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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태양의 도시>와 전체론 생태 유토피아 본문

감상, 분류, 규정/생태 사회주의, 에코 페미니즘

<태양의 도시>와 전체론 생태 유토피아

OneTiger 2020. 6. 22. 19:58

[폐쇄 생태계는 로망스러운 SF 설정입니다. 하지만 이건 가부장적인 자본주의에 기반할지 모릅니다.]



"하늘을 나는 자동차, 혈관 속을 돌아다니는 로봇, 화성에 건설한 식민지…. 우리가 30년 후, 50년 후 세상을 상상할 때, 왜 우리가 이런 것들을 머릿속에 떠올릴까? 깨끗하고 효율적으로 관리되는 상하수도, 화재나 지진에 좀 더 안전한 건물, 모든 인류에게 싸고 안전하게 공급되는 백신…. 왜 우리가 이런 것들로 가득찬 미래를 상상하지 않을까?" 과학 철학 서적 <미래는 오지 않는다>에서 이렇게 공동 저자 전치형과 홍성욱은 묻습니다. <미래는 오지 않는다>에서 부제는 '과학 기술은 어떻게 미래를 독점하는가'입니다. 제목이 가리키는 것처럼, 이 책은 과학이 중립적이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사람들이 미래를 예상할 때, 사람들은 과학 기술들을 동원합니다. 미래를 예상하기 위해 과학은 필수적입니다. 하지만 과학은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과학은 권력에게 종속됩니다. 과학이 권력을 떠받들기 때문에, 사람들이 과학을 동원할 때, 사람들은 권력을 떠받듭니다. 사람들이 권력을 떠받들기 때문에, 미래 예측 역시 권력을 떠받듭니다. 누군가는 미래를 독점합니다. 누군가가 미래를 독점하기 때문에, 미래 예측은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대중적인 미래 세계관이 무슨 가치를 추구하나요? 대중적인 미래 세계관이 무엇을 원하나요? <미래는 오지 않는다>는 자본이 과학을 움직인다고 설명합니다.



솔직히 이건 너무 진부한 결론입니다. 세계화 자본주의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 계급은 자본가 계급입니다. 자본가 계급이 권력을 차지하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 계급이 권력을 차지하기 때문에, 자본가 계급은 지배적인 관념을 퍼뜨립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적인 관념은 자본가 계급을 편듭니다. 대중적인 미래 세계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배적인 관념에서 대중적인 미래 세계관 역시 자유롭지 않습니다. 대중적인 미래 세계관은 지배적인 관념을 떠받들고, 미래 세계관은 자본가 계급에게 충성합니다. 자본은 미래를 움직입니다.


비록 <미래는 오지 않는다>가 길게 설명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미 19세기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적인 관념이 자본가 계급을 편든다고 설명했습니다. <미래는 오지 않는다>는 19세기 사회주의자들이 옳았다고 증명합니다. 19세기 사회주의자들이 옳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는 사라져야 합니다. 사회주의자들이 옳기 때문에, 사회주의 혁명 역시 옳습니다. 만약 무산자 민중들이 미래 세계관을 꿈꾸기 원한다면, 무산자 민중들은 자본가 계급을 몰아내야 합니다. 민중들이 시민 배당을 주장하고 자본가 계급에게 저항할 때, 그 자체로서 이건 사회주의 운동이 되고, 안전한 미래는 다가올 겁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건 쉽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적인 관념은 자본가 계급을 편듭니다. 자본가 계급과 사회주의자들은 대립합니다.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적인 평등, 공유 사회를 주장합니다. 자본가 계급은 민영화, 사유화를 추구합니다. 민영화와 사회적인 평등, 사유화와 공유 사회는 공존하지 못합니다. 둘 중에서 하나는 사라져야 합니다. 지배적인 관념은 사회적인 평등과 공유 사회가 나쁜 것이라고 계속 왜곡하고 세뇌합니다. 이른바 '공유지의 비극'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학교 경제학 교과서들은 공유지의 비극을 세뇌하고, 사람들은 이것을 배우고 공유 사회가 나쁘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오래 전부터, 이른바 유토피아 문학들은 공유 사회를 주장했습니다. <미래는 오지 않는다>는 대중적인 미래 세계관이 오직 하늘을 나는 자동차, 혈관 속을 돌아다니는 로봇, 화성에 건설한 식민지 같은 것들만 추구한다고 지적합니다. <미래는 오지 않는다>는 대중적인 미래 세계관이 깨끗하고 효율적으로 관리되는 상하수도, 화재와 지진에 좀 더 안전한 건물, 모든 인류에게 싸고 안전하게 공급되는 백신을 외면한다고 지적합니다. 이게 사실인가요? 정말 대중적인 미래 세계관이 평등하고 안전한 미래 사회를 외면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SF 장르에서 유토피아 문학이 커다란 흐름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SF 장르에서 주된 배경 무대는 미래 세계입니다. 19세기 후반 사이언티픽 로망스부터 21세기 초반 비디오 게임까지, 허버트 웰즈와 소설 <타임 머신>부터 비디오 게임 <스페이스 헤이븐>까지, 수많은 사이언스 픽션들은 미래 세계를 이야기합니다. 유토피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SF 장르에서 유토피아 문학들은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다른 많은 사이언스 픽션들처럼, 유토피아는 미래를 그립니다. 여기에서 미래는 훨씬 평등하고 안전한 사회입니다. <미래는 오지 않는다>(의 표지 문구)는 대중적인 미래 세계관이 평등한 미래 사회를 외면한다고 지적하나, 유토피아 문학들은 이것을 꿈꿉니다.


