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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엘더 스크롤> 오토마톤과 낡은 하드 SF 본문

SF & 판타지/스팀펑크, 사이언스 판타지

<엘더 스크롤> 오토마톤과 낡은 하드 SF

OneTiger 2021. 8. 7. 20:00



만약 SF 소설에서 상급 인공 지능과 인간 형태 로봇이 결합한다면, 이 로봇들은 많은 노동들을 담당할 수 있습니다. 로봇들이 많은 노동들을 담당하기 때문에, 인간 노동자들은 훨씬 여유롭습니다. 인간 노동자들이 훨씬 여유롭기 때문에, 고된 노동들에서 그들은 벗어납니다. 인간들은 고된 노동들을 로봇들에게 넘기고 여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건 노동 해방입니다. 상급 인공 지능과 인간 형태 로봇이 결합하기 때문에, 노동 해방은 성공합니다. 상급 인공 지능과 인간 형태 로봇은 미래 첨단 과학들입니다. 미래 첨단 과학들은 노동 해방을 이룩합니다.

 

미래 첨단 과학들이 위대한 업적을 이룩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과학이 경이롭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우와, 굉장해! 첨단 과학들이 진보하기 때문에, 이제 고된 노동들에서 인간들은 벗어났어! 더 이상 고된 노동들은 인간들을 구속하지 않아! 이제 인간들은 예술들과 취향들과 문화들을 자유롭게 즐길 수 있어! 세상에, 과학은 경이로워!" 이건 모든 사람이 노동 해방에 동의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된 노동들이 인간 운명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비록 노동들이 번거롭고 고되다고 해도, 인간들은 이것들이 운명이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인간들은 노동들을 회피하기보다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인간이고, 인간이 육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고된 노동은 태생적인 것입니다. 이렇게 어떤 사람들은 노동 해방을 부정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노동 해방을 환영할 겁니다. 첨단 과학 기술들이 노동 해방을 이룩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과학 기술들이 아주 경이롭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비록 어떤 사람들이 노동 해방을 부정한다고 해도, 그들 역시 과학 기술들이 아주 경이롭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SF 소설에서 미래 과학들은 비단 노동 해방만 아니라 다른 여러 업적들을 이룩합니다.

 

만약 미래 의학 기술들이 전염병들을 몰아낸다면, 비록 어떤 사람들이 노동 해방을 부정한다고 해도, 이 사람들 역시 미래 기술들을 환영할 겁니다. 전염병들이 인류 사회를 구속하지 않고 위협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훨씬 안락하고 건강하게 살아갑니다. 인류 사회가 훨씬 안락해지고 건강해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과학 기술들이 아주 경이롭다고 느낄 겁니다. 비단 SF 소설만 아니라 SF 만화, SF 영화, SF 보드 게임, 다른 SF 형식(매체)들 역시 미래 과학들을 묘사할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미래 사이언스(과학) 기술들이 아주 경이롭다고 보여줍니다.



이건 오직 (SF 소설을 비롯해) 사이언스 픽션만 사이언스(과학)가 경이롭다고 보여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SF 장르 없이, 우리는 과학이 경이롭다고 인식할 수 있습니다. 과학 기술들이 근대 사회를 엄청나게 바꾸기 때문입니다. 몇 백 년 전에, 15세기 사람들은 80일 동안 인간이 세계를 일주한다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19세기 근대 사회 이후, 과학 기술들은 발달했고, 교통 수단들은 진보했습니다. 80일 동안, 20세기 (후반) 사람들은 세계를 일주합니다. 아니, 심지어 80일조차 너무 깁니다. 80일 세계 일주가 가능한 것처럼, 과학은 문명을 크게 바꿉니다.

 

과학이 문명을 크게 바꾸기 때문에, 우리는 과학이 경이롭다고 인식할 수 있습니다. 20세기 사람들에게 15세기 사람들은 과거입니다. 15세기 사람들에게 20세기 사람들은 미래입니다. 시대가 계속 흐르기 때문에, 시대가 절대 멈추지 않기 때문에, 언젠가 21세기 초반은 과거가 될 겁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 우리에게 이건 현재입니다. 시대가 계속 흐르기 때문에, 이 현재는 과거가 됩니다. 만약 미래 인류 문명이 멸망하지 않는다면, 20세기 사람들에게 15세기 사람들이 과거인 것처럼, 27세기 사람들에게 21세기 초반 사회는 (현재 사회보다) 과거 사회일 겁니다.



