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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좋은 짝궁으로서 비경 탐험과 생태학 SF 본문

SF & 판타지/비경 탐험

좋은 짝궁으로서 비경 탐험과 생태학 SF

OneTiger 2020. 1. 20. 22:26

[문명 외부, 비경에는 미지의 자연이 있습니다. 그래서 비경 탐험과 생태계 연구는 겹칠 수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우주선을 타고 외계 행성으로 떠납니다. 외계 행성에는 드넓고 깊은 바다가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잠수정을 타고 바닷속으로 들어갑니다. 바닷속에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거대 괴수가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거대 바다 괴수를 관찰하고, 연구하고, 감탄합니다. 외계 해양 생태계에서 거대 바다 괴수는 핵심 생물종입니다. 거대 바다 괴수가 뭔가를 먹고, 부스러기들을 흘리고, 해저 지형을 바꾸고, 배설물을 내놓기 때문에, 해양 생태계는 활발하게 돌아갑니다. 거대 바다 괴수는 활발한 해양 생태계를 뒷받침하고, 활발한 해양 생태계에서 거대 괴수는 풍족하게 먹고 삽니다.


SF 울타리에서 이런 이야기는 드물지 않습니다. 수많은 스페이스 오페라들, 우주 탐사물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비경 탐험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구에는 아주 신비롭고 기이하고 장대한 생태계들이 있는지 모릅니다. 아직 우리는 이런 생태계들을 알지 못하나, 언젠가 과학자들은 미지의 생태계를 찾을지 모릅니다. 미지의 생태계에는 정말 거대 괴수가 있을지 모릅니다. 만약 과학자들이 미지의 생태계와 거대 괴수를 찾는다면, 우리는 자연 환경이 신비롭다고 감탄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경이를 위해 많은 사이언스 픽션들은 미지의 생태계와 거대 괴수를 이야기합니다.



고전적인 사이언티픽 로망스들부터 최신 블록버스터 비디오 게임들까지, 미지의 생태계와 거대 괴수는 커다란 인기를 끕니다. SF 평론가들은 이런 사이언스 픽션들이 생태학 SF 장르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미지의 생태계, 가상의 생태학, 생태적인 상상력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SF 평론가들은 생태학 SF 장르를 규정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들은 비경 탐험 이야기가 됩니다. 과학자들이 외계 바닷속을 향해 떠나는 것처럼, 사람들이 비경을 향해 떠나기 때문에,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들은 비경 탐험이 됩니다. 외계 바다 이야기는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이고, 동시에 이건 비경 탐험입니다.


외계 바다 이야기가 보여주는 것처럼,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과 비경 탐험은 겹칠 수 있습니다. 소설 <잃어버린 세계>는 비경 탐험입니다. 공룡 탐사대는 남아메리카 열대 밀림의 비경을 향해 떠납니다. 동시에 이건 생태학 SF 소설입니다. 주연 등장인물은 고생물학자이고, 고생물학자는 공룡을 관찰하고, 연구하고, 감탄합니다. 영화 <쥬라기 공원 III>는 비경 탐험입니다. 앨런 그랜트 일행은 열대 지역 무인도를 향해 떠납니다. 동시에 이건 생태학 SF 영화입니다. 앨런 그랜트는 고생물학자입니다. 앨런 그랜트는 공룡을 관찰하고, 연구하고, 감탄합니다. 비디오 게임 <서브노티카>는 비경 탐험이고, 이건 생태학 SF 게임입니다.



무인 외계 행성에서 게임 주인공은 불시착합니다. 무인 외계 행성은 비경입니다. 게임 주인공은 비경을 탐험해야 합니다. 게임 주인공이 비경을 탐험하는 동안, 게임 주인공은 해양 생물 다양성을 관찰하고, 연구하고, 이용합니다. 그래서 <서브노티카>는 생태학 SF 게임입니다. 소설 <잃어버린 세계>와 영화 <쥬라기 공원 III>와 게임 <서브노티카>가 보여주는 것처럼, 비경 탐험과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은 짝궁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SF 독자가 어떤 비경 탐험 소설을 읽는다면, SF 독자는 비경 탐험 소설이 생태학 SF 소설이라고 간주할 수 있습니다. 반대 상황 역시 성립할 수 있습니다.


