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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토피아 뉴스>와 <붉은 별> - 초기 생태 사회주의와 생태학 SF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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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토피아 뉴스>와 <붉은 별> - 초기 생태 사회주의와 생태학 SF

OneTiger 2019. 9. 20. 20:22

이름처럼, 생태 사회주의는 사회주의를 이용해 환경 보호를 주장합니다. 생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기후 변화를 비롯해 환경 오염들을 절대 해결하지 못한다고 주장합니다. 자본주의가 어느 정도 환경 오염들을 해결한다고 해도, 이건 근본적인 대안이 되지 못합니다. 자본주의에게 유일한 목표는 이윤 극대화입니다. 오직 이윤만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작동합니다. 더 많은 이윤을 위해 자본주의는 더 많이 판매해야 합니다. 더 많이 판매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더 많은 상품들을 만들어야 합니다. 더 많은 상품들을 만들기 위해 자본주의는 더 많은 자원들을 소비해야 합니다.


더 많은 자원들을 소비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자연 환경을 수탈해야 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무한한 이윤 축적을 노립니다. 자본주의는 더 많이, 더 많이, 더 많이 자연 환경을 수탈하기 원합니다. 시장 포화 역시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는 치명적인 모순이 있습니다. 자본가 계급은 엄청나게 많은 상품들을 만드나, 자본가 계급은 적은 임금을 지급하기 원합니다. 자본가 계급은 비용을 줄이기 원하고, 그래서 그들은 임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습니다. 자본가 계급이 임금을 줄인다면, 소비 시장은 줄어들 겁니다. 임금 노동자들은 상품들을 제대로 소비하지 못합니다.



자본주의는 엄청나게 많은 상품들을 만듭니다. 반면, 자본주의는 상품들을 제대로 소비하지 못합니다. 언제나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상품 생산은 상품 소비를 압도합니다. 생산 시장에 상품들이 넘쳐난다고 해도, 소비 시장은 상품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합니다. 이건 시장 포화, 거품 경제로 이어집니다. 이런 모순이 정점에 달한다면, 이건 경제 공황이 될 겁니다. 그래서 창고들에 상품들이 가득함에도, 먹고 살기 위해 사람들은 쓰레기통들을 뒤져야 합니다. 이건 너무 말이 안 되는 미친 짓거리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창고들에 식량들이 가득함에도, 사람들은 굶주려야 합니다.


보수 우파 학자들은 이런 미친 짓거리가 최고의 경제 현상이라고 찬양합니다. 어떻게 이런 비극적인 상황이 최고의 경제 현상이 될 수 있습니까? 아무리 보수 우파 경제학자들이 자본주의를 찬양한다고 해도, 자본주의는 그저 미친 짓거리에 불과합니다. 미친 짓거리 자본주의는 시장 포화를 해소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잉여 자본을 투입하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 합니다. 자본주의는 비자본주의 영역으로 잉여 자본을 투입하고 시장 경제를 개척합니다. 여기에서 주된 외부 영역은 자연 환경입니다. 자본주의는 잉여 자본을 자연 환경에 투입하고 자연을 상품화합니다.



자연 환경이 상품화하기 때문에, 더 이상 자연은 자연이 아닙니다. 더 이상 자연은 우리를 둘러싸는 살아있는 상호 작용이 아닙니다. 자연은 그저 상품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기후 변화가 행성급 환경 오염임에도, 윗대가리들은 탄소 배출 상품들을 운운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자연 환경보다 상품 판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류 문명은 기후 변화를 절대 해결하지 못합니다. 생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기후 변화를 비롯해 심각한 환경 오염들이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주장합니다. 다른 환경 운동들과 생태 사회주의 사이에는 아주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얄팍한 환경 운동들과 달리, 생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비판합니다. 오히려 얄팍한 환경 운동들은 자본가 계급에게 충성합니다. 만약 민중들이 자본가 계급에게 저항한다면, 얄팍한 환경 운동들은 민중들보다 자본가 계급을 편들 겁니다. 이런 환경 운동가들은 원주민들보다 다국적 기업들이 열대 밀림을 소유해야 한다고 나불거립니다. 다국적 기업들이 원주민들을 내쫓고, 원주민들이 고향을 잃는다면, 얄팍한 환경 운동가들은 이런 상황을 예찬할 겁니다. 지구의 절반이 굶주림에도, 생물학 교과서들과 과학 학습 만화들은 인간들이 탐욕스럽기 때문에 인간들이 자연을 오염시킨다고 나불거립니다.



