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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우리사이느은>과 스테고사우루스 해석 본문

SF & 판타지/스팀펑크, 사이언스 판타지

<우리사이느은>과 스테고사우루스 해석

OneTiger 2020. 3. 9. 19:51

[비록 만화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 화사한 만화 세상에서 골판 공룡은 진화했을 겁니다.]



소설 속에는 '또 다른 세상'이 있습니다. 소설 속에서 그 자체로서 '또 다른 세상'은 존재합니다. 비단 소설만 아니라 영화 속에도 또 다른 세상이 있습니다. 비단 영화만 아니라 게임 속에도 또 다른 세상이 있습니다. 비단 게임만 아니라 만화 속에도 또 다른 세상이 있습니다. 소설, 영화, 게임, 만화 같은 픽션들, 창작물들 속에서 그 자체로서 '또 다른 세상'은 존재합니다. 만화 <우리사이느은> 속에는 '또 다른 세상'이 있습니다. 또 다른 세상에서 주연 등장인물 도가영은 존재합니다. 아무리 독자가 이 만화를 재미있게 본다고 해도, 현실에서 만화 독자는 등장인물 도가영을 만나지 못합니다.


만화 속의 세상이 또 다른 세상이기 때문에, 또 다른 세상과 현실이 다르기 때문에, 만화 독자는 또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도가영은 현실을 향해 튀어나오지 못합니다. 만화 독자는 현실에 속하고, 도가영은 또 다른 세상에 속합니다. 심지어 <우리사이느은>에서 특정한 시점들로서 도가영은 존재합니다. 만약 만화 시점이 오직 도가영 앞모습만 보여준다면, 만화 독자는 도가영 뒷모습을 알지 못할 겁니다. 만약 만화 시점이 오직 도가영 상반신만 보여준다면, 만화 독자는 도가영 하반신을 알지 못할 겁니다. 만화 <우리사이느은>에서 이연지 작가 그림체로서 도가영은 존재합니다.



만화 속에서 다른 만화 작가들보다 이연지 작가 그림체로서 도가영은 존재합니다. 이연지 작가에게 고유한 그림체가 있기 때문에, 만약 다른 만화 작가들이 등장인물 도가영을 그린다면, 다른 그림체로서 도가영은 존재할 겁니다. 만약 황미나 작가가 도가영을 그린다면, 황미나 작가 그림체로서 도가영은 존재할 겁니다. 현실에서 만화 독자는 특정한 그림체가 아닙니다. 현실에서 특정한 그림체로서 만화 독자, 호모 사피엔스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 그 자체 역시 특정한 그림체가 아닙니다. 만약 현실과 우주만물이 특정한 그림체라고 해도, 이 그림체는 이연지 작가 그림체와 다릅니다.


만화 독자와 도가영은 다른 형식에 속합니다. 만화 그림체로서 도가영은 존재하고, 이건 도가영이 어느 정도 시각적이라는 뜻입니다. 만약 <우리사이느은>이 웹툰보다 웹소설이었다면, 그림체보다 글자들로서 도가영은 존재했을 테고, 도가영은 시각적이지 않았을 겁니다. 아무리 소설 작가가 뛰어난 필력을 발휘한다고 해도, 글자 도가영보다 그림체 도가영은 상대적으로 시각적입니다. 글자들이 사회적인/지배적인 기호이기 때문에, 글자들은 보편적입니다. 글자는 표준어가 될 수 있으나, 그림은 표준화(標準畵)가 되지 않습니다. 남한에는 표준어가 있으나, 표준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남한에 표준어가 있고, 표준화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림보다 글자는 훨씬 보편적입니다. 인터넷 유저들이 이모티콘(^_^;;)들을 어느 정도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것처럼, 그림 역시 보편적인 기호가 될 수 있으나, 표준어와 표준화가 다른 것처럼, 그림보다 글자는 훨씬 보편적입니다. 글자가 보편적이기 때문에, 글자는 고유한 특징을 (시각적으로) 뚜렷하게 드러내지 못합니다. 글자로서 도가영과 그림체로서 도가영은 다릅니다. 만약 <우리사이느은>이 애니메이션이 된다면, 성우는 도가영을 연기할 테고, 도가영에게는 목소리가 있을 겁니다. 만화 등장인물 도가영에게는 목소리가 없습니다.


