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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장르적인 상상력의 차이 본문

SF & 판타지/장르 정의

장르적인 상상력의 차이

OneTiger 2019. 1. 17. 20:47

[사이언스 픽션과 중세 판타지는 똑같이 녹색 삼림 도시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양쪽이 똑같은 상상력일까요.]

 

 

문학은 때로 '대리 경험' 양식으로 간주됩니다. 나는 스컹크로 사는 것이 어떤 느낌일지 알지 못하지만, 스컹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흥미로운 단편 소설이 이 점에서 제약을 극복하게 해줄지 모르지요. 그러나 스컹크로 살게 되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게 되더라도 특별한 가치는 없습니다. 상상력이라는 행위는 원래 그 자체가 소중한 것이 아닙니다.

 

 

위 설명은 문학 비평 서적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에 나옵니다.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에서 테리 이글턴은 그 자체로서 상상력이 대단하지 않다고 설명합니다. 정말 그 자체로서 상상력이 대단하지 않을까요? 어떤 작가들은 이런 설명에 반박할지 모릅니다. 소설은 허구입니다. 소설이 어떤 등장인물이나 사건을 보여준다고 해도, 현실에서 그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역사 소설을 쓰는 동안 소설 작가가 1차 세계 대전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1차 세계 대전이 역사적인 현실이라고 해도, 기본적으로 역사 소설은 허구입니다.

 

역사 소설은 1차 세계 대전을 경험한 역사적인 인물 클라라 체트킨의 내면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역사 소설은 의식의 흐름으로 블라디미르 레닌의 사고 방식을 서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 소설 작가는 직접 클라라 체트킨의 머릿속에 들어가본 적이 없을 겁니다. 클라라 체트킨이 무덤에서 살아 돌아오고, 의식을 공유하는 기계 장치가 나타난다고 해도, 그건 마찬가지일 겁니다. 소설 작가가 의식 공유 장치를 이용해 클라라 체트킨의 의식을 공유한다고 해도, 서로 다른 개체들이 완전히 똑같이 의식할 수 있을까요?

 

 

의식 공유 장치가 나타난다고 해도, 개체성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개체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개체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클라라 체트킨의 내면을 묘사할 때, 역사 소설 작가는 필연적으로 허구를 지어야 합니다. 소설에는 허구가 있습니다. 허구는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허구를 지을 때, 작가는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건 상상력입니다. 상상하지 않는다면, 작가는 소설을 쓰지 못할 겁니다. 특히, 사이언스 픽션이나 판타지 같은 장르 작가들에게 상상력은 훨씬 중요할 겁니다.

 

상상력은 현실에서 비롯합니다. 인공 지능 컴퓨터와 생체 우주선과 거대 해저 도시는 SF 상상력입니다. 불타는 칼을 휘두르는 악마와 포레스트 드래곤에게 교감하는 드루이드와 성채 위를 날아다니는 비행선은 판타지 상상력입니다. 이런 상상력들은 현실에서 비롯합니다. 자연 생태계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SF 작가와 판타지 작가는 생체 우주선과 포레스트 드래곤을 상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생체 우주선과 포레스트 드래곤을 이야기하기 위해 SF 작가와 판타지 작가는 현실을 이용해야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SF 작가와 판타지 작가는 현실을 뻥튀기해야 합니다. SF 작가와 판타지 작가는 '아주 크게' 현실을 뻥뻥~ 뻥튀기해야 합니다.

 

 

현실을 아주 크게 뻥튀기하는 과정은 상상력입니다. 이런 상상력 없이 SF 작가는 생체 우주선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SF 소설을 쓰지 못합니다. SF 작가들에게 상상력은 아주 중요한 원천입니다. 하지만 테리 이글턴은 그 자체로서 상상력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테리 이글턴은 자신이 진공 청소기가 되는 느낌을 상상한다고 해도 그게 숭고한 상상력을 입증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로버트 셰클리가 <구두>를 쓴 것처럼, SF 작가들은 인간이 사물이 되거나 인간이 사물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상상합니다. 물론 단편 소설 <구두>에서 구두는 단순한 신발이 아니라 고급 인공 지능을 장착한 첨단 장비입니다.

 

로저 앨런이 쓴 <모듈러 인간 The Moduler Man>처럼, 인간이 진공 청소기가 되는 SF 소설은 존재하나, 인간이 정말 진공 청소기가 된다면, 인간에게는 아무 의식이 없을 겁니다. <구두>를 읽는 동안 독자들은 키득거릴 겁니다. <구두>에서 인공 지능 구두가 꽤나 인간적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진짜 구두가 아니죠. 디즈니 애니메이션 <미녀와 야수>에서 피피는 먼지털이가 되었으나, 인간이 정말 먼지털이가 된다면, 그 순간 인간은 의식을 잃을 겁니다. '마법사의 제자' 미키 마우스가 빗자루에게 주문을 거는 것처럼, 마법 주문 없이 진짜 먼지털이에게는 의식이 없겠죠.

 

 

이건 상상력에 아무 가치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두>는 요절복통 풍자 SF 소설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진지하고 엄중한 하드 SF 소설들이 많습니다. 누군가가 생체 우주선이 항해하는 진지한 하드 SF 소설을 쓴다면, 많은 독자들은 거기에 경탄할 겁니다. 상상력은 중요합니다. 생체 우주선 소설 작가에게 상상력은 아주 중요하겠죠. 문제는 모든 상상력이 똑같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상상력에는 여러 종류들이 있습니다. 생체 우주선을 관리하는 생태학자와 포레스트 드래곤에게 교감하는 드루이드는 똑같이 생태적인 상상력입니다.

