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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유리와 정원>이 말하는 솔라펑크와 희망 본문

SF & 판타지/유토피아

<유리와 정원>이 말하는 솔라펑크와 희망

OneTiger 2019. 2. 21. 20:18

[솔라펑크는 재생 에너지가 흐르는 희망찬 미래 도시를 묘사합니다. 우리에게는 희망이 필요해요.]



"디스토피아와 아포칼립스에 지친 독자들에게 이런 밝은 미래 전망들은 신선한 공기가 될 것이다." 이렇게 소설 모음집 <유리와 정원 Glass and Gardens>은 주장합니다. <유리와 정원>은 이른바 솔라펑크 소설 모음집입니다. 이름처럼 솔라펑크는 태양열 에너지를 이용하는 SF 장르입니다. 환경 오염을 막기 위해 미래 인류는 재생 에너지를 적극적으로 사용합니다. 그들은 더 이상 석탄이나 석유 같은 화석 연료에 과다하게 의존하지 않고 태양열 에너지를 비롯해 풍력 발전과 수력 발전과 여러 재생 에너지들을 연구합니다.


<유리와 정원> 표지 그림은 밝은 태양과 세련된 기하학적 미래 도시와 태양열 전지판들과 풍력 발전기들을 보여줍니다. 표지 그림은 따스하고 경쾌합니다. 표지 그림처럼 <유리와 정원>은 재생 에너지를 이용해 유토피아를 그립니다. 여러 갈등들과 문제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으나, 전반적으로 <유리와 정원>은 유토피아에 가깝습니다. 사람들이 화석 연료를 버리고 재생 에너지들을 사용하기 때문에, 당연히 산업 자본주의 역시 상당히 바뀔 겁니다. 사람들이 산업 자본주의를 바꾸지 않고 오직 화석 연료만을 재생 에너지로 바꿀 수 있을까요? 그건 불가능할 겁니다.



산업 자본주의와 화석 연료를 밀접한 관계를 맺습니다. 이미 19세기에 유럽이 산업 혁명을 일으켰을 때부터, 자본주의와 화석 연료는 서로 떨어지지 못했습니다. 만약 19세기 유럽이 석탄들을 열심히 태우지 않았다면, 거대 공장들은 돌아가지 않았을 테고, 자본주의는 대량 생산으로 이어지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분명히 자본주의는 초기 매뉴팩처 체제를 없애고 대량 생산 체제를 원했을 겁니다. 유럽이 석탄들을 태우지 않았다고 해도, 자본주의는 어떻게든 대량 생산 체제를 구축하기 원했을 겁니다. 자본가 계급은 엄청난 임금 노동자들을 집약적으로 동원했을 겁니다.


공장이 돌아가지 않는다고 해도, 몸이 부서질 때까지 임금 노동자들은 상품들을 만들어야 했을 겁니다. 석탄이 없는 19세기 자본주의를 상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건 대체 역사에 가까울 겁니다. 이런 19세기 유럽을 묘사하고 싶다면, SF 작가는 대체 역사 소설을 써야 할 겁니다. 하지만 이미 현실 속에서 석탄들이 있었기 때문에 19세기 산업 혁명은 자본주의 대량 생산을 뒷받침할 수 있었습니다. 산업 자본주의는 엄청난 석탄들을 태웠고 온실 가스들을 열심히 뿜기 시작했습니다. 21세기 초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석유 기업들, 자동차 기업들은 21세기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대표합니다.



석유 기업들, 자동차 기업들은 석유, 화석 연료를 쉽게 버리지 못합니다. 이윤을 축적하기 위해 이런 기업들은 계속 석유를 태워야 합니다. 무분별한 대량 생산이 기후 변화를 부른다고 해도, 이윤이 목표이기 때문에, 석유 기업들, 자동차 기업들은 화석 연료를 버리지 못합니다. 인류 산업 문명이 화석 연료를 버리고 재생 에너지들을 사용한다면, 그건 별로 어려운 변화가 아닐 겁니다. 미래학자들은 그게 가능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산업 문명은 아주 적은 비용으로 화석 연료를 버리고 재생 에너지들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만약 커다란 비용이 든다고 해도, 산업 문명은 무조건 재생 에너지들로 넘어가야 합니다.


산업 문명이 계속 화석 연료를 태운다면, 기후 변화는 생물 다양성을 파괴할 테고, 폭염이나 홍수를 부를 테고, 수많은 약자들은 고통을 겪거나 목숨들을 잃을 겁니다. 이건 착취이고 수탈입니다. 산업 자본가가 기쁘게 이윤을 축적하는 동안, 가난한 농민들은 농사를 포기하고 파산할 겁니다. 이윤을 축적하기 위해 산업 자본가가 공장을 돌리고 온실 가스를 뿜었기 때문에, 기후 변화는 이상 기후를 불렀고, 이상 기후 속에서 농민은 파산해야 합니다. 이건 폭력이고 범죄입니다. 따라서 비용이 많이 든다고 해도, 산업 문명은 재생 에너지들로 넘어가야 합니다. 재생 에너지들은 그저 선행이나 도덕만이 아니라 의무에 가깝습니다. 기후 변화는 단순한 재앙이 아니라 착취이고 범죄입니다.



