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가타카>, <트루먼 쇼>, <시몬> - 진짜와 가짜 사이 본문
앤드류 니콜은 <가타카>, <트루먼 쇼>, <시몬> 같은 영화들을 감독했고 제작했고 (시나리오들을) 썼습니다. <로드 오브 워> 같은 영화 역시 앤드류 니콜의 제작 경력을 반영하나, <가타카>와 <트루먼 쇼>와 <시몬>은 좀 더 특별합니다. 앤드류 니콜의 제작 경력에서 세 영화들은 상단을 차지하고, 동시에 비슷한 주제를 논의하고, 동시에 SF 장르에 속합니다. 비록 앤드류 니콜은 <트루먼 쇼>를 감독하지 않았으나, 니콜은 시나리오와 제작을 맡았고, 따라서 <트루먼 쇼> 역시 <가타카>와 <시몬>과 어깨를 나란히 견줄 수 있겠죠.
<가타카>는 바이오펑크이고, 우성과 열성을 이야기합니다. 미래 사회에서 우성과 열성은 계급 구조를 이룹니다. 영화 주인공은 열성 태생이나, 우성 사회에 들어가기 원하고 우주로 나가기 원합니다. 영화 주인공은 열성 신분을 감추고 우성 신분으로 가장합니다. 하지만 열성 신분이 우성 사회에 쉽게 적응할 수 있겠어요? 열성 신분이 우성 사회로 쉽게 몰래 들어갈 수 있을까요? 영화 주인공은 자신을 우성이라고 포장해야 하고, 사방에 열심히 거짓말들을 퍼뜨려야 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다면, 거짓말들은 더욱 늘어나겠죠.
열성 신분을 감추기 위해 영화 주인공은 자신이 우성이라고 계속 위장합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거짓말들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짓말들은 꾸준히 늘어나죠.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거품을 키우는 것처럼. 언제나 거품은 터지고, 그건 경제 공황을 일으킵니다. 거짓말들 역시 비슷합니다. 거짓말들은 쌓이고 쌓이고 쌓이고, 결국 그것들은 거창하게 붕괴합니다. 영화 주인공은 열성과 우성, 진실과 거짓, 하류 사회와 상류 사회, 위장과 정체성, 진짜와 가짜를 계속 반복합니다. 그렇게 <가타카>는 계급 구조가 부조리하다고 고발하고, 동시에 진실과 거짓이 복잡하게 교차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트루먼 쇼> 역시 그렇게 가짜와 진짜를 뒤바꾸죠. <세상 밑 터널>에서 프레드릭 폴이 이야기한 것처럼, 이 세상은 가짜일지 모릅니다. 어쩌면 진짜 배후는 또 다른 것이고, 가시적인 세상은 가짜일지 모르죠. 우리는 우리가 두 눈으로 이 세상을 본다고 생각하나, 그건 그저 표면적인 응시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트루먼 쇼>에서 영화 주인공은 평범한 미국 중산층 남자입니다. 이런 남자에게는 아무 고민이 없고, 고민이 있다고 해도, 그건 아주 일상적인 고민이겠죠. 매일 영화 주인공은 비슷한 일상을 삽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영화 주인공은 뭔가가 이상하다고 느낍니다.
영화 주인공은 세상이 약간 가식적이라고 느끼기 시작합니다. 어쩌면 세상은 겉보기와 다른지 모릅니다. 의심은 계속 커지고, <가타카>에서 진짜와 가짜가 뒤섞이는 것처럼, <트루먼 쇼>에서 진짜와 가짜는 계속 뒤섞입니다. 하지만 <가타카>에서 영화 주인공은 스스로 가짜가 되고 진짜를 감췄습니다. 그걸 가리기 위해 영화 주인공은 계속 가짜들을 만들었죠. <트루먼 쇼>는 다릅니다. 영화 주인공은 진짜를 찾기 원하나, 이 세상은 가짜입니다. 가짜가 너무 거대하기 때문에 영화 주인공은 쉽게 진짜를 찾지 못하고, 진실을 위한 행보는 좀처럼 앞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영화 주인공이 진짜를 추구하기 때문에 <트루먼 쇼>는 <가타카>나 <시몬>과 다소 다를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진짜와 가짜가 교묘하게 엇갈리는 주제는 비슷할 겁니다. 제목과 포스터에서 <시몬>은 아예 가상 현실과 진짜 현실이 섞인다고 이야기합니다. 영화 감독으로서 주인공은 멋진 영화를 찍고 싶으나, 좋은 배우를 구하지 못합니다. 배우들은 스캔들을 일으키고, 변덕스럽고, 감독에게 대들고, 아주 난리법석을 부립니다. 영화 주인공은 이상적이고 차분하고 감독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배우를 원해요. 그러는 동안 영화 주인공은 가짜 배우, 디지털 합성 배우를 이용합니다. 그리고 디지털 합성 배우는 아주 엄청난 인기를 끕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영화 주인공은 그 배우가 가짜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영화 주인공은 그 배우가 진짜라고 말했고, 사람들은 그걸 믿습니다. 사람들은 배우를 만나고 싶어하나, 배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해야 하기 때문에 영화 주인공은 계속 가짜들, 거짓들을 만들어야 합니다. <가타카>처럼 거짓들은 거품을 만들고 거품은 크게 터질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그런 거짓들에 계속 열광하죠. 흔히 우리는 인간이 진실을 추구한다 운운합니다. 네, 인간은 진실을 추구하죠. 하지만 정말 진실을 추구하고 싶다면, 우리는 표면을 넘어 근본을 들여다봐야 할 겁니다.
