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허구로서 주류 문학과 사이언스 픽션 본문
소설, 연극, 만화, 영화, 게임, 기타 등등. 이런 것들은 허구입니다. 창작물은 허구입니다. 문학 교과서들은 창작물이 허구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종종 허구와 사실은 겹칩니다. 극장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에서 톰 행크스는 톰 행크스를 연기합니다. 톰 행크스는 톰 행크스 자신을 연기합니다. 엔딩 크레딧은 톰 행크스가 자신을 연기한다고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게 가능합니까? 톰 행크스가 톰 행크스를 연기할 수 있나요? 톰 행크스는 톰 행크스입니다. 톰 행크스는 톰 행크스를 연기하지 않아요. 물론 현실 속의 톰 행크스와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 속의 톰 행크스는 다를 겁니다.
현실은 애니메이션이 아닙니다. 아무리 현실 속의 톰 행크스가 애니메이션 속의 톰 행크스를 연기한다고 해도, 애니메이션 속의 톰 행크스가 현실 속의 톰 행크스 자신이라고 해도, 관객들은 두 톰 행크스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속의 톰 행크스는 그림체입니다. 현실 속의 톰 행크스는 그림체가 아닙니다. 현실 속의 톰 행크스가 어떤 그림체나 어떤 기호라고 해도, 애니메이션 속의 그림체와 현실 속의 그림체는 다릅니다. 영화 <맨 인 블랙 2>에서 마이클 잭슨이 마이클 잭슨 본인을 연기하는 것처럼, 만약 <심슨 가족>이 실사 영화이고, 정말 영화 속에서 톰 행크스가 톰 행크스 본인을 연기한다고 해도, 영화에는 각종 촬영 기법들이 있습니다.
애니메이션보다 실사 영화는 훨씬 정교합니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처럼, 실사 영화에는 기호가 있습니다. 실사 영화는 각종 촬영 기법들을 이용해 현실을 기호화합니다. 영화 감독이 카메라와 조명과 반사판과 시점을 선택하는 순간, 영화 촬영은 현실을 기호로 만듭니다. 이런 기호(실사 영화 촬영 기법들) 속에서 톰 행크스가 존재한다면, 실사 영화 속에서 톰 행크스가 톰 행크스 본인을 연기한다고 해도, 관객들은 현실 속의 톰 행크스와 실사 영화 속의 톰 행크스를 구분할 수 있을 겁니다.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에 톰 행크스가 나온다고 해도, 관객들은 진짜 톰 행크스와 가짜 톰 행크스를 헛갈리지 않을 겁니다. 관객들은 이게 그저 재미있는 카메오일 뿐이라고 웃을 겁니다.
물론 어떤 관객들은 미즈 마블과 브리 라슨을 구분하지 못하거나 크리스 프랫이 정말 스타 로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브리 라슨을 욕하기 위해 관객들이 캡틴 마블을 욕하거나, 스타 로드를 욕하기 위해 사람들이 크리스 프랫 SNS를 테러한다면, 이건 꽤나 기이한 난장판이 될 겁니다. 솔직히 현실 속에서도 사람들은 무엇이 사실인지 구분하지 못합니다. 수 천 년 동안 가부장 문화가 여자들을 억압했음에도, 사람들은 가부장 문화를 관대하게 용서하고 몇몇 극단적인 여자들을 맹렬하게 물어뜯습니다. 이건 그저 지랄병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중립을 지킨다고 운운하나, 많은 사람들은 그저 지랄발광할 뿐입니다.
보수 우파 지식인들이 지랄발광하기 때문에, 보수 우파가 너무 폭력적이기 때문에, 민중들은 저도 모르게 지랄발광을 모방합니다. 민중들에게 무슨 죄가 있습니까. 보수 우파 지식인들이 지랄발광하고 사실과 거짓을 뒤섞기 때문에, 민중들은 그저 세뇌를 당할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사람들은 현실 속의 톰 행크스와 애니메이션 속의 톰 행크스가 섞이지 않는다고 생각할 겁니다. 진짜 문제는 두 톰 행크스가 다르다고 해도, 두 톰 행크스에게 어느 정도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두 톰 행크스가 다르다고 해도, 애니메이션 속의 톰 행크스는 현실 속의 톰 행크스를 어느 정도 모방합니다.