 

하지만 SF 생태학자와 판타지 드루이드는 다릅니다. 생체 우주선을 관리하는 동안 생태학자는 진화 이론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생물 다양성은 진화했고 수많은 자연 생태계들을 조성했습니다. 그 덕분에 인류 문명은 생체 우주선을 건조할 수 있었겠죠. 그 덕분에 생체 우주선은 폐쇄 인공 생태계를 품을 수 있을 겁니다. 생태학자에게 진화 이론은 아주 중요할 겁니다. 생체 우주선을 설정하기 위해 SF 작가는 진화 이론에 상상력을 덧붙여야 합니다. 진화 이론 없이 생체 우주선은 존재하지 못할 겁니다.

 

 

반면, 판타지 드루이드는 진화 이론을 이야기하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드루이드가 진화 이론을 이야기한다면, 그건 판타지 설정을 망칠지 모릅니다. 테이블 게임 <던전스 앤 드래곤스>에는 마이리키라는 대지모신이 있습니다. 마이리키는 숲과 야생 동물들을 보살핍니다. 마이리키는 최고 상위 신성이 아니나, 마이리키는 어머니 자연과 숲의 여신이 될 수 있죠. 하지만 마이리키가 진화 이론을 알까요? 마이리키가 생물 다양성이 진화한다고 말할까요? 어떻게 생명체들이 진화할까요? 마이리키가 숲의 여신이기 때문에 드루이드들과 레인저들은 마이리키를 숭배합니다.

 

듀얼 시미터를 휘두르는 유명한 다크 엘프 레인저 드리즈트 도어덴 역시 마이리키 레인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이리키 때문에 드리즈트가 구엔휘바와 사귄다고 오해합니다.) 드리즈트 도어덴이 울창한 숲을 바라볼 때, 드리즈트가 생물 다양성을 이해할까요? 드리즈트가 구엔휘바를 부를 때, 어떻게 판테라 소속 야수들이 진화했는지 드리즈트가 이해할까요? 비디오 게임 <발더스 게이트 2>와 <아이스윈드 데일>과 <네버윈터 나이츠>와 <네버윈터 나이츠 2>에는 드루이드들이 있습니다. 드루이드들은 플레이어 클래스이고 종종 중요한 역할을 맡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진화 이론을 말하지 않습니다.

 

 

여러 생태 유토피아 소설들, 이른바 에코토피아 소설들은 평등한 사회가 자연 생태계를 관리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절대 자연 생태계를 관리하지 못합니다. 이윤을 위해 자본가 계급이 계속 자연 생태계를 수탈하기 때문입니다. 현실 속에서 신자유주의는 기후 변화를 유발했고 절대 기후 변화를 막지 못합니다. 에코토피아 소설들은 이런 현실에 상상력을 덧붙이고 평등한 사회를 주장합니다. 반면, 판타지 상상력은 다릅니다. 비디오 게임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 시리즈에는 실반 엘프들이 있습니다. 그들 역시 울창한 숲을 지키기 원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평등한 사회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왕권 사회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배틀 포 웨스노스>에서 우드 엘프들 역시 왕권 사회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왕에게 충성합니다. <엔들리스 레전드>에서 야생을 걷는 자들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야생을 걷는 자들 역시 왕권 사회를 유지합니다. 소설 <드래곤 라자>에서 우드 엘프 이루릴 세레니얼은 야생 동물들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이루릴이 에코토피아와 평등한 사회를 본다면, 이루릴은 깜짝 놀랄 겁니다. <드래곤 라자>에서 이루릴 세레니얼은 무산자 민중 계급이 평등한 사회를 혁명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죠.

 

 

생체 우주선 속의 생태학자와 포레스트 드래곤에게 교감하는 드루이드는 똑같이 상상력입니다. 양쪽 모두 생태적인 상상력입니다. 비디오 게임 <블록후드>와 <엔들리스 레전드>의 야생을 걷는 자들은 똑같이 생태적인 상상력입니다. 양쪽 모두 삼림 도시를 강조합니다. 비디오 게임 <판도라: 퍼스트 콘택트>에 나오는 비비안과 <드래곤 라자>에 나오는 이루릴은 똑같이 야생 동물들을 지키고 싶어합니다. 양쪽 모두 똑같이 생태적인 상상력이나, 비비안은 평등한 사회 구조와 녹색당을 지지할 겁니다. 비비안과 달리, 이루릴은 동성애 합법 결혼과 여자가 임신 중절할 수 있는 권리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겠죠.

 

생태학자와 <블록후드>의 삼림 도시와 테라 살붐의 비비안은 진화와 진보를 고민합니다. 반면, 드루이드와 야생을 걷는 자들과 이루릴 세레니얼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그 자체로서 상상력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현실(진화와 진보)을 반영할 때, 상상력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건 이루릴보다 비비안이 훨씬 나은 상상력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누군가는 비비안보다 이루릴을 훨씬 선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을 반영할 때, 상상력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자체로서 상상력이 상상력이라고 뭉뚱그리지 못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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