만약 SF 독자가 어떤 생태학 SF 소설을 읽는다면, SF 독자는 생태학 SF 소설이 비경 탐험 소설이라고 간주할 수 있습니다. 소설 <소멸의 땅>은 비경 탐험 소설입니다. 주연 탐사대가 X 구역을 향해 떠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X 구역에는 미지의 활발하고 기이한 생태계가 있습니다. 소설 주인공은 생물학자이고, 생물학자는 생태계 연구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생물학자가 X 구역에 들어가기 전부터, 이미 생물학자는 생태계 연구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생태계 묘사가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소멸의 땅>은 생태학 SF 소설입니다. 비경 탐험과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은 좋은 동반자입니다.



소설 <듄>은 비경 탐험,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보다 스페이스 오페라입니다. 많은 스페이스 오페라들이 그러는 것처럼, <듄>은 거대하고 치열한 전투에 치중합니다. 만약 아트레이드 가문, 하코넨 가문, 은하 제국 황실이 서로 싸우지 않았다면, 많은 독자들은 <듄>을 외면했을지 모릅니다. 비디오 게임 <듄 2000>이 실시간 전략 게임이 되는 것처럼, 소설 <듄>에서도 전투는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아무리 <듄 2000>과 원작 소설 <듄>이 다르다고 해도, 결국 양쪽 모두 전략을 중시합니다. 폴 무앗딥은 프레멘 군대를 이끌고, 은하 제국 황제와 하코넨 가문을 물리치고, 권력을 차지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전투입니다.


하지만 다른 많은 스페이스 오페라들과 달리, <듄>에서 비경 탐험은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폴 아트레이드에게 아라키스 행성은 비경입니다. 드넓은 모래 사막과 사막 생태계는 비경입니다. <스타 워즈> 같은 스페이스 오페라는 비경에 관심을 별로 기울이지 않습니다. <스타 워즈>는 자연 생태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데스 스타는 자연 생태계가 아닙니다. 반면, <듄>은 비경 묘사에 많은 비중을 할애합니다. 주연 등장인물들은 아라키스 행성이 비경이라고 느낍니다. <듄>과 <스타 워즈>가 똑같이 스페이스 오페라라고 해도, <듄>과 <스타 워즈>는 크게 다릅니다. 어떤 관점에서 <듄>과 <소멸의 땅>은 비슷합니다.



<스타 워즈>는 비경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나, <듄>과 <소멸의 땅>은 똑같이 비경을 중시합니다. 두 소설은 사람들이 낯선 환경을 향해 떠난다고 이야기합니다. 낯선 환경에는 낯선 생물 다양성이 있습니다. <소멸의 땅>에서 생물학자가 X 구역 생태계를 연구하는 것처럼, <듄>에서 폴 무앗딥은 아라키스 사막 생태계를 연구합니다. 심지어 폴 무앗딥은 사막 행성을 싱그러운 삼림 행성을 바꿀 수 있습니다. <스타 워즈>에서 생태계 변화는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생태계 변화를 구경하기 위해 관객들은 <스타 워즈>를 관람하지 않습니다. 반면, <듄>에서 생태계 변화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소멸의 땅>에서도 생태계 변화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소멸의 땅>은 스페이스 오페라가 아니나, 비경 탐험과 생태계 변화 측면에서 <스타 워즈>보다 <소멸의 땅>과 <듄>은 훨씬 가깝습니다. <듄>에 비경 탐험과 생태계 변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실시간 전략 게임 <듄 2000> 역시 모래벌레들을 빠뜨리지 않습니다. <듄 2000>에서 모래벌레는 지지직~ 정전기를 일으키고, 불쑥 튀어나오고, 기갑 유닛을 집어삼킵니다. <스타 워즈> 같은 스페이스 오페라는 미지의 생태계, 거대 괴수를 묘사하지 않습니다. <스타 워즈>에 거대 괴수가 있다고 해도, 거대 괴수는 그저 간단한 조연, 병풍에 불과합니다.



소설 <듄>은 비경 탐험과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이 좋은 동반자라고 증명합니다. 인류 문명 외부에서 자연 생태계는 존재합니다. 인류 문명 안에는 자연 생태계가 없거나 부족합니다. 만약 사람들이 진정한 자연 생태계를 찾기 원한다면, 사람들은 문명 밖을 향해 떠나야 합니다. 도시에서 호랑이는 살아가지 못합니다. 울창한 열대 밀림 속에서 호랑이는 살아가야 합니다. 만약 도시에서 호랑이가 살아간다면, 호랑이와 사람들은 충돌할 겁니다. 호랑이는 문명 밖을 향해 나가야 합니다. 인류 문명 외부에서 호랑이는 살아가야 합니다. 인류 문명 외부에는 자연 생태계, 열대 밀림이 있고, 여기에서 호랑이는 살아야 합니다.


