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유사성들과 장르 정립, 장르 해석 본문
[화성 바이오스피어와 진화 생물학 게임은 다릅니다. 하지만 양쪽에는 유사성(생태적인 상상력)이 있습니다.]
문제) 다음 다섯 동물들 중에서 특징이 다른 하나를 고르세요.
1) 물수리 2) 혹등고래 3) 장수 거북 4) 얼룩무늬물범 5) 자이언트 수달
만약 사람들이 이런 문제를 푼다면, 사람들이 몇 번을 고를까요? 많은 사람들은 1번 물수리를 고를지 모릅니다. 혹등고래, 장수 거북, 얼룩무늬물범, 자이언트 수달은 수중 동물들입니다. 네 동물 모두 물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혹등고래와 장수 거북과 얼룩무늬물범의 다리들은 지느러미에 가깝고, 그래서 이런 동물들은 물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먹고 살기 위해 이런 동물들에게는 수중 환경이 필요합니다. 자이언트 수달은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수중 환경에서 벗어날 수 있으나, 자이언트 수달 역시 수중 환경에 적합합니다. 길다랗고 유연한 신체, 물갈퀴들, 짧은 다리들은 육상 환경보다 수중 환경에 적합합니다.
장수 거북이 바다를 헤엄쳐야 하는 것처럼, 자이언트 수달은 아마존 강물을 헤엄쳐야 합니다. 반면, 물수리는 헤엄치지 않습니다. 물수리에게는 본격적인 수중 생활을 위한 지느러미와 물갈퀴가 없습니다. 혹등고래, 장수 거북, 얼룩무늬물범, 자이언트 수달은 일상적으로 헤엄치나, 물수리는 두 날개로 날아다닙니다. 자이언트 수달에게 자맥질은 일상적이나, 물수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1번 물수리가 정답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정말 1번 물수리가 정답인가요? 정말 물수리가 혹등고래, 장수 거북, 얼룩무늬물범, 자이언트 수달과 다른가요?
하지만 물수리에게도 수중 자연 환경이 필요합니다. 이름처럼, 물수리는 물고기를 잡아먹습니다. 물수리는 물고기 이외에 다른 동물들을 사냥할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해도 물수리는 물고기들을 잡아먹습니다. 물고기를 사냥하기 위해 물수리는 자맥질합니다. 자이언트 수달과 달리, 물수리는 물 속을 헤집지 않습니다. 장수 거북과 달리, 물수리는 대양을 헤엄치지 않습니다. 얼룩무늬물범과 달리, 물수리는 깊고 깊은 물 속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물수리는 물고기를 사냥해야 하고, 그래서 물수리는 자맥질과 헤엄에 익숙해야 합니다.
이런 자연 다큐멘터리 동영상(링크)처럼, 적어도 물수리는 수중 환경에 친숙해야 합니다. 그래서 1번 물수리는 정답이 아닐지 모릅니다. 만약 1번 물수리가 정답이 아니라면, 누가 정답인가요? 누가 다른 네 동물들과 다른가요? 어쩌면 어떤 사람들은 3번 장수 거북이 정답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장수 거북은 파충류입니다. 반면, 혹등고래와 얼룩무늬물범과 자이언트 수달은 포유류입니다. 물수리는 조류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포유류와 조류가 온혈 동물이라고 묶고 파충류가 변온 동물이라고 묶습니다. 파충류는 스스로 체온을 조절하지 못합니다. 포유류와 조류는 가능합니다. 이건 포유류와 조류 이외에 다른 모든 동물이 스스로 체온을 조절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실 장수 거북은 어느 정도 체온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장수 거북은 우아하고 장엄한 수영 선수이고 동시에 체온을 조절할 수 있는 수영 선수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일반적으로 포유류와 조류 이외에 다른 동물들은 변온 동물에 속합니다. 혹등고래와 얼룩무늬물범과 자이언트 수달과 물수리는 온혈 동물(포유류와 조류)에 속하고, 장수 거북은 변온 동물(파충류)에 속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3번 장수 거북이 정답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반박할지 모릅니다. 다섯 동물들 중에서 오직 혹등고래만 수중 환경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수리와 장수 거북과 얼룩무늬물범과 자이언트 수달은 물 밖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네 동물들에게는 다리들이 있습니다.
