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우주 속의 위험한 던전들 본문
[이런 상황에서 복잡하고 비좁은 거대 우주 폐선은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던전이 될 수 있죠.]
'중세 판타지 게임에서 모험가들은 던전을 탐험하고, 스페이스 오페라 게임에서 우주선은 우주를 항해한다.' 예전에 어떤 게임 사이트에서 이런 문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문구를 보는 순간, 저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습니다. SF 게임들에서 던전 탐험이 정말 우주 항해보다 작은 비중을 차지할까요? <마스터 오브 오리온> 같은 거대 전략 게임이나 <윙커맨더> 같은 비행 게임은 우주 항해를 이야기하죠. <엔들리스 스카이>나 <패스터 댄 라이트> 같은 소규모 게임 역시 우주 항해를 표현합니다. 이런 게임들에 주목한다면, 다들 스페이스 오페라 게임들이 우주 항해를 주로 표현한다고 여길지 모릅니다.
하지만 SF 세상에서 던전 탐험은 우주 항해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입니다. 비단 SF 게임들만 아니라 SF 소설들 역시 던전 탐험에 많은 노력들을 할애합니다. 일반적으로 던전은 폐쇄적이고 컴컴하고 복잡하고 위험한 실내 공간을 가리킵니다. <지구 속 여행>은 깊고 복잡한 동굴을 탐사하는 소설입니다. 거대한 지구 공동은 어마어마한 던전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겁니다. <지구 속 여행>은 초기 SF 소설이고 동시에 던전 탐험 소설이죠. 라이더 해거드가 쓴 <동굴의 여왕> 같은 소설 역시 다르지 않아요. 사실 숱한 비경 탐험들은 던전 탐험이 될 수 있죠.
<동굴의 여왕>은 판타지에 가까운 소설이나, <지구 속 여행>은 분명히 SF 소설입니다. 비록 지구 공동을 상상하는 설정은 자세하지 않으나, 쥘 베른은 최대한 자연 과학적인 감성을 불어넣었습니다. <광기의 산맥> 같은 소설은 어떨까요. <광기의 산맥>에서 주연 탐사대는 고대 외계인들이 만든 지하 도시를 떠돕니다. 주연 탐사대는 어떻게 고대 외계인들이 살았는지 조사하고, 직접 외계인들이나 그들의 개조 생명체들을 만납니다. 그런 내용은 주된 비중을 차지합니다. 당연히 <광기의 산맥>은 던전 탐험이 될 수 있어요.
그리고 하워드 크래프트가 다소 판타지 작가에 가깝다고 해도 <광기의 산맥>은 누가 봐도 SF 소설이죠. 사실 음침하고 복잡하고 위험한 실내 공간은 모든 환상 작가에게 매력적인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던전은 짜릿한 모험을 위한 멋진 무대가 될 수 있어요. SF 작가들이 던전을 마다할 이유는 없습니다. 소설 <타임 머신>에서 몰록들과 맞서기 위해 시간 여행자는 과감하게 위험한 지하실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쇠파이프를 들고 몰록들과 필사적으로 싸웁니다. 이는 던전 속에서 장검을 들고 해골 병사들과 싸우는 모험가와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게다가 우주선 역시 던전이 될 수 있습니다. 기나긴 항해를 떠나는 우주선은 꽤나 거대할 테고, 특히, 세대 우주선은 훨씬 거대할 겁니다. 그런 우주선이 혼란에 빠진다면, 세대 우주선은 거대한 미궁이 될 수 있습니다. <진홍빛의 불협화음>에서 우주선 승무원들이 익스톨을 피해 달아날 때, <조던의 아이들>에서 소설 주인공이 돌연변이 구역들을 돌아다닐 때, <기시감>에서 석아찬이 게이트의 비밀스럽고 어두운 구석들을 돌아다닐 때, 독자들은 우주선 역시 던전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될 겁니다. <에일리언>이나 <이벤트 호라이즌>이나 <팬도럼> 같은 영화들 역시 우주선이 던전이 된다고 주장할 수 있겠죠. (<스피어>나 <딥 블루 씨> 같은 소설이나 영화는 스페이스 오페라가 아니나, 이 영화 역시 해저 과학 기지가 던전이 된다고 말합니다.)
이런 우주선 던전은 별로 특별하거나 드문 설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평론가들이 지겹다고 투덜거릴 만큼, 너무 진부하죠. SF 테이블 게임이나 비디오 게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SF 게임에서 던전은 일상적인 모험 무대입니다. 게임 <스페이스 헐크>에서 우주 터미네이터 해병들은 복잡하고 위험한 우주 유령선을 탐험하고 기술이나 장치를 얻어야 해요. 우주 해병들은 치명적인 진 스틸러들을 퇴치해야 하고, 비좁은 복도들에서 사각을 지켜야 하죠.
비단 테이블 게임만이 아니라 비디오 게임들 역시 던전을 보여줍니다. <둠>은 비디오 게임 역사에 획을 그었습니다. 그리고 <둠>에서 주인공 둠가이는 우주 기지를 돌아다니고 외계 악마들과 신나게 싸웁니다. 우주 기지는 일종의 거대한 던전이고, 우주 기지에서 외계 악마들과 싸우는 둠가이는 던전에서 해골 병사들과 싸우는 모험가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프 라이프> 역시 비디오 게임 역사에 획을 그은 게임이고, 동시에 과학 기지가 던전이라고 주장하는 게임입니다. <타임 머신>에서 시간 여행자가 쇠파이프를 들고 몰록들과 싸운 것처럼 <하프 라이프>에서 고든 프리맨은 빠루를 들고 외계인들과 싸웁니다.
<둠>과 <하프 라이프> 같은 게임들 덕분에 우주 기지나 과학 기지는 훌륭한 던전으로 변모할 수 있습니다. <던전 오브 엔들리스>는 건설 게임과 던전 탐험을 합쳤죠. 온갖 SF 로그라이크 게임들을 언급한다면, 저는 훨씬 길다란 목록을 작성할 수 있을 겁니다. 이처럼 던전은 검마 판타지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검마 판타지와 별개로) 소설, 영화, 게임에서 사이언스 픽션들은 꾸준히 던전을 이용했습니다. 이는 SF 게임이 우주 항해를 이야기한다는 문구가 완전히 틀렸다는 뜻이 아닙니다. 저는 우주 항해가 사이언스 픽션의 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던전 역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할 수 있어요. 아니, 우주선이라는 던전은 사이언스 픽션의 꽃인 우주 항해를 이야기할 수 있죠. 우주 항해와 우주선이라는 던전은 절대 멀리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미궁을 돌아다니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복잡하고 위험한 장소들을 탐험하고 비밀을 조사할 때, 마치 그건 어려운 퍼즐을 푼 것 같은 쾌감을 선사할 겁니다. 어쩌면 제 생각이 틀렸을지 모르죠. 하지만 분명히 사람들은 던전을 탐험하고 싶어합니다. SF 창작물들에게 그런 욕구를 마다할 이유는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