디지털 합성 배우 시몬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시몬이 존재한다고 믿고, 모든 현상을 엉뚱하게 해석합니다. 존재하지 않는 시몬을 믿기 위해 사람들은 허구를 지어내기 시작해요. 그렇게 진실에 닿기는 어렵죠. 우리는 진실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건 절대 쉽지 않습니다. 진실을 추구하고 싶다면, 우리는 가시적인 표면 넘어 근본적인 문제를 성찰해야 합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은 오직 가시적인 표면만을 바라보고, 그게 세상의 전부라고 받아들이죠. 그렇게 진짜와 가짜는 엇갈립니다.
이렇게 세 영화들 <가타카>와 <트루먼 쇼>와 <시몬>은 비슷한 주제를 전개합니다. 게다가 세 영화들은 SF 장르입니다. 왜 앤드류 니콜이 사이언스 픽션을 선택했을까요. 특별한 의도가 있을까요. 진짜와 가짜가 헛갈리는 상황에서 사이언스 픽션이 무엇을 담당할 수 있을까요. SF 설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이런 이야기들을 쓰고 감상할 수 있습니다. <왕자와 거지>를 보세요. 여기에 SF 설정은 아예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와 거지>는 진짜와 가짜를 뒤섞을 수 있죠. <가타카>는 바이오펑크이고, 우성과 열성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하층민과 재벌을 이야기했다고 해도, 주제나 분위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겁니다. 게다가 <트루먼 쇼>가 정말 SF 영화일까요. 아니죠. 현대 인류 문명은 얼마든지 이런 거대한 세트장을 지을 수 있습니다. 현대 인류 문명이 어떤 사람에게 물을 먹이기로 작정한다면, 충분히 이런 세트장을 짓고 거짓 세상을 꾸밀 수 있을 겁니다. 여러 평론가들이나 관객들은 <트루먼 쇼>가 SF 영화라고 말하나, 이 영화는 사이언스 픽션이 아닐지 모릅니다. 하지만 왜 <가타카>나 <트루먼 쇼>나 <시몬>이 사이언스 픽션이 되거나 그런 분위기를 이용해야 했을까요.
어쩌면 근대성이 더 많은 거짓들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근대성, 산업 문명,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수많은 것들을 만들었습니다. 근대 이전에 사람들은 전기라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으나, 근대 이후 전기는 일상이 되었습니다. 근대 이전에 사람들은 잠수함을 상상하지 못했으나, 근대 이후 잠수함은 수중을 누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가짜들 역시 훨씬 교묘해질 수 있고, 가짜가 침투할 수 있는 공간들 역시 늘어나겠죠. 심지어 근대성은 존재하지 않는 생명을 만들 수 있어요. 근대성은 놀라운 것들을 만들었고, SF 작가들은 이런 것들을 파악했습니다.
그래서 메리 셸리를 비롯해 여러 작가들은 <프랑켄슈타인>, <미래의 이브>, <모로 박사의 섬>, <지킬 박사과 하이드 씨> 같은 소설들을 썼죠. 이런 소설들에서 인조인간, 반인반수, 개조 생명체는 진짜 인간과 엇갈립니다. 특히, <미래의 이브>는 인조인간을 만들고, 인공적인 사랑과 진실한 사랑을 뒤섞습니다. 남자가 아름다운 여자를 사랑한다면, 그게 정말 사랑일까요. 만약 아름다운 여자가 인조인간이라면? 남자가 그 여자를 떠날까요? 아름다운 외모가 중요하다면, 여자가 인조인간이라고 해도, 그게 상관이 없을까요? 인조인간을 설정할 수 있기 때문에 이미 고전 SF 소설들은 이런 것들을 이야기했습니다. 앤드류 니콜은 이런 주제들을 20세기에 맞게 변주한 것 같습니다. 어쩌면 영화 <시몬>은 훨씬 현대적인 <미래의 이브>인지 모르죠.
옹고집이나 피그말리온처럼 판타지 역시 다양한 거짓들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판타지는 시대 변화에 둔감합니다. 사실 판타지는 시대 변화를 거의 의식하지 않아요. 반면, 사이언스 픽션은 시대 변화에 아주 민감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에게 근대성은 디딤돌과 같습니다. 근대성을 규정하는 사상들 중 하나는 자유주의(개인주의)입니다. 근대적인 자유주의는 개인을 강조해요. 다른 사람과 다른 나 자신. 그래서 현대 도시 시민들은 '개인'을 꽤나 의식합니다. 현대 도시 시민들은 '개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대부분 사람들을 똑같이 임금 노예로 만들어요. 현대 사회는 개성을 중시하는 것 같으나, 알맹이는 취직과 실업을 걱정하는 임금 노예 제도죠. 그래서 정체성 문제(내가 정말 진짜인가? 내가 가짜인가? 내 자아와 개성이 어디에 있지?)는 자유주의와 깊게 이어질 수 있죠. 근대적인 자유주의가 널리 퍼지지 않았다면, 필립 딕 같은 작가는 정체성 문제(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불안감)을 쉽게 쓰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이는 개인의 정체성이 오직 자유주의와 이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공동체를 중시하는 부족 사회 속에서도 사람들은 개인의 정체성을 의식했습니다.
하지만 자유주의 시대는 특별히 개인과 개성을 강조합니다. 아예 신자유주의는 사회가 없고 오직 개인들만 존재한다고 부르짖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의 정체성 문제는 훨씬 두드러지겠고, 그건 쉽게 진짜와 가짜 문제로 이어질 수 있겠죠. 중세 사회 속의 개인 정체성과 현대 사회 속의 개인 정체성은 다르죠. 그래서 사이언스 픽션은 현대 도시 시민을 훨씬 불안하게 자극할 수 있어요. 설사 앤드류 니콜이 그걸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가타카>와 <트루먼 쇼>와 <시몬>은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