생물학 교과서들은 굶어죽는 흑인 아이들이 탐욕스럽다고 매도합니다. 사람들이 이런 교과서들을 이용해 환경 운동을 배운다면, 어떻게 사람들이 기후 변화를 해결할 수 있나요? 얄팍한 환경 운동들과 달리, 생태 사회주의는 이런 상황을 매섭게 비판합니다. 이건 생태 사회주의가 완벽한 사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생태 사회주의 역시 인간이 만든 산물입니다. 하지만 생태 사회주의는 훨씬 근본적입니다. 생태 사회주의에도 여러 커다란 한계들이 있으나, 다른 환경 운동들보다 생태 사회주의는 훨씬 근본적인 대안을 제시합니다. 자본주의는 경제 현상이고, 환경 운동은 경제 현상을 비판해야 합니다.


도덕과 윤리와 선행과 박애주의는 대안이 되지 못합니다. 이런 것들이 어느 정도 환경 오염들을 정화한다고 해도, 결국 이것들은 근본적인 한계, 경제학을 비판하지 않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할 겁니다. 생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경제학을 비판합니다. 하지만 언제 이런 생태 사회주의가 나타났나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생태 사회주의가 뚝 떨어졌나요? 우리가 어떤 사상을 파악할 때, 우리는 시대적인 상황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인류 문명에서 갑자기 아무것도 뚝 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류 문명에서 수많은 사상들은 역사적인 생성 과정을 거칩니다. 생태 사회주의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다른 사회주의 운동들처럼, 19세기 중반 이후에 생태 사회주의는 나타납니다. 여기에서 윌리엄 모리스와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는 초기 생태 사회주의를 대표할 수 있습니다. 학자들은 윌리엄 모리스와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가 특별하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윌리엄 모리스와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가 모두 SF 소설을 썼다는 사실입니다. 윌리엄 모리스는 <에코토피아 뉴스>를 썼고,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는 <붉은 별>을 썼습니다. <에코토피아 뉴스>에서 소설 주인공은 미래로 타임 슬립하고 사회주의 문명을 둘러봅니다. 미래 사회주의 문명은 상당히 목가적이고 울창한 야생 삼림을 보호합니다.


미래 문명이 정말 목가적이기 때문에, 미래 문명은 낭만적인 중세 같습니다. 윌리엄 모리스는 이런 이야기가 사이언스 픽션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윌리엄 모리스는 사이언티픽 로망스를 인식했는지 모르나, 그렇다고 해도 <에코토피아 뉴스>는 전형적인 사이언티픽 로망스보다 전통적인 유토피아 문학에 가깝습니다. 유토피아 장르에서 타임 슬립과 새로운 문명은 낯선 형식이 아닙니다. 19세기~20세기 초반 동안 여러 작가들은 이런 형식을 활용합니다. 1836년 소설 <Three Hundred Years Hence>에서 메리 그리피스는 이런 형식을 선보였고, 여러 유토피아 작가들은 이것을 따랐습니다.



메리 그리피스는 최초의 미국 (여자) SF 작가라고 평가를 받습니다. 장르 경계선이 고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어떤 평론가들은 반박할지 모릅니다. 많은 평론가들은 에드워드 벨라미가 쓴 <뒤돌아보며>가 훨씬 본격적인 사이언티픽 로망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뒤돌아보며>는 1888년 소설입니다. 이미 1836년에 메리 그리피스는 유토피아 문학 형식을 제시했습니다. 허버트 웰즈와 샬롯 퍼킨스 길먼 같은 다른 많은 작가들 역시 유토피아 문학 형식을 계승했습니다. 메리 그리피스가 최초의 미국 SF 작가가 아니라고 해도, 분명히 메리 그리피스는 초기 SF 장르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런 장르 흐름 속에서 윌리엄 모리스 역시 1890년 소설 <에코토피아 뉴스>를 썼습니다. 윌리엄 모리스가 얼마나 구체적으로 SF 장르를 이해했든, 메리 그리피스, 에드워드 벨라미, 허버트 웰즈, 샬롯 퍼킨스 길먼으로 이어지는 SF 장르 속에서 <에코토피아 뉴스>는 존재합니다. 윌리엄 모리스가 로망스 작가에 가깝고, <에코토피아 뉴스>가 낭만적인 판타지 로망스에 가깝다고 해도, SF 평론가들이 초기 사이언티픽 로망스 장르를 정리한다면, <에코토피아 뉴스>는 빠지지 못할 겁니다. 메리 셸리가 자신이 SF 작가라고 의식하지 못한 것처럼, 장르는 '후천적으로' 나타납니다.



