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직조자와 세계적인 그물망이 소설 작가를 비유할 수 있는가 본문
소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에는 직조자라는 기이한 거미가 나옵니다. 직조자는 차원들을 넘나들 수 있는 거미입니다. 종종 직조자는 인간들을 돕거나 방해하거나 심지어 죽입니다. 아무도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차원들을 넘나들 수 있기 때문에 직조자는 인간들에게 무시무시한 위협이나 간절한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왜 직조자가 사람들을 돕거나 해치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고, 그래서 직조자와 협상하거나 직조자에게 도움을 요청하기가 힘들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그저 직조자가 아름다운 세계망을 구성하기 바란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외계 거미로서 직조자는 사방에 거미줄들을 칩니다. 사람들은 그런 거미줄들을 볼 수 없습니다. 때때로 거미줄들이 차원을 넘나들기 때문에, 거미줄들이 세계적인 그물망을 구성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걸 쉽게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차원을 넘는다면, 외계 차원에서 그 사람은 세계적인 그물망을 볼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은 세계적인 그물망을 알지 못해요. 외계 거미로서 직조자는 무엇보다 세계적인 그물망, 차원을 넘나들고 세계를 구축하는 거미집을 우선시합니다.
하지만 세계적인 그물망은 오직 거미집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직조자는 비단 거미집을 짤 뿐만 아니라 세계의 다양한 요소들이 그물망을 이룬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과 사건들과 공간들이 특정한 형태를 구성할 때, 직조자는 세계적인 그물망이 아름답게 짜였다고 감탄합니다. 만약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직조자는 직접 세계에 개입하고 적극적으로 사람들과 사건들과 공간들을 다시 배치합니다. 그것 때문에 누군가는 도움을 받을지 모르고, 누군가는 망할지 모르고, 심지어 누군가는 죽을지 모릅니다. 권력자가 협박하거나 가난한 사람이 애원한다고 해도, 직조자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직조자는 인간들의 권력이나 연민에 상관하지 않습니다.
외계 거미는 오직 아름다운 그물망을 짜기 원할 뿐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계는 직조자에게 아름다운 그물망입니다. 직조자는 계속 그물을 짜고 모든 요소를 아름답게 배치해야 합니다. 물론 직조자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아름다움과 거리가 멉니다. 죽음과 고통이 아름답나요? 아니죠, 일반적으로 우리는 죽음이나 고통이 부정적이라고 여깁니다. 뭐, 피칠갑 매니아들은 하드고어 영화들을 신나게 즐깁니다. 하지만 하드고어 영화들은 진짜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허구입니다. 하드고어 영화는 감독이 연출한 허구입니다.
하지만 그 허구를 연출하기 위해 감독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할 겁니다. 감독은 배우들과 살인 사건들과 무대 세트를 효과적으로 배치하느라 애쓰겠죠. 감독은 이렇게 물어볼 겁니다. "여기에서 이 배우가 등장할 수 있을까? 그게 극적일까? 여기에서 이 배우가 빠져야 하나? 이 배우가 계속 나온다면, 그게 군더더기가 될까? 어디가 절정이고, 어디가 위기일까? 내가 최초 살인 사건을 일찍 집어넣어야 하나? 셋째 살인 사건이 늦게 나와야 하나? 살인 사건들이 많아야 하나? 관객들이 그게 질리다고 느끼지 않을까? 언제 살인범이 정체를 밝혀야 하지? 살인범이 무슨 흉기를 휘둘러야 하지? 식칼? 도끼? 총기가 너무 진부하지 않을까?"
하드고어 영화 감독은 계속 이런 것들을 고민할 테고, 그렇게 영화를 연출하겠죠. 비단 하드고어 영화 감독들만 아니라 다른 창작가들 역시 비슷하게 고민할 겁니다. 서로 다른 매체들을 연출한다고 해도, 소설 작가들, 만화가들, 애니메이터들, 비디오 게임 제작자들은 비슷한 고민을 품을 겁니다. 멋진 창작물을 만들기 위해 그들은 어떻게 등장인물들과 사건들과 배경들을 배치해야 하는지 고민하겠죠. 흠, 하지만 이게 직조자의 고민과 비슷하지 않나요.
직조자와 창작가들은 서로 비슷하게 고민합니다. 소설을 쓰는 동안, 소설가들은 어떻게 등장인물들과 사건들과 배경들을 배치할지 계속 자문할 겁니다. 그건 소설 속의 세계를 구성하는 행위입니다. 직조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직조자는 어떻게 사람들과 사건들과 공간들을 배치할지 계속 고민합니다. 소설 속에서 사람들은 마구 죽어나갈지 모릅니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이 죽어나간다고 해도, 소설 작가는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소설 작가는 그저 멋진 소설을 쓰기 원할 겁니다. 멋진 소설을 쓸 수 있다면, 수 천만 명이 죽어나간다고 해도, 행성 하나가 뽀개진다고 해도, 작가는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작가는 적극적으로 그런 장면을 묘사하겠죠. 이런 창작 과정은 직조자가 세계망을 구성하는 과정과 비슷합니다. 직조자는 오직 아름다운 그물망에 관심을 기울일 뿐입니다. 아름답게 그물망을 짤 수 있다면, 사람들이 죽어나간다고 해도, 직조자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거미집을 찢거나 망친다면, 직조자는 그런 존재를 적극적으로 공격하고 거미집을 복원할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직조자는 소설 작가입니다. 직조자와 소설 작가는 서로 비슷합니다. 양쪽 모두 세계를 구성하기 원하고, 그래서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제대로 배치하기 원합니다.
차이나 미에빌이 이런 점을 의식했을까요? 직조자가 소설 작가를 비유하거나 상징할 수 있을까요? 만약 직조자가 소설 작가를 상징한다면, 직조자는 차이나 미에빌을 상징할 수 있을 겁니다. 미에빌 역시 소설 작가죠. 미에빌은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을 썼고, 뉴크로부존 도시와 바스-라그 세계를 구성했습니다. 직조자는 소설 속의 차이나 미에빌일지 모릅니다. 물론 차이나 미에빌은 이런 점을 의식하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직조자는 완전히 다른 것을 상징할지 모르거나 수많은 재해석들을 낳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분명히 직조자는 소설 작가와 비슷합니다. 차이나 미에빌이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소설 작가들은 직조자에게 자신을 투영할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