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워크래프트 2>의 놈 잠수함 본문
비디오 게임 <워크래프트 2>는 전형적인 중세 유럽 판타지입니다. <워크래프트 2>는 우리가 중세 유럽 판타지에서 기대하는 여러 요소들을 보여줍니다. 중장 기사를 보고 싶나요? <워크래프트 2>에는 중장 기사들이 등장합니다. 마법사들? 마법사들 역시 있습니다. 엘프 레인저들, 하늘을 나는 화룡들, 도끼를 휘두르는 야만적인 오크들, 되살아난 시체들, 사악한 강령술사들 역시 있습니다. 드루이드 같은 숲 속 종족을 좋아하는 중세 판타지 팬들에게 <워크래프트 2>는 다소 아쉬운 게임입니다.
<워크래프트 2>에는 드루이드 비슷한 뭔가조차 나오지 않습니다. 엘프 레인저들이 나온다고 해도, 엘프 레인저들은 별로 자연 친화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요. 엘프 레인저들은 그저 강력한 궁사에 불과하죠. 전략 게임에서 숲 속 종족을 보고 싶다면, <마스터 오브 매직>이나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 2> 같은 게임들은 <워크래프트 2>보다 훨씬 나을 겁니다. (속편 <워크래프트 III>는 발톱 드루이드나 드라이어드 등으로 이런 숲 속 종족들을 보강하죠.) 그렇다고 해도 <워크래프트 2>는 분명히 재미있는 게임이고, 전형적인 중세 유럽 판타지를 보여줍니다.
전작 <워크래프트>와 달리, <워크래프트 2>는 해군 전력을 보강했습니다. 그래서 게임 플레이어들은 다양한 선박들을 건조해야 합니다. 요즘 실시간 전략 게임들은 이런 해상전을 배제하는 분위기 같습니다. 여러 변수들을 통제하기가 힘들기 때문이겠죠. 해상전이 존재한다면, 해상 전력이 존재해야 합니다. 하지만 해상 전력은 보조적인 전력입니다.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 게임 플레이어들은 상대 기지를 깨뜨려야 합니다. 상대 기지는 육상에 있고, 해상 전력을 육상을 공격하지 못합니다. 지상 전력이나 공중 전력은 육상을 공격할 수 있으나, 해상 전력은 그렇지 못합니다. 사정거리가 길다란 전함은 해안 내부를 포격할 수 있겠으나, 일반적인 해상 전력은 육상을 건드리지 못하죠.
따라서 해상전이 존재한다면, 게임 플레이어들은 보조적인 해상 전력을 운영해야 하고, 이는 게임을 한층 복잡하게 만들 겁니다. 게다가 게임 플레이어는 상륙전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상대 기지를 공격하기 위해 게임 플레이어는 아군 해안에서 육상 전력을 수송선에 태우고, 바다를 건너고, 상대 해안에 육상 전력을 내리는 수고를 치르러야 합니다. 이건 꽤나 귀찮은 작업입니다. 여러 실시간 전략 게임들에서 수송선이 침몰할 때 수송선에 탑승한 육상 전력은 함께 침몰하거나 엉뚱한 해안에 표류합니다.
<마스터 오브 매직> 같은 순서 기반 게임에서 이런 과정은 전술의 깊이를 더할지 모릅니다. 순서 기반 게임을 플레이할 때, 게임 플레이어들은 차근차근 생각해야 합니다. 하지만 실시간 전략 게임은 손이 바쁜 게임이고, 차근차근 생각할 여유 따위 없습니다. 그래서 실시간 전략 게임들은 해상전을 배제하는 추세 같습니다. 어쩌면 이는 그저 개인적인 경험이나 개인적인 추측에 불과할지 모르죠. 저는 실시간 전략 게임들을 잘 모릅니다. 어쨌든 <워크래프트 2>는 해상 전력을 보여주는 게임입니다.
이런 해상 전력들 중 가장 독특한 유닛은 놈 잠수함일 겁니다. 놈 잠수함은 해상 전력보다 수중 전력에 가깝습니다. 놈 잠수함은 유일하게 잠수할 수 있는 유닛입니다. 따라서 잠수함은 모습을 감출 수 있고, 불시에 상대를 공격할 수 있습니다. 놈 잠수함은 암살이나 정찰, 테러에 유용하죠. 하지만 내구력은 빵점이고, 속도는 별로 빠르지 않습니다. 게다가 고블린 비행선 같은 공중 유닛은 놈 잠수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은신이라는 멋진 장점이 있음에도, 놈 잠수함은 절대 주력이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주력이 아니라고 해도, 놈 잠수함은 분명히 특이한 유닛입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와 잠수함…. 이게 어울리는 조합일까요.
물론 <워크래프트 2>는 스팀펑크를 특별하게 고찰하지 않습니다. 그저 잠수 유닛이 필요했기 때문에 <워크래프트 2>는 스팀펑크를 도입했겠죠. 하지만 중세 판타지와 구닥다리 주조소나 구닥다리 잠수함이 공존할 때, 이는 기묘한 괴리를 풍깁니다. 누군가는 이런 괴리가 어색하다고 지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사이언스 픽션은 그 자체로서 괴리를 이야기하는 장르입니다. 여러 하드 SF 소설들은 미래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미래 문명을 확신하지 못합니다. 아무도 어떻게 미래 문명이 다가올지 알지 못합니다. SF 작가들이 그리는 미래 문명은 진짜 미래 문명이 아닙니다.
SF 작가들은 그저 현대적인 관념을 미래 문명에 투영할 뿐입니다. SF 작가들은 현대적인 관념을 미래 문명에게 투영하고, 가상의 공간을 창조합니다. 미래를 이용해 가상의 공간을 창조할 수 있다면, 우리는 과거를 이용해 가상의 공간을 창조할 수 있을 겁니다. 과학 기술이 (우리가 사는 현실과) 다르게 발전한다면, 그런 가상의 공간은 등장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세 판타지와 구닥다리 잠수함은 함께 어울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익숙한 것(현대적인 과학 기술)을 낯선 것(마법사와 드래곤)에 집어넣고, 두 가지를 대조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어요.
낯선 것 속에 익숙한 것이 존재할 때, 익숙한 것은 완전히 다른 느낌을 풍길 겁니다. 저는 그게 스팀펑크를 즐기는 재미라고 생각합니다. 익숙한 것을 더 이상 익숙하지 않은 것으로 바꾸는 작업. 저는 스팀펑크가 그런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뭐, <워크래프트 2>는 그저 실시간 전략 게임에 불과하고, 그런 장르 성향을 자세히 고찰하지 않아요. 하지만 저는 게임 플레이어들이 조금 고민한다면 <워크래프트 2>에서 이런 성향을 뽑아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단 <워크래프트 2>만 아니라 숱한 중세 판타지 스팀펑크들 역시 마찬가지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