윌리엄 모리스보다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는 훨씬 본격적인 SF 작가입니다. 소설 <붉은 별>은 우주선들, 외계 행성들, 첨단 기계들을 선보입니다. 전반적인 줄거리 구조는 다른 유토피아 문학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소설 주인공은 새로운 문명으로 떠나고, 새로운 문명을 둘러보고, 새로운 사회 철학을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붉은 별>은 산업 발전과 자연 환경 사이에 갈등이 있다고 말합니다. 산업 발전은 계속 확장하고 싶어하나, 자연 환경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산업 발전이 지속 가능성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이건 재앙으로 이어질 겁니다. 비단 자본주의 경제만 아니라 공산주의 경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공산주의 경제 역시 끊임없는 발전을 경계하고 지속 가능성을 존중해야 합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 우리는 지속 가능성을 아무렇지 않게 운운하나, 이미 1908년 <붉은 별>은 산업 발전과 지속 가능성을 고려했습니다. <붉은 별>은 비단 초기 사이언티픽 로망스일 뿐만 아니라 상당히 선구적인 생태 문학입니다. 이렇게 대표적인 초기 생태 사회주의자 윌리엄 모리스와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는 비슷하게 사이언티픽 로망스를 썼습니다. 생태 사회주의와 생태학 SF 장르 사이에는 어떤 긴밀한 관계가 있을지 모릅니다. 아니, 사실 생태 사회주의와 생태학 SF 장르 모두 19세기 서구 근대화에서 비롯했습니다.



윌리엄 모리스와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가 생태 사회주의자라고 해도, 자본주의 시장 경제 속에서 윌리엄 모리스는 살아가야 했습니다. 짜르 국가에서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는 살아가야 했습니다. 윌리엄 모리스는 급진적인 혁명가였고,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는 볼셰비키 소속이었으나, 두 사람에게 생태 사회주의 문명은 현실보다 미래였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에코토피아 뉴스>와 <붉은 별>을 썼습니다. 아직 해방 사회가 도래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실이 너무 억압적이기 때문에, 두 사람은 미래, 다른 세상을 바라봤고 사이언티픽 로망스를 썼습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이런 사이언티픽 로망스가 너무 공상적이라고 비판할 겁니다. 아무도 미래 사회를 구체적으로 예언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이언티픽 로망스 역시 미래 사회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에코토피아 뉴스>와 <붉은 별>은 미래 사회를 예언하지 못합니다. 소설 <붉은 별>에서 소설 주인공은 외계 공산주의 문명에 적응하지 못합니다. 소설 주인공이 열정적인 공산주의 혁명가임에도, 소설 주인공은 외계 공산주의 문명이 이질적이라고 느낍니다. 마르크스주의가 낮은 단계 공산주의와 높은 단계 공산주의를 분리하는 것처럼, 소설 주인공은 낮은 단계이고, 외계 공산주의는 높은 단계인지 모릅니다. 낮은 단계는 높은 단계에 빠르게 닿지 못합니다.



어쩌면 우리 호모 사피엔스들은 높은 단계 공산주의에 절대 닿지 못할지 모릅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상이 완전히 바뀌지 않는다면 높은 단계 공산주의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우리 호모 사피엔스들은 오직 낮은 단계 공산주의만 이룩할지 모릅니다. 낮은 단계 공산주의는 완전한 공산주의가 아니고, 그래서 인류가 바뀐 이후, 인류 이후, 높은 단계 공산주의는 나타날지 모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사회주의 혁명이 시기상조와 기나긴 가시밭길을 거쳐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에코토피아 뉴스>와 <붉은 별>은 예언서가 되지 못합니다.


