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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새로운 사회의 중심에서 중립을 외치다 본문

SF & 판타지/비경 탐험

새로운 사회의 중심에서 중립을 외치다

OneTiger 2019. 1. 28. 19:00

[새로운 장소에는 새로운 기회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기존의 가치관은 꽤나 끈질기겠죠.]



마야도 색스에 뒤이어 주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접시를 씻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들이 너무 감정적이야. 나는 가끔씩 내가 <출구 없는 방>이라는 연극에 갇힌 채 끝없이 연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기분이 들어." "사람들이 작은 방에 갇혀서 빠져나올 수 없는 내용의 연극이었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이 바로 지옥이야."



위 대사들은 소설 <붉은 화성>에 나옵니다. 킴 스탠리 로빈슨이 쓴 <붉은 화성>에서 과학자들은 우주선을 타고 화성으로 향합니다. 화성에서 과학자들은 새로운 외계 도시를 세우기 원합니다. 화성에서 그들은 생존해야 하고, 여러 건물들을 지어야 하고, 농장들을 관리해야 하고, 화성 생태계를 새롭게 조성해야 합니다. <붉은 화성>은 외계 생존 건설 탐험 이야기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붉은 화성>은 스팀 플랫폼에서 유행하는 여러 외계 생존 건설 게임들과 비슷합니다.


<서브노티카>, <림월드>, <플래닛 베이스>, <에이븐 콜로니>, <언클레임드 월드>, <뮨베이스>와 <붉은 화성> 사이에는 아주 커다란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새로운 세계로 향하고 새로운 자연을 탐험하고 새로운 문명을 세우죠. 이런 SF 창작물들은 로빈슨 크루스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로빈슨 크루소는 고향을 떠나고 낯선 땅을 방황하고 낯선 땅에서 살아남아야 합니다. 로빈슨 크루소는 대표적인 생존자이자 탐험가이자 새로운 문명의 건설자일 겁니다. 로빈슨 크루소는 낯선 땅의 생존자입니다. <서브노티카>, <림월드>, <플래닛 베이스>, <에이븐 콜로니>, <언클레임드 월드>, <뮨베이스>와 <붉은 화성>은 모두 낯선 땅의 생존자들을 이야기합니다.



SF 세상에서 이런 이야기들은 커다란 인기를 끕니다. 어떤 이야기는 로빈슨 크루소를 거의 모방하고, 어떤 이야기는 로빈슨 크루소에게 여러 가지를 보탭니다. 19세기에 사이언티픽 로망스가 나타났을 때, 사이언티픽 로망스들 역시 그랬습니다. 소설 <신비의 섬>을 썼을 때, 쥘 베른은 로빈슨 크루소를 의식했을 겁니다. 비록 로빈슨 크루소와 달리, <신비의 섬>에서 생존자들은 서로 협력할 수 있었으나, 넓은 관점에서 <신비의 섬>과 로빈슨 크루소는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신비의 섬>은 지구 어딘가의 무인도를 이야기하나, 배경 무대가 우주로 바뀐다고 해도, 전반적인 골격은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히 SF 작가들은 로빈슨 크루소 이야기를 반복합니다. 로빈슨 크루소는 아무도 없는 세계를 탐험했고, 거기에서 생존해야 했고, 새로운 문명을 이룩해야 했습니다. 로빈슨 크루소처럼, <서브노티카>, <림월드>, <플래닛 베이스>, <에이븐 콜로니>, <언클레임드 월드>, <뮨베이스>와 <붉은 화성>은 아무도 없는 세계를 탐험하고, 거기에서 생존하고, 새로운 문명을 이룩합니다. <서브노티카>와 <뮨베이스>는 1인 생존자를 이야기하고, 1인 생존자에게 문명은 다소 거창한 용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1인 문명 역시 문명이겠죠. 게다가 <서브노티카>와 <뮨베이스>는 첨단 기지를 세울 수 있습니다. 어마어마하고 으리으리한 해저 첨단 기지와 각종 잠수정들에게 문명이라는 단어는 사치가 아닐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서브노티카>와 <뮨베이스>는 <언클레임드 월드>와 <플래닛 베이스>와 <에이븐 콜로니>와 다릅니다. <언클레임드 월드>와 <플래닛 베이스>와 <에이븐 콜로니>는 로빈슨 크루소 이야기보다 <신비의 섬>에 가깝습니다. 여기에는 사회가 있고, 사람들은 서로 역할들을 맡습니다. 어떤 관점에서 이건 캠핑장과 다르지 않습니다. 캠핑장에서 사람들은 서로 역할들을 맡습니다. 캠핑장은 일상적인 장소가 아닙니다. 캠핑장으로 향할 때, 사람들은 일상에서 벗어나고 새롭고 즐거운 세계로 들어간다고 느끼죠. 물론 주말 캠핑이 회사 MT이고 직장 상사들이 함께 있다면, 캠핑장은 별로 새로운 세계가 되지 못할 겁니다. 그건 그저 캠핑을 빙자하는 또 다른 업무에 불과할 겁니다.