만화 속에서 뭐라고 도가영이 말하든, 이것들은 글자들입니다. 도가영 대사들은 목소리가 아닙니다. 반면, 만약 <우리사이느은>이 애니메이션이 된다면, 애니메이션 <우리사이느은>에서 도가영은 목소리로 말할 겁니다. 애니메이션 시청자들은 성우가 잘 어울리거나 어울리지 않는다고 호평하거나 비판할 겁니다. 많은 애니메이션들은 이런 호평/비판을 감수해야 합니다. 심지어 서혜정 성우처럼, 어떤 성우들은 고정적인 목소리 이미지를 확보합니다. 만약 서혜정 성우보다 다른 여자 성우가 한국어 더빙 데이나 스컬리를 연기한다면, TV 드라마 시청자들은 뭔가가 어색하다고 느낄 겁니다.



이렇게 만화 독자와 도가영은 다른 세상에 속합니다. 만화 독자는 현실에 속하고, 도가영은 만화 속의 세상에 속합니다. 만화 <우리사이느은>에는 '또 다른 세상'이 있습니다. 현실에서 만화 독자가 도가영을 만나지 못하기 때문에, 만화 속의 세상은 '또 다른 세상'입니다. 한편으로 또 다른 세상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 아닙니다. 많은 측면들에서 현실과 또 다른 세상은 겹칩니다. 양쪽에는 교집합들이 있습니다. 만화 <우리사이느은> 1화를 보세요. 만화 1화 속의 '또 다른 세상'에서 스테고사우루스 화석이 존재하나요? 만화 <우리사이느은> 1화는 스테고사우루스 화석을 직접 보여주지 않습니다.


만화 1화가 스테고사우루스 화석을 직접 보여주지 않고, 만화 속의 세상이 또 다른 세상이기 때문에, 만화 1화 속의 세상에서 스테고사우루스 화석이 존재하지 않나요? 그건 아닐 겁니다. <우리사이느은> 1화 속의 또 다른 세상에서 스테고사우루스 화석은 존재할 겁니다. 아무리 만화 속의 세상이 또 다른 세상이라고 해도, 이 세상은 대체 역사를 거치지 않았을 겁니다. 만화 속의 세상에서 대략 138억 년 전에 우주는 나타났을 테고, 대략 45억 년 전에 지구는 나타났을 테고, 대략 5억 년 전에 생명 현상은 폭발적으로 번성했을 테고, 중생대 쥐라기에 커다란 스테고사우루스들은 나타났을 겁니다.



중생대 이후, (너무 애석하게도) 스테고사우루스들은 멸종했습니다. 스테고사우루스들은 화석이 되었을 테고, 그래서 <우리사이느은> 1화 속의 또 다른 세상에서도 스테고사우루스 화석은 존재할 겁니다. <우리사이느은> 속에서 그 자체로서 또 다른 세상은 존재하나, 현실에서 또 다른 세상은 완전히 벗어나지 않습니다. 적어도 거시적인 생명 진화 관점에서 현실과 <우리사이느은>은 교집합을 형성합니다. 비록 이연지 작가가 고생물학을 자세히 알지 못한다고 해도, 만화 속의 또 다른 세상에서 생명 진화 역사는 흐르고, 스테고사우루스는 진화했고 (너무 애석하게) 멸종했을 겁니다.


비록 이연지 작가가 스테고사우루스에 상관하지 않는다고 해도, 만화 독자는 만화 속의 또 다른 세상에서 스테고사우루스가 진화했고 멸종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연지 작가보다 현실이 훨씬 거대하기 때문입니다. 만화 작가보다 생명 진화 역사는 훨씬 거대하고, 비록 만화 작가가 커다란 골판 공룡을 의식하지 못했다고 해도, 이건 거시적인 생명 진화 역사에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독자 여러분, 이 만화 속에서 스테고사우루스는 진화하지 않았어요." 이렇게 이연지 작가는 말하지 못합니다. 만약 이연지 작가가 스테고사우루스 진화를 지우기 원한다면, 만화 장르는 바뀔 겁니다.