과학이 문명을 바꾸기 때문에, 15세기 사회와 20세기 사회가 아주 다른 것처럼, 21세기 초반 사회와 27세기 사회는 아주 다를 겁니다. 15세기 사람들은 80일 세계 일주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15세기 사람들에게 이건 상식이 아니었습니다. 20세기 (후반) 사람들에게 80일 세계 일주는 상식입니다. 심지어 80일조차 너무 깁니다. 15세기 사회와 20세기 사회에서 상식은 똑같지 않습니다. 비록 15세기 사람들이 80일 세계 일주를 믿지 않았다고 해도, 20세기 사회에서 80일 세계 일주는 상식이 되었습니다. 시대가 흐르고 사회가 바뀔 때, 상식은 바뀝니다.

 

시대가 흐르고 사회가 바뀔 때, 상식이 바뀌기 때문에, 몇 백 년이 흐르고, 27세기 사회가 찾아온 이후, 상식은 바뀔 겁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 우리는 뭔가를 믿으나, 27세기 사회에서 이건 상식이 아닐지 모릅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현재라고 판단하나, 우리는 절대적인 현재, 고정적인 현재가 아닙니다. 언젠가 21세기 초반 사회는 과거가 될 겁니다. 심지어 27세기 사람들은 21세기 초반 사람들이 케케묵은 과거 사람들이라고 느낄지 모릅니다. (SF 소설을 비롯해) 사이언스 픽션은 21세기 초반 사람들이 케케묵은 과거라고 묘사할 수 있습니다.



현재는 현재가 아닙니다. 언젠가 현재는 케케묵은 과거가 됩니다. 이건 시대 격차입니다. 15세기 사회와 20세기 사회가 아주 다르고, 21세기 초반 사회와 27세기 사회가 아주 다른 것처럼, 이건 시대 격차입니다. SF 소설이 27세기 미래 사회를 묘사할 수 있기 때문에, SF 소설은 시대 격차를 강조할 수 있습니다. 많은 문학들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SF 소설은 시대 격차를 강조합니다. SF 소설이 시대 격차를 강조하기 때문에, SF 소설은 미래 과학들이 경이롭다고 강조합니다. SF 장르 없이, 우리는 과학이 경이롭다고 인식할 수 있으나, SF 장르는 이것을 강조합니다.

 

SF 소설이 시대 격차를 강조하기 때문에, 80일 세계 일주가 상식이 되거나 상식이 되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상식이 고정적이지 않다고 인식할 수 있습니다. 몇 백 년 전에, 과거 사람들에게 노비 제도는 상식이었습니다. 심지어 똑똑한 국왕들조차 노비 제도를 완전히 철폐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양반이 노비를 부린다고 해도, 사람들은 이게 정당하다고 믿었습니다. 심지어 똑똑한 국왕들조차 이게 정당하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21세기 초반 오늘날, 남한 사회에서 노비 제도는 불법입니다. 적어도 형식적으로 남한 사회에서 노비 제도, 노예 제도는 합법이 아닙니다.



똑똑한 과거 국왕들과 달리, 심지어 21세기 초반 남한 사회에서 아이들조차 노비 제도에 찬성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국왕들보다 아이들이 노비 제도에 반대하는 것처럼, 인류 사회는 고정적이지 않고 상식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뭔가를 상식이라고 판단한다고 해도, 이건 그저 지배적인 관념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21세기 초반 남한 사회에서 자유 민주주의는 상식입니다. 이건 너무 상식입니다. 하지만 조선 사회 사람들에게 노비 제도는 상식이었습니다. 이건 너무 상식이었습니다. 27세기 미래 사회에서 여전히 자유 민주주의가 상식일까요?

 

SF 소설이 시대 격차를 강조하기 때문에, 만약 어떤 소설 작가가 과학 기술들을 과장하기 원한다면, SF 소설은 좋은 선택일 겁니다. SF 소설이 좋은 선택인 것처럼, 이 장르는 과학을 과장하기 위한 좋은 발판입니다. 장르 명칭이 가리키는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에서 사이언스(과학)가 핵심이기 때문에, 이 장르는 사이언스(과학)를 과장할 수 있습니다. 과학이 문명을 바꾸고 근대 사회를 뒷받침하기 때문에, 21세기 초반 오늘날, SF 장르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SF 소설들은 아주 중요한 문학입니다. 우리는 SF 소설들을 읽고 과학 문명을 고민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SF 소설들을 읽고 과학과 문명을 고민하는 것처럼, 이 장르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하지만 SF 장르에게는 커다란 문제가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에서 사이언스(과학)는 핵심이나, 사이언스(과학)는 계속 진보합니다. 과학 기술들이 계속 진보하기 때문에,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인류 사회가 너무 빠르게 바뀐다고 탄식합니다. 인류 사회가 너무 빠르게 바뀌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변화를 힘겹게 쫓아갑니다. 변화가 너무 빠르기 때문에, 변화를 쫓아가기는 힘들고 어렵습니다. 10년 이후, 강산이 바뀌나요? 아니, 이제 10년은 너무 느립니다.

