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우주 상인>과 자본주의 윤활유, 광고 본문
프레데릭 폴과 시릴 콘블루스는 <우주 상인>이라는 소설을 썼습니다. 어쩌면 두 작가는 이 소설에 잘못된 제목을 붙였을지 모르겠어요. 상인은 물건을 파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소설 주인공은 광고업자입니다. 광고 역시 상품이고 광고업자 역시 광고를 파는 상인이나, 일반적인 상인은 아니죠. 소설 주인공이 광고업계에서 나가기 때문에 어쩌면 두 작가는 그런 행보를 염두에 두었을지 모르겠군요. 아울러 두 작가가 광고업자를 소설 주인공으로 설정한 이유를 추측한다면, 자본주의 체계를 비판하기 위해서일지 모릅니다.
소설 속에서 자본주의 체계는 자연 환경을 엄청나게 오염시킵니다. 천연 자원을 낭비하고, 깨끗한 물을 더럽히죠. 자본가들은 이윤만을 위해 막대한 힘을 쏟아붓고, 정치권은 이걸 막지 않습니다. 당연히 가난한 사람들은 고난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치명적이고 위독한 환경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광고업자들은 이런 기업들을 멋지게 포장해요. 자본주의 체계는 자연 환경을 무참하게 짓밟고 밑바닥 사람들은 물조차 제대로 마시지 못함에도 광고업자들은 마치 기업들을 사회에 이바지하는 것처럼 떠들죠. 네, 기업들은 사회에 이바지하죠. 만약 그 사회가 상류층이나 잘 먹고 잘 사는 중산층만 가리킨다면, 기업들이 사회에 이바지한다는 광고가 틀리지 않겠죠.
비단 <우주 상인>만 아니라 광고를 이용해 자본주의를 풍자하는 소설들은 많습니다. 필립 딕은 어느 단편 소설에서 광고 로봇을 묘사했습니다. 이 광고 로봇은 정말 끈질깁니다. 아주 끈질기게 소비자들을 쫓아다닙니다. 소비자들은 절대 광고 로봇을 떨치지 못하고, 언제나 광고를 들어야 합니다. 필립 딕은 자본주의가 어떻게 작동하고, 무엇이 자본주의를 기름칠하는지 정확히 판단한 것 같습니다. 그렉 이건이 쓴 <쿼런틴>에서 주인공은 광고들이 온갖 채널들을 독식하는 광경에 진저리를 냅니다. 마치 광고업자들이 서로 짜고 하루 종일 광고들만 틀어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소설 주인공은 광고업자들이 서로 짜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저 광고 수익료 덕분에 텔레비전들이 하루 종일 광고들만 틀어댈 뿐이죠. 자본주의 체계 속에서 기업들은 계속 상품들을 팔아야 하고, 상품들을 팔기 위해 홍보해야 하고, 그래서 광고는 자본주의 체계가 무난하게 흘러가게 도와주는 윤활유입니다. 아마 노엄 촘스키가 말한 광고는 프로파간다라는 이야기는 이걸 가리킬지 모릅니다. 소설 주인공은 그런 맥락을 짚었죠. 흠, 이런 사이버펑크나 디스토피아에서 광고를 풍자하는 사례는 너무 뻔할지 모르겠군요. 다른 사례 역시 있습니다. 아서 클라크는 어느 우주 탐사 단편 소설에서 광고업자가 우주 탐사를 좌우하는 상황을 풍자했습니다. 우주 탐사 역시 자본주의 체계의 윤활유를 벗어나지 못하죠.
이처럼 현대 자본주의에서 광고는 필수적인 요소들 중 하나입니다. 19세기 사회주의자들은 열심히 자본주의를 분석했으나, 그들은 이렇게 광고들이 어마어마하게 커질지 몰랐을 겁니다. 이런 대형 광고는 정보 통신 수단과 밀접하게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사이버펑크 소설은 쉽게 광고를 이야기할 수 있죠. 19세기 유럽은 정보 통신 기술을 몰랐고, 자본주의 역시 광고를 활용할 줄 몰랐습니다. 그 당시 역시 광고가 있었으나, 그걸 대대적으로 이용하지 못했죠. 사회주의자들 역시 광고에 별로 주목하지 않았고요.
어쩌면 19세기 자본주의와 20세기 자본주의에는 광고라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19세기 사회주의자들은 거대한 다국적 회사가 전세계 수 십 만 명에게 동시에 대대적인 광고를 때릴 수 있다는 사실을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런 기술을 몰랐기 때문에 예상하기가 힘들었겠죠. 이런 광고가 드러내는 문제들 중 하나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소비 상태로 몰아넣는다는 사실입니다.. 광고는 계속 사람들을 자극하고 소비 욕구를 쉬지 않고 부채질합니다. 광고는 마치 사람들이 뭔가를 계속 소비해야 만족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광고 자체가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뭔가를 홍보하고 싶다면, 그것 자체를 비판할 이유는 없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하루 종일 광고에 노출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광고들 속에서 세상은 마치 엄청나게 사치스럽고 고급스러운 것처럼 등장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와 정반대입니다. 광고가 현실을 사치스럽게 포장할 뿐이죠. 하지만 그것들을 계속 접하는 사람들은 광고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광고가 계속 사고 방식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사람들은 광고 속의 세계와 현실 세계를 혼동할지 몰라요.
그래서 현실 세계를 외면하고, 자극적이고 화려한 광고 속의 세계가 현실이라고 착각할지 모르죠. 물론 이는 개인적인 추측일 뿐입니다. 근거는 없습니다. 어쩌면 노엄 촘스키처럼 어떤 학자들은 이런 이론을 실험했을지 모르겠군요. 어쨌든 중요한 사실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광고를 접한다는 상황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주 접하는 대상을 더욱 우호적으로 생각하겠죠. 그렇다면 멸종 위기에 처한 야생 동물들을 보는 사람들과 대기업들이 홍보하는 광고를 보는 사람들 중 누가 많을까요. 저는 이런 상황을 한 번쯤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