반면, 혹등고래에게는 다리가 없습니다. 혹등고래의 다리들은 완전히 지느러미들입니다. 혹등고래는 완전히 수중 환경에 적응했습니다. 혹등고래가 바다를 벗어나고 싶다고 해도, 혹등고래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혹등고래가 바다를 벗어난다면, 이건 좌초가 될 겁니다. 얼룩무늬물범은 바다를 벗어나고 빙판 위에서 (펭귄들과 함께) 한가하게 쉴 수 있으나, 혹등고래에게 이건 좌초입니다. 혹등고래가 다른 생물종으로 진화하지 않는다면, 혹등고래는 영원히 바다를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장수 거북 역시 수중 환경에 완전히 적응했으나, 알들을 낳기 위해 암컷 장수 거북은 바다를 벗어나고 해변으로 올라갑니다. 장수 거북이 알들을 낳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해도, 장수 거북이 마음을 먹는다면, 장수 거북은 해변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혹등고래는 해변으로 올라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2번 혹등고래는 정답인지 모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여러 정답들을 대답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1번 물수리를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3번 장수 거북을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2번 혹등고래를 말합니다. 얼룩무늬물범과 자이언트 수달 역시 정답이 될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얼룩무늬물범이나 자이언트 수달에서 다른 특징들을 찾을지 모릅니다. 이렇게 우리가 유사성과 차이성을 분류할 때, 우리는 다양한 기준들을 내세울 수 있습니다. 사실 여기에는 정답이 없을 겁니다. 혹등고래와 얼룩무늬물범과 자이언트 수달이 포유류이기 때문에, 세 동물들은 장수 거북과 다릅니다.
계통 분류학에서 이건 정답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계통 분류학보다 다른 기준들을 내세운다면, 정답은 바뀔 수 있습니다. 혹등고래가 바다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생활 환경을 고려한다면, 혹등고래는 얼룩무늬물범과 자이언트 수달과 장수 거북과 다릅니다. 생활 환경이 기준이 될 때, 자이언트 수달은 혹등고래보다 장수 거북에 가깝습니다. 자이언트 수달과 장수 거북은 똑같이 육지에 나갈 수 있으나, 혹등고래는 그렇지 못합니다. 혹등고래가 토끼를 꼬시고 싶다고 해도, 별주부와 달리, 혹등고래는 바다 밖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혹등고래와 장수 거북 사이에는 여러 유사성들과 차이성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해석에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가 뭔가를 분류하고 대조하고 정리할 때, 우리는 여러 기준들을 내세웁니다. 그래서 분류, 대조, 정리는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이것들은 유동적입니다. 인류보다 생물 다양성은 원초적입니다. 하지만 계통 분류학은 인위적입니다. 캄브리아 시대에서 오파비니아들이 번성했을 때, 계통 분류학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계통 분류학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레이첼 카슨은 다른 방법으로 생물 다양성을 분류합니다. SF 장르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SF 장르는 다섯 동물들 문제와 비슷합니다. SF 팬들은 유사성들을 찾고, 비슷한 것들을 묶고, 특징들이 다른 것들을 대조하기 원합니다.
하지만 기준들이 고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SF 장르는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혹등고래와 얼룩무늬물범과 자이언트 수달이 물수리와 다른 것처럼, 물수리와 장수 거북과 자이언트 수달이 혹등고래와 다른 것처럼, 물수리와 얼룩무늬물범과 자이언트 수달이 장수 거북과 다른 것처럼, 분류는 계속 바뀔 수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장르가 고정적이라고 생각하나, 이건 커다란 착각인지 모릅니다. 이웃집 영희는 영화 <스타 워즈: 새로운 희망>과 소설 <반지 원정대>가 비슷하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양쪽 모두 영웅 서사시에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덧붙이기 때문입니다. 옆동네 철수는 반박할 겁니다.
