니까? 누가 인간을 뜯어봤습니까? 우리가 정말 인간의 본질을 논의하고 싶다면, 우리는 뇌 과학과 진화 생물학을 동원해 인간을 뜯어봐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그럴 수 있을까요? 누가 뇌 과학이 완전하다고 장담합니까? 누가 진화 역사를 완전하게 파악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아직 아무도 뇌 과학과 진화 역사를 완전하게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언제 뇌 과학과 진화 생물학이 완전해질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영원히 인간 두뇌와 인간 진화 역사를 파악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함부로 인간의 본질 운운할 수 있나요? 소설 <파피용>을 읽은 이후, 독자들은 인간의 본질이 이기적이라고 떠듭니다. 아, 그래요? 그런 독자들이 인간 두뇌와 인간 진화 역사를 샅샅이 파악했을까요? 그런 독자들이 자크 라캉도 울고 가는 정신 분석학의 대가들일까요? 그건 아니겠죠. 하지만 독자들은 함부로 인간의 본질을 떠들고 인간이 이기적이라고 함부로 단정합니다. 그런 독자들은 절대 적지 않을 겁니다. 우리에게 인간의 본질을 파악할 수단이 없음에도, 독자들은 그걸 떠듭니다.
분명히 현대 인류 문명에는 크고 작은 숱한 분쟁들이 있습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그런 분쟁들이 모두 동시에 하늘에서 뚝 떨어졌나요? 어느 날 갑자기 그런 분쟁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났나요? 그건 아닙니다. 게다가 정말 인간의 본질이 이기적이기 때문에 그렇게 크고 작은 분쟁들이 벌어질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이 세상에는 평등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북반구부터 남반구까지, 동양부터 서양까지,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은 평등한 사회를 만드느라 애씁니다. 방법들은 서로 다르나, 지금 이 순간에도 평등한 사회, 지속 가능한 사회, 생태적인 사회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은 노력하고 노력하고 노력합니다. 그 사람들이 외계인들일까요? 그 사람들이 인간이 아닐까요?
아니, 그들은 인간들입니다. 그 사람들 역시 인간입니다. 평등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역시 인간입니다. 하지만 <파피용>을 읽은 이후, 숱한 독자들은 인간의 본질이 이기적이라고 말할 겁니다. 그런 독자들은 평등을 위해 노력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무시하고 인간의 본질이 이기적이라고 단정하겠죠. 인간의 본질을 파악할 방법이 없음에도, 그런 독자들은 평등을 무시하고 함부로 인간의 본질이 이기적이라고 말하겠죠. 안타깝게도 평등한 사회는 위험합니다. 평등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은 위험합니다. 언제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그들을 짓밟을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19세기 파리 코뮌이 평등한 사회 해방을 외친 이후, 자본주의는 언제나 평등한 사회를 짓밟았습니다. 19세기 파리 코뮌부터 21세기 초반 원주민 운동들까지, 자본주의는 언제나 사회 해방 운동들을 짓밟았고 짓밟는 중입니다. 자본주의가 그런 사회를 직접 공격하지 않는다고 해도, 자본주의 세계화 속에서 그런 사회는 무너질 겁니다. 다국적 기업들이 엄청난 온실 가스를 뿜고 산업 폐기물들을 버린다면, 생태 공동체가 혼자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평등하게 살아가기 위해 생태 공동체가 노력한다고 해도, 기후 변화가 온갖 난리들을 일으킨다면, 생태 공동체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그건 말도 안 되는 망상입니다. 생태 공동체는 철벽 방어막이 아닙니다. 자연 환경이 평화롭게 순환할 수 있을 때, 사람들이 그런 자연 환경을 이용할 수 있을 때, 생태 공동체들 역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경제 공황, 기후 변화, 산업 폐기물들은 그걸 막겠죠. 이런 극심한 상황 속에서 생태 공동체들은 아둥바둥 몸부림쳐야 합니다. 그런 몸부림은 갈등과 싸움과 분열로 이어질 겁니다. 이미 예전에도 어떤 사회가 고립되었을 때, 아무리 그 사회가 평등을 추구한다고 해도, 그 사회는 전쟁과 공황과 환경 오염들을 버티지 못했고 무너졌습니다. 그런 사례들은 많습니다. 자본주의가 너무 엄청난 파괴를 부르기 때문에. 심지어 성인군자들이 사회를 이룬다고 해도, 경제 공황과 기후 변화는 그런 사회를 파괴할 겁니다.
우리가 정말 평등한 사회를 이룩하고 싶다면, 우리는 이런 현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인간의 본질이 이기적일까요?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본질에 상관없이, 이미 수많은 사람들은 평등한 사회를 보여줬습니다. 아직 그런 사회 해방 운동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설사 인간의 본질이 이기적이라고 해도, 숱한 차별들과 착취들과 오염들을 막기 위해 우리는 그런 평등한 사회들을 지지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생태 공동체들이 많은 지지들을 받을까요? 전환 마을 운동들이 많은 지지들을 받을까요? 평등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많은 지지들을 받을까요?
<파피용>을 읽고 인간의 본질이 이기적이라고 단정하는 독자들이 그런 생태 공동체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할까요? 그런 생태 공동체들을 지키기 위해 독자들이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적극적으로 거부할까요? 글쎄요, 그건 꽤나 회의적입니다. 자랑스러운 세계 최고의 반공 국가 대한민국 독자들이 정말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적극적으로 거부할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학교 교육들, 언론 매체들, 문화 예술들은 자본주의가 최고이고 만능이고 영원불멸하다고 떠듭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남한 독자들은 자본주의를 받아들입니다. 당연히 남한 독자들은 자본주의를 거부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정말 평등하게 살고 싶다면, 우리는 자본주의를 비판해야 합니다.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우리가 선의와 연민과 동정을 추구한다고 해도, 결국 우리는 계급 구조를 숭배하고 누군가를 짓밟을 겁니다. 소설 <파피용>이 자본주의를 제대로 분석하고 계급 구조를 타파하기 원할까요? 그건 아닙니다. <파피용>은 현대 문명을 근본적으로 분석하지 않습니다. 비단 <파피용>만 아니라 다른 소설들에서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현대 문명을 제대로 분석한 적이 있나요? <개미>가 그랬을까요? <아버지들의 아버지>가 그랬을까요? <타나토노트>가 그랬을까요? 그건 아닙니다. <파피용>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소설은 그저 아무렇게나 사람들을 세대 우주선에 밀어넣었을 뿐입니다. 그런 실험은 당연히 실패하겠죠.
독자들이 이런 진부하고 피상적인 실험으로 인간의 본질 운운한다면, 그건 인간을 무시하고 모욕하는 행위일 겁니다. 사실 이런 피상적인 실험들은 드물지 않습니다. 이미 소설 <파리 대왕>에서 윌리엄 골딩은 어린애들을 야만인이라고 몰아붙였습니다. 이미 소설 <동물 농장>에서 조지 오웰은 인민들이 가축들, 개돼지들이라고 비유했습니다. 왜 인간이 인간을 무시합니까? 인간이 인간을 무시한다면, 누가 인간의 손을 잡겠습니까? 물론 <파피용> 독자들은 인간을 무시하기 원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인간의 본질이 탐욕적이라는 발언은 평등을 위한 투쟁을 무시하거나 은폐할 겁니다. 인간의 본질을 운운할 때, 독자들은 이런 사실에 주의해야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