분명히 많은 사이언스 픽션들은 오직 하늘을 나는 자동차, 혈관 속을 돌아다니는 로봇, 화성에 건설한 식민지 같은 것들만 추구합니다. 분명히 많은 사이언스 픽션들은 오직 화려한 첨단 기술들에만 열광합니다. 휴고 건즈백이 사이언스 픽션을 과학 기술 잔치로 만들었기 때문에, 많은 사이언스 픽션들은 오직 첨단 기술들만 추구하고 평등하고 안전한 사회를 외면합니다. 하지만 SF 장르에서 이것들은 전부가 아닙니다. SF 장르에서 휴고 건즈백은 전부가 아닙니다. 인류 문화에서 유토피아 문학들은 유구하고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고, 계몽주의 이후, 유토피아 문학들은 사이언스 픽션에 가까워지기 시작합니다.



계몽주의 이전에, (서구 문화에서) 유토피아 문학들은 신화, 종교에 기반했습니다. 인간들은 미래 사회를 스스로 이룩하지 못합니다. 인간들보다 신들이 훨씬 대단하기 때문에, 인간은 신에게 종속됩니다. 여기에서 이성, 논리, 과학, 계몽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계몽주의는 종교보다 이성, 논리, 과학을 중시하고, 계몽주의가 발달하는 동안, 17세기~19세기 초반까지, 유토피아 문학들은 신화와 종교보다 사이언스 픽션에 가까워집니다. 이런 유토피아 문학들은 원형적인 사이언스 픽션들입니다. 비록 이런 유토피아 문학들이 SF 장르에 완전히 속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것들은 원형이 될 수 있습니다.


천국(파라다이스)과 유토피아의 차이가 무엇인가요? 일반적으로 파라다이스와 유토피아는 행복하고 평화롭고 풍요로운 세상, 이상향을 가리킵니다. (서구 문화에서) 종교가 구원을 약속할 때, 구원은 이상향, 풍요로운 세상입니다. 사람들은 구원을 받고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로운 세상에 들어갈 겁니다. 사회학자 미카엘 뢰비가 기독교 공산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비교하는 것처럼, 가상의 전기 서적 <두 사람>에서 일로나 예르거가 모세와 카를 마르크스를 비교하는 것처럼, 파라다이스와 유토피아는 비슷한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두 가지는 다릅니다. 파라다이스는 창조신에게 속합니다.



인간은 파라다이스를 스스로 만들지 못합니다. 이미 신은 천국을 계획했고, 인간은 그저 신을 따르고 천국에 들어갈 뿐입니다. 반면, 인간은 유토피아를 스스로 이룩합니다. 실천하는 주체로서 인간이 직접 건설하기 때문에, 유토피아는 초월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회주의 문명을 파라다이스보다 유토피아라고 부릅니다. 특히, 마르크스주의는 초월적인 이상향을 경계합니다. 아무도 미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유토피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저 억압적인 현실(자본주의)에 저항할 뿐입니다. 인간이 유토피아를 직접 건설하기 때문에, 천국보다 유토피아는 주체로서 인간을 강조합니다.


마르크스주의 역시 주체로서 인간을 강조합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유물론을 내세우고, 창조신을 배제하고, 변증법(주체적인 인간)을 강조합니다. 그때 인간은 자유의 왕국을 건설할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가 유물론과 변증법을 내세우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는 자신을 과학적인 사회주의라고 주장(자랑)합니다. 계몽주의 동안, 유토피아 문학들 역시 창조신에게 의지하기보다 실천하는 주체 인간을 바라봅니다. 인간들이 직접 유토피아를 이룩하고 행복한 미래를 달성하기 때문에, 유토피아 문학들은 SF 장르에 속할 수 있습니다. 17세기 서구 유토피아 문학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문학들은 원형적인 SF 소설입니다.



