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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점박이: 새로운 낙원>이 고생물학 덕질 대상이 될 수 있는가 본문

SF & 판타지/장르 정의

<점박이: 새로운 낙원>이 고생물학 덕질 대상이 될 수 있는가

OneTiger 2019. 3. 18. 17:54

[이건 자연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백악기 우화입니다. 이게 고생물학 덕질 대상이 될 수 있나요?]



애니메이션 <점박이: 새로운 낙원>은 백악기 공룡 시대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건 공룡들을 이용하는 우화이고 자연 다큐멘터리가 아닙니다. 컴퓨터 그래픽이 정교하기 때문에, 어떤 관객들은 <점박이: 새로운 낙원>이 자연 다큐멘터리에 가깝다고 오해할지 모릅니다. 정교한 형식 때문에 사람들은 내용 역시 정교하다고 오애할지 모릅니다. 형식은 내용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형식과 내용은 서로 떨어지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점박이: 새로운 낙원>은 자연 다큐멘터리가 아닙니다.


3D 컴퓨터 그래픽이 정교하다고 해도, 2D 셀 애니메이션 <리틀 풋의 대모험>처럼, <점박이: 새로운 낙원>은 우화입니다. 심지어 이 애니메이션은 여러 고생물학 지식들을 제대로 고증하지 못합니다. <점박이: 새로운 낙원>보다 비디오 게임 <사우리안>은 훨씬 고생물학 고증에 가까울 겁니다. 관객들이 <점박이: 새로운 낙원>을 관람한다고 해도, 관객들은 그저 어설픈 고증이 있는 우화를 볼 뿐입니다. 이건 <점박이: 새로운 낙원>이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화는 우화이고, 우화가 정교한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한다고 해도, 우화가 고생물학 고증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없습니다.



어떤 공룡 팬들은 <점박이: 새로운 낙원>에게 불만을 품을 겁니다. 고생물학자들이 영화 <쥬라기 월드>를 비판하는 것처럼, 어떤 공룡 팬들은 <점박이: 새로운 낙원>이 엉터리 고생물학을 보여준다고 비판할 겁니다. 하지만 소설 <정글북>에서 표범과 늑대들과 곰이 말하는 것처럼, <점박이: 새로운 낙원>은 우화입니다. 소설 <정글북>에서 표범이 말할 때, 사람들은 생물학 고증을 따지지 않습니다. <점박이: 새로운 낙원>이 엉터리 데이노니쿠스를 보여준다고 해도, 그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데이노니쿠스는 말하지 못합니다. 데이노니쿠스는 한국어를 이용하지 못합니다. 데이노니쿠스가 한국어로 말한다면, 이건 고증 오류일 겁니다.


하지만 우화에서 동물들이 말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비판하지 않습니다. 그게 우화 공식이기 때문에. 이것처럼, <점박이: 새로운 낙원>이 엉터리 데이노니쿠스를 고증한다고 해도, 공룡 팬들은 비판하지 못합니다. 이게 가족 우화에 불과하고, 가족 우화에게 고생물학 고증을 철저하게 따라야 하는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고 해도 공룡 팬들은 비판을 멈추지 않을 겁니다. 진짜 문제는 우화가 일반적인 형식이고 고생물학이 그렇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우화는 오랜 역사를 자랑합니다. 사람들은 우화가 그저 상징과 비유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화에서 표범이 말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표범이 정말 말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고생물학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19세기 이후, 고생물학은 여러 경로들을 갈팡질팡 거쳤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수많은 사람들은 수많은 우화들을 일상적으로 접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고생물학을 일상적으로 접하지 않습니다. 고생물학은 일상적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고생물학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안킬로사우루스와 사이카니아를 쉽게 구분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심지어 자연 사진 작가들조차)이 꿀벌과 꽃등에를 헛갈리는 것처럼, 사람들은 안킬로사우루스와 사이카니아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점박이: 새로운 낙원>이 엉터리 데이노니쿠스를 보여준다면, 사람들은 그게 고생물학이라고 믿을 겁니다. 고생물학이 일상적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고생물학을 일상적으로 접하지 않기 때문에, 우화와 고생물학은 서로 다릅니다. <점박이: 새로운 낙원>에는 우화와 고생물학이 함께 있고, 관객들은 우화적인 측면을 여과할 수 있으나, 관객들은 엉터리 고생물학을 여과하지 못합니다. 어떤 관객들은 정말 백악기 시대에 거대 전갈이 살았다고 믿을 겁니다. 그래서 공룡 팬들은 분노할 겁니다. 사람들이 고생물학을 왜곡할 때, 공룡 팬들은 참지 못할 겁니다.