두 소설은 미래 사회를 이용해 현실 문제를 비판합니다. 독자들은 두 소설이 예언서라고 간주해서는 안 됩니다. 현실이 너무 억압적이기 때문에, 두 소설은 미래를 빌렸습니다. 비단 생태 사회주의만 아니라 다른 유토피아 문학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현실이 너무 억압적이기 때문에, 해방을 이야기하기 위해 저항 운동들은 미래와 다른 세상을 빌립니다. 비단 <에코토피아 뉴스>와 <붉은 별>만 아니라 이런 사례들은 드물지 않습니다. 샬롯 퍼킨스 길먼은 <Moving the Mountain>을 썼습니다. 소설 <허랜드>처럼, <Moving the Mountain>은 페미니즘 유토피아 소설입니다. 다른 많은 유토피아 문학들처럼, <Moving the Mountain>은 소설 주인공이 새로운 문명으로 떠나고 새로운 세상을 둘러보고 충격에 휩싸인다고 이야기합니다.



<에코토피아 뉴스>와 <붉은 별>은 동물 권리를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으나, <Moving the Mountain>은 페미니즘 유토피아에 동물원이 없다고 말합니다. 동물원은 감옥입니다. 동물원은 야생 동물들을 가둡니다. 어떤 사람들은 동물원이 생태적인 감성을 키운다고 이야기하나, 정말 동물원이 그럴 수 있나요? 아이가 철창 감옥 속의 호랑이를 바라본다고 해도, 아이가 생태적인 감성을 키울 수 있나요? 그 자체로서 호랑이는 호랑이가 아닙니다. 열대 밀림 속에서 호랑이가 잠복하기 때문에, 호랑이는 호랑이가 됩니다. 호랑이에게 복잡하고 야생적인 검은 줄무늬는 가장 커다란 특징입니다.


밀림 속에서 호랑이가 잠복하기 때문에, 호랑이에게는 이런 특징, 복잡하고 야생적인 검은 줄무늬가 있습니다. 동물원 우리 속의 호랑이는 잠복하지 못합니다. 호랑이가 잠복하지 못한다면, 이런 호랑이가 정말 호랑이인가요? 이런 동물원 호랑이가 정말 생태적인 감성을 키울 수 있나요? 게다가 <Moving the Mountain>은 1911년 소설이나, 오늘날 21세기 초반, 우리는 다양한 방법들로 자연 생태계를 관찰할 수 있습니다. 무인 로봇 카메라는 야생 동물들을 크게 방해하지 않습니다. 비디오 게임들은 자연 생태계를 자세하게 구현할 수 있습니다. <쉘터 2> 같은 게임은 야생 동물들을 가두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말 생태적인 감성을 키우고 싶다면, 동물원보다 자연 다큐멘터리들과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들은 훨씬 나을 겁니다. 동물원 호랑이는 진정한 호랑이를 보여주지 못합니다. 동물원은 야생 동물들을 둘러싸는 살아있는 거대한 테두리를 보여주지 못합니다. 다른 호랑이들과 달리, 수마트라 호랑이에게는 훨씬 짙고 복잡한 줄무늬들, 무성한 갈기, 물갈퀴가 있습니다. 수마트라 열대 밀림에서 수마트라 호랑이는 독자적으로 진화했습니다. 수마트라 호랑이에게 물갈퀴가 있는 것처럼, 야생 동물과 자연 환경은 상호 작용합니다. 우리가 이런 상호 작용을 이해할 때, 우리는 생태적인 감성을 키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테두리를 둘러봐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테두리를 이해하고 싶다면, 우리는 어떻게 자연 생태계와 생물 다양성이 상호 작용하는지 폭넓게 파악해야 합니다. 우리는 개체보다 다양성, 체계, 상호 작용, 환경을 파악해야 합니다. 동물원에는 이런 시각이 없습니다. 우리가 다양성, 체계, 상호 작용, 환경을 파악하기 원한다면, 동물원 관람보다 <쉘터 2> 같은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은 훨씬 나을 겁니다. 심지어 동네 뒷산에서조차 우리는 나무들과 새들과 버섯들과 다람쥐들과 꿀벌들과 꽃들을 둘러보고 다양성, 체계, 상호 작용, 환경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태적인 감성을 키우기 원한다면, 동물원보다 이런 동네 뒷산은 훨씬 나을 겁니다. 샬롯 길먼이 지적하는 것처럼, 동물원은 감옥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야생 보호 구역들이 사라지기 때문에 동물원들이 유전 형질들을 보관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동물원이 유전 은행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왜 야생 보호 구역들이 사라지나요? 첫째~셋째 문단이 설명한 것처럼,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자연 환경을 상품화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인류 문명이 다양한 유전 형질들을 보관하기 원한다고 해도, 자본주의는 자연 환경을 상품화합니다. 누가 아나요. 결국 자본주의는 다양한 유전 형질들을 상품화할지 모릅니다. 자본주의는 인간 유전 형질을 상품화하고 싶어합니다.