물론 SF 평론가들은 17세기 서구 유토피아 문학이 SF 장르에 속한다고 합의하지 못합니다. 어떤 평론가는 이게 SF 소설이라고 분류할 테고, 어떤 평론가는 이것을 제외할 겁니다. 하지만 17세기 유토피아 문학은 평등하고 안전한 미래 사회를 꿈꿨습니다. 과학 역사 서적 <자연의 죽음>에서 캐롤린 머천트는 어떻게 서구 남자 과학이 생태학을 바꾸는지 설명합니다. 이 책에서 캐롤린 머천트는 전체론 생태학(부분들의 합보다 전체는 크다)을 지지합니다. 기계적인 생태학보다 전체론 생태학이 훨씬 평등하고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17세기 유토피아 문학 역시 평등하고 안전한 전체론 생태학을 구현했습니다.


왜 기계적인 생태학보다 전체론 생태학이 평등한가요? 명칭이 가리키는 것처럼, 전체론 생태학은 자연 생태계가 총체적이라고 주장합니다. 소설 <빼앗긴 자들>에서 생태학자 타크베르는 생물 다양성이 총체적으로 이어진다고 파악합니다. 총체적인 그물망 속에서 타크베르는 존재합니다. 자연은 개별적이지 않고, 타크베르 역시 개별적이지 않습니다. <빼앗긴 자들>에서 어슐라 르 귄은 전체론 생태학을 강조하지 않으나, 타크베르가 총체적인 자연 생태계를 파악하기 때문에, 타크베르는 자연과 사회를 분리하지 않을 겁니다. 총체적인 자연 속에서 사회는 존재하고, 공유 사회 역시 개별적이지 않습니다.



"열 손가락들을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다." 이 속담은 부분이 개별적이지 않다고 뜻합니다. 부분은 그저 부분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부분은 전체에 속합니다. 그래서 생명체는 자신을 쪼개지 못합니다. 반면, 기술자들은 기계를 분해할 수 있습니다. 기술자들은 기계를 쪼갭니다. 기계가 쪼개지기 때문에, 기계적인 사고 방식은 전체보다 부분을 중시합니다. 전체는 그저 부분들의 집합에 불과합니다. 기계적인 사고 방식은 자연 생태계를 쪼갭니다. 더 이상 자연 환경은 총체적인 그물망이 아닙니다. 기계적인 사고 방식은 자연과 사회를 분리합니다. 기계적인 사고 방식은 자연을 작게 쪼개고 개별 재산, 사유 재산을 인정합니다.


반면, 17세기 서구 유토피아 문학으로서 <태양의 도시>는 전체론입니다. <태양의 도시>에서 토마소 캄파넬라는 '자연'을 쪼개지 않습니다. <태양의 도시>는 '자연'이 웅장하고 통합된 체계라고 파악합니다. '자연'이 통합된 체계이기 때문에, 자연과 문명은 별개가 아닙니다. 문명은 자연에 속하고, 자연 속에서 사람들은 살아갑니다. 자연이 통합된 체계이기 때문에, 자연이 개별적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 역시 개별적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연 환경을 '공유'합니다. <빼앗긴 자들>처럼, <태양의 도시>에서 '공유 사회'는 핵심입니다. (존 로크의) 자유 민주주의와 달리, <태양의 도시>에서 사유 재산에게는 커다란 의미가 없습니다.



자유 민주주의는 사유 재산, 개인적인 소유를 중시하나, <태양의 도시>에서 사유 재산보다 공유 사회는 평등하고 안전한 세상을 조성합니다. 그래서 여자들 역시 평등하게 살아갑니다. 이건 <태양의 도시>가 성 해방을 완전히 이룩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캐롤린 머천트는 <태양의 도시>가 일정한 한계를 넘지 못했다고 지적합니다. <태양의 도시>는 시대적인 한계, 가부장 편견을 완전히 몰아내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캐롤린 머천트는 토마소 캄파넬라가 여자들의 자연적인 아름다움에 너무 집착한다고 지적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자유 민주주의 사회보다 공유 사회에서 여자들은 훨씬 평등하게 살아갑니다.