공룡 팬들은 고생물학 덕후들입니다. 오덕후라는 용어가 널리 퍼지기 전부터 이미 수많은 사람들은 공룡 팬들이었고 고생물학 덕후들이었습니다. 레이 브래드버리는 공룡 덕후라는 용어를 알지 못했으나, 아무도 레이 브래드버리가 공룡 덕후가 아니라고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고생물학 덕후들은 공룡을 사랑합니다. 인간은 사랑하는 대상이 왜곡되는 상황을 쉽게 참지 못합니다. 인간은 사랑하는 대상을 온전하게 지키기 원합니다. 공룡은 왜곡되어서는 안 됩니다. 고생물학은 왜곡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점박이: 새로운 낙원>을 관람한 이후, 관객들이 데이노니쿠스를 오해할 때, 공룡 팬들은 분노하고 고생물학을 바로잡기 원할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점박이: 새로운 낙원>은 우화입니다. 이건 바뀌지 않는 사실입니다. 어떤 관객들은 변명할 겁니다. "그래, 나는 타르보사우루스를 오해했어. 하지만 나는 그저 우화를 봤을 뿐이야. 이게 문제인가?" 네, 이건 문제입니다. 문제는 <점박이: 새로운 낙원>에 우화와 고생물학이 함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어디까지 우화이고 어디까지 고생물학인지 구분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점박이: 새로운 낙원>에서 우화적인 측면과 엉터리 고생물학은 딱딱 나뉘지 않습니다. <점박이: 새로운 낙원>이 그저 우화에 불과하다고 해도, 관객들은 고생물학을 오해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공룡 팬들은 불만을 품을 겁니다.



고생물학자들이 <쥬라기 월드>를 비판할 때, 왜 그들이 <쥬라기 월드>를 비판하나요? 이건 그저 바이오펑크 영화에 불과합니다. 이건 생태학 SF 영화입니다. <쥬라기 월드>는 진짜 고생물학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창작물입니다. 브라이스 댈러스 하워드는 고생물학 학술 회의에 참석하지 않을 테고, 고생물학 논문을 쓰지 않을 테고, 대중 과학 서적을 쓰지 않을 겁니다. 브라이스 댈러스 하워드가 고생물학 회의에 참가하지 않음에도, <쥬라기 월드>가 그저 생태학 SF 영화에 불과함에도, 왜 고생물학자들이 <쥬라기 월드>를 비판하나요?


창작물이 그저 창작물에 불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창작물은 현실을 반영합니다. 창작물은 현실을 반영하고, 사람들은 다시 창작물을 현실에 적용합니다. <쥬라기 월드>가 엉터리 벨로시랩터들을 보여줄 때, 관객들은 그것들이 진짜 벨로시랩터라고 오해할 겁니다. <쥬라기 월드>가 창작물이라고 해도, 관객들은 창작물을 학술적인 영역으로 끌어들일 수 있습니다. 현실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수많은 것들은 딱딱 나뉘지 않습니다. 창작물과 일상과 학술적인 영역은 서로 영향을 미치고 섞입니다. 창작물은 복잡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현실 속에서 우리는 그런 복잡한 반영들을 다시 적용합니다.



[브라이스 하워드는 환경 운동가가 아니나, 생태학 SF와 환경 보호 사이에서 경계선은 흐릿합니다.]



어떤 인터뷰에서 킴 스탠리 로빈슨은 자신이 자연 과학자가 아니라 그저 SF 소설가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네, 킴 스탠리 로빈슨은 자연 과학자가 아닙니다. 이 양반은 소설 작가입니다. 하지만 왜 신문 기자들이 킴 로빈슨을 취재하나요? 왜 기후 변화를 비판하기 위해 신문 기자들이 킴 로빈슨을 취재하나요? 일상 속에서 기후 변화가 그저 자연 과학적인 학술 영역에 불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후 변화는 경제, 사회, 문화, 일상에 커다란 영향들을 미칠 겁니다. 자연 과학자들은 이걸 파악하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자연 과학자들은 일상을 창작물 속에 집어넣지 못합니다.


자연 과학자들에게는 그런 재주가 없습니다. 그건 소설 작가들의 몫입니다. 기후 변화는 그저 자연 과학적인 영역이 아니고, 기후 변화가 일상에 영향을 미칠 때, SF 소설가는 그걸 포착하고 묘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후 변화를 비판하기 위해 신문 기자들은 (자연 과학자가 아닌) 소설 작가 킴 스탠리 로빈슨을 취재합니다. 이렇게 현실 속에서 창작물, 자연 과학, 사회 비평, 일상 묘사는 딱딱 나뉘지 않습니다. 현실은 바둑판이 아닙니다. 현실은 훨씬 총체적입니다. 경계선은 흐릿하고, 다양한 요소들은 서로 영향들을 미칩니다.



공룡 팬들은 고생물학 덕후들입니다. 애니메이션 <점박이: 새로운 낙원>은 자연 다큐멘터리가 아닙니다. 고생물학 덕후가 <점박이: 새로운 낙원>을 관람한다면, 이게 고생물학 덕질이 될까요? 물론 이건 얼마든지 고생물학 덕질이 될 수 있습니다. 경계선이 흐릿하고 다양한 요소들이 서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고생물학 덕후는 백악기 우화를 비평할 수 있습니다. 고생물학자는 바이오펑크 영화를 비평할 수 있고, 기후 변화를 논의하기 위해 신문 기자들은 소설 작가를 취재할 수 있습니다. 덕질은 특정한 영역에 국한하지 않습니다.


덕질이 특정한 영역에 국한하지 않는다면, 덕질은 다양한 분야들을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생태학 SF 덕후가 열심히 에코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를 떠든다고 해도, 이것 역시 생태학 SF 덕질이 될 수 있습니다. 이건 마르크스주의 비평이고 동시에 생태학 SF 덕질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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