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오더 오브 더 스틱>과 스팀펑크 마을 본문
인터넷 만화 <오더 오브 더 스틱>은 던전 탐험 이야기입니다. 길다란 대검을 휘두르는 인간 전사, 다소 딱딱하나 우직하고 충실한 드워프 성직자, 재빠르고 사랑스러운 인간 도적, 영민하지 않으나 수려하고 따스한 인간 음유시인, 화려하고 지적인 엘프 마법사, 사악하고 호전적인 하플링 레인저는 함께 모험가 일행을 꾸리고, 던전을 탐험합니다. 하지만 이 모험가 일행이 주구장창 던전만 떠돌아다닌다는 뜻은 아닙니다. 처음에 <오더 오브 더 스틱>은 던전 탐험 이야기로 시작했으나, 얼마 후 던전을 벗어나고 대도시와 삼림과 바다와 사막으로 무대를 넓힙니다.
이 만화가 던전 탐험 이야기로 시작한 이유는 <던전스 앤 드래곤스 3.5>를 밑바탕에 깔았기 때문일 겁니다. <디앤디>는 기본적으로 던전을 탐험하는 검마 판타지 게임이고, 그래서 <오더 오브 더 스틱> 역시 던전 탐험으로 첫문을 열었겠죠. 하지만 어느 정도 이야기를 진행한 후, 모험가 일행은 던전을 떠나고 더욱 넓은 모험과 전쟁의 무대로 진출합니다. 그리고 964화에서 모험가 일행은 놈들이 운영하는 스팀펑크 마을에 들려요. 흠, 스팀펑크 마을? <던전스 앤 드래곤스>와 스팀펑크 마을?
전통적으로 <디앤디>와 스팀펑크는 별로 연관이 없습니다. 에버론 같은 스팀펑크 캠페인이 아예 없지 않으나, 전통적인 그레이호크나 포가튼 렐름은 스팀펑크와 별로 친하지 않죠. 게다가 <오더 오브 더 스틱> 역시 스팀펑크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요. <오더 오브 더 스틱> 964화는 2014년 10월에 나왔습니다. 그전까지 스팀펑크를 상징하는 요소들(증기 비행선이나 잠수함, 증기 기관차, 인조인간이나 수발 소총, 놈들의 기계 공학 등등)은 이 만화에 등장하지 않았어요.
왜 갑자기 만화가가 스팀펑크를 집어넣었을까요? 독자는 인간 도적의 대사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인간 도적은 "요즘 스팀펑크는 아주 잘 나가는 장르이다."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대사가 요즘 세태를 풍자하는 자조적인 대사라고 생각합니다. 영어권 출판 시장에서 스팀펑크 소설들은 아주 잘 나가는 대박 상품들이고, 그래서 다들 스팀펑크 소설들을 쓰는 것 같습니다. <오드 오브 더 스틱> 964화가 2014년 10월에 나왔기 때문에 지금 그 열기는 다소 식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인터넷 만화조차 자조할 만큼, 한때 스팀펑크 소설들이 엄청난 인기를 휘몰았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왜 다들 스팀펑크 소설에 열광했을까요. 왜 찰스 스트로스 같은 작가는 스팀펑크가 너무 지겹다고 일갈했을까요. 저는 스팀펑크가 스페이스 오페라와 비슷한 면모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뚜렷한 근거는 없습니다. 개인적인 추측일 뿐이죠. 아마 영어권 작가들이나 평론가들은 왜 독자들이 스팀펑크에 열광했는지 분석했을지 모릅니다. 분명히 그랬을 겁니다. 왕년에 평론가들이 스페이스 오페라를 열심히 깐 것처럼 비가 오는 날에 먼지들이 날리도록 평론가들은 스팀펑크를 깠을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건 영어권 출판계에서 구경할 수 있는 현상이고, 저는 뚜렷한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스팀펑크에 열광하는 분위기는 다소 식었을까요. 아니면 여전히 다들 스팀펑크를 목놓아 부르는 중일까요. 좀비 아포칼립스와 스팀펑크가 인기를 끌었다면, 다음 타자는 누구일까요. 저는 그것 역시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저는 영어권 출판계를 따라가기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영어권 출판계는 온갖 SF 소설들을 쏟아내나, 저는 그것들을 확인하지 못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그런 소식을 제대로 알아보기 어려운 것 같아요.
사대주의처럼 한국 출판계가 영어권 출판계를 숭배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솔직히 영어권이나 일본 이외에 다른 나라 작가들도 좋은 SF 소설들을 쓸 겁니다. 한국 SF 작가들 역시 그렇고요. 하지만 영어권 출판계는 기상천외한 소설들을 쏟아내고, 가끔 저는 영어권 작가들이 얼마나 기상천외한 상상력을 발휘하는지 궁금합니다. 영어권 출판계를 숭배할 마음은 없으나, 그쪽 소식이 궁금합니다. 다행히 인터넷 때문에 수많은 독자들이 소감문들을 올리나, 영어 실력이 좋다고 해도, 인터넷만으로 그쪽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겠죠.
어쨌든 아작 출판사는 언젠가 <상처>나 <강철 의회>를 펴낸다고 밝혔고, 그때 한국 독자들은 2000년대 이후의 또 다른 스팀펑크 소설을 읽을 수 있겠군요. 음, 차이나 미에빌은 이런 사태를 주도한 주범(?)일지도…. 하지만 작가들이나 평론가들이 스팀펑크를 비판한다고 해도 스팀펑크가 제시하는 재미 자체를 부정할 이유는 없을 겁니다. 미래적인 기술을 예상하는 것보다…. 과거 기술을 재구성하는 방법은 분명히 매력적입니다. 그게 복고적이라고 해도 스팀펑크를 비판하는 평론가들조차 매력을 부정하지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