만약 이연지 작가가 스테고사우루스를 거부한다면, <우리사이느은>은 사이언스 픽션 같은 사변 장르(Speculative Fiction)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이 만화가 또 다른 세상을 보여주고, 그 자체로서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고 해도, 이 만화는 사이언스 픽션이 아닐 테고, 생명 진화 역사는 커다란 골판 공룡들을 낳았고 거두었을 겁니다. 그래서 뭐라고 이연지 작가가 말하든, <우리사이느은> 1화 속의 또 다른 세상에서 스테고사우루스 화석은 존재할 겁니다. 만약 도가영이 고생물학 강의에 참석한다면, 과제 보고서를 쓰기 위해 도가영은 스테고사우루스 화석을 조사해야 할지 모릅니다.


<우리사이느은>이 사변 장르가 아니기 때문에, 만화 독자는 스테고사우루스 화석이 존재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반면, 사변 장르가 이런 해석을 허용하나요? 사변 장르는 우주 창조, 생명 진화, 문명 발전을 새롭게 가공합니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사변 장르가 우주만물을 새롭게 해석하기 때문에, 사변 장르는 "스테고사우루스 화석은 존재한다." 같은 해석들을 거부할지 모릅니다. 애니메이션 <스머프: 비밀의 숲>을 보세요. <스머프: 비밀의 숲>에서 그 자체로서 또 다른 세상은 존재합니다. 애니메이션 속의 또 다른 세상 속에서 스테고사우루스 화석이 존재하고, 관객이 이것을 해석할 수 있나요?



[사변 장르는 생명 진화 역사를 새롭게 가공합니다. 그래서 사변 장르는 다양한 해석들을 제시합니다.]



만약 관객이 스머프 설정을 구체적으로 파악한다면, 관객은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관객이 오직 <스머프: 비밀의 숲>만 관람한다면, 관객은 애니메이션 속의 또 다른 세상에서 스테고사우루스가 진화했고 멸종했는지 파악하지 못할 겁니다. 이건 쉽지 않을 겁니다. 현실 속의 우주 창조, 생명 진화, 문명 발전에서 사변 장르가 훨씬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우리사이느은>과 <스머프: 비밀의 숲>은 모두 또 다른 세상을 보여주나, 사변 장르(동화)로서 <스머프: 비밀의 숲> 속의 또 다른 세상은 생명 진화 역사를 거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해석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소설 <상흔>은 스팀펑크 판타지입니다. 스팀펑크 판타지로서 <상흔>은 증기선과 둔클레오스테우스를 함께 보여줍니다. <상흔> 속의 또 다른 세상은 스팀펑크 판타지이고, 사변 장르로서 이 세상은 우주 창조, 생명 진화, 문명 발전을 복잡하게 뒤섞고 새롭게 가공합니다. 그래서 증기선과 둔클레오스테우스는 바스-라그 바다를 함께 누빌 수 있습니다. <상흔> 속의 또 다른 세상에서 둔클레오스테우스가 존재하기 때문에, 어떤 독자들은 여기에서 스테고사우루스 역시 존재한다고 해석할지 모릅니다. 이런 해석이 타당한가요? 바스-라그 동물학자가 살아있는 골판 공룡을 연구할 수 있나요?



<상흔>은 살아있는 스테고사우루스를 직접 보여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상흔>에서 둔클레오스테우스가 존재하고, 현실에서 둔클레오스테우스와 스테고사우루스가 모두 선사 시대 동물이기 때문에, <상흔>에서 둔클레오스테우스가 존재하는 것처럼, 스테고사우루스 역시 존재할지 모릅니다. 아니면 오직 둔클레오스테우스만 존재하고, 스테고사우루스는 존재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만약 독자가 소설 작가 차이나 미에빌에게 묻는다면, 차이나 미에빌은 정답을 알려줄지 모릅니다. 하지만 만약 차이나 미에빌이 독자 해석에 정답을 맡긴다면? 만약 독자가 차이나 미에빌에게 묻지 못한다면?


