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홈월드>와 <현을 위한 아다지오>의 어울림 본문
[이런 스페이스 오페라에 무슨 음악이 어울리나요? 음악이 특정한 내용을 설명할 수 있나요?]
태양 플레어가 폭발한다면, 여기에 무슨 음악이 어울리나요? 태양 플레어가 폭발할 때, 우리가 무슨 음악을 들어야 하나요? 태양 플레어는 양성자 폭풍이라고 불리는 높은 에너지 입자 흐름을 뿜습니다. 양성자 폭풍은 인간 신체에 생화학적인 피해를 미칩니다. 그래서 소설 <붉은 화성>에서 아레스 우주선 사람들은 황급히 대피소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소설 <붉은 화성>에서 아레스 우주선은 화성 개척 우주선입니다. 개척 과학자들은 아레스 우주선을 타고 화성으로 향하는 중이었어요. 아레스가 항해하는 동안, 태양 플레어는 폭발하고 양성자 폭풍은 아레스로 몰려옵니다.
우주선은 경보를 울리고, 우주선 과학자들은 대피소로 우르르 몰려갑니다. 바이오 돔 과학자들은 대피소에 가장 늦게 도착합니다. 그들은 폐쇄 농장에서 식물들이 제대로 자라고 폐쇄 생태계가 순환하는지 실험하는 중이었습니다. 양성자 폭풍이 폐쇄 생태계에 치명적인 피해를 미칠 수 있기 때문에, 바이오 돔 과학자들은 바이오 돔을 정리했고 가장 늦게 도착했을 겁니다. 마침내 양성자 폭풍은 아레스를 강타합니다. 어떤 과학자는 우스꽝스럽게 이리저리 춤을 춥니다. 과학자는 방사선이 자신을 맞추지 못하기 원했고 자신이 움직이는 표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상황에서 과학자들은 베토벤이 작곡한 <전원 교향곡 (교향곡 6번 바 장조)>을 듣습니다. 우주선 대피소에서 <전원 교향곡>은 웅장하게 울려퍼집니다. 특히, 대피소에서 4악장 <폭풍>은 사람들의 마음들을 두드립니다. 개척 과학자들은 양성자 폭풍이 몰려오기 때문에 <폭풍>이 대피소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양성자) 폭풍이 몰려올 때, 여기에는 <폭풍> 음악이 어울릴 겁니다. 게다가 <폭풍>에서 폭풍을 피하기 위해 농민들은 난리법석을 벌입니다. 소설 <붉은 화성>에서 아레스 바이오 돔 과학자들 역시 난리법석을 벌였습니다.
개척 과학자들 중에서 바이오 돔 과학자들은 특별히 생태계를 다룹니다. 생태계는 살아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과학자들보다 바이오 돔 과학자들은 난리법석을 벌였을 겁니다. 사실 생명체들을 옮기기 위해 다른 과학자들 역시 난리법석을 벌였습니다. 이런 상황은 교향곡 <폭풍>과 잘 어울립니다. 얼마 후 양성자 폭풍은 지나갑니다. 아레스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무사하다고 느낍니다. 대피소 음악 역시 5악장으로 넘어갑니다. 5악장은 폭풍이 지나간 이후 농부들이 감사하는 내용입니다. 양성자 폭풍이 지나간 이후 과학자들이 안도했기 때문에 5악장 음악과 우주선 아레스는 비슷합니다. 어떤 독자들은 한 편의 가사 없는 오페라를 감상했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소설 <붉은 화성>은 베토벤 교향곡과 화성 개척 우주선을 비교했습니다. 웅장하고 무시무시한 교향곡처럼, 화성 개척 우주선은 한 바탕 소동을 벌였습니다. 소설은 <교향곡 6번 바 장조>를 태양 플레어와 개척 우주선에 덧씌웠고, <교향곡 6번 바 장조>는 개척 우주선으로 들어갑니다. 소설은 두 가지를 겹치고 <교향곡 6번 바 장조>가 풍기는 느낌을 개척 우주선 아레스에 주입합니다. 그래서 이 장면은 한 편의 가사 없는 오페라와 비슷합니다. 웅장한 음악이 흐르는 동안 사람들은 산만하게 소동을 벌입니다. 이건 문자 그대로 스페이스 오페라(?)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교향곡 <폭풍>이 웅장하다고 해도, <폭풍>과 하드 SF 소설이 어울리나요? <붉은 화성>은 개척 과학자들이 화성을 테라포밍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테라포밍은 첨단 기술입니다. 사실 개척 우주선 아레스 역시 첨단 기술입니다. 아레스 우주선 속의 바이오 돔 역시 첨단 기술입니다. 반면, 루트비히 반 베토벤은 18세기 후반 사람입니다. 유럽 클래식 사조가 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로 넘어가는 동안, 베토벤은 활약했습니다. 아무리 루트비히 반 베토벤이 악성이라고 해도, 베토벤은 옛날 사람입니다. 이런 옛날 사람이 작곡한 교향곡과 첨단 기술 우주선이 어울릴 수 있나요?