인간 유전 형질들이 상품화한다면, 야생 유전 형질들 역시 상품화를 피하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사라져야 합니다. 인류 문명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옹호하기보다 야생 보호 구역들을 확장해야 합니다. 인류 문명은 거대한 터전들을 비우고,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옮기고, 야생 보호 구역들을 설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다양한 야생 유전 형질들을 보호하기 원한다면, 동물원보다 야생 보호 구역은 근본적인 대안이 됩니다. 어떤 관점에서 21세기 초반 생태학자들보다 100여 년 전의 SF 소설 <Moving the Mountain>은 훨씬 낫습니다. 이 소설은 인류 문명이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숭배해야 한다고 나불거리지 않습니다. 이 소설에는 초기 에코 페미니즘이 있습니다.



샬롯 퍼킨스 길먼은 모성을 너무 중시하고, <허랜드>에서 모성은 거의 종교입니다. 분명히 평등한 인류 문명에게 돌봄 노동 사회화는 필수 조건입니다. 어쩌면 이건 돌봄 노동 '의무화'가 되어야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페미니즘 평론가들은 <허랜드>가 모성을 너무 미화한다고 비판할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Moving the Mountain>과 <허랜드> 같은 SF 소설들은 인류 문명이 상품화를 숭배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허랜드>가 공동체 노동을 중시하기 때문에, 남한 독자들은 <허랜드>가 사회주의에 가깝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허랜드>가 전형적인 공산주의가 아니라고 해도, <허랜드>는 '공동체주의에 가까운' 사회주의와 비슷합니다.


<에코토피아 뉴스>와 <붉은 별>이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것처럼, <허랜드>에게도 자본주의는 헛소리입니다. <Moving the Mountain>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에서 각종 저항 운동들이 등장하는 동안, 저항 운동들은 유토피아 장르, SF 장르로 이어집니다. 이런 과정과 흐름 속에서 생태 사회주의와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 역시 나타납니다. 어떤 독자들은 허버트 웰즈와 <타임 머신>과 몇몇 소설을 생태 사회주의와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에 집어넣을지 모릅니다. 허버트 웰즈가 대표적인 서구 사회주의자이고, <타임 머신>을 비롯해 허버트 웰즈 소설들이 기이한 자연 환경을 묘사하기 때문입니다.



허버트 웰즈는 초기 비경 탐험, 바다 괴수, 기이한 생태계를 이야기했습니다. 식인 식물부터 두족류 괴수까지, 허버트 웰즈는 다양한 생태적인 상상력들을 펼쳤습니다. 소설 <타임 머신>은 미래 지구 자연이 엄청나게 바뀐다고 이야기합니다. 인류 문명은 야생 동물들을 멸종시킬지 모릅니다. 19세기 산업 자본주의는 찬란한 진보를 주장하나, 찬란한 진보는 야생 동물 멸종으로 이어질지 모릅니다. 인류 문명 역시 안전하지 않습니다. 자연 환경이 고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인류 문명 역시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타임 머신>은 자본주의를 직접 비판하지 않으나, 이 소설은 산업 자본주의가 찬란한 진보가 아니라고 의심합니다.