옆동네 철수는 <새로운 희망>이 사이언스 픽션이고 <반지 원정대>가 중세 판타지라고 반박할 겁니다. 옆동네 철수는 소설 <듄>과 애니메이션 <고지라: 행성 포식자>를 비교할지 모릅니다. 양쪽 모두 행성 생태계 변화를 거시적으로 조명하기 때문입니다. 뒷동네 말자 할머니는 반박할 겁니다. 말자 할머니는 <듄>이 스페이스 오페라이고 <고지라: 행성 포식자>가 괴수물이라고 반박할 겁니다. 아무리 모래 벌레가 거대하다고 해도, <듄>은 괴수물이 아닙니다. 뒷동네 말자 할머니는 소설 <야생종>과 영화 <엑스맨>을 똑같이 초인 장르로 분류할지 모릅니다. 양쪽 모두 초인들을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아랫집 수진은 반대할 겁니다. 아랫집 수진은 <엑스맨>이 <야생종>보다 <슈퍼맨>과 <스파이더맨>과 심지어 <쾌걸 조로>에 가깝다고 이야기할 겁니다. 엑스맨들이 영웅들이기 때문입니다. 소설 <야생종>에서 아무리 안얀우가 뛰어난 치유사이고 동물 변신술사라고 해도, 안얀우는 영웅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랫집 수진은 말자 할머니에게 반대할 겁니다. 아랫집 수진은 게임 <플래닛 베이스>의 바이오 돔 생물학자와 게임 <던전스 앤 드래곤스>의 드루이드가 비슷하다고 간주할지 모릅니다. 바이오 돔 생물학자와 드루이드 모두 자연 생태계를 조사하고 연구하고 관리합니다. 중세 판타지 속에서 드루이드는 생태학자와 비슷합니다.
이런 스크린샷(링크)처럼, 바이오 돔에서 생물학자는 식물들을 키웁니다. 바이오 돔 속의 생물학자처럼, 이런 팬 아트(링크)는 드루이드가 식물들을 키운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웃집 영희는 바이오 돔 생물학자가 진화 생물학을 인정하고 드루이드가 진화 생물학을 알지 못한다고 반박할 겁니다. 아무리 여자 드루이드가 동물 동료로서 장수 거북과 사귄다고 해도, 여자 드루이드는 레이첼 카슨이 되지 못하고 <바다의 가장자리>를 쓰지 못합니다. 영희와 말자 할머니가 사라 스콧이 쓴 <천년 홀과 주변국 묘사>가 SF 소설이라고 분류한다면, 철수와 수진은 이게 사이언스 픽션보다 페미니즘 사변 문학에 가깝다고 반박할 겁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다양한 기준들을 내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SF 장르는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SF 팬들은 사이언스 픽션이 무엇인지 계속 논의해야 합니다. 이런 지속적인 논의 속에서 SF 장르는 존재합니다. 유사성들은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장르 역시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이웃집 영희와 옆동네 철수와 뒷동네 말자 할머니와 아랫집 수진은 <마스터 오브 오리온>이 사이언스 픽션이라고 동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메리 셸리와 에드워드 벨라미가 사이언티픽 로망스들을 썼을 때, 메리 셸리와 에드워드 벨라미는 <마스터 오브 오리온>을 절대 상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메리 셸리와 에드워드 벨라미가 외계인 이야기를 상상했다고 해도, 메리 셸리와 에드워드 벨라미는 비디오 4X 게임이 외계인들을 이야기할 거라고 절대 상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어떻게 19세기 서구 사람들이 20세기 후반 비디오 게임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사이언스 픽션이 근대적인 진보를 이용해 상상하기 때문에, SF 장르는 특별히 유동적입니다. 메리 셸리가 우주 4X 비디오 게임 <마스터 오브 오리온>을 상상하지 못한 것처럼, 우리는 장르를 고정시키지 못합니다. 21세기 SF 팬들은 사이언스 픽션을 규정할 수 있으나, 23세기에서 이런 규정은 크게 바뀔지 모릅니다. 메리 셸리가 <마스터 오브 오리온>을 상상하지 못한 것처럼, 21세기 SF 팬들은 23세기 SF 장르를 상상하지 못합니다. 장르는 얼마든지 넓어질 수 있습니다. 비단 장르 정의만 아니라 소설 해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틀 전에 6월 23일 게시글은 반다나 싱이 쓴 <아내>와 생태계 오픈 월드 게임 <쉘터 2>와 움베트로 에코가 쓴 <소설의 숲으로 여섯 발자국>을 이야기했습니다. 어떻게 이 세 가지가 서로 이어질 수 있나요? 단편 소설 <아내>와 생태계 게임 <쉘터 2>와 문학 비평 <소설의 숲으로 여섯 발자국> 사이에 유사성이 있나요? 네, 여기에는 유사성이 있습니다. <아내>와 <쉘터 2>와 <소설의 숲으로 여섯 발자국>은 모두 방대한 숲을 이야기합니다. 단편 소설 <아내>에서 아내는 숲을 방황하고, <쉘터 2>는 드넓은 야생을 보여주고, <소설의 숲으로 여섯 발자국>은 문자 그대로 소설이 숲이라고 말합니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숲이 방대하다고 간주합니다.
