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탐험과 항해를 동경하는 <모아나>와 <표면 장력> 본문
만약 누군가가 <대항해 시대 III>와 <엔들리스 스카이>를 함께 평가한다면, 그런 평가에 무슨 가치가 있을까요? 제목처럼, <대항해 시대 III>는 유럽 탐험가들이 아프리카와 중앙 아시아, 동남 아시아, 동아시아를 탐험하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는 이야기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유럽 탐험가가 되고, 장대한 탐사, 무역, 해전을 겪어야 합니다. 드넓은 세계에는 수많은 항구들, 범선들, 선원들, 해적들, 기이한 동식물들, 바다 괴수들(!), 고대 유적들이 있고, 주인공 탐험가는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고 이런 것들을 마주칩니다.
주인공 탐험가는 범선을 구입하고, 범선을 개조하고, 수많은 항구들에서 수많은 교역품들을 매매하고, 기이한 동식물들을 발견하고, 해적들과 싸우고, 고대 유적들을 발견합니다. <대항해 시대 III>는 역사적인 탐험 항해를 이용하는 장대한 오픈 월드입니다. 반면, <엔들리스 스카이>는 스페이스 오페라입니다. 당연히 <엔들리스 스카이>는 <대항해 시대 III>와 많이 다릅니다. 우주선은 범선과 다르죠. 하지만 <대항해 시대 III>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범선을 타고 드넓은 세계를 누빌 수 있습니다. <엔들리스 스카이>는 비슷한 체험을 제공합니다. <대항해 시대 III>가 그런 것처럼, <엔들리스 스카이>는 장대한 탐사, 무역, 해전을 제공합니다.
<엔들리스 스카이>에서 주인공 우주선 선장은 우주선을 구입하고, 우주선을 개조하고, 수많은 행성들에서 수많은 교역품들을 매매하고, 우주 해적들과 싸우고, 새로운 우주 항로들을 발견합니다. <대항해 시대 III>와 달리, <엔들리스 스카이>에서 우주선 선장은 직접 기이한 동식물들을 발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행성 풍경들은 '드넓은 우주를 탐험한다'는 느낌을 한껏 풍깁니다. 범선과 우주선이 나온다고 해도, <대항해 시대 III>와 <엔들리스 스카이>는 서로 비슷한 감성을 풍길 수 있습니다. 두 게임에는 공통적인 감성이 있어요.
이건 <대항해 시대 III>와 <엔들리스 스카이>가 무조건 똑같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떻게 범선이 무역풍을 따르는 게임과 우주선이 초공간 도약하는 게임이 똑같을 수 있겠어요. 우주를 동경하는 게임 플레이어에게 <대항해 시대 III>는 아무 매력을 풍기지 못하겠죠. 그런 게임 플레이어는 단순한 범선 항해가 아니라 우주 항해를 원하겠죠. 하지만 탐험과 항해라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대항해 시대 III>와 <엔들리스 스카이>는 비슷한 감성을 풍깁니다. 예전에 <우주, 바다에서 또 다른 바다로….>라는 게시글이 이야기한 것처럼, 우주는 또 다른 바다가 될 수 있어요. 이미 수많은 SF 작가들, 독자들, 비평가들은 그런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이런 관점을 견지할 수 있다면, SF 팬들은 탐험과 항해 이야기에서 미래 문명을 끄집어낼 수 있을지 모르죠.
애니메이션 <모아나>는 주인공 모아나가 뛰어난 항해자가 되는 과정을 그립니다. 모아나는 모투누이 부족의 부족장 딸입니다. 모투누이 섬에서 모투누이 부족은 풍족하고 여유롭게 살아가는 중이었죠. 열대 밀림과 푸른 바다가 수많은 음식들과 자원들을 제공했기 때문에 모투누이 섬에서 부족민들은 배불리 먹고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투누이 부족은 심각한 재난에 부딪힙니다. 부족민들은 모투누이 섬을 떠나고 문제를 해결해야 했어요. 부족민들은 영원히 모투누이에 머물지 못할 운명이었죠. 하지만 부족장을 비롯해 사람들은 항해를 두려워합니다.
어느 순간부터 바다 괴수들은 선박들을 덮쳤고, 항해자들은 돌아오지 못하는 항해를 떠나야 했어요. 그래서 모투누이 부족은 항해를 금기시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떠나야 했어요. 이상한 검은 물이 계속 섬 생태계를 붕괴시키기 때문에 누군가는 왜 검은 물이 흘러오는지 조사해야 했습니다. 모아나의 할머니(부족장의 어머니)는 그런 모아나를 격려하고 응원하고 부족이 항해하는 역사를 들려줍니다. 모아나가 속한 부족은 항해 부족이고 예전에 수많은 섬들을 항해했었죠. 그들은 섬을 방문하고, 어느 정도 문명을 이룩하고, 다시 또 다른 섬을 찾기 위해 떠나고, 또 다른 섬을 방문하고, 다시 문명을 이룩하고…. 그들은 이런 과정을 반복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아차린 이후, 평소에 탐험과 항해를 그리워했기 때문에, 모아나는 배를 타고 드넓은 바다로 떠납니다. 이야기는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고, 바다 괴수들은 사라지고, 모투누이 부족은 항해 부족이라는 정체성을 되찾고, 또 다른 섬을 찾기 위해 그들은 드넓은 바다로 떠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게 사이언스 픽션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물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수많은 SF 소설들이나 영화들이나 게임들은 이런 과정을 이야기합니다. 인류는 지구를 떠나야 합니다. 인류는 지구를 떠나고 우주선을 타고 다른 외계 행성들을 방문해야 합니다. 거기에서 인류는 새로운 문명을 이룩할 테고 또 다시 다른 행성들로 떠나겠죠.