비디오 게임 <홈월드>에서 쿠샨 행성 사람들은 고향별 히가라를 찾아갑니다. 머나먼 우주를 항해하기 위해, 쿠샨 사람들은 거대한 모선을 만듭니다. 모선은 쿠샨 사람을 모두 태워야 했고, 그래서 모선은 정말 엄청나게 거대합니다. 당연히 쿠샨 행성 안에서 사람들은 모선을 건조하지 못했습니다. 모선을 건조하기 위해 쿠샨 사람들은 대기 밖으로 나가야 했습니다. 행성 궤도에서 그들은 조선소를 건설했고, 궤도 조선소에서 그들은 모선을 건조합니다. 이게 꽤나 컸기 때문에 행성 지표면에서 사람들은 궤도 조선소를 볼 수 있었습니다.
게임 초반 동영상은 정말 밤하늘에서, 별들 사이에서 궤도 조선소가 보인다고 묘사합니다. 하지만 행성 지표면에서 사람들이 궤도 조선소를 구경하지 못한다고 해도, 분명히 궤도 조선소는 초거대 건조물입니다. 이걸 짓기 위해 쿠샨 사람들은 커다란 희생과 비용을 감당해야 합니다. 마침내 그들은 피와 땀과 눈물을 뿌리고 거대한 모선을 완성합니다. 모선이 첫 번째 시동을 걸 때, 숱한 쿠샨 사람들의 피와 땀과 눈물은 함께 머나먼 우주를 향합니다. "우리는 떠난다." 이 단순한 문구에는 엄청난 희생과 비용과 머나먼 고향별을 향하는 동경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감동적인 배경 음악은 빠지지 못합니다. <홈월드>는 사무엘 바버가 작곡한 <현을 위한 아다지오>를 들려줍니다.
우주 전략 게임 역사에서 쿠샨 모선이 떠나는 장면은 길이길이 남을 명장면입니다. 아니, 비단 우주 전략 게임만 아니라 SF 역사 전체에서도 이 장면은 꽤나 감동적일 겁니다. 서글프고 웅장한 클래식과 거대하고 비장미가 넘치는 모선은 잘 어울립니다. 하지만 클래식은 '옛날 것'입니다. <교향곡 6번 바 장조>와 달리, <현을 위한 아다지오>는 19세기 초반 음악이 아니라 20세기 중반 음악입니다. <현을 위한 아다지오>는 1936년 음악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클래식은 클래식입니다. 이런 클래식과 첨단 기술 우주선이 어울릴 수 있나요? 클래식은 과거를 바라봅니다.
첨단 기술 우주선은 미래입니다. 과거와 미래는 반대입니다. 과거와 미래가 반대임에도, 두 가지가 어울릴 수 있나요? <현을 위한 아다지오>와 거대한 쿠샨 모선이 어울릴 수 있나요? 첨단 기술에는 첨단 기술 음악이 어울릴지 모릅니다. 신디사이저는 음악들을 전자적으로 합성합니다. 따라서 사이언스 픽션에는 클래식보다 신디사이저 연주가 훨씬 어울릴지 모릅니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신디사이저 연주를 들려줍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클래식을 버리고 이런 음악을 골라야 할지 모릅니다. 왜 소설 <붉은 화성>이 구태여 19세기 초기 음악을 고릅니까? 왜 <홈월드>가 고전을 미래 우주에 갖다붙이나요?
YouTube 같은 동영상 사이트에는 이른바 우주 분위기 음악(space ambient music)들이 있습니다. 이런 음악들은 클래식보다 신디사이저나 테크노 음악에 초점을 맞춥니다. 우주 분위기는 미래적입니다. 미래적인 분위기에는 미래적인 음악이 어울립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클래식을 버려야 합니다. 사람들이 클래식을 듣는 순간, 사람들은 미래보다 과거를 바라볼 겁니다. 클래식이 문자 그대로 고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말 이런 사고 방식이 옳은가요? 클래식이 무조건 과거를 가리켜야 하나요? 분명히 클래식은 과거 음악이나, 그 자체로서 클래식이 과거를 노래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클래식에는 내용이 없습니다. 사실 모든 음악에는 내용이 없습니다. 음악은 산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산문을 읽고 내용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음악에는 내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음악을 듣고 그저 가락을 느낄 뿐입니다. 열차가 칙칙폭폭 달리는 동안, 안토닌 드보르작은 영감을 받았고 <유모레스크>를 작곡했습니다. <유모레스크>에는 열차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루 종일 우리가 <유모레스크>를 듣는다고 해도, 우리는 열차를 느끼지 못할지 모릅니다. <유모레스크>가 열차를 직접 설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모레스크>는 그저 가락을 들려줄 뿐입니다. 음악에는 내용이 없어요.
