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지배 계급과 전쟁이 맺은 관계 본문
전쟁이 없는 세상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아마 누군가는 그게 공상이라고 주장할 겁니다. 네, 그래서 SF 작가들은 정말 전쟁이 없는 세상을 묘사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공상 과학이 아니라 상상 과학이나, 어쨌든 SF 작가들은 전쟁이 없는 설정을 구상했어요. 방법들은 다양합니다. 어떤 작가는 인류 문명을 다시 시작합니다. 대재앙이 인류 문명을 덮치고, 찬란한 첨단 문명은 멸망합니다. 사람들은 과학 기술들을 잃고 고대나 중세 수준으로 돌아가요.
하지만 진짜 고대나 중세와 달리, 이 '새로운 중세'에는 노예나 하인이 없습니다. 귀족이나 왕족 역시 없습니다. 새로운 중세 사람들은 첨단 문명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닫고 지배 계급이 없는 문명을 이룩합니다. 지배 계급이 없기 때문에 소소한 갈등들은 벌어질지 모르나, 대규모 학살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간혹 어떤 설정들은 아예 첨단 기술 자체를 거부합니다. 과다한 러다이트 운동이라고 부를 수 있겠죠. 이런 설정들은 첨단 기술이 대규모 전쟁을 부른다고 주장하나,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첨단 기술과 대규모 학살은 아무 연관이 없습니다. 어느 시대든 지배 계급이 사람들을 통치하는 이상, 전쟁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어떤 작가들은 첨단 기술을 이용해 전쟁을 피합니다. 가령, 만약 모든 사람이 무한한 자원을 이용할 수 있다면, 전쟁을 피할 수 있을 겁니다. 자신이 원하는 자원을 마음대로 가질 수 있다면, 구태여 목숨을 걸고 남과 싸울 이유가 없어요. 인공 지능이나 물질 생성기는 이런 설정에서 빠지지 못하는 요소입니다. 심지어 이런 문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번식조차 기술에 맡깁니다. 자연적으로 번식하지 않고, 복제인간들을 만듭니다.
사실 유전자 조작으로 훌륭한 세대를 만들 수 있다면, 구태여 자연적인 번식에 의존할 이유가 없습니다. 현실 속의 미생물들, 식물들, 동물들은 기술이 없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번식할 뿐입니다. 인류 역시 다르지 않아요. 하지만 SF 소설 속의 최첨단 문명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생명체를 조작할 수 있고, 따라서 성교나 부부 관계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기술적인 변화는 사회 구조를 바꾸고, 그래서 최첨단 문명인들은 가족이나 정부 같은 고리타분한 사회 조직을 없앱니다. 남자들이나 정치인들이 세상을 지배하지 않습니다. 엇비슷한 복제 인간들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차별 역시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배 계급 역시 없습니다.
새로운 중세를 이룩하든, 최첨단 기술을 이용하든, 결국 양쪽 설정은 지배 계급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설사 지도층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들은 통치하지 않습니다. 그저 공동체를 관리할 뿐이죠. 아마 샤를 푸리에가 말한 '지배하지 않는 정부'는 이런 것을 의미할지 모릅니다. 카를 마르크스는 이를 공상적(과학적이지 않고 관념적)이라고 말했으나, SF 작가들은 이런 설정들을 묘사하곤 합니다. 우리는 정부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나, SF 소설 속에서 사람들은 정부를 없애거나 지배하지 않는 정부를 선출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전쟁에 휘말리지 않죠. 많은 사람들은 전쟁을 당연한 본능이나 속성으로 여기나, 전쟁터에서 죽기 원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겁니다. 전쟁터에 죽기 원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조국이나 국민 같은 명분을 위해 그 사람은 죽기 원하겠죠. 하지만 조국이나 국민은 무엇을 뜻할까요. 조국이나 국민이라는 단일한 집단이 존재하나요? 국민은 모두 똑같은 사람들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대기업 회장과 가난뱅이 농민은 똑같은 국민일 수 있으나, 똑같은 삶을 누리지 못합니다. 오히려 대기업 회장은 이윤을 축적하기 위해 농민을 수탈하곤 합니다.
올림픽이나 월드컵이 열릴 때마다 언론들이나 광고들은 하나된 조국을 외칩니다. 마치 모든 국민이 똑같이 월드컵에 열광하는 것처럼 언론들은 신나게 포장하죠. 그리고 경기를 관람하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국가가 이길 때마다 국가의 이름을 외칩니다. 하지만 하나된 조국은 없습니다. 그건 종교 경전 속의 신처럼 증명하지 못할 관념입니다. 아니, 설사 하나된 조국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 조국 안에서 기득권들은 계속 피지배 계급들을 수탈하죠. 즉, 누군가가 조국을 위해 죽는다고 해도, 기득권들을 위해 그 사람은 죽을 뿐입니다.
조국을 위해 그 사람이 목숨을 바치고, 그래서 그 국가가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해도, 그 국가 안에서 여전히 기득권들은 피지배 계급들을 수탈할 겁니다. 예를 들어, 동학 운동이든 민중 총궐기든, 농민들은 기관총 세례를 맞거나 물대포를 맞아야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지배 계급들은 엄연히 존재하고, 그래서 피지배 사람들은 수탈을 당합니다. 저는 사람들이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문구를 다시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국가와 국민이 무엇을 뜻하는지 다시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당장 우리가 정부를 없애고 군대를 없애지 못하겠죠. 그렇게 된다면 좋겠으나, 그건 불가능할 겁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가 계급 수탈을 항상 상기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건 더욱 큰 비극을 막는 시발점일 겁니다. (그리고 언제나 말하듯 기본 소득이나 추첨 민주주의 같은 정책은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고, 그래서 계급 수탈을 줄일 수 있겠죠. 그건 첫걸음이 될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