이런 캠핑장에는 회사에서 직원들이 느끼는 불만들이 여전히 존재하겠죠. 접대가 업무의 연장인 것처럼, 이런 주말 MT는 업무의 연장이겠죠. 하지만 이런 업무의 연장들과 일상의 연장들을 제외한다면, 사람들은 캠핑장이 신선하고 낯선 장소라고 느낄 겁니다. 캠핑장은 일상에서 벗어난 장소입니다. 캠핑장이 일상에서 벗어난 장소이기 때문에, 그걸 위해 사람들은 캠핑장으로 향합니다. 낯선 땅에서 사람들은 새롭게 행동합니다. 장소가 낯설기 때문에 사람들 역시 낯설게 행동합니다. 이건 캠핑의 즐거움이죠. 어쩌면 이건 캠핑의 가장 커다란 즐거움이 될 겁니다. 그래서 <언클레임드 월드>와 캠핑장은 서로 비슷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함께 생활한다면, 사람들은 갈등을 쉽게 피하지 못할 겁니다. 그들은 누가 접시들을 닦아야 하고, 누가 상추들을 씻어야 하고, 누가 자동차를 운전해야 하고, 누가 술판을 차려야 하는지 논의할 겁니다. 만약 역할 분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들은 서로 갈등할 테고, 캠핑은 지지부진해지거나 엉망이 될지 모릅니다. <플래닛 베이스>와 <언클레임드 월드>와 <에이븐 콜로니>와 <림월드> 같은 게임들은 이걸 이야기합니다. 특히, <림월드>에서 이건 아주 심각한 사태로 번질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외계 사회에 불만을 품을 때, 그 사람은 살인을 저지르고 외계 사회를 망칠 수 있죠. 소설 <붉은 화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붉은 화성>은 어떻게 새로운 장소에서 사람들이 갈등하는지 묘사합니다. 우주선 안에서, 화성 개척지에서, 개척 과학자들은 서로 다른 것들을 주장하고, 이건 아주 지긋지긋한 갈등 관계가 됩니다. 다들 이런 갈등 관계에 진절머리를 냅니다. 그래서 색스는 <출구 없는 방>을 언급했을 겁니다. 갈등 관계가 너무 지긋지긋하고 진절머리가 나기 때문에 색스는 다른 사람들이 지옥이라고 말했을 겁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중립을 표방합니다. 이렇게 어지럽고 혼란스럽고 더럽고 추잡하고 시끄러운 상황에서 중립은 고고하고 객관적이고 깔끔한 단어가 됩니다. 사람들은 당파성보다 중립이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개척 과학자들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중립을 지지합니다. 당파성은 진흙탕 싸움이나, 중립은 깔끔합니다. 정치는 더럽고 치사하나, 중립은 고고하고 깨끗합니다. 사람들은 중립을 원하고 고고하고 깨끗하기 바랍니다. 중립과 객관성은 좋은 것입니다. 더럽고 요란한 당파성보다 중립은 훨씬 깔끔하고 온건하죠. 게다가 우주선과 화성은 낯선 장소, 새로운 사회입니다. 새로운 사회에서 사람들이 중립을 외칠 때, 그건 더럽고 추레한 당파성에 물들지 않을 수 있겠죠.


