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단일하지 않은 대중과 대중 문화 본문
영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는 '대중적'입니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는 엄청나게 흥행했고, 수많은 관객들은 이 영화를 관람했습니다. 대중적이라는 단어는 이런 영화에 잘 어울릴 겁니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가 대중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적을 겁니다. 흔히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대중 문화라고 부릅니다. 이와 달리,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보다 코니 윌리스가 쓴 <둠스데이 북>은 대중적이지 않습니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는 엄청나게 흥행했으나, <둠스데이 북>은 그렇지 않습니다.
스칼렛 요한슨이나 베네딕트 컴버배치나 크리스 햄스워스가 거리를 걷는다면, 사람들은 그들에게 달려가고 사인을 받거나 함께 사진을 찍을 겁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에서 다들 스칼렛 요한슨이나 베네딕트 컴버배치를 만났다고 자랑하겠죠. 반면, 코니 윌리스가 거리를 걷는다고 해도, 사람들은 코니 윌리스를 주목하지 않을 겁니다. 스칼렛 요한슨은 화려하게 포토 라인에 설 수 있으나, 코니 윌리스는 그렇지 않습니다. 심지어 미국 슈퍼 히어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조차 어벤져스나 스파이더맨이나 스칼렛 요한슨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조차 코니 윌리스나 <둠스데이 북>을 알지 못할 겁니다. 분명히 영화 <어벤져스: 인피티니 워>보다 소설 <둠스데이 북>은 대중적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둠스데이 북>은 대중 문화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영화 <어벤져스: 인피티니 워>보다 소설 <둠스데이 북>이 대중적이지 않다고 해도, <둠스데이 북> 역시 대중 문화입니다. <둠스데이 북>은 '<인피니티 워>보다 대중적이지 않은 대중 문화'입니다. <인피니티 워>가 수많은 관객들을 동원할 때, 관객들은 대중입니다. 독자들이 <둠스데이 북>을 읽을 때, 독자들 역시 대중입니다. <인티니티 워> 관객들과 <둠스데이 북> 독자들은 서로 다른 대중이나, 양쪽 모두 대중입니다. <인피니티 워>와 <둠스데이 북>은 똑같이 대중 문화입니다. 물론 양쪽에게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어떤 대중은 <인피니티 워>를 좋아하고 <둠스데이 북>을 싫어할지 모릅니다. 어떤 대중은 <둠스데이 북>을 좋아하고 <인티니티 워>를 싫어할지 모릅니다. 어떤 대중은 양쪽 모두를 좋아하거나 싫어할지 모릅니다. 어떤 대중은 오직 껍데기만 요란한 블록버스터 영화보다 알맹이가 알찬 소설을 좋아할지 모릅니다. 어떤 대중은 블록버스터 영화가 보여주는 신나는 싸움박질을 좋아하고 소설이 묘사하는 내면 심리를 지루하다고 여길지 모릅니다. 대중이 대중 문화를 즐긴다고 해도, 여기에는 다양한 차이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차이들이 있음에도, 우리가 대중을 대중이라고 대충 묶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대중이 모두 똑같은 대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대중'이라는 용어에는 오류가 있을지 모릅니다. 영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와 소설 <둠스데이 북>이 모두 대중 문화라고 해도,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와 <둠스데이 북>은 똑같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대중 문화라고 함께 묶는다면, 그건 오류일지 모릅니다. 대중은 꽤나 피상적인 용어일지 모릅니다. 어떤 문학 평론가들은 대중이라는 용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게 너무 막연하기 때문입니다. 대중 문화 속에는 온갖 것들이 있습니다. 지배적인 관념에 충성하는 영화는 대중 문화가 될 수 있습니다. 사회 구조를 뒤집자고 주장하는 전복적인 소설 역시 대중 문화가 될 수 있습니다.
양쪽은 서로 대조적이나, 양쪽은 모두 대중 문화에 들어갑니다. 분명히 이건 오류이나,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런 것들을 대중 문화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이런 상황을 극복하고 싶다고 해도, 그건 쉽지 않을 겁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대중이 뚝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완전한 형체로서 대중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인류 사회 속에서 대중은 꾸준히 바뀌고 뭉치고 흩어지고 다시 바뀝니다. 대중은 어떤 고정적이고 특정한 집단이 아닙니다. 대중이 고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대중 문화 역시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21세기 대도시에서 흑인들이 신나게 랩을 읊을 때, 예술 평론가들은 랩이 대중 문화라고 분류할 겁니다. 하지만 19세기 목화 농장에서 흑인 노예들이 음악을 연주할 때, 그게 대중 문화가 될 수 있을까요? 아니, 19세기 목화 농장의 흑인 노예들이 대중이 될 수 있나요? 21세기 대도시에서 흑인들이 랩 배틀을 벌일 때, 예술 평론가들은 흑인 래퍼들이 대중 문화를 양산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19세기 목화 농장에서 아무리 흑인 노예들이 신나게 음악을 연주한다고 해도, 그건 대중 문화가 되지 못할 겁니다. 대중이 고정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회 구조가 바뀔 때, 대중 역시 나타나고 사라지고 바뀌고 뭉치고 흩어집니다. 21세기 대도시에서 여자들은 대중이 될 수 있습니다. 19세기 시골에서 여자들이 대중이 될 수 있나요?