심지어 <태양의 도시>에서 전형적인 중산층 가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주거지와 식당을 공유합니다. (존 로크의) 자유 민주주의 관점에서 <태양의 도시>는 사회주의에 가까울 겁니다. 토마소 캄파넬라는 골수 빨갱이가 아니었으나, <태양의 도시>는 이미 유토피아 문학들이 사회주의에 다가갔다고 증명합니다. <태양의 도시> 이후, 19세기에서 본격적인 산업 자본주의는 나타났고, 많은 사람들은 대규모 기계들을 싫어했습니다. 대규모 기계들, 산업 자본주의는 엄청난 충격이었고, 충격에서 많은 사람들은 도피하기 원했습니다. 이 사고 방식은 낭만주의로 이어집니다. 낭만주의는 목가적인 자연을 노래합니다.



낭만주의는 대규모 기계들, 산업 자본주의를 외면하고 목가적인 자연을 노래합니다. 이건 모든 낭만주의가 산업 자본주의를 외면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19세기 후반 윌리엄 모리스는 <에코토피아 뉴스>를 썼습니다. <에코토피아 뉴스>는 미래 사회를 이야기합니다. 분명히 <에코토피아 뉴스>는 미래 사회를 논의하고, 이 소설은 SF 장르에 들어갑니다. 윌리엄 모리스가 소설 <뒤돌아보며>를 읽었기 때문에, <뒤돌아보며>가 SF 장르에 속하는 것처럼, <에코토피아 뉴스>는 SF 장르에 속합니다. <뒤돌아보며>는 미래 유토피아 문학입니다. 이 19세기 후반 소설에서 2000년 미래 사회는 훨씬 평등합니다.


<미래는 오지 않는다>(의 표지 문구)는 대중적인 미래 세계관이 평등한 사회를 외면한다고 지적하나, 이미 19세기 후반 소설 <뒤돌아보며>는 평등한 2000년 미래 사회를 꿈꿨습니다. 이 소설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무엇보다 <뒤돌아보며>는 사회주의 유토피아입니다. 2000년 미래 사회는 시민 배당을 지급하고, 여자들은 평등하게 살아가고, 빈부 격차는 사라지고, 자본가 계급 역시 사라지고, 자본가 계급을 위해 과학 기술은 봉사하지 않습니다. <뒤돌아보며>가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호소하는 것처럼, <에코토피아 뉴스> 역시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호소합니다. 하지만 두 소설은 다릅니다.



<뒤돌아보며>는 첨단 거대 도시를 묘사하나, <에코토피아 뉴스>는 낭만주의를 계승합니다. <에코토피아 뉴스>는 첨단 거대 도시보다 목가적인 중세 마을을 묘사합니다. 분명히 이 소설은 미래 사회를 꿈꾸나, 미래 사회는 첨단 거대 도시보다 목가적인 중세 마을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어떤 독자들은 이 소설이 현실 도피적이라고 비난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낭만주의와 달리, 이 '낭만주의'는 산업 자본주의를 정면 돌파합니다. 사회주의 유토피아로서 <에코토피아 뉴스>는 산업 자본주의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소설은 치열하고 폭력적인 혁명을 응원합니다. 이 소설은 진보적인 폭력을 응원합니다.


언뜻 <에코토피아 뉴스>는 낭만적이고 목가적이나, 무산자 민중들이 무장 봉기하고 산업 자본주의를 타파하기 때문에, 목가적인 (유사) 중세 마을은 미래 사회가 됩니다. 목가적인 중세 마을에는 빈부 격차가 없고, 환경 오염이 없고, 성 차별이 없습니다. 이건 <에코토피아 뉴스>가 완전한 성 해방을 이룩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에코토피아 뉴스>는 성별 고정 노동을 묘사합니다. 윌리엄 모리스는 시대적인 한계, 가부장 편견을 깨뜨리지 못했습니다. 윌리엄 모리스는 고리타분한 수구 꼴통, 19세기 상류층 백인 남자를 뛰어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 역시 전형적인 중산층 가족을 타파하고 공유 사회를 추구합니다.



<자연의 죽음>에서 캐롤린 머천트는 이 소설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나, <태양의 도시>와 <에코토피아 뉴스>는 상당히 비슷합니다. 만약 토마소 캄파넬라가 <에코토피아 뉴스>를 읽는다면, 토마소 캄파넬라는 이 소설에 동의할지 모릅니다. 특히, <태양의 도시>가 선구적이고 원형적인 생태 사회주의를 드러내는 것처럼, 낭만주의 문학으로서 <에코토피아 뉴스>는 생태 사회주의입니다. <뒤돌아보며>는 야생 자연을 거의 묘사하지 않으나, 낭만주의 문학으로서 <에코토피아 뉴스>는 미래 사회주의자들이 야생 삼림을 보호한다고 강조합니다. 이건 생태 사회주의 유토피아가 낭만주의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산업 기계들이 자연 환경을 무참하게 파괴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산업 문명과 자연 환경이 대립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연의 죽음>에서 캐롤린 머천트는 어니스트 칼렌바크와 <에코토피아>를 언급합니다. 어니스트 칼렌바크는 <에코토피아>를 썼고, 이 소설은 과학 기술들, 산업을 완전히 배척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소설은 과학 기술들을 이용하고 친환경 동력을 만듭니다. 레이첼 카슨이 <침묵의 봄>을 쓰고 서구 환경 운동이 대세가 된 이후, 20세기 후반 서구에서 <에코토피아>는 가장 유명한 생태 유토피아 문학입니다. 가장 유명한 생태 유토피아 문학은 산업 사회, 과학 기술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습니다.