 

10년이 너무 느리기 때문에, 1년 이후, 강산은 바뀝니다. 과거 사람들은 10년 이후 강산이 바뀐다고 운운했으나, 10년이 너무 느리기 때문에, 이제 10년은 1년이 됩니다. 10년이 1년이 되는 것처럼, 과학 기술들은 너무 빠르게 진보합니다. 과학 기술들이 빠르게 진보하기 때문에, 심지어 사이언스 픽션조차 이 변화를 쫓아가지 못합니다. 아이작 아시모프는 <이 세상의 모든 문제>, <최후의 질문>, <핵심 요소 Point of View>, <익살꾼>, <승리를 가져다 준 기계>를 썼습니다. 이 단편 소설들은 멀티백(Multivac)을 묘사합니다. 멀티백은 엄청난 슈퍼 컴퓨터입니다.



멀티백이 인류 사회를 총괄적으로 관리하기 때문에, 이건 아주 아주 엄청난 슈퍼 컴퓨터입니다. 멀티백이 아주 아주 엄청난 슈퍼 컴퓨터이기 때문에, 멀티백이 아주 아주 엄청난 인터페이스를 자랑하나요? 21세기 초반 사이언스 픽션들은 슈퍼 컴퓨터가 사용자 친화적이고 화려한 홀로그램 인터페이스를 띄운다고 묘사할 수 있습니다. 사용자는 홀로그램을 접촉하고 명령을 입력할 수 있습니다. 슈퍼 컴퓨터는 명령을 수행하고, 여러 화려한 시각 효과들을 연출하고, 처리 결과를 보여줍니다. 21세기 초반 사이언스 픽션들에게 이 호화로운 연출은 낯설지 않습니다.

 

21세기 초반 사이언스 픽션들이 슈퍼 컴퓨터와 화려한 인터페이스를 묘사하는 것처럼, 아이작 아시모프 단편 소설들에서 아주 아주 엄청난 슈퍼 컴퓨터 멀티백이 화려한 인터페이스를 자랑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아무리 멀티백이 아주 아주 엄청난 슈퍼 컴퓨터라고 해도, 멀티백은 구닥다리 인터페이스를 드러냅니다. 21세기 초반 SF 독자는 멀티백 인터페이스가 너무 케케묵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사용자 친화적이고 화려한 홀로그램 인터페이스 앞에서 띡띡띡~ 도트 프린터는 박물관 골동품과 다르지 않습니다. 아아, 엄청난 슈퍼 컴퓨터는 너무 구닥다리입니다.



왜 아이작 아시모프가 멀티백 인터페이스를 구닥다리라고 묘사했나요? 멀티백은 전지전능합니다. 이 슈퍼 컴퓨터는 신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전지전능한 슈퍼 컴퓨터는 구닥다리 도트 프린터를 드러냅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왜 멀티백이 360도 파노라마 터치 스크린을 구현하지 않나요? 과학 기술들이 진보하기 때문입니다. 멀티백은 신과 같습니다. 아주 아주 오래 전에, 고대 사람들은 신을 상상했습니다. 이미 고대 사람들이 신을 상상했던 것처럼, 전지전능한 신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고, 전지전능한 슈퍼 컴퓨터를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멀티백이 신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아이작 아시모프는 신화와 과학 기술들을 결합했고 전능한 슈퍼 컴퓨터를 쉽게 상상했습니다. 반면, 고대 사람들은 3차원 홀로그램 파노라마 인터페이스를 상상하지 않았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과학 기술들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비단 고대 사회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회들 역시 파노라마 인터페이스 컴퓨터를 상상하지 않았습니다. 19세기 근대 이전에, 과학 기술들은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과학 기술들이 발달했다고 해도, 이 과학들은 근대 사회를 바꾸지 않았습니다. 과학은 과거 사회보다 미래 사회에 속합니다.



