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범주와 흐름 본문
[두 게임은 똑같이 외계 개척 도시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두 게임의 상상 과학은 완전히 다르죠.]
비디오 게임 <플래닛 베이스>와 <에이븐 콜로니>는 비슷한 소재를 다룹니다. 양쪽 모두 외계 행성에서 인류가 새로운 도시를 짓는다고 이야기합니다. <플래닛 베이스>에서 개척자들은 여러 행성들(건조한 붉은 행성, 혹독한 겨울 행성, 폭풍우가 몰아치는 축축한 행성, 기타 등등)을 선택합니다. 여기에서 개척자들은 다양한 돔 건물들을 짓고, 통로들을 연결하고, 발전소와 광산과 충전기를 설치합니다. <플래닛 베이스>에서 개척 도시는 수많은 돔들과 통로들입니다. 주변 환경이 삭막하고 위험하기 때문에 개척 도시는 돔들과 통로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반적인 고층 건물들은 쉽게 나타나지 못하겠죠. 반면, <에이븐 콜로니>는 현란한 미래 도시를 보여줍니다. 주변 환경은 삭막하거나 황량하지 않습니다. 사방에는 온갖 외계 식생들이 가득합니다. 싱그럽고 울창한 외계 식생들과 현란한 미래 도시는 좋은 궁합입니다. 물론 여기에도 위험은 없지 않습니다. 심지어 사막 지형에서 개척자들은 거대한 모래 벌레를 만나야 합니다. 이건 <듄>의 오마쥬일 겁니다. <에이븐 콜로니>에는 비단 울창한 외계 식생만 아니라 거대한 모래 벌레가 있고 개척자들은 모래 벌레를 연구할 수 있습니다.
<플래닛 베이스>가 하드 SF 설정에 가깝다면, <에이븐 콜로니>는 스페이스 오페라에 가깝습니다. <플래닛 베이스>에는 외계 식생이나 거대 괴수가 없습니다. 솔직히 외계 행성들에 정말 울창한 식생들과 거대 괴수들이 있을까요? 글쎄요, 누군가는 <스텔라리스>처럼 거대한 우주 드래곤(!)이 날아다닌다고 믿고 싶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상상력은 너무 비약적입니다. 우주 생물학자들은 아직 거대한 우주 드래곤은 고사하고 외계 미생물조차 찾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화성 어딘가에는 작은 생명체가 있을지 모릅니다. 어쩌면 유로파 바다에는 미생물 생태계가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울창한 외계 식생과 거대 괴수는 비약적인 상상력입니다. 하드 SF 팬들은 <에이븐 콜로니>가 상상 과학을 비약했다고 지적할지 모릅니다. 이런 SF 팬들은 <에이븐 콜로니>보다 <플래닛 베이스>를 훨씬 좋아하거나 관대하게 바라볼 겁니다. <플래닛 베이스>와 <에이븐 콜로니>가 똑같이 외계 행성과 외계 개척지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양쪽에는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SF 팬들은 <에이븐 콜로니>가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라고 반박할지 모릅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스페이스 오페라가 정말 사이언스 픽션이 될 수 있는지 반문합니다. 아무리 외계 식생이 상상 과학이라고 해도, 이게 SF 설정이 될 수 있을까요?
비디오 게임 <어스텅>은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입니다. <어스텅>은 외계 행성 생태계를 보여줍니다. 이 외계 행성 생태계는 지구 생태계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온갖 버섯들, 딱정벌레, 나비, 사마귀, 말벌, 거미가 있습니다. 배경 그림은 적막하고 신비로운 우주입니다. 하지만 알맹이는 지구 생태계와 별로 다르지 않죠. <어스텅>은 그저 외계 생태계를 빙자하는 지구 생태계에 불과합니다. 아무도 이게 외계 생태계라고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겠죠. 외계 행성 생태계에 버섯들과 거미가 있을 거라고 아무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을 겁니다.