21세기 여자 시민은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를 관람하고 베네닉트 컴버배치가 잘 생겼다고 환호할 수 있습니다. 뭐, 적어도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잘 생김을 연기합니다. 반면, 19세기 시골 여자가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를 관람할 수 있을까요? 19세기 시골 여자가 시간 여행하고 21세기에 도착한다고 해도, 19세기 시골 여자는 <인피니티 워>가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심지어 19세기 여자는 닥터 스트레인지가 정말 존재한다고 믿을지 모릅니다.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를 개봉했을 때, 왜 관객들이 기절했을까요? <인피니티 워>를 관람하기 위해, 시골 여자는 기술적인 격차들을 이해하고 수많은 사전 지식들을 습득하고 문화적인 체험들을 겪어야 합니다.
어떤 TV 드라마에서 탤런트 김지영은 시골 여자를 연기한 적이 있습니다. 시골 여자는 1998년 <갓질라>를 관람했고 엉뚱한 소감을 내놨습니다. 시골 여자는 미국 상업 블록버스터 영화에 익숙하지 않았고 엉뚱한 소감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20세기 후반 도시 시민들에게 <갓질라>는 고지라를 빙자한 형편 없는 영화일지 모르나, 시골 여자에게 <갓질라>는 엄청나고 훌륭한 대작이 될 수 있습니다. 관객들이 영화를 관람할 때, 우리는 대중이 대중 문화를 즐긴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21세기 대중이 대중 문화를 즐기는 것과 달리, 19세기 사람들은 대중 문화를 즐기지 못했습니다.
사회와 문화는 꾸준히 바뀌고, 사회와 문화가 바뀔 때마다, 대중 역시 바뀝니다. 대중은 고정적이지 않고, 대중 문화 역시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와 <둠스데이 북>은 똑같이 대중 문화가 될 수 있습니다. 스칼렛 요한슨과 코니 윌리스는 똑같이 대중적인 배우와 대중적인 작가입니다. 비단 대중만 아니라 인류 사회에는 수많은 집단들이 있습니다. 비단 대중만 아니라 인류 사회가 바뀔 때마다 수많은 집단들은 흩어지고 뭉치고 바뀝니다. 수많은 집단들은 고정적이고 특정한 뭔가가 아닙니다. 심지어 민족조차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민족이 단일한 공동체라고 여기나, 그건 커다란 환상입니다.
우리는 편의상 민족을 분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민족은 고정적이지 않고 단일하지 않습니다. 남한 사람들은 이완용을 민족의 배신자라고 말합니다. 이완용 때문에 많은 조선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말 이완용이 민족의 배신자인가요? 일제 시대에서 숱한 조선 무정부주의자들은 일본 장교와 조선 양반이 똑같이 나쁘다고 말했습니다. 양쪽 모두 조선 피지배 계급을 착취하기 때문입니다. 조선 상놈에게 조선 양반과 일본 장교는 똑같이 썩어죽을 놈팽이입니다.
따라서 만약 이완용이 민족의 배신자라면, 박정희 역시 민족의 배신자일 겁니다. 박정희 때문에 숱한 남한 노동자들이 죽어나갔기 때문입니다. 노무현 역시 민족의 배신자일 겁니다. 노무현 때문에 숱한 남한 노동자들이 고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남한 사회에서 숱한 약자들은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고 폭력에 신음하고 목숨들을 잃습니다. 만약 우리가 박정희와 노무현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함께 민족이라고 부른다면, 그건 커다란 오류일 겁니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와 <둠스데이 북>이 똑같이 대중 문화가 아닌 것처럼, <2001 우주 대장정>과 <스타 워즈>가 똑같이 우주 사이언스 픽션이 아닌 것처럼, 박정희와 노무현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똑같이 민족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편의상' 박정희와 노무현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함께 민족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이런 민족 개념에 반대하는 사람들조차 이런 분류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좀 더 자세히 파고든다면, 민족이라는 개념은 꽤나 공허할 겁니다. 우리는 민족이라는 개념을 인정하고 동시에 민족 속에서 어떻게 수직적인 계급 구조가 갈라지는지 알 수 있겠죠.
이렇게 사람들은 서로 다릅니다. 사람들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사람들을 함께 묶기는 어려울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몇몇 필수적인 공통점을 찾을 수 있겠죠. 무엇보다 인간은 먹고 살아야 합니다. 스칼렛 요한슨과 코니 윌리스는 먹고 살아야 합니다. Reddit 사이트의 괴수 팬은 <갓질라>를 싫어하고 시골 여자는 <갓질라>에 감탄하나, 괴수 팬과 시골 여자 모두 먹고 살아야 합니다. 뤼미에르 영화에 기절하는 19세기 여자와 최신 블록버스터를 아무렇지 않게 관람하는 21세기 여자 역시 먹고 살아야 합니다. <2001 우주 대장정>을 좋아하는 하드 SF 독자와 <스타 워즈>를 좋아하는 스페이스 오페라 관객은 모두 먹고 살아야 합니다. 박정희와 (이른바) 비정규직 공순이 역시 먹고 살아야 합니다.
스칼렛 요한슨과 코니 윌리스와 Reddit 사이트의 괴수 팬과 시골 여자와 19세기 여자와 21세기 여자와 박정희와 비정규직 공순이는 똑같이 호모 사피엔스이고 똑같이 먹고 살아야 합니다. 인간이 무엇을 얼마나 많이 먹을지 그건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돌리기 위해 인간은 기본적으로 영양분을 채워야 합니다. (문화 평론가들은 문화 역시 인간 생존의 필수적인 조건이라고 주장할 겁니다. 마음의 양식 역시 양식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 인간은 식량을 생산해야 하고, 식량을 생산하기 위해 인간에게는 생산 수단이 있어야 합니다. 생산 수단은 공통점입니다. 따라서 생산 수단을 공유하는 사회는 공통점을 인정하는 사회가 될 겁니다. 이걸 부정하는 사회는 인간이 먹고 살아야 한다는 기본적인 공통점을 무시하는 사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