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외계 생명체를 읽는 인간, 페미니즘을 외치는 남자 본문
SF 소설이 선사하는 가장 큰 재미는 무엇일까요. 아니, 비단 SF 소설만 아니라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장르가 선사하는 가장 큰 재미는 무엇일까요. 저는 인간 이외에 다른 생명체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생물이든, 식물이든, 동물이든, 아니면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그 어느 생명체이든, 어쨌든 우리는 사이언스 픽션 속에서 여러 생명체들을 만날 수 있어요. 사실 우리 자신이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대부분 인간만 이야기하고 인간과 어울리고 인간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인간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인간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다른 생명체를 무시하거나 외면할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에게 집중하는 동시에 얼마든지 다른 생명체들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 문명만 떠받들 이유가 없어요. 다른 생명체들에게 얼마든지 관심을 기울일 수 있어요. 그때 우리는 이 세상이 더 넓고 복잡하다는 (아주 당연하고) 놀라운 사실을 깨달을 수 있죠. 이른바 주류 소설들은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어떤 소설들은 문명의 본질을 꿰뚫을 수 있으나, 대부분 주류 소설들은 문명의 본질을 꿰뚫지 못하고 다른 생명체들도 주시하지 못하죠.
물론 SF 소설만 인간 이외의 생명체들을 이야기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른바 자연 문학이나 동물 문학 역시 다른 생명체들을 논할 수 있어요. 어니스트 톰슨 시튼이 쓴 늑대 로보나 여우 빅슨 같은 소설들은 그렇습니다. 장룽이 지은 <늑대 토템>은 자연 문학이 아니나, 이런 소설 역시 인간 이외의 생명체들을 자세히 표현합니다. 하지만 이런 소설들은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생명체들만 이야기할 뿐입니다. 우리가 직접 만나지 못하는 (비조류) 공룡이나 매머드나 검치호랑이를 이야기하지 못하죠. 인간이 그런 생명체와 어울리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 작가는 과학적 상상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게다가 우리는 미래에 무슨 생명체가 등장할지 이야기할 수 있을 겁니다. 자연 생태계는 꾸준히 변하고, 아마 몇 만 년 이후에 새로운 생명체들이 등장할지 모르죠. 아울러 우리는 새로운 생명체들을 만들 수 있어요. 클리포드 시맥이나 아서 클라크가 묘사한 것처럼 지능이 높은 개들이나 돌고래들을 만들지 모르죠. 아니, 왜 이런 상상력이 지구 안에서만 머물러야 할까요. 우리는 우주를 바라볼 수 있고, 외계 생명체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외계 생명체를 상상한다고 해도 그런 상상은 틀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외계 생명체가 무엇일지 저는 상상하지 못하겠어요. 제가 상상할 수 있는 외계 생명체는 그저 미생물들뿐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고증이 맞거나 틀리거나) 우리가 인간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인간적인 사고 방식에서 조금 더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SF 소설은 과학 논문이 아닙니다. 빅 데이터가 궁금하다고 해도 SF 소설 속에서 해답을 찾지 못할 겁니다. 소설을 읽는 대신 과학 논문들을 뒤적이는 편이 나을 겁니다.
하지만 SF 소설들은 주류적인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라고 말하고, 그래서 우리는 인간적인 사고 방식에서 좀 더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관습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할 겁니다. 그건 불가능하겠죠. 스타니스와프 렘이 지적한 것처럼 아무리 열심히 하드 SF 소설들을 읽어도 우리는 외계 생명체를 본질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겠죠.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하드 SF 소설에서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SF 소설을 읽기 위해 외계 생명체가 될 이유는 없습니다. 수많은 SF 독자들은 외계 생명체가 아니나, 외계 생명체 이야기를 읽죠.
이런 관점을 다른 대상에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가령, 페미니즘은 어떨까요. 종종 어떤 사람들은 페니미즘이 여자들만의 운동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왜 페미니즘이 여자들만의 운동인가요? 분명히 억압을 받는 계급은 여자들이나, (기득권에 속하는) 남자들 역시 여자들을 이해할 수 있어요. 페미니즘은 모두를 위한 철학입니다. 수많은 독자들이 하드 SF 소설을 읽고 감탄하는 것처럼 남자들은 얼마든지 페미니즘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하드 SF 소설의 외계 생명체들보다 수탈을 당하는 여자들을 이해하기가 훨씬 쉬울 겁니다. 페미니즘 운동에 뛰어드는 이유는 여자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수탈을 당하는 계급을 이해하고 분노하기 때문입니다. 페미니즘은 성 평등 운동이나, 성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수탈을 당하는 계급이 있다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고 분노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그걸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런 수탈을 막고 싶다면, 주류적인 계급 관계를 전복해야 할 겁니다. 우리는 가족을 해체하고 공공 육아를 주장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방법들이 너무 성급하게 보인다면, 좀 덜 성급한 방법들을 제안할 수 있고요.
어쨌든 저는 뭔가를 이해하기 위해 그 대상이 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남자들 역시 얼마든지 전투적인 페미니즘 운동에 뛰어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