19세기 근대 사회가 나타나기 전에, (고대 사회를 비롯해) 많은 인류 사회들이 과학 기술들을 연구하지 않았던 것처럼, 고대 사회부터 근대 사회까지, 이게 몇 천 년을 요구했던 것처럼, 과학 기술들은 과거에 속하지 않습니다. 이것들은 미래에 속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미래를 알지 못합니다. 아무도 미래를 겪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이작 아시모프는 훌륭한 SF 작가이나, 아이작 아시모프는 예언자가 아닙니다. 아이작 아시모프는 미래 사회를 예언하지 못하고 미래 사회를 겪지 못합니다. 과학은 빠르게 진보하나, 오직 현재에서만 아이작 아시모프는 살아갑니다.

 

과학이 빠르게 진보하기 때문에, 미래 과학은 엄청나게 진보할 수 있으나, 오직 현재에서만 아이작 아시모프가 살아가기 때문에, 시대적인 한계 내부에서 아이작 아시모프는 미래 사회를 상상합니다. 아이작 아시모프가 미래 사회를 상상하는 동안, 아이작 아시모프는 시대적인 한계를 넘어가지 못합니다. 아이작 아시모프가 시대적인 한계를 넘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21세기 초반 SF 독자는 멀티백 인터페이스가 너무 케케묵었다고 느낍니다. 과학과 달리, 이미 고대 사람들이 신을 상상했고, 멀티백과 신이 비슷하기 때문에, 신화는 시대적인 한계에 부딪히지 않습니다.



아이작 아시모프가 보여주는 것처럼, 만약 어떤 소설이 과학을 강조한다면, 이 소설은 시대적인 한계에 부딪힐지 모릅니다. 비단 아이작 아시모프만 아니라 다른 SF 작가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드 SF 작가들이 과학 기술들을 엄중하게 고증하기 원하기 때문에, 심지어 하드 SF 소설들은 훨씬 커다란 한계에 부딪힐지 모릅니다. 반면, 만약 어떤 소설이 신화를 강조한다면, 이 소설은 시대적인 한계를 뛰어넘을 겁니다. 노라 제미신은 <다섯 번째 계절>, <오벨리스크의 문>, <석조 하늘>을 썼습니다. 이 3부작 소설들 역시 미래 첨단 과학 기술들을 묘사합니다.

 

아이작 아시모프가 미래 슈퍼 컴퓨터를 묘사하는 것처럼, 노라 제미신은 미래 첨단 과학 기술들을 묘사합니다. 하지만 노라 제미신 소설들은 과학보다 신화를 강조합니다. <다섯 번째 계절>, <오벨리스크의 문>, <석조 하늘>은 사이언스 판타지입니다. 어떤 관점에서 이 3부작 소설들은 스팀펑크와 비슷합니다. 이 3부작이 사이언스 판타지이기 때문에, 이 소설들이 스팀펑크와 비슷하기 때문에, 이 소설들은 시대적인 한계에 부딪히지 않습니다. 아무리 23세기 사람들이 이 소설들을 읽는다고 해도, 23세기 사람들은 실 아나기스트가 낡았다고 느끼지 않을지 모릅니다.



아이작 아시모프 단편 소설들과 노라 제미신 소설들은 다릅니다. 전자는 신화보다 과학을 강조하나, 후자는 과학보다 신화를 강조합니다. 아무리 하드 SF 소설들이 엄중한 과학들을 고증한다고 해도, 하드 SF 소설들은 시대적인 한계에 부딪힐지 모르나, (스팀펑크를 비롯해) 사이언스 판타지들은 시대적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적어도 사이언스 판타지들은 시대적인 한계에 느리게 부딪히거나 부딪히지 않을지 모릅니다. 심지어 중세 유럽 판타지조차 스팀펑크를 도입할 수 있습니다. 비디오 게임 <엘더 스크롤> 시리즈는 스팀펑크를 도입할 수 있습니다.

 

만약 <엘더 스크롤> 시리즈가 스팀펑크를 도입하고 오토마톤(자동 인형)을 묘사한다면, 비록 이 오토마톤이 로봇 공학을 고증하지 않는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들은 이게 오류라고 느끼지 않을 겁니다. 아이작 아시모프 단편 소설에서 멀티백 인터페이스는 너무 구닥다리 골동품이나, 비록 <엘더 스크롤> 오토마톤이 로봇 공학을 고증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건 오류보다 또 다른 과학입니다. <엘더 스크롤> 시리즈는 오토마톤이 이른바 둘째 세계 과학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첫째 세계 과학과 둘째 세계 과학이 다르기 때문에, 이 오토마톤은 오류가 아닙니다.



