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왜 <세인트 테일>이 도둑과 탐정을 이야기하는가 본문
[소녀와 소년은 도둑과 탐정이 되고, 도둑과 탐정의 숨바꼭질은 사랑의 숨바꼭질을 비유합니다.]
다치가와 메구미가 그린 만화 <괴도 세인트 테일 (천사 소녀 네티)>은 로맨스 장르입니다. 당연히 로맨스 장르는 연인을 보여줘야 할 겁니다. 로맨스 장르로서 <괴도 세인트 테일>에서 두 주연은 하네오카 메이미와 아스카 다이키입니다. 양쪽은 같은 학급 학생이나, 사이는 별로 좋지 않습니다. 하네오카 메이미는 아스카 다이키에게 시비를 걸곤 하고, 아스카 다이키는 하네오카 메이미에게 쏘아붙이곤 합니다. 메이미와 다이키가 대화를 시작할 때, 학급 친구들은 양쪽이 또 다시 싸울 거라고 예상하고, 이런 예상은 별로 틀리지 않습니다.
하네오카 메이미와 아스카 다이키는 비단 같은 학급 학생으로서만 아니라 도둑과 탐정으로서도 정말 경쟁 상대입니다. 사실 하네오카 메이미는 단순한 학생이 아니라 마법 도둑 소녀입니다. 메이미는 세인트 테일이라는 도둑으로 변신하고 보물들을 훔칩니다. 메이미의 몸놀림이 아주 날렵하고, 게다가 메이미가 신기한 마술들을 부리기 때문에, 경찰은 세인트 테일을 쉽게 사로잡지 못합니다. 세인트 테일이 보물을 훔칠 때마다, 경찰은 허탕을 치곤 합니다. 아스카 다이키는 열정적인 우등생 탐정이고, 그래서 아스카 다이키는 세인트 테일 사건을 전담합니다. 다이키는 오직 자신만이 세인트 테일을 체포할 수 있다고 당당하게 장담합니다.
하지만 이런 호언장담과 달리, 대부분 사건들에서 아스카 다이키는 세인트 테일보다 훨씬 늦습니다. 아무리 아스카 다이키가 똑똑한 우등생 탐정이라고 해도, 다이키는 날렵한 운동 신경과 신비한 마술들을 당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설정상 다이키는 천재적인 두뇌 회전을 자랑하나, 설정과 달리, 다이키는 천재적인 두뇌 회전을 거의 보여주지 않습니다. 만화 속에서 다이키는 허당, 몸개그, 슬랩스틱 코미디를 맡습니다. 애니메이션에서 이런 허당과 몸개그는 훨씬 심해집니다. 이건 언제나 아스카 다이키가 무능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종종 다이키는 꽤나 날카롭게 세인트 테일을 파악합니다.
이런 직감 덕분에 아스카 다이키는 계속 세인트 테일 전담 탐정이 될 수 있습니다. 놀이 공원 사건은 아스카 다이키의 날카로운 직감을 증명합니다. 놀이 공원에서 세인트 테일 퍼레이드 때문에 다들 당황하는 동안, 아스카 다이키는 누가 진짜 세인트 테일인지 파악하고 쫓습니다. 세인트 테일은 다이키가 자신을 찾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고 꽤나 당황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다이키는 신기한 마술들을 당하지 못하고 "나는 반드시 너를 잡을 거야!"라고 외칩니다. 이런 다이키를 향해 세인트 테일은 "그래, 네가 나를 잡을 수 있다면, 어디 한 번 잡아봐."라고 도발이 아닌 도발을 건넵니다.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하네오카 메이미가 아스카 다이키를 만날 때, 메이미는 다이키를 놀립니다. "다이키, 또 다시 세인트 테일을 놓쳤지?" 언제나 메이미는 다이키에게 이것을 묻고, 다이키는 "이건 너와 아무 상관이 없어!"라고 쏘아붙입니다. 결국 양쪽은 티격태격합니다. 애니메이션에서 이런 전개는 훨씬 반복적입니다. 이런 전개는 거의 시트콤 같습니다. 하지만 양쪽 관계는 그저 도둑과 탐정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괴도 세인트 테일>은 그저 도둑 이야기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어떤 관점에서 도둑 역할과 탐정 역할은 보조적입니다. 하네오카 메이미가 아스카 다이키를 좋아하고, 다이키 역시 메이미(세인트 테일)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다이키는 메이미와 세인트 테일이 닮았다고 의심합니다. 그리고 다이키가 세인트 테일의 정체를 밝히고 싶어하기 때문에, 다이키는 메이미에게 끌립니다. 메이미가 다이키를 좋아하기 때문에, 세인트 테일은 다이키가 자신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오기 바랍니다. 세인트 테일은 꾸준히 다이키에게 예고장을 보내고 다이키가 계속 자신을 쫓아오기 바랍니다. 하지만 양쪽은 도둑과 탐정입니다. 도둑은 보물을 훔치고 빠져나가야 하고, 탐정은 도둑을 잡아야 합니다. 도둑은 도망치고, 탐정은 쫓습니다. 하지만 도둑은 탐정이 자신을 쫓기 원하고, 탐정은 도둑(과 학급 동기)에게 끌립니다.