만약 사람들이 호랑이를 관찰하기 원한다면, 문명에서 사람들은 벗어나야 할 겁니다. 사람들은 문명에서 벗어나고 자연, 비경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때 사람들은 호랑이를 관찰할 수 있습니다. 자연과 문명은 다릅니다. 문명 외부에서 자연은 존재합니다. 자연은 비경입니다. 자연을 관찰하기 위해 사람들은 비경을 향해 떠나야 합니다. 그래서 비경 탐험과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은 겹칠 수 있습니다. 타이야키와 앙꼬처럼, 비경 탐험과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은 좋은 동반자입니다. 이건 언제나 모든 비경 탐험과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이 겹친다는 뜻이 아닙니다. 비경 탐험과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은 반드시 겹치지 않습니다.



소설 <에코토피아 비긴스>는 생태학 SF 장르입니다. 이 소설에서 환경 보호는 핵심적인 주제입니다. 그래서 이 소설이 비경 탐험을 이야기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소설 <오벨리스크의 문>은 생태학 SF 장르입니다. 이 소설에서도 생태계 변화는 핵심적인 주제입니다. 그래서 소설 속에 비경과 탐험가가 있나요? 그건 아닙니다. 소설 <광기의 산맥>은 비경 탐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광기의 산맥>은 자연 생태계를 연구하지 않습니다. 외계인 역사와 생태계 연구는 다릅니다. 소설 <노변의 피크닉>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소멸의 땅>과 <노변의 피크닉>은 비슷하나, <노변의 피크닉>은 생태적인 감성을 풍기지 않습니다.


<소멸의 땅>과 달리, <노변의 피크닉>에서 주연 등장인물은 생물학자, 생태학자가 아닙니다. 주연 등장인물은 어떻게 자연 생태계가 순환하는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노변의 피크닉>에서 주연 등장인물 스토커는 생물 다양성을 주목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소멸의 땅>과 <노변의 피크닉>이 비슷하다고 해도, 아무리 두 소설이 똑같이 비경 탐험이라고 해도, <소멸의 땅>은 생태계 변화를 중시하나, <노변의 피크닉>은 불가해한 감성을 훨씬 중시합니다. 이런 사례들이 증명하는 것처럼, 비경 탐험과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은 반드시 겹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많은 비경 탐험 이야기들은 생태계 묘사를 중시합니다.



'비경 탐험 = 생태학 SF' 공식은 진리가 아니나, 많은 비경 탐험 이야기들은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이 될 수 있습니다. 인류 문명 외부에서 자연 생태계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호랑이를 관찰하기 위해 생태학자가 도시에서 벗어나고 자연, 열대 밀림, 비경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연과 문명이 다르기 때문에, 비경 탐험과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은 동반자가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얄팍한 이분법입니다. 자연과 문명은 다릅니다. 자연과 문명이 다르기 때문에, 비경 탐험과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은 동반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연과 문명이 별개인가요? 정말 자연과 문명이 완전히 다른 것인가요?


만약 우리가 자연과 문명이 완전히 다르다고 구분한다면, 이건 얄팍한 이분법이 될지 모릅니다. 자연과 문명이 다르기 때문에, 문명이 확장하는 동안, 문명은 자연을 얼마든지 개척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개척은 정복, 침략이 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자연과 문명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얄팍한 이분법은 개척과 정복을 구분하지 않을 겁니다. 개척이 정복, 침략이 된다고 해도, 얄팍한 이분법은 이게 당연하다고 간주할 겁니다. 이미 17세기부터 서구 침략자들은 자연과 문명을 얄팍하게 구분했고 원주민들을 학살했습니다. 서구 침략자들이 '빈 땅'을 주장했기 때문에, 서구 문명은 막대한 부를 끌어모았습니다.



[SF 팬들이 외계 자연 풍경을 바라볼 때, SF 팬들이 '빈 땅' 논리, 제국주의를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요?]