SF 팬들이 <에이븐 콜로니>를 비판할 수 있다면, 그들은 <어스텅>을 함께 비판할 수 있겠죠. SF 팬들은 <에이븐 콜로니>와 <어스텅>이 SF 울타리 안에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에이븐 콜로니>와 <어스텅>은 상상 과학을 비약했거나 상상 과학을 빙자했습니다. 외계 식생은 진지하지 않습니다. 외계 버섯들 역시 진지하지 않죠. 우주 생물학자들은 외계 버섯을 향해 코웃음을 칠 겁니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상상 과학이 SF 울타리 안에 들어갈 수 있겠어요? 아무리 생태적인 상상력을 발휘한다고 해도, <어스텅>과 <라마와의 랑데부>가 똑같이 SF 울타리 안에 들어갈 수 있겠어요? 이런 물음을 들을 때, 하드 SF 독자들은 고개들을 절래절래 흔들 겁니다.
<어스텅>에는 여러 게임 모드들이 있습니다. <어스텅>은 자연 생태계 모델을 제시했고, 게임 모더들은 자연 생태계 모델을 다양하게 응용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게임 모드는 <메트로이드> 생명체들을 이용하고, 어떤 게임 모드는 건조한 외계 식생을 구현하고, 어떤 게임 모드는 해양 산호초 생태계를 보여줍니다. '어스우드 프리저브(Earthwood Preserve)'라는 게임 모드는 일반적인 지구 온대 삼림을 구현하는 것 같습니다. 어스우드 프리저브에는 파리지옥이 있습니다. 재미있게도 어스우드 프리저브에서 파리지옥은 다람쥐나 토끼나 도마뱀이나 올빼미를 잡아먹을 수 있습니다. 어머? 파리지옥이 다람쥐나 도마뱀이나 올빼미를 잡을 수 있을까요?
이건 다소 이상한 설정입니다. 현실 속에서 파리지옥은 그저 곤충들을 잡아먹을 뿐입니다. 현실 속에는 토끼를 잡아먹는 파리지옥이 없습니다. 하지만 어스우드 프리저브에서 파리지옥은 토끼를 잡아먹을 수 있습니다. 이게 게임적인 과장일까요? 이게 과장된 표현일까요? 아니면 정말 어스우드 프리저브 파리지옥이 토끼를 잡아먹을 수 있을까요? 게임 속의 생태학 보고서는 어스우드 파리지옥이 비단 곤충만 아니라 포유류와 도마뱀처럼 커다란 동물을 잡아먹는다고 보고합니다. 따라서 어스우드 프리저브는 지구 생태계가 아닙니다. 이건 또 다른 생태계입니다. 어스우드 파리지옥은 새로운 생물종입니다.
[소설 <2312>와 달리, 어스우드 프리저브는 인공 생태계 같지 않습니다. 이게 생태학 SF가 될 수 있을까요.]
어스우드 파리지옥이 새로운 생물종이라면, 어스우드 프리저브는 SF 설정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새로운 생물종은 생태학 SF 설정이 될 수 있겠죠. 사실 여기는 지구가 아닙니다. 생태학 보고서는 어스우드 프리저브가 지구를 모방한 모방 생태계(mimic ecosystem)라고 말합니다. 외계 행성에서 어떤 지적 존재들은 오래된 고향별 지구 생태계를 모방했고 어스우드 프리저브를 형성했습니다. 어스우드 프리저브 모드는 누가 모방 생태계를 만들었는지 자세히 밝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생태학 보고서를 읽은 이후, 게임 플레이어는 인류가 오래된 고향별 지구를 떠났고 외계 행성에 도착했고 지구 생태계를 모방하는 어스우드 프리저브를 형성했다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외계 행성의 야생 보호 구역 레인저가 되고 어스우드 프리저브를 관리해야 합니다. 따라서 어스우드 프리저브 모드는 생태학 SF 게임입니다. 외계 행성에 모방 생태 구역이 나타난다면, 그건 생태학 SF가 될 수 있겠죠. 하지만 정말 어스우드 프리저브가 생태학 SF가 될 수 있을까요? 킴 스탠리 로빈슨이 쓴 <2312>에는 생태학 SF 설정이 있습니다. 이 소설이 소행성 내부의 야생 보호 구역을 묘사하기 때문이죠. 많은 SF 독자들은 분명히 <2312>에 생태학 SF 설정이 있다고 생각할 겁니다. <2312>처럼, 어스우드 프리저브 모드 역시 외계에서 지적 존재들이 야생 보호 구역을 만든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어스우드 프리저브에는 자세한 상상 과학이 없습니다.