심지어 세인트 테일은 아스카 다이키에게 말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나를 잡는다면, 나는 다이키 네가 나를 잡기 원해. 나는 너에게 잡히고 싶어." 이건 고백이 아닌 고백입니다. 도둑으로서 세인트 테일은 탐정에게 말했으나, 동시에 소녀로서 메이미는 좋아하는 소년에게 고백했습니다. 소녀는 자신의 마음을 다른 누구에게도 주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소녀는 오직 좋아하는 소년에게만 자신의 마음을 주고 싶어합니다. 어떤 누구도 소녀의 마음을 잡아서는 안 됩니다. 오직 좋아하는 소년만 소녀의 마음을 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소녀는 계속 편지들을 보냅니다. 예고장들은 연애 편지와 다르지 않습니다.
"나는 여기로 갈 거야. 내 마음을 잡아줘." 예고장들은 이런 편지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렇게 메이미(세인트 테일)가 열정적으로 고백함에도, 아스카 다이키는 이걸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심지어 아스카 다이키는 자신이 메이미(세인트 테일)를 좋아한다고 깨닫지 못합니다. 다이키는 천재적인 탐정이나, 천재적인 탐정은 자신의 심리를 헤아리지 못합니다. 하지만 종종 다이키는 저도 모르게 본심을 밝힙니다. "나는 반드시 너를 잡을 거야! 오직 나만 너를 잡을 수 있어!" 소년은 좋아하는 소녀에게 향합니다. 다른 누가 방해한다고 해도, 소년은 포기하지 않고 좋아하는 소녀에게 향합니다.
[이런 서정적이고 톡톡 튀는 음악은 소녀와 소년이 서로 두근거리며 숨바꼭질한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네오카 메이미(세인트 테일)와 아스카 다이키는 도둑과 탐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양쪽은 사랑의 숨바꼭질을 벌이는 중입니다. 세인트 테일과 아스카 다이키가 "나는 너에게 잡히고 싶어.", "나는 반드시 너를 잡을 거야."라고 대사를 날릴 때, 양쪽은 절절하게 마음을 고백합니다. 물론 양쪽이 도둑과 탐정이기 때문에, 아스카 다이키는 이게 사랑 고백이라고 쉽게 깨닫지 못합니다. 만화 독자는 이게 사랑 고백이라고 느끼나, 하네오카 메이미는 진실("나는 도둑이야.")을 직접 말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만화 <세인트 테일>은 도둑과 탐정을 이용해 두근거리는 사랑의 숨바꼭질을 펼칠 수 있습니다.
사실 연애는 숨바꼭질과 다르지 않습니다. 특히, 고백은 훨씬 그렇습니다. 연애 감정은 수줍고 부끄럽습니다. 사람들은 연애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못합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연애 감정을 감추기 원합니다. 하네오카 메이미 역시 연애 감정을 감추기 원합니다. 동시에 메이미는 아스카 다이키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기 바랍니다. 아스카 다이키 역시 연애 감정을 감춥니다. 메이미와 다이키는 숨어있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연애 감정이 꼭꼭 숨어있다고 해도, 메이미와 다이키는 찾아야 합니다. 사랑 고백과 연애 감정은 숨바꼭질과 다르지 않습니다. 만화 <괴도 세인트 테일>은 도둑과 탐정을 이용해 사랑의 숨바꼭질을 비유합니다.
<괴도 세인트 테일>은 일종의 비유입니다. 그 자체로서 이 만화는 사랑의 숨바꼭질을 비유합니다. "나는 네가 나를 잡기 원해." 이 대사는 "나는 네가 내 마음을 알아주기 원해."를 뜻합니다. 그래서 <괴도 세인트 테일>은 두근거리고 설레는 마음을 강조할 수 있습니다. 만약 하네오카 메이미와 아스카 다이키가 평범하게 연애한다면, '숨바꼭질'이라는 느낌은 크게 살아나지 않을 겁니다. 양쪽이 정말 숨바꼭질하기 때문에, 사랑의 숨바꼭질 역시 생생하게 살아날 수 있습니다. 도둑과 탐정이라는 역할은 소녀와 소년이라는 역할과 겹치고, 도둑과 탐정의 숨바꼭질은 사랑의 숨바꼭질로 승화합니다.