이런 상황에서 소설 독자는 스스로 해석해야 하나, 독자는 살아있는 골판 공룡이 정말 존재하는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우리사이느은>이 사변 장르가 아니기 때문에, 만화 독자는 <우리사이느은>에서 스테고사우루스가 진화했다고 해석할 수 있고, 이연지 작가 의도는 이것을 거부하지 못하나, <상흔>이 스팀펑크 판타지이기 때문에, <상흔>은 훨씬 다양한 해석들을 제시하거나 특정한 해석들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비단 자연 과학만 아니라 사회 과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른바 '바스-라그 3부작'에서 소설 <상흔>은 2편입니다. 소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은 첫째 이야기, 1편입니다.



소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에서 주된 배경 무대는 뉴크로부존이고, 뉴크로부존은 전형적인 19세기 서구 산업 자본주의 도시입니다. 전형적인 산업 자본주의는 경제 공황을 일으킵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전반적으로 자본가 계급은 임금들을 최대한 줄이기 원하고 상품들을 최대한 많이 팔기 원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전반적으로 임금들이 줄어들기 때문에, 소비 능력은 줄어듭니다. 전반적으로 상품들이 늘어나기 때문에, 생산력은 증대합니다. 두 가지 상황은 충돌하고, 1930년대 세계 대공황, 2008년 금융 대란처럼, 결국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경제 공황을 일으킵니다.


자본주의가 경제 공황을 필연적으로 일으키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절대 지속 가능하지 않습니다. 주류 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가 최선이라고 지껄여대나, 이건 그저 무식한 헛소리, 미친 망상에 불과합니다. 자본주의는 경제 공황을 일으키고, 이것을 수습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막대한 통화량을 퍼붓습니다. 어떻게 자본주의가 막대한 통화량을 퍼부을 수 있나요? 자본주의가 식민지들을 너무 끔찍하게 수탈하고 막대한 부를 축적하기 때문입니다. 학교 경제학 교과서들은 이런 사실을 절대 언급하지 않습니다. 학교 경제학 교과서들이 추악한 거짓말, 자본주의 만만세를 씨부렁거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경제학 교과서들이 어린 학생들을 세뇌하기 원한다고 해도, 진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비참한 낭떠러지, 경제 공황을 향해 돌진합니다. 뉴크로부존은 산업 자본주의 도시입니다. 뉴크로부존이 19세기 서구 산업 자본주의와 비슷하기 때문에, 아직 뉴크로부존은 1930년대 세계 대공황과 2008년 금융 대란 같은 극심한 파국에 부딪히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19세기 서구 자본주의가 경제 공황을 겪은 것처럼, 뉴크로부존은 경제 공황을 겪었을 겁니다. 이게 타당한 해석인가요? 뉴크로부존은 비단 자본주의 도시일 뿐만 아니라 스팀펑크 판타지 도시입니다.


스팀펑크 판타지 도시로서 뉴크로부존에는 비인간 종족들, 마법사들, 오토마톤들, 초자연적인 존재들, 외계인들이 있습니다. 현실과 달리, 또 다른 세상 뉴크로부존은 스팀펑크 판타지입니다. 마법사들과 외계인들이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자본주의 작동 원리는 완충 효과를 얻고 경제 공황을 향해 돌진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뉴크로부존은 경제 공황을 겪은 적이 없을지 모릅니다. 아니면 오토마톤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뉴크로부존은 2008년 금융 대란 같은 파국을 겪었는지 모릅니다. 어떻게 소설 독자가 해석할 수 있나요? 무슨 해석이 훨씬 타당하거나 훨씬 비약인가요?