많은 관객들은 페르소나 연기를 중시합니다. 만약 톰 행크스가 자신을 연기한다면, 이게 페르소나 연기가 되나요?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 릭 데커드(해리슨 포드)는 케이(라이언 고슬링)와 투닥투닥 싸웁니다. 이건 연기입니다. 하지만 촬영 현장에서 해리슨 포드는 실수로 정말 라이언 고슬링을 때린 적이 있습니다. 만약 라이언 고슬링이 비명을 질렀고 피를 흘렸다면, 드니 빌뇌브 감독이 이 장면을 촬영했고 영화로 만들었다면, 이 장면이 허구인가요, 아니면 허구가 아닌가요? 해리슨 포드가 라이언 고슬링을 정말 때렸을 때, 라이언 고슬링이 비명을 질렀다면, 이건 연기보다 진짜 비명일 겁니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가 이 비명을 들려준다면, 관객들은 연기보다 진짜 비명을 들을 겁니다. 하지만 영화가 허구이기 때문에, 관객들은 그게 진짜 비명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겁니다. 나중에 관객들은 영화 촬영 후일담을 찾아보고 그게 진짜 비명이라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허구이기 때문에, 영화 속의 비명은 허구가 됩니다. 라이언 고슬링이 정말 아파했고 피를 흘렸다고 해도, 이건 허구가 됩니다. 허구적인 영화는 진짜 비명을 담습니다. 관객들은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와 영화 속의 비명이 모두 허구라고 간주할 수 있으나, 해리슨 포드가 때리는 순간, 라이언 고슬링은 정말 비명을 질렀습니다.
허구 속에는 사실이 있을지 모릅니다. 영화 <라스트 액션 히어로>는 메타 창작물이고 패러디입니다. 영화 속에서 아놀드 슈왈제네거는 액션 영웅 잭 슬레이터를 연기합니다. 나중에 잭 슬레이터는 (가짜) 아놀드 슈왈제네거를 만납니다. 그래서 아놀드 슈왈제네거는 아놀드 슈왈제네거를 연기합니다. 아놀드 슈왈제네거는 아놀드 슈왈제네거를 연기하고 동시에 아놀드 슈왈제네거는 잭 슬레이터를 연기합니다. 여기에서 진짜 아놀드 슈왈제네거, 가짜 아놀드 슈왈제네거, 진짜 잭 슬레이터는 다릅니다. 우리는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실존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네, 아놀드 슈왈제네거는 실존 인물입니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진짜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연기하는 가짜 아놀드 슈왈제네거와 (진짜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연기하는) 진짜 잭 슬레이터 중에서 누가 훨씬 허구에 가까운가요? 적어도 진짜 잭 슬레이터는 자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잭 슬레이터는 이른바 '제4의 벽'을 깨뜨리고 자신이 영화 속의 등장인물이라고 깨닫습니다. 하지만 가짜 아놀드 슈왈제네거는 자신이 영화 속의 등장인물이라고 깨닫지 못합니다. (진짜)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가짜) 아놀드 슈왈제네거를 연기한다고 해도, (가짜) 아놀드 슈왈제네거는 등장인물입니다.
잭 슬레이터가 제4의 벽을 깨뜨렸기 때문에, 잭 슬레이터는 사실에 훨씬 가깝습니다. 영화 <클라우즈 오브 실스 마리아>에서 줄리엣 비노쉬는 마리아 엔더스를 연기합니다. 마리아 엔더스는 배우입니다. 그리고 줄리엣 비노쉬 역시 배우입니다. 배우로서 줄리엣 비노쉬는 배우 마리아 엔더스를 연기합니다. 발렌틴이 마리아 엔더스와 충돌할 때, 발렌틴은 영화 속의 등장인물이나, 배우로서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배우를 비판하는 발렌틴을 연기합니다. 발렌틴이 배우를 비판할 때, 배우로서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배우를 비판해야 합니다. 발렌틴이 배우를 비판할 때,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여기에 공감하나요?
영화 속에서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발렌틴을 연기할 때,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자신이 배우라는 사실을 자각하나요?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그걸 자각할 겁니다. 발렌틴이 배우를 비판한다면,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배우이기 때문에) 이 비판은 크리스틴 슈트어트 자신을 향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배우이나, 배우로서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배우를 비판하는 발렌틴을 연기해야 합니다. 영화 <라스트 액션 히어로>와 달리, <클라우즈 오브 실스 마리아>는 노골적인 패러디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도 <라스트 액션 히어로>처럼, <클라우즈 오브 실스 마리아>에는 메타 창작물 같은 요소가 있어요.
<클라우즈 오브 실스 마리아>는 창작물(연극)을 이야기하는 창작물(영화)입니다. 관객들이 <클라우즈 오브 실스 마리아>를 보는 동안, 관객들은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제4의 벽을 깬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사실 이 영화에는 그런 단서들이 있습니다. 남자 영화 감독이 두 여자 배우(줄리엣 비노쉬와 크리스틴 스튜어트)를 이용해 여자들 관계를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남자 영화 감독이 여자를 이야기한답시고 어설프게 여자들 관계에 접근하지 않나요? <클라우즈 오브 실스 마리아>는 이런 메타 창작물 같은 물음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줄리엣 비노쉬와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정말 환상적인 호흡을 보여줍니다. 아아, 황홀하여라.)