캐롤린 머천트는 생태 유토피아로서 <에코토피아>가 과학 친화적이라고 설명하나, 이미 20세기 초반에서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는 <붉은 별>을 썼습니다. <에코토피아 뉴스>와 <붉은 별>은 초기 생태 사회주의를 드러내나, <에코토피아 뉴스>보다 <붉은 별>은 훨씬 전형적인 SF 소설에 가깝습니다. 이 소설에서 외계 공산주의 문명은 우주선을 건조합니다. 본격적인 SF 소설로서 <붉은 별>은 초기 생태 사회주의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는 킴 스탠리 로빈슨과 <붉은 화성>에게 영향을 미쳤는지 모릅니다.) 과학 친화적인 생태 유토피아로서 <에코토피아>보다 <붉은 별>은 훨씬 선구적입니다.


<태양의 도시>와 <에코토피아 뉴스>와 <붉은 별>처럼, <에코토피아>는 사회주의에 가깝습니다. <붉은 별>과 달리, <에코토피아>는 완전한 사회주의로 기울어지지 않으나, 일반적인 신자유주의와 달리, 이 소설은 자유 시장 경제를 노골적으로 떠받들지 않습니다. <에코토피아>가 자유 시장 경제를 떠받들지 않는 것처럼, 샬롯 퍼킨스 길먼 소설들 역시 자유 시장 경제를 노골적으로 떠받들지 않습니다. 만약 존 로크가 샬롯 퍼킨스 길먼 소설들을 읽는다면, 존 로크는 이 소설들이 사회주의에 가깝다고 비난할지 모릅니다. 자유 시장 경제가 민영화, 사유화를 선호하기 때문에, 자유 시장 경제와 돌봄 노동 사회화는 공존하지 못합니다.



17세기 초반 <태양의 도시>부터 20세기 후반 <에코토피아>까지, SF 장르에서 (생태) 유토피아 문학들은 평등하고 안전한 미래를 꿈꿉니다. 21세기 초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디스토피아와 아포칼립스에 지친 독자들에게 밝은 미래 전망들은 신선한 공기가 될 것이다." 이렇게 소설 모음집 <유리와 정원 Glass and Gardens>은 주장합니다. <유리와 정원>은 이른바 솔라펑크 소설 모음집입니다. <유리와 정원> 표지 그림은 밝은 태양과 세련되고 기하학적인 미래 도시와 태양열 전지판들과 풍력 발전기들을 보여줍니다. 따스하고 경쾌한 표지 그림처럼, 유토피아 문학 <유리와 정원>은 재생 에너지를 이용합니다.


<미래는 오지 않는다>(의 표지 문구)는 대중적인 미래 세계관이 평등한 사회를 외면한다고 지적하나, 소설 모음집 <유리와 정원>은 이것에 반박할 수 있습니다. 비단 사레나 올리바리만 아니라 킴 스탠리 로빈슨 소설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엘리너 아나슨은 기후 변화 시대에서 SF 독자들에게 디스토피아와 포스트 아포칼립스보다 생태 유토피아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엘리너 아나슨은 생태 유토피아 작가로서 킴 스탠리 로빈슨을 지목했습니다. <퍼시픽 엣지>부터 <뉴욕 2140>까지, 킴 스탠리 로빈슨은 생태 유토피아들을 지속적으로 썼습니다. 언뜻 <뉴욕 2140>은 생태 유토피아보다 환경 아포칼립스에 가깝습니다.



<뉴욕 2140> 표지 그림이 보여주는 것처럼, 기후 변화가 해수면 상승으로 이어지고, 바다가 거대 도시를 덮치기 때문에, 수몰된 거대 도시는 환경 아포칼립스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자연 환경이 바뀌기 때문에, 사회 구조 역시 바뀌고, 소설 <뉴욕 2140>은 암울한 절망보다 진보적인 희망을 드러냅니다. 문제는 자본주의, 자유 시장 경제입니다. 이 소설은 자유 시장 경제에 반대합니다. <뉴요커> 5월 1일 사설에서 킴 스탠리 로빈슨은 코로나 19 사태 때문에 우리가 사회 구조를 크게, 빨리 바꿔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행성급 환경 재난은 얼마나 크게, 얼마나 빨리 우리가 사회 구조를 바꿔야 하는지 제안합니다.