결혼식장들에서 많은 사람들은 노래 <지금 이 순간>을 부릅니다. 하지만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는 끔찍한 비극입니다. <지금 이 순간>은 위험한 욕망을 노래합니다.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는 행복하고 아름다운 결혼을 축복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신부와 신랑을 축복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을 부릅니다. 곡조가 열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가사보다 열정적인 곡조입니다. 음악에서 내용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산문에서 내용은 중요할 수 있으나, 음악에서 내용보다 곡조와 분위기는 훨씬 중요할 겁니다. 음악에 내용이 없기 때문에, 거대한 첨단 모선이 클래식과 함께 항해한다고 해도, 이건 불협화음이 아닐 겁니다.
<현을 위한 아다지오>에서 내용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웅장하고 서글픈 분위기입니다. 그래서 영화 <플래툰>과 <현을 위한 아다지오>는 잘 어울립니다. 그래서 하늘을 향해 엘리어스가 두 팔을 뻗는 유명한 장면에서 영화 <플래툰>은 <현을 위한 아다지오>를 들려줬을 겁니다. 영화 <플래툰>은 스페이스 오페라가 아닙니다. 이 영화는 비열하고 끔찍한 베트남 침략을 이야기합니다. <플래툰>과 <홈월드>는 완전히 다릅니다. 하지만 엘리어스가 처절하게 두 팔을 뻗을 때, 쿠샨 모선이 머나먼 우주로 떠날 때, 양쪽 모두 엄숙하고 비장하고 서글픈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그래서 <현을 위한 아다지오>는 양쪽 모두와 어울릴 수 있습니다.
[아아, SF 팬들이 우주 항해를 이야기할 때, SF 팬들은 이 장면을 빼놓지 못할 거에요.]
이건 음악에 반드시 내용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류트 연주는 목가적인 중세 유럽 판타지를 노래할 수 있습니다. 첨단 우주 탐사선과 류트 연주는 별로 어울리지 않을 겁니다. 테크노 음악은 사이버펑크 메트로폴리스를 그릴 수 있습니다. 목가적인 중세 마을이 테크노 음악을 흘린다면, 이건 별로 어울리지 않을 겁니다. 안녕바다는 노래 <별빛이 내린다>를 불렀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이 노래가 별빛을 말한다고 해도, 비장미가 넘치는 <홈월드>와 감미로운 <별빛이 내린다>는 어울리지 않을지 모릅니다. 우주 공포 게임 <데드 스페이스>는 동요 <반짝반짝 작은 별>을 '음산하게' 편곡합니다. 양쪽은 정말 잘 어울립니다.
게다가 산문에 내용이 있다고 해도, 산문 역시 수많은 해석들을 낳습니다. 심지어 리처드 로티 같은 철학자는 "독자가 산문이라는 수레바퀴를 굴린다면, 언젠가 그것은 하나의 해석이 된다."고 말합니다. 이건 무궁무진한 해석들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많은 기호학자들, 비평가들, 철학자들은 여기에 반박할 겁니다. 무궁무진한 해석들은 불가능할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분명히 산문은 수많은 해석들을 낳을 수 있습니다. 엘리너 아나슨이 쓴 <방랑자의 시>에서 소설 주인공(들)이 여자인가요, 남자인가요,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요? 소설 주인공(들)은 아기에게 젖을 먹입니다. 그래서 소설 주인공(들)은 여자 같습니다. 하지만 정말 소설 주인공(들)이 여자인가요? <방랑자의 시>는 중세 판타지 같고 한편으로 외계인들을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방랑자의 시>가 판타지인가요, 사이언스 픽션인가요?
엘리너 아나슨이 판타지 작가인가요, SF 작가인가요? 왜 SF 소설 모음집이 <방랑자의 시>를 실었나요? 어떤 사설에서 엘리너 아나슨은 킴 스탠리 로빈슨과 Cli-Fi 소설들을 평가한 적이 있습니다. 만약 <방랑자의 시>가 중세 판타지 소설이라면, 왜 판타지 작가 엘리너 아나슨이 Cli-Fi 소설들을 평가하나요? Cli-Fi 소설들이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에 속함에도, 판타지 작가가 Cli-Fi 소설들을 평가할 수 있나요? 해석은 분분할 겁니다. 음악에 내용이 없는 것처럼, 산문, 특히, 문학 역시 정확한 내용을 전달하지 못할지 모르죠. 하지만 적어도 음악보다 문학은 내용을 훨씬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유모레스크>는 열차를 직접 가리키지 못하나, 차이나 미에빌이 쓴 <강철 의회>는 그럴 수 있습니다.
어떤 비평가들은 음악에 내용이 없기 때문에 음악이 아무 데나 달라붙는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들은 음악보다 산문이 낫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심지어 결혼식장에서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의 가사를 온화하게 바꿉니다. 음악에서 가사 따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용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가사보다 곡조는 훨씬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건 음악이라는 매체의 단점이 아닐 겁니다. 오히려 이건 장점일 겁니다. 음악이 추상적이기 때문에, 음악은 넉넉한 품을 자랑합니다. 산문이 오직 특정한 내용만을 가리키기 때문에, 어떤 비평가들은 산문이 알량하고 속좁다고 말할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