심지어 소설 작가 차이나 미에빌조차 쉽게 대답하지 못할 겁니다. 만약 차이나 미에빌이 뉴크로부존이 경제 공황을 겪지 않는다고 대답한다면, 어떤 독자들은 왜 뉴크로부존이 경제 공황을 겪어야 하는지 따질지 모릅니다. 독자들은 <자본론>과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을 비교하고 경제 공황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게 타당한 해석인가요? 아무리 일반적으로 스팀펑크가 19세기 서구 산업 자본주의에 기반하고, <자본론>이 19세기 서구(영국) 산업 자본주의를 분석한다고 해도, 독자들이 <자본론>과 스팀펑크 판타지를 비교할 수 있나요? <자본론>은 외계인을 말하지 않습니다.


소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이 스팀펑크인 것처럼, 비디오 게임 <프로스트펑크>는 스팀펑크입니다. <페르디도 기차역>은 비인간 종족들, 마법사들, 오토마톤들, 초자연적인 존재들, 외계인들을 보여주나, <프로스트펑크>는 오토마톤들 이외에 비인간 종족들과 마법사들과 외계인들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페르디도 기차역>과 달리, <프로스트펑크>는 다소 심심한(?) 스팀펑크입니다. 하지만 <페르디도 기차역>처럼, 스팀펑크로서 <프로스트펑크>는 19세기 서구 문명에 기반합니다. 19세기 서구 문명에는 (급진적이거나 온건한) 사회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프로스트펑크>는 어떤가요?



19세기 서구 문명에 사회주의자들이 있었고, <프로스트펑크>가 19세기 서구 문명에 기반하기 때문에, 게임 속의 또 다른 세상, 최후의 도시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존재하나요? 만약 최후의 도시에 사회주의자들이 있다면, 그들이 급진적인가요, 아니면 온건한가요? 19세기 서구에서 유럽 대륙과 달리, 섬나라 영국은 온건 좌파에 가까웠습니다. <프로스트펑크>에서 최후의 도시가 독일 같은 대륙 문화보다 영국 문화에 가깝기 때문에, 만약 최후의 도시에 사회주의자들이 있다고 해도, 그들은 급진적이기보다 온건할지 모릅니다. 그들은 프리드리히 엥겔스보다 오스카 와일드에 가까울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미 18세기 영국에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페미니즘 서적을 썼습니다. 19세기 서구 문명에서 페미니즘은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습니다. 최후의 도시는 어떤가요? 만약 최후의 도시에 사회주의자들이 있다면, 그들이 페미니즘을 의식하나요? 얼마나 급진적으로 그들이 여자 무급 노동을 비판하고 돌봄 노동 사회화를 주장하나요? <프로스트펑크>는 '사회' 생존 게임이고, 이 게임은 사회 구조가 핵심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게임 플레이어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와 최후의 스팀펑크 도시를 비교할 수 있으나, 이런 비교가 타당한가요? 최후의 스팀펑크 도시는 현실이 아닙니다.



[최후의 도시에는 사회주의자들이 있을지 모르고, 그들은 여자 유급 노동을 강력하게 주장할지 모릅니다.]



이렇게 사변 장르는 온갖 해석들을 제시하거나 거부합니다. 그래서 사변 장르를 해석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사례들 이외에 사변 장르에는 아주 다양한 해석들이 있습니다. 만약 스페이스 오페라가 생체 우주선을 직접 보여주지 않는다면, 스페이스 오페라 속의 또 다른 세상에서 생체 우주선이 존재하지 않나요? 만약 사이버펑크가 비행 자동차를 직접 보여주지 않는다면, 사이버펑크 속의 또 다른 세상에서 비행 자동차가 존재하지 않나요? 만약 중세 유럽 판타지가 드루이드와 동물 동료를 직접 보여주지 않는다면, 중세 유럽 판타지 속의 또 다른 세상에서 드루이드가 존재하지 않나요?


나오미 노빅은 소설 <업루티드>를 썼습니다. 이 소설은 중세 판타지에 속하나, 이 소설은 드루이드와 검치 호랑이 동료를 직접 언급하지 않습니다. 비디오 게임 <엘더 스크롤 V: 스카이림>은 중세 판타지에 속하나, 이 게임은 드루이드와 검치 호랑이 동료를 직접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업루티드>와 <스카이림>에서 드루이드가 존재하지 않나요? 만약 소설 독자와 게임 플레이어가 "드루이드는 존재한다."라고 해석한다면, 이게 틀린 해석인가요? 이런 해석들은 충돌하고 갈등하고 대립합니다. 그 자체로서 '또 다른 세상'은 존재하나, 사변 장르는 너무 대립적인 해석들을 제시합니다.



