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월-E>의 쓰레기장 지구와 청소 로봇 본문
[환경 아포칼립스가 닥쳤음에도, <월-E>는 절망으로 너무 깊이 빠지지 않습니다.]
블록버스터 애니메이션으로서 <월-E>는 좀 특이합니다. 초반부 동안 <월-E>에는 특별한 대사가 없습니다. 세상은 쓰레기들 천국이고, 하루 종일 청소 로봇 월-E는 쓰레기들을 치우느라 바쁩니다. 쓰레기들을 치우는 동안 월-E는 여러 사물들을 접하고 관찰하고 사용하나, 그런 행위들은 일상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아요. 월-E는 (생명력이 끈질긴) 바퀴벌레 친구를 사귀나, 바퀴벌레 이외에 다른 누군가와 대화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오직 월-E(와 말이 없는 바퀴벌레)만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정말 지구에 월-E 이외에 다른 지적 존재가 없을까요. 관객들은 그걸 확실히 알 방법이 없습니다. 애니메이션의 시점이 지구에서 오직 주인공 청소 로봇만 따라다니고, 다른 장소들을 비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지구에는 다른 청소 로봇들이 존재할지 모르나, 애니메이션 시점은 그걸 보여주지 않아요. 이브가 도착하기 전까지 월-E는 그저 묵묵하게 쓰레기를 치우고, 이것저것 건드리고, 사방을 돌아다닐 뿐이죠. 등장인물들이 없는 대신 이 애니메이션에는 엄청난 쓰레기 더미들이 가득합니다. 지구는 생명의 요람이 아니라 거대한 쓰레기장인 것 같습니다.
이런 방법은 <월-E>가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SF 세상에는 여러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이 있고, 어떤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은 거대한 적막을 제시합니다. 사실 멸망한 세상은 시끄럽지 않을 겁니다. 모든 것이 사라진 세상은 꽤나 고요하겠죠. 문자 그대로 죽은 듯이 조용할 겁니다. 그래서 숱한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은 적막을 강조합니다. <해변에서> 같은 소설처럼 담담한 일상을 보여주는 소설에서조차 잠수함이 북반구를 탐사할 때 기이한 적막을 강조했죠. 잠수함 승무원들은 죽은 북반구를 돌아다녔고, 종말이 다가옴을 실감합니다.
가족 애니메이션으로서 <월-E>는 화사하고 귀여운 그림을 보여주나, 이런 가족 애니메이션조차 압도적인 적막을 피하지 않습니다. 일상 소음을 대신하는 것들은 무지막지한 쓰레기들입니다. 인류와 다른 생명체들과 소음이 사라진 대신 이 세상에는 쓰레기들이 남았습니다. 덕분에 <월-E>는 아주 거대한 환경 아포칼립스가 됩니다. 세상이 멸망한 이유는 다른 요인들이 아니라 환경 오염 때문이죠. 자연 환경이 오염되고 쓰레기들이 널린 이유는 거대 다국적 회사 때문이고요. 따라서 <월-E>는 대놓고 이야기하지 않으나, 자본주의가 세상을 망쳤다고 이야기합니다.
<월-E>는 어떻게 자본주의가 자연 환경을 파괴했는지 직접 보여주지 않습니다. 이 애니메이션은 중반부까지 환경 아포칼립스를 보여주고, 중반부 이후 우주 탐사물로 바뀝니다. 그러는 동안 다국적 기업이 자연 환경을 파괴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이야기할 뿐입니다. 하지만 숱한 환경 아포칼립스들을 고려한다면, 어떻게 다국적 기업이 자연 환경을 파괴했는지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을 겁니다. 어떤 관객들은 다국적 기업과 어마어마한 쓰레기 더미에서 소비 자본주의라는 맥락을 읽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소비 자본주의라는 용어가 완전히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소비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체계를 제대로 분석하지 못하는 용어입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중요한 것이 소비가 아니라 생산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소비 이전에 생산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소비 행태를 비판하고 싶다면, 먼저 생산 문제를 걸고 넘어가야 합니다. 하지만 <월-E>는 그런 문제를 걸고 넘어가지 않습니다. 사실 이런 블록버스터 애니메이션은 그런 문제를 쉽게 걸고 넘어가지 못하겠죠. 이미 블록버스터 애니메이션 자체가 거대 자본주의에게서 비롯한 존재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월-E>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환경 오염을 경고하는 애니메이션입니다. 다국적 기업은 모든 것을 집어삼켰고, 세상을 뒤흔들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대기업에게 매달렸고 대기업을 일상 곳곳에서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꽤나 비참했고, 결국 쓰레기 행성을 남겼어요. SF 세상에서 이런 설정은 드물지 않습니다. 이미 1950년대부터 SF 작가들은 이런 설정을 이용했고, 자본주의와 무분별한 개발과 환경 오염을 걱정했죠. <월-E>는 그런 연장선에 있는 것 같으나, 청소 로봇을 이용해 색다르게 사건을 전개합니다.
다른 디스토피아나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달리, <월-E>는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조명하지 않아요. 대신 이 애니메이션은 월-E가 아기자기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죠. 덕분에 관객들은 거대한 환경 아포칼립스에 부담 없이 접근할 수 있을 겁니다. 고통을 받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월-E>는 그저 압도적일 뿐이고, 암울하지 않아요. 아무리 쓰레기장 지구가 인간에게 지옥이라고 해도, 로봇에게 지옥이라는 법은 없겠죠. 만약 똑같이 쓰레기 세상과 환경 아포칼립스를 보여줬다고 해도, 주인공이 청소 로봇이 아니라 인간이었다면, 분위기가 많이 달랐을지 모르겠습니다.
※ 이브와 월-E가 알콩달콩 연애하는 장면은 두근두근 설레는군요. 어느 이야기에서든 연애 이야기는 좋은 기반이 되는 것 같습니다. 연애 이야기를 잘 쓰는 작가가 진짜 필력이 있는 작가인 것 같아요. 게다가 이브와 월-E가 연애하는 장면은 숱한 로맨스 소설들이나 만화들이나 영화들보다 훨씬 낫습니다. 재벌 남자 친구를 근사하게 묘사하는 로맨스들과 달리, 적어도 <월-E>는 자본주의를 비판하죠. 반면, 재벌 남자 친구를 근사하게 묘사하느라 숱한 로맨스 장르들은 자본주의까지 정신 없이 인정하죠. 종종 이런 가족 애니메이션(이자 환경 아포칼립스)이 성인 소설이나 성인 드라마보다 훨씬 나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