열대 지역 원주민들은 자연입니다. 서구 지역은 문명입니다. 자연과 문명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문명(서구)은 자연(열대 원주민)을 정복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서구 문명은 막대한 부를 끌어모았고 자본주의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세계화 자본주의는 자연 환경을 파괴하고 식민지를 수탈합니다. 심지어 자본주의는 행성급 환경 범죄, 기후 변화를 저지릅니다. 만약 우리가 기후 변화를 정말 해결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자본주의를 반드시 타파해야 할 겁니다. 세계화 자본주의 속에서 인류 문명은 기후 변화를 절대 해결하지 못합니다. 이건 불가능합니다. 녹색 자본주의는 글러처먹은 망상입니다.


이윤 극대화를 위해 자본주의는 문명이 자연을 정복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자연과 문명이 완전히 다른가요? 소설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에서 지구 침략자들에게 애스시 행성은 비경입니다. 그래서 소설 <세상 숲>이 비경 탐험 이야기인가요? 지구 침략자들에게 애스시 행성이 비경이기 때문에, <소멸의 땅>처럼, <세상 숲>은 비경 탐험입니다. <듄>에서 아라키스 행성이 비경이 되는 것처럼, <세상 숲>에서 애스시 행성은 비경이 됩니다. 그래서 프레멘 원주민들이 비경, 자연이 되나요? 애스시 원주민들이 비경, 자연이 되나요? 거대 가문들, 지구 침략자들이 비경을 개척하고 정복해야 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비록 자연과 문명이 다르다고 해도, 우리가 '자연'을 구분할 때, 우리는 무엇이 자연이 되는지 경계해야 할 겁니다. 세계화 자본주의가 자연 환경을 파괴하고 이윤을 얻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을 너무 얄팍하게 규정할지 모릅니다. 이건 자연과 문명이 완전히 똑같다는 뜻이 아닙니다. 분명히 자연과 문명 사이에는 경계선이 있습니다. 극심한 전염병 역시 자연 환경에 속합니다. 만약 우리가 자연 환경을 보호하기 원한다고 해도, 극심한 전염병은 해당 사항이 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자연과 문명 사이에서 우리가 경계선을 그을 때, 우리는 얄팍한 이분법을 경계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얄팍한 이분법이 옳다고 믿습니다. 심지어 환경 운동가들조차 얄팍한 이분법을 추구합니다. 환경 운동가들이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비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구 자본주의가 열대 밀림을 파괴하고 식민지를 수탈하기 때문에, 서구 자본주의는 엄청나게 부유합니다. 하지만 환경 운동가들은 그 자체로서 자본주의가 부유하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자본주의 '배후', 열대 밀림 파괴와 식민지 수탈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지배적인 관념이 지배 계급의 관념이기 때문입니다. 지배 계급의 관념은 자본주의가 유일무이하고 절대적으로 옳다고 거짓말합니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지배적인 관념은 환경 운동가들을 세뇌합니다. 지배적인 관념이 지배 계급을 편들기 때문에, 여기에서 환경 운동가들이 벗어나기 원한다고 해도, 이건 절대 쉽지 않습니다. 지배적인 관념에서 개인은 절대 쉽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환경 운동가들이 자본주의에 충성하고 자연 보호를 배신한다고 해도, 이건 환경 운동가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하지만 환경 운동가들이 잘못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런 상황은 환경 운동을 억압하고 가로막습니다. 환경 운동가들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아주 관대하게 용서하고 무산자 민중 계급, 인류가 자연 환경을 파괴한다고 떠듭니다.


환경 운동가들은 지배 계급을 용서하고 피지배 계급에게 죄를 덮어씌웁니다. 환경 운동가들이 피지배 계급임에도, 그들은 지배 계급보다 다른 피지배 계급들을 헐뜯습니다. (자칭 페미니즘부터 얄팍한 진보들까지, 애석하게도 피지배 계급이 지배 계급을 미화하고 다른 피지배 계급들을 헐뜯는 사례들은 드물지 않습니다.) 이런 멍청하고 한심한 짓거리가 환경 운동들을 장악하기 때문에, 기후 변화 해결은 요원합니다. 그래서 생태 사회주의는 훨씬 크게, 훨씬 격렬하게 외쳐야 할 겁니다. 그래서 생태학 SF 장르에게도 생태 사회주의는 필수적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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