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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오직 역겨움만을 위한 바이오펑크 본문

SF & 판타지/어떻게 읽는가

오직 역겨움만을 위한 바이오펑크

OneTiger 2018. 12. 31. 17:55

정승락이 쓴 <풀잎 위의 개미>는 바이오펑크 소설입니다. 이건 그냥 바이오펑크 소설이 아니라 개조 기생충을 인간에게 삽입하는 내용입니다. 네, 당연히 <풀잎 위의 개미>를 장악하는 감성은 혐오입니다. 아무리 과학자들이 개조했다고 해도 기생충은 기생충입니다. 기생충이 사람의 몸 속으로 들어간다면, 대부분 사람들은 그게 유쾌하다고 느끼지 못하겠죠. <풀잎 위의 개미>는 그저 혐오를 조성하는 소설에 불과하지 않으나, 다른 요소들보다 끔찍한 시각적인 측면은 훨씬 강합니다. 소설을 읽은 이후, 오랜 동안 독자들은 기생충들이 꿈틀거리는 모습을 잊지 못할 겁니다.


이건 <풀잎 위의 개미>가 아주 하드 고어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이것보다 훨씬 역겨움을 유발하는 소설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대중적인 기준에서 <풀잎 위의 개미>는 절대 유쾌한 소설이 아닐 겁니다. 독자들이 호기심에 이 소설을 펼친다면, 잠시 동안이나 오랜 동안 독자들은 꿈틀거리는 악몽을 잊지 못할 겁니다. 어떤 독자들은 이런 묘사에 익숙하겠으나, 그렇다고 해도 많은 독자들은 충격을 받을 겁니다. <풀잎 위의 개미>는 아주 강렬한 감성을 전달하고, 독자들은 그걸 쉽게 잊지 못할 겁니다. <풀잎 위의 개미>처럼 바이오펑크는 쉽게 혐오를 조성할 수 있습니다. 신체를 마구 파헤치고 조작하고 자르는 모습은 유쾌하지 않습니다.



사이언티픽 로망스가 출현한 이후, 바이오펑크 소설들은 꾸준히 끔찍한 신체 조작들을 이야기했습니다. <모로 박사의 섬>에서 모로 박사가 동물들을 수술하고 개조하는 장면들은 피비린내를 팍팍 풍깁니다. <모로 박사의 섬>은 조셉 콘라드가 쓴 <암흑의 핵심>처럼, 아니, 어쩌면 그것보다 훨씬 끔찍한 소설일지 모릅니다. 20세기 이후, SF 영화들은 시각 효과를 동반하기 시작했고, 바이오펑크는 훨씬 직접적인 시각 충격을 전달합니다. 데이빗 크로넨버그가 감독한 영화 <플라이>는 빠지지 못하는 사례겠죠. <플라이>는 왜 바이오펑크가 끔찍한 악몽으로 귀결하는지 증명하는 사례일 겁니다.


<디스트릭트 9> 역시 비슷할 겁니다. 어쩌면 <디스트릭트 9>은 <플라이>에게 살짝 오마쥬를 바치는 영화일지 모릅니다. 영화 주인공이 바뀌는 모습은 <플라이>보다 시각적으로 덜 충격적일지 모르나, 관객들은 그런 변화에서 기생충과 질병을 상기할지 모릅니다. 신체 변형이 시각적으로 끔찍하지 않다고 해도, 분명히 본인이 원하지 않는 신체 변형은 충격적입니다. 거대 파리보다 프론은 덜 혐오스러울지 모르나, 그렇다고 해도 사람들은 프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시각적인 부분이 약하다고 해도, 그 자체로서 이런 발상은 충격적입니다. 따라서 뭔가 기괴하고 역겨운 감성을 원하는 창작가에게 바이오펑크는 좋은 수단이 될 겁니다.