이 그림(링크)을 보세요. 이 그림은 중세 유럽 판타지에 속합니다. 한편으로 이 그림은 스팀펑크를 도입합니다. 중세 판타지가 스팀펑크를 도입하기 때문에, 이건 또 다른 과학, 둘째 세계 과학, 신화적인 과학입니다. 이게 신화적인 과학이기 때문에, 비록 이 과학이 뭔가를 고증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건 오류가 아닙니다. 이미 고대 사람들이 신화를 상상했던 것처럼, 신화가 아주 아주 유구하기 때문에, 신화적인 과학은 시대적인 한계에 느리게 부딪히거나 부딪히지 않을지 모릅니다. 이 관점에서 하드 사이언스 픽션보다 사이언스 판타지는 나은지 모릅니다.

 

만약 중세 판타지 소설이 스팀펑크를 도입한다면, 오토마톤들이 고된 노동들을 담당하기 때문에, 인간들은 노동 해방을 이룩할지 모릅니다. 오오~, 스팀펑크 로봇 공학은 노동 해방을 이룩할 수 있습니다. 로봇 공학이 노동 해방을 이룩하기 때문에, 소설 독자들은 과학 기술들이 경이롭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하드 SF 소설들이 경이로운 과학을 강조할 수 있는 것처럼, 중세펑크(중세 판타지+스팀펑크) 소설들 역시 경이로운 과학을 강조할 수 있습니다. 이건 하드 사이언스 픽션과 중세 판타지 스팀펑크가 (첨단) 과학 기술들을 똑같이 강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중세 판타지 스팀펑크보다 하드 사이언스 픽션은 훨씬 구체적입니다. 중세 판타지 스팀펑크보다 하드 사이언스 픽션은 훨씬 현실(주의)적입니다. 하드 사이언스 픽션이 훨씬 구체적이고 훨씬 현실(주의)적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중세 판타지 스팀펑크보다 하드 사이언스 픽션을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스팀펑크를 비롯해) 사이언스 판타지를 무시하는지 모릅니다. "아니, 어떻게 스팀펑크 소설이 SF 장르에 속할 수 있지? 이건 SF 장르에 들어오지 못해! 스팀펑크 소설은 SF 장르보다 판타지 장르에 들어가야 해! 이건 진짜 SF가 아니야!"

 

어떤 사람들은 하드 사이언스 픽션이 진짜이고 스팀펑크가 가짜라고 주장하는지 모릅니다. 이 사람들은 아이작 아시모프가 진짜 SF 작가이고 노라 제미신이 가짜 SF 작가라고 주장할 겁니다. 아하, 그렇습니다! 아무리 노라 제미신이 감동적인 소설들을 쓴다고 해도, 노라 제미신은 진짜보다 가짜입니다! 하지만 아이작 아시모프 단편 소설들이 시대적인 한계에 부딪히고, 노라 제미신 소설들이 부딪히지 않는 것처럼, 23세기 SF 독자가 실 아나기스트를 케케묵었다고 느끼지 않을지 모르는 것처럼, 어떤 관점에서 하드 사이언스 픽션보다 사이언스 판타지는 낫습니다.



(스팀펑크를 비롯해) 사이언스 판타지는 노동 해방을 묘사할 수 있습니다. 소설 <석조 하늘>이 무분별한 자원 착취를 경고하는 것처럼, 사이언스 판타지는 비단 경이로운 과학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과학 만능주의를 지적할 수 있습니다. 비록 하드 사이언스 픽션이 시대적인 한계에 부딪힌다고 해도, 사이언스 판타지는 느리게 부딪히거나 부딪히지 않을지 모릅니다. 심지어 23세기 독자는 하드 사이언스 픽션이 케케묵었다고 느낄지 모르고 사이언스 판타지가 훨씬 세련되었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사이언스 판타지는 시대적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판타지에게는 고유한 미덕이 있습니다. 비록 어떤 사람들이 하드 사이언스 픽션을 떠받들고 사이언스 판타지를 무시한다고 해도, 하드 사이언스 픽션보다 사이언스 판타지는 나을 수 있습니다. 분명히 하드 사이언스 픽션은 빛나는 정수입니다. (하드 SF '소설'은 훨씬 정수입니다.) 하드 사이언스 픽션이 빛나는 정수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하드 SF 소설이 우월하다고 떠받드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사이언스 판타지에게는 고유한 미덕이 있습니다. 이 고유한 미덕 덕분에, 아무리 시대가 계속 흐른다고 해도, 사이언스 판타지는 인기를 누릴지 모릅니다.


※ 게임 <엘더 스크롤 온라인> 스크린샷 출처:
https://www.elderscrollsonline.com/en-us/news/post/55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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