이런 우주 항해 과정은 <모아나>의 모투누이 부족과 꽤나 비슷합니다. 새로운 문명을 이룩하기 위해 사람들은 새로운 섬을 찾고, 새로운 문명을 이룩하기 위해 인류는 새로운 외계 행성을 찾고…. 가령, 제임스 블리시가 쓴 소설 <표면 장력>에서 어떤 수중 인간은 잠수정을 타고 새로운 지역을 탐험하고 싶어합니다. 모아나가 항해와 바다와 새로운 세계를 동경하는 것처럼, <표면 장력>에서 수중 인간은 사람들이 탐험하고 새로운 세계를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아나>와 <표면 장력>은 모두 항해와 탐험을 동경하고 탐험은 훨씬 진보한 문명을 이룩할 거라고 주장합니다.
이건 <모아나>가 우주 탐사물들과 똑같은 분위기를 풍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무리 새로운 문명과 탐험과 항해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모아나>는 고대 오세아니아 항해 부족민들을 이야기합니다. 고대 오세아니아 범선은 첨단 장거리 우주선이 아니죠. 누군가가 <모아나>를 <표면 장력> 같은 소설과 비교한다면, 그건 너무 비약이겠죠. <모아나>와 <표면 장력>에서 모아나와 수중 인간은 그들의 선조들이 항해자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람들이 다른 장소(새로운 섬, 새로운 웅덩이)로 항해하고, 새로운 문명을 이룩하기 바랍니다.
<모아나>와 <표면 장력>은 비슷한 분위기와 동경에 기반합니다. 탐험과 항해를 위해 양쪽 모두 진취적이고 쾌활하고 굳건한 의지를 찬양합니다. 보수적인 의견들은 탐험과 항해를 반대하나, 언제까지 그들은 모투누이 섬과 웅덩이에 머물지 못합니다. 결국 그들은 섬과 웅덩이 밖으로 나가고, 새로운 세상을 찾고, 또 다른 문명을 이룩해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비단 <표면 장력>뿐일까요? 그건 아니겠죠. 고전적인 비경 탐험 소설부터 최신 비디오 게임까지, 수많은 사이언스 픽션들은 탐험과 항해와 새로운 문명을 노래합니다. 스팀 게임 플랫폼에는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는 게임들이 널렸습니다.
누군가는 <모아나>와 <표면 장력>에게서 비슷한 감성을 느낄 겁니다. 누군가는 <대항해시대 III>와 <엔들리스 스카이>를 함께 재미있게 플레이할 수 있을 겁니다. <모아나>와 <대항해 시대 III>와 <엔들리스 스카이>와 <표면 장력>은 모두 탐험과 항해를 이야기하고, 분명히 이것들에는 뚜렷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고대 항해와 우주 항해에는 비슷한 감성이 있습니다. 수많은 탐험 다큐멘터리들이나 탐험 서적들은 고대 오세아니아 부족부터 아서 클라크나 보이저 무인 탐사선까지 장대하게 이야기합니다. 김용만이 쓴 <세상을 바꾼 탐험> 같은 서적은 표지 그림에서 정크 범선과 우주 승무원을 함께 보여줍니다.
유구한 인류 문명에서 탐험과 항해는 수많은 궤적들을 따랐고 장대하게 바다에서 우주로 이어졌습니다. 따라서 <모아나>를 보는 동안, 관객이 어떤 SF 감성을 느낀다고 해도, 그건 완전히 틀린 감성이 아닐 겁니다. 반면, 누군가는 <모아나>와 <대항해 시대 III>가 그저 수상 항해에 불과하다고 느낄 겁니다. 누군가는 <모아나>와 <대항해 시대 III>가 <엔들리스 스카이>와 <표면 장력> 같은 진보적인 우주 항해와 너무 다르다고 느낄 겁니다. 고대 오세아니아 카누와 카락 같은 범선과 생체 잠수정과 초공간 도약 우주선은 똑같지 않습니다. 탐험과 항해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해도, 고대 카누와 초공간 도약 우주선은 절대 똑같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모아나>와 <대항해 시대 III>와 <엔들리스 스카이>와 <표면 장력>에서 무엇을 느끼든, 정답은 없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주 탐사물들은 계속 우주가 또 다른 바다라고 이야기할 겁니다. <모아나>와 <대항해 시대 III> 같은 창작물들을 볼 때, 사람들은 어떻게 인류가 탐험하고 우주로 진출했는지 기나긴 여정을 회상할 수 있겠죠. 존 클루트를 비롯해 숱한 SF 작가들, 평론가들, 독자들은 사이언스 픽션이 탐험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미 원형적인 사이언스 픽션들과 사이언티픽 로망스들이 나타났을 때부터 사이언스 픽션은 탐험과 떨어지지 못했습니다. 에드거 앨런 포가 쓴 1838년 <아서 고든 핌의 모험>은 탐험을 이야기하는 원형적인 SF 소설이 될 수 있겠죠.
어느 날 갑자기 우주 항해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오래 전부터 인류는 탐험했고 마침내 인류는 우주를 바라볼 수 있었죠. 물론 이건 끝이 아니겠죠. 어디로 떠나든, 인류는 또 다른 탐험에 나설지 모릅니다. 탐험은 계속될 겁니다. 아득하고, 아주 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