하지만 산업 문명이 간단하게 재생 에너지들로 넘어갈 수 있다고 해도, 석유 기업들과 자동차 기업들은 이걸 반가워하지 않겠죠. 산업 문명이 재생 에너지들로 넘어가는 동안, 석유 기업들과 자동차 기업들은 권력을 잃을 겁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가장 커다란 목표는 이윤입니다. 오직 이윤만이 가장 커다란 목표가 됩니다. 다른 것은 절대 중요하지 않아요. 기후 변화가 행성적인 재앙이 된다고 해도, 자본주의 경제에서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지구가 망가지든, 생태계가 무너지든, 약자들이 죽어나가든, 중요한 것은 이윤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자본주의를 바꾸지 않는다면, 이런 기업들은 계속 권력을 휘두를 테고, 산업 문명은 쉽게 재생 에너지들로 넘어가지 못할 겁니다.


기업들은 막강한 권력으로 계속 석유를 시추할 테고, 사람들은 그걸 막지 못할 겁니다. 이건 꽤나 황당한 상황입니다. 왜 사람들이 몇몇 기업들을 막지 못할까요? 기업들이 신인가요? 기업들이 왕인가요? 기업들이 노예 주인인가요? 시민들이 노예이고, 기업들이 노예 주인인가요? 노예로서 시민들이 노예 주인 기업들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고 복종해야 하나요? 많은 사람들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시민들이 노예이고 노예 주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노예 제도입니다. 하지만 이건 말이 안 되는 헛소리입니다. 시민들은 생산 수단을 공유하고 권력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시민들에게 권력이 생길 때, 그건 더 이상 자본주의가 아닐 겁니다. 자본주의는 무너지거나 꽤나 많이 바뀌어야 합니다. 물론 솔라펑크들은 착하고 깨끗한 자본주의를 묘사할 수 있습니다. 솔라펑크들은 자본주의가 무너지지 않고 오직 화석 연료가 재생 에너지로 바뀔 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펭귄이 하늘을 난다는 망상처럼, 그건 망상에 가깝습니다. 그건 솔라펑크보다 망상펑크에 가깝겠죠. 이미 소설 <에코토피아 비긴스>가 태양열 에너지와 평등한 사회를 묘사한 것처럼, 평등한 사회 없이 태양열 에너지는 없을 겁니다. 솔라펑크는 비단 재생 에너지들만이 아니라 평등한 사회 구조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에코토피아 비긴스>는 선구적인 솔라펑크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초반부에서 어떻게 소설 주인공 여자 고등학생이 태양열 에너지 전지를 만드는지 보여줍니다. 동시에 이 소설은 어떻게 가상의 녹색당이 평등한 사회를 고민하는지 이야기합니다. <에코토피아 비긴스>가 태양열 에너지를 발명하는 소녀와 가상의 녹색당을 보여주는 것처럼, 솔라펑크들은 재생 에너지와 평등한 사회 구조를 함께 말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에코토피아 비긴스>는 전통적인 유토피아 소설입니다. 그래서 솔라펑크들 역시 유토피아가 될 수 있습니다. 재생 에너지들과 평등한 사회는 유토피아를 뒷받침할 수 있습니다.



소설 모음집 <유리와 정원>은 자신이 유토피아 소설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유토피아 소설은 디스토피아와 포스트 아포칼립스에 지친 독자들에게 희망을 선사할 수 있습니다. 디스토피아들과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을 너무 많이 읽는다면, 독자들은 지칠 겁니다. 디스토피아들과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은 암울한 상황을 묘사합니다. 독자들이 이런 암울한 상황만을 연이어 만난다면, 독자들은 이 세상에 희망보다 절망이 훨씬 많다고 느낄 겁니다. 몸이 뭔가를 가깝다고 느낀다면, 마음 역시 그걸 가깝다고 느낄 겁니다. 독자들이 계속 암울한 상황만을 본다면, 암울한 상황은 독자의 고정 관념 속으로 들어갈지 모릅니다.


하지만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그저 포스트 아포칼립스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기후 변화가 훨씬 심각한 재앙이 된다면,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미래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독자들이 오직 절망만을 만난다면, 독자들은 기후 변화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할 겁니다. 사람들은 희망으로 기후 변화에 저항해야 하고, 그래서 <유리와 정원>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보여주기 원합니다. 그래서 표지 뒷면에서 <유리와 정원>은 자신이 유토피아라고 당당하게 주장할 겁니다. 우리는 할 수 있고, 우리는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희망이 필요해요.



하지만 무조건 희망이 좋을까요? 무조건 낙관이 좋을까요? 희망에는 여러 종류들이 있습니다. "시장 경제는 만능이야! 보이지 않는 손은 모든 것을 해결할 거야! 다국적 기업들은 기후 변화를 몰아낼 수 있어! 아니면 기후 변화 따위는 문제가 아닐 거야! 기후 변화가 심각해진다고 해도, 시장 경제가 있다면,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 수 있어!" 이건 희망이고 낙관입니다. 동시에 이건 망상이고 세뇌입니다. <에코토피아 비긴스>와 <유리와 정원>은 이런 희망과 낙관을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에게는 희망과 낙관이 필요해요. 하지만 그건 망상을 가장한 희망과 세뇌에서 비롯한 낙관이 되어서는 안 될 겁니다. 암울하고 끔찍하고 처절한 현실을 확실하게 인식할 때, 우리는 제대로 희망을 끌어안을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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