마가렛 대처와 로널드 레이건은 사회 같은 것이 없다고 말했으나, 킴 스탠리 로빈슨은 마가렛 대처와 로널드 레이건이 헛소리한다고 비판합니다. 킴 스탠리 로빈슨은 비록 우리가 개인적이라고 해도 훨씬 커다란 사회 속에서 우리가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만약 행성급 환경 재난에서 우리가 살아남기 원한다면, 우리는 사회적(social)이어야 합니다. 단어 'social'은 '사회주의'를 포함합니다. <뉴요커> 사설에서 킴 스탠리 로빈슨이 사회주의를 주장하나요? 그건 아닐 겁니다. 전반적인 분위기는 사회주의보다 사회적인 평등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사회적인 평등은 자유 민주주의와 부딪힙니다. 자유 민주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자유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뒷받침합니다. 잉여 노동 시간을 이윤으로 전환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임금 노동자들을 착취합니다. 게다가 자본주의는 여자 무급 노동에 기생합니다. 임금 노동자 착취보다 여자 무급 노동은 훨씬 심각합니다. 적어도 임금 노동자는 (불공평한) 댓가를 받으나, 문자 그대로 무급 여자 노동자는 댓가를 받지 못합니다. 자본주의가 여자 무급 노동에 기생하기 때문에, 소비량은 생산량을 따라잡지 못하고,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과잉 생산합니다. 과잉 생산은 거품을 쌓고, 포화된 시장 경제에서 자본주의는 버티지 못합니다. 자본주의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 합니다.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자연을 시장 경제에 집어넣습니다. 자본주의에게 자연은 자연이 아닙니다. 시장 경제에서 자연은 상품입니다. 자본주의가 생산 수단의 민영화를 인정하기 때문에, 기계적인 생태학에서 자연은 개인적인 상품이 되고, 환경 오염은 외부 비용이 됩니다. 만약 토마소 캄파넬라가 이것을 본다면, 토마소 캄파넬라는 분노할 겁니다. 그래서 <자연의 죽음>에서 캐롤린 머천트는 <태양의 도시>와 전체론 생태학을 설명했을 겁니다. <태양의 도시>는 전체론 생태학과 사회적인 평등을 추구하나, 기계적인 자본주의는 자연과 사회를 분리합니다. <태양의 도시>와 자본주의는 대립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생태 유토피아, 삼림 도시를 꿈꿉니다. 하지만 자유 민주주의는 이것을 짓밟습니다.]



자유 민주주의가 자본주의를 뒷받침하기 때문에, 자유 민주주의와 <태양의 도시>는 대립합니다. <자연의 죽음>이 <태양의 도시>를 설명하기 때문에, 자유 민주주의와 <자연의 죽음>은 대립합니다. 자유 민주주의와 사회적인 평등은 공존하지 못합니다. 자유 민주주의에서 핵심이 개인의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자유 시장(free market)은 자유(freedom)를 부르짖고 사회적인 평등을 짓밟습니다. 19세기 후반 파리 코뮌이 사회적인 평등을 주장했을 때, 이미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 계급은 파리 코뮌을 짓밟았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 계급은 파리 코뮌을 끔찍하게, 너무 끔찍하게 학살했습니다. 파리 코뮌이 보여준 것처럼, 자본주의와 사회적인 평등은 절대 공존하지 못합니다.


자본주의(자유 민주주의)와 사회적인 평등 중에서 하나는 사라져야 합니다. 그래서 자유 민주주의는 사회적인 평등을 왜곡하고 탄압합니다. 자유 민주주의는 공유지의 비극을 주절거리고 사람들을 세뇌합니다. 반면, <자연의 죽음>에서 캐롤린 머천트는 여러 유럽 코뮨들이 공유지를 모범적으로 관리했다고 설명합니다. 진짜 문제는 공유지보다 지배 계급이었습니다. 지배 계급이 착취했기 때문에, 공유지는 망가졌습니다. 황폐한 공유지는 공유지의 비극보다 '지배 계급 착취'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공유 사회가 불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지배적인 관념이 사람들을 세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중적인 미래 세계관은 자본가 계급에게 들러붙고 평등한 미래 사회를 외면합니다.