그래서 SF 독자들은 <타임 머신>을 생태 사회주의,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에 집어넣을지 모릅니다. 이런 분류가 옳은가요? 허버트 웰즈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고 급진적인 혁명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허버트 웰즈는 대표적인 사회주의자였고, <타임 머신>은 거시적인 생태계 변화를 전망합니다. 만약 SF 독자들이 이런 특징들에 주목한다면, 이게 과잉 해석이 되거나 오류가 되나요? 대답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윌리엄 모리스와 <에코토피아 뉴스>,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와 <붉은 별>은 생태 사회주의와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으로 들어갈 수 있으나, 허버트 웰즈와 <타임 머신>은 애매합니다.



하지만 <에코토피아 뉴스>, <붉은 별>, <Moving the Mountain>, <타임 머신>이 비슷한 시대 배경, 비슷한 사조, 비슷한 저항 운동들에서 비롯했기 때문에, SF 독자들은 이런 소설들을 비교하고 대조할 수 있습니다. SF 독자들이 정답을 얻지 못한다고 해도, 이런 비교/대조는 과정과 흐름을 알려줍니다. 어쩌면 진짜 '정답'은 이런 '과정과 흐름'일지 모릅니다. 장르가 고정적이지 않다면, SF 팬들은 고정적인 정답보다 유동적인 흐름이 정답이라고 간주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독자들은 <잃어버린 세계> 같은 초기 생태학 SF 소설들을 유동적인 흐름과 비교할 수 있을 겁니다.


여기에서 독자들이 훨씬 거시적으로 파악한다면, 소설 <붉은 화성>이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를 오마쥬하는 것처럼, 독자들은 <에코토피아 뉴스>와 <붉은 별>을 20세기 중반~후반 생태학 SF 소설들 및 21세기 초반 생태학 SF 소설들과 함께 비교할 수 있을 겁니다. 심지어 SF 팬들은 <에코토피아 뉴스>와 21세기 초반 비디오 게임 <블록후드>를 비교할 수 있습니다. SF 팬들이 <에코토피아 뉴스>와 <블록후드>를 함께 묶는다면, 이런 분류는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을 거시적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에코토피아 뉴스>와 <블록후드>는 많이 다른 것 같으나, 두 가지 사이에는 유구한 흐름이 있습니다.



그저께 9월 18일 게시글이 설명한 것처럼, 만약 윌리엄 모리스가 <블록후드>를 플레이할 수 있다면, 윌리엄 모리스가 이 게임을 좋아할까요? 여러 측면들에서 <에코토피아 뉴스>와 <블록후드>는 닮았습니다. 비록 <블록후드>는 목가적인 중세 마을을 보여주지 않으나, <블록후드> 역시 평온한 생태 공동체를 묘사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무한한 산업 확장을 주장하나, <블록후드>는 무한한 산업 확장이 인류 사회와 자연 환경을 파괴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블록후드>는 싱그러운 자연 환경을 보여주고, 심지어 인류 도시와 자연 생태계는 서로 어울릴 수 있습니다. 이런 조화는 삼림 건물이 됩니다.


삼림 건물은 지속 가능한 에너지를 이용하고, 곳곳에서 나무들을 키우고, 빈터를 야생 보호 구역으로 전환합니다. <에코토피아 뉴스>는 목가적인 중세 마을을 예찬하나, <블록후드>의 삼림 건물과 <에코토피아 뉴스>의 목가적인 마을은 비슷한 생태 공동체입니다. 물론 윌리엄 모리스는 <블록후드>가 급진적인 혁명을 주장하지 않는다고 비판할지 모릅니다. <에코토피아 뉴스>는 평온한 것 같으나, 이 소설은 급진적인 혁명이 참혹한 무장 봉기를 거친다고 이야기합니다. 아무 폭력과 투쟁 없이, 울창한 야생 삼림은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SF 팬들은 <에코토피아 뉴스>와 <블록후드>를 비교하고 대조할 수 있습니다.