하지만 창작가가 무조건 기괴하고 역겨운 장면을 묘사한다고 해도, 그건 전부가 아닐 겁니다. 그 자체로서 역겨운 장면이 목적이 될까요? 그 자체로서 역겨운 장면들은 어떤 미학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금기를 넘어가고 싶은 욕망을 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징그러운 뭔가가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기 원합니다. 징그러운 뭔가를 볼 때, 우리는 세상을 넓게 바라볼 수 있고 사고 방식을 훨씬 넓힐 수 있겠죠. 하드 고어 매니아들은 이런 미학들을 줄줄이 늘어놓을 수 있겠죠. 종종 아주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감성은 희망으로 승화합니다. 혐오스럽고 역겨운 장면들을 읽은 이후, 독자들은 산뜻하고 희망찬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문학적인 효과는 정화에 속할 겁니다.


감성을 정화하기 위해 어떤 독자들은 의도적으로 끔찍한 장면들, 부정적인 장면들을 원할지 모릅니다. 이렇게 기괴하고 역겨운 장면들에는 어떤 미학들이 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역겨운 묘사는 그런 미학들의 전부가 아닐 겁니다. 작가가 그저 역겨운 신체 변형들만 늘어놓는다면, 그건 더 큰 혐오감을 조성하기 위한 무한 루프에 빠질지 모릅니다. 작가가 오직 혐오 그 자체만 노린다면, 그런 작가는 혐오 그 자체에 매달리고 어떻게든 좀 더 기괴한 장면을 묘사하느라 애쓸 겁니다. 작가가 오직 혐오 그 자체만을 추구한다면, 그건 끝없는 자극으로 이어질 겁니다. 결국 그런 목표 의식은 오직 혐오와 다른 혐오와 또 다른 혐오를 부를 뿐이겠죠. 거기에는 혐오 이외에 다른 것이 없겠죠.



이건 그런 묘사에 아무 가치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누군가는 그런 장면들을 좋아할 겁니다. 그런 장면들은 미학적인 가치를 포함할 겁니다. 하지만 작가들이 오직 혐오 그 자체에만 매달린다면, 그건 실속 없는 자극제가 될 수 있습니다. 소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에서 어떤 예술 비평가는 개조 생명체 동물원을 둘러봅니다. 개조 생명체 동물원에는 온갖 기괴한 개조 동물들이 있습니다. 예술 비평가는 갈수록 생체 개조 기술이 오직 역겨운 자극만을 추구한다고 비판합니다. 다들 누가 더 역겨운 동물을 개조할 수 있는지 경주하는 것 같습니다. 예술 비평가는 개조 생명체들이 징그럽다고 해도, 오직 징그러움 그 자체만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바이오펑크 소설 역시 마찬가지일지 모릅니다. 자꾸 작가들이 오직 징그러움 그 자체만을 노린다면, 훨씬 징그러운 묘사를 위해 작가들은 무한 경쟁을 시작할지 모릅니다. 그런 무한 경쟁은 깊은 수렁으로 빠지고 다른 것들을 침몰시킬지 모릅니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게 괜한 걱정이나 꼰대 기질(?)이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비평에는 언제나 절대적인 기준선이 없죠. 어쩌면 개조 생명체들을 비판했던 예술 비평가는 아무 근거 없이 걱정하는 중일지 모릅니다. 혐오와 징그러움을 위해 작가들이 무한 경쟁한다고 해도, 거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을지 모르죠. 무한 군비 경쟁보다 무한 혐오 묘사 경쟁은 훨씬 나을 겁니다. 작가들이 무한 혐오 묘사 경쟁에 빠진다고 해도, 그건 그저 또 다른 문학 사조가 될 뿐인지 모릅니다.