[메리 셸리는 SF 작가입니다. 하지만 메리 셸리는 이런 스페이스 오페라 게임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숲이 방대하기 때문에, 숲에는 고정적인 경로가 없습니다. <아내>와 <쉘터 2>와 <소설의 숲으로 여섯 발자국> 역시 고정적인 경로를 말하지 않습니다. 이런 '유사성' 때문에, <아내>와 <쉘터 2>와 <소설의 숲으로 여섯 발자국>은 만날 수 있습니다. 반다나 싱은 이걸 의도하지 않았을 겁니다. 반다나 싱은 <아내>가 <쉘터 2> 같은 생태계 오픈 월드 게임과 이어질 거라고 의도하지 않았을 겁니다. 반다나 싱이 <아내>를 쓰는 동안, 반다나 싱은 <쉘터 2> 같은 생태계 게임을 머릿속에 떠올리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반다나 싱이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현실 속에서 우리는 <아내>와 <쉘터 2>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뭐, 반다나 싱이 <쉘터 2>를 플레이한다면, 반다나 싱은 <쉘터 2>를 좋아할지 모릅니다. 단편 소설 <아내>는 아내(여자)-숲-야생 동물을 연결하고, 게임 <쉘터 2> 역시 엄마(여자)-숲-야생 동물을 연결합니다. 아니면 반다나 싱은 <쉘터 2>가 지루하고 따분한 게임이라고 싫어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반다나 싱이 <쉘터 2>를 싫어한다고 해도, <아내>와 <쉘터 2>에는 비슷하게 여자, 숲, 야생 동물이 있습니다. 작가가 의도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유사성을 찾고 소설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많은 독자들은 독자가 반드시 작가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나, 작가보다 현실은 훨씬 방대합니다.
작가보다 현실이 훨씬 방대하기 때문에, 작가는 오직 자신의 의도만을 관철시키지 못합니다. 그래서 독자는 현실을 이용해 소설을 훨씬 폭넓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만약 게임 플레이어가 <Among Ripples 2> 같은 생태계 게임을 플레이한다면, 게임 플레이어가 이것과 킴 스탠리 로빈슨이 쓴 <오로라>를 연결할 수 있을까요? <Among Ripples 2>와 <오로라> 사이에 유사성이 있나요? <Among Ripples 2>가 사이언스 픽션이 아님에도, <Among Ripples 2>와 <오로라>가 함께 엮일 수 있나요? 솔직히 이건 너무 황당무계한 해석인지 모릅니다.