윌리엄 모리스가 선구적인 생태 사회주의자, 생태학 SF 작가라고 해도, 윌리엄 모리스는 <블록후드>를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샬롯 퍼킨스 길먼이 사이언티픽 로망스를 이용해 초기 에코 페미니즘을 제시했다고 해도, 샬롯 퍼킨스 길먼 역시 <블록후드>를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윌리엄 모리스와 샬롯 퍼킨스 길먼은 그저 소설을 썼을 뿐입니다. 두 작가가 <블록후드>를 예상하지 못한 것처럼, 미래 사회에는 새로운 생태학 SF 매체가 있을 겁니다. 이게 무엇인지 21세기 초반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생태학 SF 매체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생태학 SF 덕후들은 과정과 흐름을 파악해야 합니다.


샬롯 퍼킨스 길먼이 사이언티픽 로망스를 이용해 자연 환경 복원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처럼, 오늘날 수많은 사이언스 픽션들은 자연 환경 복원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박문영 작가가 쓴 <지상의 여자들>은 샬롯 퍼킨스 길먼을 (우회적으로) 계승하는 것 같습니다. <지상의 여자들>은 생태 공동체를 보여주지 않으나, 이 소설은 여자들만의 공동체와 환경 운동, 동물 권리를 이야기합니다. <판도라: 퍼스트 콘택트> 같은 우주 4X 게임은 녹색 유토피아를 훨씬 직접 주장합니다. 샬롯 퍼킨스 길먼은 우주 4X 게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샬롯 길먼은 외계 행성의 거대 바다 괴수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사이언스 픽션, 환경 운동, 미래 유토피아 관점에서 <Moving the Mountain>과 <지상의 여자들>과 <판도라: 퍼스트 콘택트>는 이어질 수 있습니다. 20세기 초반 유토피아 소설 <Moving the Mountain>과 21세기 초반 우주 4X 게임 <판도라: 퍼스트 콘택트>처럼, 생태학 SF 덕후들은 어떻게 생태학 SF 장르가 흐르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비단 사이언스 픽션만 아니라 중세 판타지 역시 마찬가지일지 모릅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 중세 유럽 판타지는 엄청난 인기를 끕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에서 드루이드는 단골 손님입니다. 드루이드는 자연 계열을 대표하고, 자연 환경을 연구하고, 자연 신앙을 숭배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드루이드를 이용해 환경 오염들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전형적이지 않습니다. "아니, 왜 옛날 사람들이 드루이드를 이용해 환경 오염들을 이야기하지 않았지?" 300년 이후, 사람들은 물을지 모릅니다. 300년 이후, 판타지 작가들은 드루이드를 이용해 환경 오염들을 비판하고, 이런 이야기들은 대중적인 인기를 끌지 모릅니다. 아니면 300년 이후, 중세 판타지 장르와 드루이드 이야기는 사라질지 모릅니다. 아니면 300년 이후, 인류 문명은 멸망할지 모릅니다. 인류 문명이 멸망한다면, 생태학 SF 사조 역시 명맥을 잃을 겁니다. 300년 이후, 이런 미래는 현실이 될지 모릅니다.



시대는 흐르고, 시대가 흐르는 동안, 생태학 SF 장르 역시 계속 나타나고, 사라지고, 넓어지고, 달라집니다. 21세기 초반 생태학 SF 덕후들이 과정과 흐름을 파악한다면, 100년 이후, 200년 이후, 300년 이후, 미래 생태학 SF 덕후들은 이것을 계승할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미래에 생태학 SF 설정은 완전히 달라질지 모릅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하드 SF 설정에 속합니다. 300년 이후,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구닥다리 설정이 될지 모릅니다. 아무리 SF 작가들이 미래 문명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그들은 미래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합니다. SF 덕후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저 21세기 초반 시점을 미래로 투영할 뿐입니다. 하지만 생태학 SF 덕후들이 장르 흐름을 정리한다면, 미래 덕후들은 이것을 계승할 수 있을 겁니다. 만약 300년 이후에도 사람들이 이 블로그를 읽을 수 있다면, 미래 사람들은 21세기 초반 생태학 SF 덕후가 무엇을 고민했고, 정리했고, 분류했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생태학 SF 덕후들은 과거, 현재, 미래를 종합할 수 있어야 합니다.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생태학 SF 덕후들은 과거를 돌아봐야 합니다. 생태학 SF 덕후들이 뒤를 돌아본다면, 덕후들은 어떻게 윌리엄 모리스와 샬롯 퍼킨스 길먼이 생태학 사이언티픽 로망스들을 썼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런 소설들과 게임들이 똑같은 울타리에 들어간다면, 앞으로도 생태학 SF 장르는 계속 변할 겁니다.]