한 가지 문제는 이겁니다. 작가가 오직 특정한 미학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작가는 다른 것들을 잃어버릴지 모릅니다. 혐오를 추구하는 미학이 있다고 해도, 창작물로서 그 미학은 어떤 토대에 기반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문학은 그저 하얀 종이 위의 검은 글자들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문법을 배운다면, 누구나 종이 위에 글자들을 쓸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좋은 평가를 받기 바란다면, 사람들은 토대를 안정시킬 수 있어야 할 겁니다. 만화 <슬램덩크>에서 사쿠라기 하나미치(강백호)는 슬램덩크를 원합니다. 사쿠라기 하나미치는 오직 슬램덩크만 원할 뿐입니다. 하나미치는 슬램덩크가 농구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아무리 하나미치가 멋지게 슬램덩크할 수 있다고 해도, 슬램덩크는 농구의 모든 것이 아닙니다.


하나미치가 멋지게 슬램덩크 쇼를 선보인다고 해도, 그건 농구가 되지 못합니다. 하나미치는 좋은 농구 선수가 되지 못합니다. 하나미치는 그저 멋진 쇼를 보여줄 뿐입니다. 아무리 슬램덩크가 역동적이라고 해도, 농구는 슬램덩크를 포함하는 훨씬 넓은 범주입니다. 우리가 좋은 농구 선수를 평가하고 싶다면, 우리는 훨씬 넓은 범주를 적용해야 할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미치가 슬램덩크를 잘 하기 때문에 하나미치가 좋은 농구 선수라고 평가할 겁니다. 하지만 슬램덩크를 잘 한다는 것과 농구를 잘 한다는 것은 서로 완전히 다르겠죠. 미야기 료타(송태섭)가 슬램덩크하지 못한다고 해도, 하나미치보다 미야기 료타는 훨씬 훌륭한 농구 선수입니다.



문학을 포함한 여러 예술들에는 형식, 기반, 토대가 있습니다. 작가들이 그런 형식, 기반, 토대를 안정시킬 수 있을 때, 그 속에서 다른 미학들 역시 빛날 수 있겠죠. 그런 형식, 기반, 토대에는 여러 종류들이 있습니다. 여기에 따라 평가들은 바뀔 수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문학 사조는 다른 문학 사조를 열심히 두들겨팰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작가들은 여러 사조들을 이용해 문학들을 전개할 수 있을 겁니다. 이건 소설을 비롯해 문학을 쓰기 위해 작가들이 문학 사조를 알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문학 사조를 알지 못한다고 해도, 작가들은 얼마든지 재미있고 좋은 소설들을 쓸 수 있습니다.


솔직히 아무리 많은 문학 사조들을 안다고 해도, 어떤 사람들은 재미있는 소설을 쓰지 못할 겁니다. <슬램덩크>에서 아야코(이한나)는 농구 규칙들을 잘 압니다. 하지만 아무리 아야코가 농구 규칙들을 줄줄이 외운다고 해도, 아야코는 하나미치보다 좋은 농구 선수가 되지 못하겠죠. (물론 아야코가 팀을 잘 조율했기 때문에 하나미치 역시 선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지식은 솜씨로 곧바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문학 역시 비슷할 겁니다. 중요한 것은 문학을 쓸 때, 작가가 문학을 이루는 형식, 기반, 토대를 구성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들이 부실하다면, 아무리 작가가 특정한 미학을 강조한다고 해도, 부실한 토대 위에 그런 미학은 서있을 겁니다.



어떤 독자들은 특정한 미학 그 자체가 형식이 되고 기반이 되고 토대가 된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아무리 문장들이 엉망이고, 등장인물들이 얄팍하고, 사상과 세계관과 주제가 공허하다고 해도, 문학이 오직 특정한 미학만으로 승부할 수 있을까요. SF 뉴웨이브 운동은 거기에 반박하는 사례가 될지 모릅니다. SF 소설이 그저 기발한 발상에만 만족할 수 있었다면, SF 뉴웨이브 운동은 일어나지 않았겠죠. SF 작가들은 그게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SF 소설들을 바꾸기 원했습니다. 이것과 비슷한 시각으로 SF 독자들은 오직 특정한 미학만을 추구하는 소설을 바라볼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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