어떻게 <오로라> 같은 하드 SF 소설과 <Among Ripples 2> 같은 생태계 게임이 이어질 수 있습니까? <Among Ripples 2>에는 SF 설정이 없습니다. <Among Ripples 2>에는 생태적인 상상력이 없습니다. 이 게임은 바이오 돔, 유전자 조작 기술, 폐쇄 인공 생태계 모식도, 테라포밍, 거시적인 생태계 변화, 미래 생물 다양성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만약 <Among Ripples 2>에 어떤 생태적인 상상력도 없다면, 어떻게 <Among Ripples 2>와 <오로라>가 비슷할 수 있을까요? 이웃집 영희가 두 가지를 연결한다면, 옆동네 철수와 뒷동네 말자 할머니와 아랫집 수진은 이게 틀린 해석이라고 반박할지 모릅니다. 분명히 이웃집 영희의 해석에는 어느 정도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웃집 영희는 완전히 틀리지 않았습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Among Ripples 2>를 플레이한다면, 게임 플레이어는 직접 자연 생태계를 조성할 겁니다. <Among Ripples 2>는 이런 재미를 선사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직접 자연 생태계를 조성합니다. 비단 <Among Ripples 2>만 아니라 여러 생태계 게임들은 이런 재미를 선사합니다. 생태계 게임 <Equilinox> 예고편 문구가 주장하는 것처럼, 생태계 게임 플레이어는 직접 자연을 만듭니다. 그리고 소설 <오로라>에서 우주선 승무원들 역시 직접 자연을 만듭니다. 소설 <오로라>는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이 소설은 세대 우주선 속의 폐쇄 인공 생태계를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뚝딱뚝딱 세대 우주선을 짓고 직접 내부 생태계를 조성해야 합니다. 제한적인 환경에서 사람들은 직접 인공 생태계를 만듭니다. <Among Ripples 2> 역시 제한적인 환경에서 게임 플레이어가 호수 생태계를 조성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양쪽은 '인간이 직접 제한적인 생태계를 조성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과 세대 우주선 소설은 이어질 수 있습니다. 우주선 설계자들은 우주선이 어떤 지구 기후들을 재현할지 고민해야 합니다. 세대 우주선이 영구 동토층 빙하를 재현해야 하나요? 세대 우주선이 온대 삼림을 재현한다면, 여기에는 가치가 있을지 모릅니다. 온대 삼림이 인류 문명에 많은 혜택들을 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구 동토층 빙하가 중요한가요? 아무리 세대 우주선 생태계가 지구 자연 생태계를 모방한다고 해도, 영구 동토층이 필요한가요? 이게 공간 낭비가 아닌가요? 우주선 설계자들은 결정할 수 있습니다. 지구 자연 생태계에는 북방 영구 동토가 있으나, 세대 우주선 설계자들은 오직 온대 삼림만으로 우주선 내부 생태계를 채울 수 있습니다. 아니면 세대 우주선 설계자들은 열대 우림을 채우거나, 건조한 사막을 채우거나, 계절성 기후를 채울 수 있습니다. <Among Ripples 2>를 비롯해 수많은 생태계 게임들에서 게임 플레이어가 직접 자연을 조성하는 것처럼, 세대 우주선 설계자들은 직접 자연을 조성합니다.
생태계 게임 플레이어와 세대 우주선 설계자들 모두 어떻게 그들이 자연 생태계를 인위적으로 배치하는지 고민합니다. <Among Ripples 2>에는 생태학 SF 설정(내용)이 없으나, 생태계 게임 형식은 세대 우주선 생태계와 비슷합니다. 그래서 이웃집 영희가 폐쇄 인공 생태계 설정을 읽고 생태계 게임을 머릿속에 떠올린다고 해도, 이건 과잉 해석이 아닐 겁니다. 이웃집 영희는 생태계 게임 <Among Ripples 2>와 생태학 SF 소설 <오로라>에서 커다란 유사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옆동네 철수와 뒷동네 말자 할머니와 아랫집 수진은 이런 해석이 완전히 틀리다고 반박하지 못합니다. 어쩌면 옆동네 철수는 이런 해석이 그저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따질지 모릅니다.
[세대 우주선 설계자들과 생태계 게임 플레이어는 자연을 직접 조성하고 배치합니다. 이건 유사성입니다.]
이 블로그에는 유사성들을 찾는 여러 사례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그저 말장난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 단테가 장미 십자회 회원이라고 증명하기 위해 가브리엘레 주세페 로세티가 유사성들을 찾는 것처럼, 유사성을 이용한 해석은 집착과 억지가 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일상에서 우리는 비유들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합니다. "그 아가씨의 녹색 눈동자는 가장 아름다운 에메랄드이다." 이건 아가씨의 눈동자가 보석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아가씨가 으리으리한 고급 금은방에 찾아간다고 해도, 아가씨의 눈동자는 보석 감정을 받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비유들을 사랑합니다.