그래서 어떤 개척 과학자들은 중립을 지지했을 겁니다. 하지만 다른 개척 과학자들은 중립이 없다고 반박합니다. 정말 중립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정말 인간이 객관적으로 행동할 수 있을까요? 새로운 사회에서 사람들이 당파성에 물들지 않을 수 있을까요? 문제는 사회 구조가 인간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입니다. 이건 아주 커다란 영향입니다. 인간은 사회를 떠나지 못합니다. 아무리 중립적인 인간 역시 사회를 떠나지 못합니다. 아무리 인간이 중립을 지지하고 객관적으로 행동한다고 해도, 사회 구조 속에서 인간은 중립을 지지하고 객관적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만약 사회 구조가 삐뚤어졌다면, 삐뚤어진 구조 속에서 인간은 중립을 지지하겠죠. 이게 진짜 중립일까요? 이게 진짜 객관적일까요?



흔히 사람들은 '가치 서술'과 '사실 서술'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르 호랑이에게는 여러 줄무늬들이 있다." 이건 사실 서술입니다. "여러 줄무늬들 덕분에 아무르 호랑이는 아주 예쁘다." 이건 가치 서술입니다. '아주 예쁘다'는 판단은 사실보다 가치입니다. 분명히 아무르 호랑이에게는 여러 줄무늬들이 있으나, 아무도 아무르 호랑이의 줄무늬들이 정말 예쁘다는 절대적인 기준을 세우지 못하죠. 그래서 사람들은 가치 서술보다 사실 서술이 객관적이라고 생각하죠. 그래서 사람들은 이른바 '팩트'를 중시합니다. 팩트들을 제시할 때, 사람들은 자신들이 객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사실 서술 역시 사회 구조에 영향을 받는다는 점입니다.


수구 보수적인 신문들이 북한 기사를 1면에 내놓을 때, 그건 사실 서술입니다. 수구 보수적인 신문들은 북한이 무슨 짓을 저질렀다고 사실을 서술합니다. 하지만 왜 구태여 수구 보수 신문들이 북한 문제를 1면으로 내놨을까요? 왜 수구 보수 신문들이 '그 사실'을 1면에 내놨을까요? 이 세상에는 수많은 사실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사실들이 넘칩니다. 아무르 호랑이에게는 여러 줄무늬들이 있습니다. 아무도 이런 '사실'을 부정하지 못하겠죠. 왜 수구 보수 신문들은 '이 사실'이 아니라 '그 사실'을 1면에 내놨을까요? 이 세상에서 수많은 것들은 사실들이 될 수 있습니다. 왜 우리가 사실들을 취사선택할까요? 왜 우리는 모든 사실이 사실이라고 말하지 않을까요?



수구 보수 신문들은 '이 사실'이 아니라 '그 사실'을 강조합니다. 남한이 미국 자본주의를 추종하고, 미국 자본주의가 북한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구 보수 신문들은 아무르 호랑이에게 여러 줄무늬들이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북한이 핵무기를 실험한다는 '사실'을 선택합니다. 네, 사람들은 사실을 선택합니다. 사실들은 많으나, 사람들은 사실을 선택합니다. 사실을 선택하는 순간, 사람들은 가치를 고려합니다. 따라서 사실 서술은 순수한 사실 서술이 아닙니다. 사실을 선택하는 순간, 그건 가치 서술에 가까워집니다. 이른바 '팩트 폭격'은 순수한 사실 서술이 아닙니다. 이것 역시 가치 서술에 가깝죠.


비단 이런 신문만이 아니라 자연 과학 서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BBC 서적 <살아있는 지구>는 지구 생태계를 감동적으로 보여줍니다. 독자들은 이런 책에 당파성과 가치 판단이 없을 거라고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놀랍게도 이 세계가 몇 년 뒤에는 결코 지금과 똑같지 않을 거라는 점 또한 사실이다. 커다란 쌍봉 낙타는 야생 개체수가 1천 마리도 되지 않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아무르 표범의 경우, 현재 야생에는 40마리도 채 살아남지 않았으며, 고속 도로가 아마존 정글을 가로지르고 있다. 기름 야자 나무를 재배하기 위해 우림이 2.5 제곱킬로미터씩 쓰러져나가고 있으며, 해양 오염으로 산호초가 파괴되고 있다. 이러한 파괴를 피할 수 있었던 야생 자연의 일부마저도 인류가 자초한 지구 온난화 때문에 급격히 변할지 모른다."


