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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찰거머리처럼 현실에 철썩 들러붙는 중세 판타지 관념 본문

SF & 판타지/장르 정의

찰거머리처럼 현실에 철썩 들러붙는 중세 판타지 관념

OneTiger 2018. 7. 3. 19:08

소설 <에라곤> 시리즈는 중세 유럽 판타지입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 아무도 이 용어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가 무슨 뜻일까요? 이는 중세 유럽에 여러 환상적인 요소들을 가미했다는 뜻입니다. 드워프, 오크, 좀비, 드래곤, 마법사 같은 것들은 전형적인 판타지 설정이죠. 이런 것들이 중세 유럽과 만났을 때, 우리는 그걸 중세 유럽 판타지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중세 유럽 판타지는 비단 이런 판타지 설정만 늘어놓지 않습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는 우리의 관념을 반영합니다.


수많은 중세 유럽 판타지 소설들, 영화들, 게임들에서 등장인물들은 진짜 중세 유럽 사람들과 다릅니다. 소설 <에라곤> 시리즈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진짜 중세 유럽 사람들과 다릅니다. <에라곤>의 등장인물들은 21세기 현대인과 비슷합니다. 작가가 21세기 관념을 소설에 집어넣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런 관념은 다소 편파적일지 모릅니다. 소설 주인공은 백인 소년입니다. 이런 중세 유럽 판타지 소설에서 흑인 할머니는 별로 주인공을 맡지 못하겠죠. 왜? 21세기 현대 문명이 서구적인 근대화를 숭배하고 가부장제를 숭배하기 때문입니다.



중세 판타지 소설이나 영화나 게임을 만들 때, 창작가들은 하나의 독립된 세계를 만드느라 애쓸 겁니다. 판타지 창작가들은 지도를 그리고, 언어를 만들고, 종족을 구성하고, 기타 등등 여러 설정들을 만듭니다. 그런 것들은 하나의 독립된 세계를 이룹니다. 창작가는 이야기(나 영상이나 게임 플레이)를 통해 그런 독립된 세계를 보여주고, 독자는 그걸 간접적으로 체험합니다. 그건 판타지를 읽거나 보거나 플레이하는 기쁨일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중세 판타지 창작가들이 지도를 그리고, 언어를 만들고, 종족을 구성하고, 난리법석을 부린다고 해도, 그런 중세 판타지는 현실에서 별로 멀어지지 않을 겁니다.


독립적인 지리와 언어와 종족이 존재함에도, 찰거머리처럼 그런 중세 판타지는 현실에 철썩 달라붙을 겁니다. 숱한 중세 유럽 판타지들은 그런 것을 보여줍니다. 숱한 중세 유럽 판타지들은 서구적인 근대화와 가부장 제도와 온갖 지배적인 관념들을 늘어놓습니다. 사실 지리나 언어나 종족은 그저 껍데기에 불과할 겁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를 구성하는 실질적인 토대 역시 (현대 인류 문명처럼) 서구적인 근대화와 가부장 제도와 온갖 지배적인 관념들일 겁니다. 이는 모든 중세 판타지가 그렇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사례들은 절대 드물지 않습니다.



따라서 중세 유럽 판타지는 독립적인 세계가 되지 못합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는 현대 인류 문명에서 수많은 관념들을 받아들입니다. 아무리 독창적인 지리와 언어와 종족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런 것들은 겉표면입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를 지탱하는 실질적인 토대는 (현대 인류 문명이 주입하는) 여러 관념들이죠. 그런 관념들을 비판하기 위해 어떤 판타지 창작물들은 일부러 그것들을 받아들였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꽤나 많은 중세 판타지 창작물들은 아무 생각 없이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아무렇지 않게 그것들을 토대로서 깔아놓습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는 어디 고립된 차원에 존재하는 독립된 세계가 아닙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재미를 더하기 위해 중세 판타지는 여러 설정들을 덧붙입니다. 그것들은 분명히 재미있고, 그것 때문에 독자들은 중세 판타지 소설들을 읽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는 중세 판타지가 현실에서 떨어질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많은 중세 판타지 소설들은 책에 지도를 집어넣습니다. 많은 판타지 독자들은 소설이 묘사하는 지리와 지도가 일치하는지 꼼꼼하게 검사합니다. 이는 중세 판타지 소설을 읽는 즐거움들 중 하나일 겁니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중요할까요? 소설이 묘사하는 지리와 가상의 지도가 일치한다면, 그건 작가가 설정을 꼼꼼하게 잘 짰다는 뜻이겠죠. 그건 재미있는 작업이고, 중세 판타지를 즐기는 취향은 그런 것이겠죠.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요? 작가가 가상의 세계를 이야기함에도, 판타지 소설에서 그저 지리나 언어나 종족이 전부일까요? 작가가 가상의 세계를 이야기할 수 있다면, 현대 인류 문명이 주입하는 지배적인 관념들을 거부해야 하지 않을까요? 작가가 현대 인류 문명과 완전히 다른 세상을 그릴 수 있지 않을까요? 판타지 창작물이 선사하는 진짜 미덕은 그런 것이 아닐까요? 저는 모든 판타지 창작가가 무조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상의 지리나 언어나 종족을 창작하고 즐기는 행위는 취향이고, 취향은 자유입니다. 아무에게도 타인의 취향에 간섭할 권리가 없어요.


하지만 우리가 가상의 지리나 언어나 종족을 창작하고 즐길 수 있다면, 왜 가상의 사회 구조를 만들지 못할까요? 우리가 가상의 지리나 언어나 종족을 창작하고 즐길 수 있다면, 왜 현대 문명에서 지배적인 관념들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우리가 정말 그런 것들에 저항하고 새로운 사회 구조와 새로운 관념을 형성할 때, 판타지 소설은 좀 더 환상적으로 바뀔지 모릅니다. 판타지 독자들은 가상의 지도를 분석하고, 드워프 왕국과 하플링 마을이 몇 km 떨어졌는지 확인하고, 소설이 그걸 제대로 묘사했는지 따지곤 합니다. 그런 행위는…. 저는 그런 취향을 존중합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요.



이 글에서 저는 판타지 소설들을 줄줄이 말했으나, 이런 논리는 SF 소설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SF 소설은 판타지 소설보다 좀 더 나을 겁니다. 적어도 SF 작가들은 인류 문명이 바뀌고 단절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인식합니다. 사실 본격적인 SF 소설은 그런 단절에서 출발했습니다. 물론 이런 단절을 의식하지 않는 스페이스 오페라들과 사이언스 판타지들 역시 숱합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기준에서 SF 소설, 특히, 하드 SF 소설은 중세 판타지 소설보다 나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중세 판타지 소설에 좀 더 초점을 맞췄습니다. (누군가는 SF 소설을 띄워주기 위해 제가 중세 판타지 소설을 열심히 깐다고 오해할지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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