세계 고전 문학들부터 유행가 가사들까지, 우리는 숱한 비유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런 비유들은 유사성을 활용합니다. 여자친구 노래 <여름 여름해>가 "엄지 척, 은하수 건너서"라고 말할 때, 이건 유사성(발음)을 이용합니다. 이 가사에서 엄지와 은하수는 두 여자친구 멤버를 가리키거나, 손가락 및 우주를 가리키거나, 양쪽 모두를 가리키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런 비유가 재미있고 참신하고 즐겁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언어 활동에서 유사성들은 필수적인지 모릅니다. 나오미 노빅이 쓴 <업루티드>에서 마법사 아그니에슈카가 주문 발현을 설명할 때, 아그니에슈카는 추상적인 개념들을 언어에 연결(숲 속에서 오솔길을 찾기)합니다. 주문 발현은 오솔길 찾기가 됩니다.
어떤 관점에서 이런 연결은 정말 억지입니다. 하지만 독자들은 이게 억지라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독자들은 나오미 노빅이 훌륭한 필력을 발휘한다고 호평합니다. 이런 연결보다 <Among Ripples 2> 및 <오로라>는 훨씬 가시적인 유사성들을 보여줍니다. <Among Ripples 2>와 <오로라>에서 이웃집 영희는 훨씬 쉽게 유사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Among Ripples 2>는 <오로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웃집 영희는 멈추지 않고 훨씬 멀리 나갈 수 있습니다. 소설 <오로라>는 자연 환경 보호를 말합니다. 소설 <오로라>가 환경 보호를 말하기 때문에, 영희는 <Among Ripples 2>를 이용해 환경 보호를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소설 <오로라>가 환경 보호를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현실 속에서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생물 다양성을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중입니다. 이웃집 영희는 현실을 이용해 창작물을 폭넓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영희는 현실 속의 자본주의 환경 오염과 <Among Ripples 2>와 <오로라>를 이용해 환경 운동을 말할 수 있습니다. <Among Ripples 2>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사라져야 한다고 말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현실에서 자본주의가 너무 심각한 환경 오염들을 일으키기 때문에, 이웃집 영희는 창작물을 이용해 해석할 수 있습니다.
<Among Ripples 2>가 자본주의 환경 오염을 직접 비판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웃집 영희는 소설 <오로라>를 이용하거나 직접 현실에서 유사성을 찾고 자본주의 환경 오염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자본주의 역시 유사성들을 이용해 자연을 상품화할 수 있습니다. KCC 인테리어 광고를 보세요. KCC 인테리어 광고에서 박찬호는 메이저리그 경기와 인테리어 회사를 연결합니다. 솔직히 메이저리그 경기와 인테리어 회사 사이에 유사성들이 있습니까? 이건 너무 엉뚱하고 우스꽝스러운 연결입니다. 하지만 박찬호는 유사성들을 이용해 두 가지를 연결합니다. 이것보다 자연 상품화는 훨씬 쉽습니다.
숱한 화장품 광고들이 맑고 깨끗하고 건강한 자연을 운운하는 것처럼, 자본주의 시장 경제 역시 자연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Among Ripples 2>를 이용해 환경 운동을 주장할 때, 화장품 광고가 맑고 건강한 자연을 떠들 때, 무엇이 훨씬 올바른 해석인가요? 후자보다 전자는 훨씬 옳은 해석일 겁니다. 왜 후자보다 전자가 훨씬 옳은가요? 후자보다 전자가 훨씬 특별한 비평 방법을 이용하기 때문에? 그건 아닙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Among Ripples 2>를 이용해 환경 운동을 주장하든, 화장품 광고가 맑고 건강한 자연을 떠들든, 양쪽 모두 똑같이 유동적인 유사성들을 이용해 해석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계급 투쟁이 화장품 광고보다 환경 운동을 응원하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의 해석은 옳고, 화장품 광고의 해석은 틀립니다. 아무리 화장품 광고들이 건강한 자연을 떠든다고 해도, 자본주의 시장 경제 속에서 자연은 절대 건강해지지 못합니다. 오히려 자본주의는 열대 밀림들을 파괴하고, 매연들을 뿜고, 기후 변화를 일으킵니다. 17세기 플랜테이션 농장들부터 21세기 초반 기후 변화까지, 자본주의는 단 한 번이라도 대규모 환경 오염들을 멈춘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현실을 이용해 유사성들을 찾고 창작물을 해석할 때, 우리는 계급 투쟁을 고려해야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