이렇게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은 저항 운동들과 함께 나타났습니다. 생태학 SF 장르와 저항 운동들은 별개가 아닙니다.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는 초기 생태 사회주의자이고 동시에 초기 생태학 SF 작가입니다. 생태 사회주의와 생태학 SF 장르에서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는 뛰어난 선구자입니다. 비단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만 아니라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에서 여러 전위 예술가들은 새로운 주제들을 고민했습니다. 어떤 관점에서 이런 상황은 자유분방했고, 어떤 관점에서 이건 엄청난 혼란이었습니다.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을 비난했고 억압했고 공격했기 때문에, 이런 전위적인 예술들은 제대로 사조를 이루지 못합니다.


심지어 나중에 이오시프 스탈린과 루카치 죄르지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사회주의 리얼리즘)를 밀어붙이고, 전위적인 예술들은 몰락합니다. 소비에트 연방은 비단 전위적인 예술들만 아니라 생태학과 환경 운동을 억압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소비에트 연방이 생태학과 환경 운동을 억압했다고 지적합니다. 트로핌 데니소비치 리센코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은 니콜라이 바빌로프를 지원했고, 그래서 20세기에서 니콜라이 바빌로프는 가장 중요한 식물학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반면, 이오시프 스탈린은 트로핌 데니소비치 리센코를 지원했고, 많은 환경 운동가들은 이오시프 스탈린을 비판합니다.



생태 사회주의자들 역시 이오시프 스탈린을 비판합니다. 분명히 이오시프 스탈린은 바가지로 쌍욕들을 퍼먹어야 합니다. 사회주의 운동권은 뭐라고 트로핌 데니소비치 리센코가 나불거렸는지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오직 이오시프 스탈린만 비판한다면, 이건 근본적인 비판보다 피상적인 힐난이 될 겁니다. 소비에트 연방이 파쇼주의와 싸워야 했기 때문입니다. 유럽이 파쇼주의에 물들고, 미국이 경제 공황을 두들겨맞고, 일본이 동아시아 식민지들을 수탈하는 동안, '고립된' 소비에트 연방은 2차 세계 대전을 혼자 준비해야 했습니다. 2차 세계 대전은 어린 아이 장난이 아닙니다. 이건 20세기 최대 비극입니다.


'고립된' 소비에트 연방은 20세기 최대 비극에 혼자 맞서야 했습니다. 그래서 '고립된' 소비에트 연방은 엄청나게 미친 짓거리를 저질러야 했습니다. 트로핌 데니소비치 리센코가 사실인 것처럼, 이것 역시 분명한 사실입니다. 소비에트 연방은 고립되었고 20세기 최대 비극에 혼자 맞서야 했습니다. 옆동네 유럽이 파쇼주의 광기에 빠지는 상황에서 소비에트 연방은 생태학과 환경 운동에 제대로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습니다. 이것 역시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말 근본적으로 비판하고 싶다면, 우리는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소비에트 연방을 왕따시켰고 파쇼주의 광기에 빠졌다고 지적해야 합니다. 자본주의는 훨씬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생태 사회주의는 소비에트 연방보다 자본주의 강대국들을 비판해야 합니다. 생태 사회주의가 이것을 외면한다면, 생태 사회주의는 다른 얄팍한 환경 운동들과 다르지 않을 겁니다. 생태 사회주의는 시대적인 상황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생태 사회주의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트로핌 리센코가 뚝 떨어졌다고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초월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생태학과 환경 운동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역사적인 과정과 흐름 속에서 생태학과 환경 운동은 존재합니다. 생태학 SF 덕후들이 과정과 흐름을 종합하는 것처럼, 생태 사회주의 역시 과정과 흐름을 잊어서는 안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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