이런 메타 창작물이 사이언스 픽션과 만날 때, 메타 창작물은 꽤나 뻔뻔해집니다. 존 스칼지가 쓴 <레드셔츠>와 영화 <갤러시 퀘스트>는 좋은 사례입니다. 소설 <레드셔츠>와 영화 <갤럭시 퀘스트>는 스페이스 오페라를 풍자합니다. 영화 <갤럭시 퀘스트>에서 시고니 위버는 배우를 연기합니다. 배우로서 시고니 위버는 배우를 연기합니다. 시고니 위버는 배우이나, 영화 속에서 시고니 위버는 스페이스 오페라 배우가 되어야 합니다.
알란 릭맨이 (연기하는 알렉산더 데인이) 연기하는 라자러스 박사는 제4의 벽을 깨지 않으나, 알렉산더 데인이 커튼 콜을 운운하고 탄식할 때, 관객들은 알렉산더 데인이 제4의 벽을 깬다고 느낄 겁니다. <갤럭시 퀘스트>에는 정말 외계인들이 있고, 외계인들 때문에 알렉산더 데인은 정말 라자러스 박사가 되어야 합니다. <갤럭시 퀘스트>에서 배우는 배우를 연기하고 그 배우는 또 다시 누군가를 연기하나, 외계인들 덕분에 더 이상 연기는 연기가 아닙니다. <라스트 액션 히어로>에서 아놀드 슈왈제네거(잭 슬레이터)가 (영화 속의) 아놀드 슈왈제네거를 만날 때, 허구와 사실은 뒤죽박죽입니다.
<클라우즈 오브 실스 마리아>에서 발렌틴과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혼연일체(?)가 되고 배우를 비판할 때, <갤러시 퀘스트>에서 배우가 배우를 연기함에도 연기가 연기가 아닐 때, 여기에서도 허구와 사실은 뒤죽박죽입니다. 물론 이런 메타 창작물들이 허구와 사실을 뒤섞는다고 해도, 관객들은 허구와 사실이 헛갈린다고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비평가들은 골치를 싸매고 이런 문제들을 고민하나, 일상 속에서 비평가들 역시 허구와 사실을 아주 정확하게 구분하지 않습니다. 사실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는 동안, 비평가들은 자신이 비평가라는 사실을 잊고 창작물 속에 빠집니다. 언제나 비평가는 비평가가 아닙니다.
사실 언제나 비평가가 100% 비평가라면, 비평가는 창작물을 '순수하게' 즐기지 못할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많은 사람들은 사실에 가까운 허구와 허구에 가까운 허구를 구분하기 원합니다. 공지영 소설과 김보영 소설은 똑같이 영으로 끝나는 작가 소설 허구이나, 많은 독자들은 '공지영 소설이 사실에 가까운 허구'이고 '김보영 소설이 허구에 가까운 허구'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리고 김보영 소설이 훨씬 허구에 가깝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공지영 소설보다 김보영 소설이 훨씬 황당무계하다고 비난할지 모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사이언스 픽션이 황당무계하다고 비난합니다. 하지만 정말 허구가 순수하게 허구입니까?
허구가 사실에서 완벽하게 독립할 수 있나요? 이 게시글이 여러 사례들을 보여주는 것처럼, 허구는 순수하게 허구가 아닙니다. 현실이 있기 때문에 허구는 나타나고, 허구와 사실은 겹칩니다. 만약 허구가 사실에서 완벽하게 독립하지 못한다면, 사이언스 픽션에게도 사실이 있을 테고, 사람들은 사이언스 픽션이 황당하다고 비난하지 못할 겁니다. 사람들이 사이언스 픽션을 비난한다면, 이건 얄팍한 비난이 될 거에요. 사람들은 어떻게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허구가 현실을 반영하는지 따져야 할 겁니다. 이건 훨씬 영양가가 높은 감상이 될 겁니다.
※ 영화 <클라우즈 오브 실스 마리아>를 관람한 이후, 어떤 사람들은 이 영화가 늙은 '여자'의 질투와 욕망을 표현한다고 말합니다. 아, 그래요? 왜 구태여 '여자'입니까? 왜 오직 여자만 질투와 욕망의 화신이 됩니까? 남자들이 흘러간 세월을 그리워하지 않나요? 늙은 남자들이 젊은 남자들을 부러워하지 않나요? 늙은 '남자'에게 흘러가는 세월이 무덤덤하다면, 왜 오스카 와일드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썼나요? 왜 도리언 그레이가 "나는 늙고 추해지겠으나, 이 그림은 영원히 젊겠지."라고 한탄했나요? 노래 <서른 즈음에>에서 김광석이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라고 씁쓸하게 읊조리는 것처럼, 유한한 인간에게 흐르는 세월은 서글플 겁니다. 여자와 남자와 다른 인간 모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