자세한 상상 과학이 없음에도, 어스우드 프리저브가 생태학 SF 게임이 될 수 있을까요? 설정이 무엇이든, 결국 어스우드 프리저브는 그저 평범한 온대 삼림 생태계를 재현할 뿐입니다. 설정은 그저 설정에 불과하죠. 어스우드 프리저브 모드는 <2312>와 다릅니다. 이 게임 모드는 어떻게 외계 행성에서 지적 존재들(미래의 인류)이 지구 생태계를 모방하는지 고찰하지 않습니다. 이 게임 모드는 왜 그들이 고향별 지구를 떠나야 했는지 자세히 말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미래 인류는 놀라운 유전 공학을 이용해 고향별 생명체들을 복원했고 그러는 동안 토끼를 잡아먹는 파리지옥을 만들었을지 모릅니다. 이런 인공 생태학 설정은 정말 로망이죠. 외계 행성에서 미래 인류가 야생 보호 구역을 만든다면, 그건 가장 장대하고 벅찬 생태학 SF 설정이 아닐까요.
하지만 이건 그저 주관적인 짐작에 불과합니다. 어스우드 프리저브는 그저 간단한 생태계 게임에 불과합니다. 하드 SF 팬들은 어스우드 프리저브가 간단한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이고 감히 이런 생태계 게임 따위가 생태학 SF가 되지 못한다고 반박할 겁니다. 정말 어스우드 프리저브가 생태학 SF 게임이 되지 못할까요?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이 뭘까요? 우리가 무엇을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을 정의할 때, 어디에서 우리가 선을 그어야 할까요? 아주 뚜렷한 경계가 있을까요? 그런 경계 위에서 우리가 "여기까지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이다!"라고 당당하게 소리칠 수 있을까요? 그건 불가능할 겁니다. 아무도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을 뚜렷하게 규정하지 못하겠죠.
지금 이 순간에도 SF 평론가들은 열심히 떠드는 중일 겁니다. 그들은 무엇이 사이언스 픽션인지 정의하고 싶을 겁니다. 하지만 SF 평론가들은 사이언스 픽션을 완벽하게 정의하지 못하겠죠. SF 평론가들은 어떤 특징들과 장르 공식들을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들은 사이언스 픽션이 되지 못합니다. 그 자체로서 특징들과 장르 공식들은 사이언스 픽션이 되지 못하죠. 사실 일반적인 주류 문학 평론가들 역시 비슷한 문제에 부딪힙니다. 문학 평론가는 문학을 평가해야 합니다. 하지만 문학이 뭘까요? 문학이 존재할까요? 누가 문학을 정확히 규정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이 문학을 정확하게 규정하지 못한다면, 문학은 존재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문학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문학 평론가가 존재할 수 있을까요? 문학 평론가는 권정생이 쓴 <몽실 언니>를 이용해 여자들이 힘겹게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게 문학 평론일까요, 아니면 페미니즘 비평일까요? 업튼 싱클레어가 쓴 <정글>을 평가할 때, 문학 평론가는 자본주의 경제가 주변 환경을 오염시키고 비위생적이라고 비판할 겁니다. 이게 문학 평론일까요, 아니면 문학을 이용하는 경제 비평일까요? 문학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문학 평론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문학 평론가는 <몽실 언니>를 이용해 그저 페미니즘 비평을 펼칠 뿐일지 모릅니다.
수필이나 소설이나 게임 시나리오를 평가할 때, 문학 평론가는 이런 어려움에 부딪힙니다. 문학 평론가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이건 문학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아무도 문학이 무엇인지 완벽하게 정의하지 못하죠. 문학 평론가들은 그저 계속 논의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런 지속적인 논의 속에서 문학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생태학 SF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생태학 SF는 논의 밖에 존재하는 어떤 특별한 뭔가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계속 논의할 때, 생태학 SF 역시 존재할 수 있죠. 인간이 생태학 SF 장르를 만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논의 밖에서 생태학 SF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의 논의들 속에서 생태학 SF는 존재할 겁니다. 그건 어떤 특정한 뭔가가 아니라 끊임없이 바뀌고 누적되는 흐름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