만화 독자는 <우리사이느은>에서 스테고사우루스 화석이 존재한다고 해석할 수 있으나, 만화 독자 해석과 달리, 사변 장르 해석들은 충돌하고 갈등하고 대립합니다. <상흔>에서 살아있는 골판 공룡은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습니다. <프로스트펑크>에서 사회주의자들은 여자 무급 노동을 비판하거나 비판하지 않습니다. <업루티드>에서 드루이드는 자연 신성 주문을 외우거나 외우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지적할지 모릅니다. "왜 사변 장르가 비일상적으로 상상하고 '비(非)현실'을 이야기하는가? 비(非)현실은 너무 모호한 해석들을 늘어놓는다. 비현실은 너무 부정적이다."


네, 맞습니다. 비(非)현실은 너무 모호한 해석들을 늘어놓고, 사변 장르에게 이건 치명적인 한계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만약 사변 장르에게 이런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면, 왜 사람들이 사변 장르를 좋아하나요? 왜 사람들이 <페르디도 기차역>과 <업루티드>와 <프로스트펑크>와 <스카이림>을 좋아하나요? 유력한 대답들 중에서 하나는 '보색 효과'인지 모릅니다. 독자가 <자본론>과 <페르디도 기차역>을 비교하는 동안, 비현실로서 <페르디도 기차역>은 현실 <자본론>을 강조합니다. <페르디도 기차역>은 거울이 되고, 독자는 거울을 바라보고 <자본론>을 훨씬 뚜렷하게 인식합니다.



모태 솔로는 자신이 솔로 상태라고 인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모태 솔로가 <우리사이느은>과 다정한 두 연인을 본다면, 모태 솔로는 자신과 다정한 두 연인을 대조하고 자신이 솔로 상태라고 훨씬 뚜렷하게 의식할 겁니다. 평소보다 12월 24일에 모태 솔로는 다른 평범한 날짜들과 화사한 연말 휴일을 대조하고 자신이 솔로 상태라고 훨씬 뚜렷하게 의식할 겁니다. 이런 사례들은 너무 외롭고 쓸쓸(T-T)하나, 이런 사례는 왜 보색 효과가 중요한지 여실히 증명합니다. 거울 속의 상(像)은 진짜가 아닙니다. 거울은 그저 현실을 반영할 뿐입니다. 거울 속의 상은 진짜보다 '반영'입니다.


하지만 거울이 반영하기 때문에, 인간은 거울을 바라보고 자신을 훨씬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변 장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페르디도 기차역>이 거울이 되기 때문에, 독자는 현실로서 <자본론>을 훨씬 뚜렷하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사변 장르를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특히, 다른 사변 장르들과 달리, 사이언스 픽션은 시대 격차를 일으킵니다. 사변 장르들 중에서 사이언스 픽션은 서구 근대화를 가장 부각합니다. 서구 근대적인 사회에서 우리가 살아가기 때문에, 다른 사변 장르들(신화, 판타지, 공포, 기타)보다 사이언스 픽션은 현실을 훨씬 부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만약 SF 팬들이 서구 근대화가 무엇인지 자각하지 못한다면, 비록 SF 팬들이 사이언스 픽션을 들여다본다고 해도, SF 팬들은 치명적인 한계에 부딪힐지 모릅니다. 아무리 서구 문명이 끔찍한 폭력을 휘두른다고 해도, 많은 사람들은 이런 폭력을 진보라고 미화하고 포장합니다. 서구 문명 폭력은 진보가 되고, 비(非)서구 지역 폭력은 야만이 됩니다. 이런 착각 속에서 SF 팬들은 서구 근대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합니다. SF 장르는 만능 열쇠가 아닙니다. 그래서 SF 팬들이 SF 장르를 들여다보는 동안, SF 팬들은 서구 근대화가 무엇인지 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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