이렇게 서문에서 <살아있는 지구>는 '인류가 자초한 지구 온난화' 때문에 자연 생태계가 사라진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인류는 지구 온난화를 자초하지 않았습니다. 인류 중에서 지구 온난화를 자초한 주범은 산업 자본가 계급입니다. 산업 자본가들이 열심히 온실 가스를 뿜을 때, 가난한 하층민들은 죽어나갔습니다. 산업 자본가 계급은 인류입니다. 이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가난한 하층민들 역시 인류입니다. 이것 역시 사실이죠. 왜 <살아있는 지구>가 이걸 언급하지 않을까요? 왜 <살아있는 지구>가 오직 산업 자본가 계급이 인류라는 사실만을 선택했을까요? 자본주의가 옳다는 세뇌 때문입니다. 사회 구조가 자본주의 경제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옳다고 생각하고, <살아있는 지구>처럼 자연 과학 서적 역시 사실을 취사선택합니다.



사람들은 가치 서술과 사실 서술이 완전히 다르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믿기 때문에 사람들은 중립과 객관성을 지지합니다. 하지만 사실을 서술할 때, 사람들은 사실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건 가치 판단에 속합니다. 미국이 훨씬 많은 양민들을 훨씬 먼저 학살했음에도, 사람들은 북한이 독재 국가라는 사실을 '선택'합니다. 가부장 문화가 훨씬 많은 폭력들을 훨씬 먼저 저질렀음에도, 사람들은 메갈리아가 험악하게 욕했다는 사실을 '선택'합니다. 산업 자본주의가 훨씬 많은 환경 오염들을 훨씬 많이 저질렀음에도, 사람들은 시셰퍼드가 거칠게 항의한다는 사실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중립과 객관성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특히, 사회 구조가 오른쪽으로 삐뚤어졌을 때, 중립과 객관성은 우파에게 수렴할 겁니다. 중립과 객관성이 팩트들을 서술한다고 해도, 중립과 객관성은 우파에게 유리한 팩트들을 선택할 겁니다. 이미 보수 우파가 구축한 사회 구조 속에서 중립은 팩트들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래서 정치는 더럽습니다. 그 자체로서 정치는 더럽지 않습니다. 삐뚤어진 사회 구조 속에서 정치는 더러워집니다. 소설 <붉은 화성>에서 자칭 중립 과학자들은 이걸 의식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른 과학자들은 중립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외쳤을 겁니다. 개척 우주선 역시 절대적으로 수평적인 사회가 아닙니다. 지구 정부는 개척 우주선에게 계속 영향을 미치죠. 개척 우주선에서 미국 과학자들은 미국적인 세계관과 가치관을 화성 도시로 옮길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중립이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낯선 장소는 인간이 낯설게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합니다. 그래서 새롭고 평등한 사회를 이야기하기 위해 <신비의 섬>과 <붉은 화성>은 낯선 장소를 선택했을 겁니다. 유토피아 소설에게 낯선 장소는 의미심장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은 기존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낯선 장소에 주입할 수 있습니다. TV 예능 프로그램 <정글의 법칙>을 시청할 때, 시청자들은 병만 부족이 낯설게 행동하기 바랄 겁니다. 생선을 요리하기 위해 병만 부족은 직접 나뭇가지로 작살을 깎고, 바다에 뛰어들고, 물고기를 잡고, 나뭇가지들을 모으고, 모닥불을 지펴야 합니다. 시청자들은 병만 족장이 대형 할인점에 들리고 훈제 연어와 가스 레인지를 구입하고 돈을 낼 거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병만 부족은 계획 경제를 세우고 누가 물고기를 잡고 누가 나뭇가지들을 모을지 논의해야 합니다. 병만 부족은 시장을 세우고 재화들을 매매하자고 말하지 않죠. 낯선 장소에서 인간은 낯설게 행동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병만 부족은 열대 원주민이 아닙니다. 병만 부족은 자유주의 사회에 속한 사람들이고 자유주의 사회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무인도 생활에 투영합니다. 김병만이 남한 사회에 돌아온다면, 김병만은 아무렇지 않게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 적응하겠죠. <정글의 법칙>에는 비자본주의적인 계획 경제와 자유주의적인 가치관이 섞여 있습니다. 솔직히 <정글의 법칙>과 <붉은 화성>과 <림월드>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비슷한 이야기(낯선 장소에서 생존과 탐험과 건설)입니다. 새로운 행성에서 새로운 사회가 중립을 외칠 때, 사람들은 이걸 고려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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