이렇게 문학적인 비유는 감정을 과장하고 확대하고 강조할 수 있습니다. 세인트 테일이 아스카 다이키를 도발할 때, 어떤 관점에서 이건 "자기야, 나 잡아봐~♡"라는 장난과 다르지 않습니다. 세인트 테일이 "아스카 주니어, 나를 잡아봐."라고 도발할 때, 소녀는 좋아하는 소년이 정말 자신을 잡기 원할 겁니다. 이건 도둑으로서 도발이고, 동시에 이건 사랑 고백입니다. 사랑 고백이 도발과 비슷하기 때문에, <괴도 세인트 테일>은 두근거리는 고백을 훨씬 강조할 수 있습니다. 만약 메이미와 다이키가 평범한 연인이었다면, 이런 두근거리는 강조는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문학적인 비유는 중요합니다. 우리가 어떤 감정을 표현하기 원할 때, 우리는 그것을 직접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너무 시시하거나 밋밋하거나 쓸쓸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문학적인 비유를 이용해 우리의 감정을 훨씬 확대하고 강조하고 과장할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 역시 이런 문학적인 과장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며칠 전에 5월 18일 게시글이 설명한 것처럼, 소설 모음집 <자신을 행성이라고 생각한 여자> 후기에서 반다나 싱은 '사변 소설 선언문'을 발표합니다. 사변 소설은 황당무계합니다. 사변 소설은 우주 나비와 대체 역사와 동물 변신술사를 보여줍니다. 현실에 이런 것들이 없기 때문에, 사변 소설은 황당무계합니다.
하지만 이런 황당한 이야기들은 문학적인 비유입니다. 사변 소설은 20세기 신화와 전설과 민담입니다. 우리가 신비로운 생물 다양성을 이야기하고 싶다면, 우리는 외계 자연 생태계를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웅장한 대자연을 예찬하고 싶다면, 우리는 거대 괴수를 비유할 수 있습니다. 만화 <괴도 세인트 테일>이 소녀와 소년을 도둑과 탐정에 비유하고 연애 감정을 숨바꼭질에 비유하는 것처럼, 사변 소설은 웅장한 대자연을 거대 괴수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황당무계는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황당무계가 나쁜 것이라고 간주합니다. 하지만 일상 속에서 이런 사람들 역시 온갖 비유들을 언급할 겁니다.
"나는 너의 영혼을 사랑해." 이렇게 이웃집 영희가 옆동네 철수에게 고백할 때, 사람들은 이런 고백이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21세기 자연 과학은 인간 신체에 영혼이 없다고 설명합니다. 사실 사람들은 영혼이 정말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고백이 황당무계하지 않고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고백이 사랑을 종교적인 차원으로 승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은 영혼을 만듭니다. 신은 성스러운 존재이고, 그래서 영혼 역시 성스럽습니다. 영희가 철수의 성스러운 영혼을 언급하기 때문에, 철수는 성스러운 존재가 되고, 성스러운 존재를 사랑하는 마음은 종교적인 차원으로 승화합니다.
그래서 영희는 "나는 너를 정말 좋아해."라고 말하지 않고 "나는 너의 영혼을 사랑해."라고 말합니다. 사변 소설은 이런 고백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외계 자연 생태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21세기 자연 과학은 아직 외계 자연 생태계를 찾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왜 사변 소설이 외계 자연 생태계를 보여주나요? 왜 스페이스 오페라 게임들이 외계 밀림과 외계 야수들을 보여주나요? 왜 <언클레임드 월드> 같은 사이언스 픽션이 기이하고 비일상적인 외계 식생을 보여주나요? 이건 비유입니다. 이건 자연이 풍성하고 원대하고 신비롭다는 비유입니다.
[소녀와 소년이 도둑과 탐정이 되는 것처럼, 신비한 자연을 바라보는 마음은 외계 생태계를 이야기합니다.]
물론 이런 비유 없이 우리는 뭔가를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기계가 아닙니다. 인간이 자신의 감정을 말하기 원할 때, 인간은 감정을 과장하고 확대하고 강조하기 원합니다. 솔직히 설레고 두근거리는 사랑 앞에서 "나는 너를 좋아해."라는 문구는 너무 밋밋한지 모릅니다. 영희는 영혼을 언급하고 사랑 고백을 훨씬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솔직히 대자연 앞에서 '신비롭다'는 단어는 너무 밋밋합니다. 우리는 외계 자연 생태계를 이용해 이런 감정을 훨씬 과장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