비디오 게임 <블록후드>는 생태 공동체, 삼림 도시를 묘사합니다. 소설 <에코토피아>처럼, <블록후드>는 친환경 과학 기술들을 이용하고 생태 유토피아를 건설합니다. 심지어 삼림 건물에서 야생 동물들과 시민들은 함께 살아갑니다. 도시는 삼림이 되고, 삼림 건물에서 자연과 사회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게 전체론 생태학인가요? 만약 토마소 캄파넬라가 <블록후드>를 플레이한다면, 토마소 캄파넬라가 <블록후드>를 좋아할까요? 대답은 확실하지 않으나, 분명히 <태양의 도시>와 <블록후드>에서 삼림 도시, 전체론 생태학은 어느 정도 비슷합니다. <태양의 도시>처럼, <블록후드>는 사회적인 평등을 중시합니다.


스토리 모드에서 산업 자본주의는 도시를 무너뜨리고, 사람들을 파탄에 빠뜨리고, 야생 동물들을 몰아냅니다. 자연 환경에서 게임 주인공은 야생 동물(멧돼지)과 교감하고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회의합니다. 게임 주인공은 (멧돼지와 함께) 생태 유토피아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합니다. <블록후드>는 골수 빨갱이가 아니나, 분명히 <블록후드> 역시 사회적인 평등을 중시합니다. 만약 <블록후드>가 자유 민주주의 사회를 훨씬 근본적으로 들여다본다면, <블록후드> 역시 자유 민주주의(자본주의)와 사회적인 평등이 절대 공존하지 못한다고 깨달을 겁니다. 이 관점에서 21세기 초반 SF 소설들보다 <태양의 도시>는 선구적입니다.



수많은 SF 소설들은 지배적인 관념에 충성하나, <태양의 도시>는 사유 재산, 중산층 가족을 비판하고 공유 사회를 추구합니다. 수많은 SF 소설들보다 <태양의 도시>가 선구적이기 때문에, <자연의 죽음>에서 캐롤린 머천트는 이 소설을 설명했을 겁니다. 다른 생태 유토피아들은 어떤가요? 다른 생태 유토피아들이 전체론 생태학과 사회적인 평등을 연결하나요? 생태 유토피아에서 이게 필수적인 요소인가요? 만약 생태 유토피아가 전체론과 사회적인 평등을 외면한다면, 이 생태 유토피아는 그저 가식에 불과할 겁니다. 유토피아 문학은 기계적인 사고 방식을 추구하고 지배적인 관념에 충성할지 모릅니다.


토마소 캄파넬라가 대지모신을 상정했기 때문에, 토마소 캄파넬라는 유물론보다 관념론에 가까웠습니다. 토마소 캄파넬라는 존재에서 관념을 끌어내기보다 관념에서 존재를 끌어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전체론이 자연을 어머니 육체라고 간주했기 때문에, 전체론은 어머니 육체를 함부로 작게 쪼개지 못했습니다. 총체적인 자연 속에서 인류 사회는 자원들을 공유하고, 가족을 해체하고, 사유 재산을 없앨 수 있습니다. 비록 <태양의 도시>에게 고질적인 관념론 한계(와 우생학의 그림자)가 있다고 해도, 공상적인 사회주의(관념론)가 마르크스주의(유물론)를 가르친 것처럼, 전체론 생태학은 생태 유토피아들에게 교훈을 가르치는지 모릅니다.



<태양의 도시>가 보여주는 것처럼, 자유 민주주의(자본주의 시장 경제, 사유 재산)와 평등한 미래 세계관은 대립합니다. 그래서 <미래는 오지 않는다>(의 표지 문구)는 대중적인 미래 세계관이 자본가 계급을 떠받든다고 지적할 겁니다. 여러 유토피아 문학들은 평등하고 안전한 미래를 꿈꾸나, 자유주의가 이것을 짓밟기 때문에, 자유주의 사회에서 평등한 미래 세계관보다 기계론적인 미래 세계관은 지배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렴하고 평등한 무료 백신보다 휘황찬란한 과학 기술들이 미래라고 믿습니다. 이런 유토피아들은 자본주의에 충성하고, 결국 이것들은 그저 화려한 과학 기술 잔치에 수렴할 뿐입니다.


<자연의 죽음>에서 캐롤린 머천트가 프랜시스 베이컨과 <새로운 아틀란티스>의 과학적인 유토피아를 비판하는 것처럼, 전체론 생태학과 사회적인 평등 없이, 유토피아 문학은 그저 지배 계급 노예에 불과할 겁니다. 이건 평등한 미래 사회를 꿈꾸지 못합니다. 만약 유토피아 문학이 전체론을 배제한다면, 자연은 개별적인 것이 될 테고, 사람들은 자연 환경을 개별적으로 소유할 겁니다. 사유 재산은 그저 화려한 과학 기술 잔치가 될 뿐입니다. 화려한 과학 기술 잔치는 평등한 미래 사회를 보장하지 못합니다. 화려한 과학 기술 잔치는 화성 식민지가 멋질 거라고 예측하나, 이건 정교한 예측보다 허무맹랑한 망상입니다.



<새로운 아틀란티스>는 '살로몬의 집'을 묘사합니다. 살로몬의 집은 과학 실험실입니다. 중요한 실험 목표들 중에서 하나는 인공 생태계입니다. 살로몬의 집은 거대한 지하 동굴을 마련하고 담수를 염수로 바꾸거나 새로운 우물을 만듭니다. 과학자들은 이 환경 창조/변화가 새로운 광물들을 생성할 거라고 기대합니다. 어머니 자연 없이, 과학자들은 인공 환경을 창조하고, 바꾸고, 자원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살로몬의 집은 비단 환경만 아니라 기후 역시 바꿉니다. 살로몬의 집은 눈과 비, 폭풍을 통제하고 기후 조절 장치를 제작합니다. 이건 SF 테라포밍과 비슷합니다. <새로운 아틀란티스>는 테라포밍을 암시합니다.


테라포밍 과정에서 개조 생명체들이 빠지지 못하는 것처럼, <새로운 아틀라틴스>는 개조 생명체들을 언급합니다. 살로몬의 집은 온갖 식물들과 동물들을 교접하고 개조합니다. 어머니 자연은 식물상과 동물상을 선사하나, 어머니 자연보다 개조 생명체들은 훨씬 유용합니다. <새로운 아틀란티스>가 17세기 문학이기 때문에, 20세기 SF 소설들과 달리, <새로운 아틀란티스>에서 인공 생태계는 다소 어설픈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미 17세기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과학 기술들이 인공 생태계를 만들 거라고 예측했습니다. 하지만 이 인공 생태계가 평등한 미래 세계인가요? 살로몬의 집이 평등과 복지를 추구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20세기 후반 SF 작가들이 바이오 돔과 버블 월드와 토러스 거주지와 화성 테라포밍을 이야기하기 전에, 프랜시스 베이컨은 인공 생태계를 선구적으로 묘사했고, 이건 굉장한 업적이나, <새로운 아틀란티스>는 가부장적인 자본주의에 기반합니다. <새로운 아틀란티스>는 성 차별과 계급 차별을 드러냅니다. 성 차별과 계급 차별이 지배적인 관념이고, <새로운 아틀란티스>가 지배적인 관념을 따르기 때문에, <미래는 오지 않는다>가 지적하는 것처럼, 미래 세계관은 그저 화려한 과학 잔치에 불과합니다. 분명히 인공 생태계(특히, 폐쇄 생태계)는 로망이고, <새로운 아틀란티스>는 로망을 멋지게 구현하나, 이게 전부인가요?


아무리 외계 행성에서 미래 인류 문명이 바이오 돔을 건설하고 테라포밍한다고 해도, 기계적인 생태학은 바이오 돔을 무너뜨리고 또 다른 환경 범죄를 저지를 겁니다. 물론 기계론과 전체론을 단순하게 구분하기는 어렵습니다. 존 벨라미 포스터는 마르크스의 유물론이 원자론에 기반한다고 설명합니다. 원자론이 가장 작은 요소이기 때문에, 전체론보다 원자론은 기계론과 어울립니다. 결국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기계론과 어울립니다. 하지만 캐롤린 머천트는 마르크스의 (초기) 생태학이 전체론을 드러낸다고 해석합니다. 이 사례가 보여주는 것처럼, 여러 철학들 속에서 기계론과 전체론은 복잡하게 얽히고, 이것을 단순하게 구분하기는 어렵습니다.



<자연의 죽음>에서 캐롤린 머천트 역시 양쪽을 단순하게 구분하기가 어렵다고 인정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시장 경제가 자연을 쪼개고 민영화/사유화하기 때문에, 기후 변화와 코로나 19 사태는 심각한 환경 오염 범죄입니다. 시장 경제가 자연을 쪼개기 때문에, 대중적인 미래 세계관은 화성 식민지를 망상합니다. 만약 무산자 민중들이 평등한 미래를 꿈꾸기 원한다면, 민중들은 자유 민주주의, 자본주의, 사유 재산, 중산층 가족을 몰아내야 합니다. 민중들은 기계적인 사고 방식을 몰아내고 전체론을 되찾아야 합니다. 이런 계급 투쟁 없이, 평등한 미래 세계관은 찾아오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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