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에드 리지스가 정말 자연 환경에 감탄하는가 본문
[사람들이 이런 아름답고 장대한 풍경에 감탄한다면, 그게 무조건 환경 보호로 이어질 수 있을까요?]
소설 <쥬라기 공원>에서 자문 과학자들과 방문객들은 공룡 사파리를 둘러봅니다. 공룡 사파리를 둘러보는 동안 그들은 여러 공룡들을 만납니다. 그것들 중에는 티라노사우루스 렉스가 있습니다. 티라노사우루스 렉스를 만나기 전에 잠시 방문객들은 노을이 지는 공원 풍경을 바라봅니다. 저녁 노을은 열대 밀림을 붉게 물들이고, 카마라사우루스들은 웅장하고 아련하게 걷습니다. 이런 풍경을 바라봤을 때, 방문객들은 자신들이 정말 선사 시대로 돌아갔다고 착각했습니다.
에드 리지스는 자신이 이런 풍경을 아주 좋아한다고 말합니다. 에드 리지스는 가끔 자신이 공룡 사파리를 방문하고 웅장하고 아련한 대자연을 감상한다고 말합니다. 정말 에드 리지스가 저녁 노을이 지는 공룡 사파리를 감상하곤 하는지 독자는 알지 못합니다. <쥬라기 공원>은 방문객들이 공원에 방문하는 이틀을 보여줍니다. 평소에 에드 리지스가 노을이 지는 공룡 사파리를 감상하는지 독자는 확인하지 못합니다. 어쩌면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에드 리지스는 뻥을 쳤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소설은 노을이 지는 선사 시대 풍경이 정말 아름답다고 묘사합니다. 에드 리지스는 거기에 반했을지 모릅니다.
<쥬라기 공원: 오퍼레이션 제네시스>나 <쥬라기 월드 에볼루션> 같은 비디오 게임들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이런 선사 시대 풍경을 만날 수 있습니다. 비디오 게임들을 플레이하는 동안 게임 플레이어는 직접 공룡 사파리를 꾸밀 수 있습니다. 저녁이 될 때, 붉은 노을은 공룡 사파리를 물들입니다. 붉은 노을과 우아하고 커다란 초식 공룡들과 열대 밀림은 환상적인 조합입니다. 소설 속에서 에드 리지스와 방문객들은 이런 풍경을 바라봤고 감탄했을 겁니다. 소설 <쥬라기 공원>은 글자들을 제시했으나, 게임 <오퍼레이션 제네시스>나 <쥬라기 월드 에볼루션>을 플레이할 때, 게임 플레이어는 시각적으로 대자연을 겪을 수 있죠.
비단 시각적인 체험만이 아니라 청각적인 체험 역시 아름답습니다. 천둥 소리, 강물이 흐르는 소리, 비가 내리는 소리, 여러 동물들의 울음소리들, 풀벌레들의 연주 소리들, 우렁찬 T-렉스의 포효…. 어떤 사람들은 청각적인 체험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동영상을 듣는다면, 왜 청각적인 체험이 중요한지 사람들은 알 수 있을 겁니다. (이런 것을 들을 때, 헤드폰은 필수겠죠.) 에드 리지스가 말없이 선사 시대 풍경을 감상한 것처럼, 게임 플레이어 역시 <오퍼레이션 제네시스>를 이용해 비슷한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오퍼레이션 제네시스> 같은 게임은 그저 건설 게임에 불과하지 않을 겁니다. 이건 감상하는 게임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건설 시간보다 감상 시간은 훨씬 길지 모릅니다.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공원 건설보다 자연 감상에 훨씬 많은 시간을 할애할지 모릅니다.
이런 풍경을 바라본다면, 게임 플레이어는 왜 수많은 사람들이 대자연을 찬미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비록 사이카니아들과 저녁 노을을 찬미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겠으나, 게임 플레이어는 대자연 그 자체가 정말 원대하다고 감탄할 수 있을 겁니다. 어떤 TED 강연에서 알랭 드 보통이 지적한 것처럼, 대자연을 바라볼 때, 인간은 자신을 넘어서는 원대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연을 좋아하는 이유는 비단 웰빙 때문만이 아닙니다. 인간이 나타나기 이전에 자연 생태계, 생물 다양성, 먹이 그물망은 이미 존재했습니다. 자연 생태계는 스승이자 선배가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연 생태계를 직접 만들지 못합니다. 인간은 자연 생태계에서 영성을 느낄 수 있겠죠.
에드 리지스 역시 이걸 느꼈을지 모릅니다. 에드 리지스가 영성을 깊게 인식하지 못했다고 해도, 에드 리지스는 대자연이 정말 멋지다고 느꼈고 가끔 저녁 노을을 구경하기 위해 공룡 사파리에 들렸겠죠. 제임스 발라드가 쓴 소설 <물에 잠긴 세계>와 달리, 에드 리지스가 원시적인 향취에 푹 빠지지 않았다고 해도, 분명히 에드 리지스는 영성을 느꼈을 겁니다. 독자들은 에드 리지스가 자연을 사랑한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반면, 이런 상황에서 앨런 그랜트는 별로 감동을 받지 않았습니다. 앨런 그랜트는 '감동을 받지 않은 목소리로' 그저 티라노사우루스 렉스가 어디에 있는지 물었을 뿐입니다.
앨런 그랜트는 우아하고 장대한 밀림 풍경보다 티라노사우루스 렉스에게 관심을 쏟았습니다. 공룡 사파리는 아련한 선사 시대 풍경을 선사했으나, 앨런 그랜트는 '감동을 받지 않은 목소리로' 산통을 깼습니다. 그래서 앨런 그랜트가 자연을 사랑하지 않을까요? 에드 리지스와 달리, 앨런 그랜트가 대자연과 영성을 인식하지 못할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앨런 그랜트는 고생물학자이고 생물학자로서 대자연을 사랑합니다. 사실 에드 리지스보다 앨런 그랜트는 대자연에 훨씬 많은 관심을 기울입니다. 에드 리지스는 그저 저녁 노을을 감상할 뿐이나, 앨런 그랜트는 공룡 사파리가 자연 생태계를 교란하는지 적극적으로 연구하기 원합니다. 공룡 사파리가 자연 생태계를 교란한다고 해도, 에드 리지스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에드 리지스는 광고 담당입니다. 쥬라기 공원에서 에드 리지스는 홍보 문구를 작성하고 공룡 사파리를 광고합니다. 에드 리지스에게 중요한 것은 광고와 광고 수익입니다. 공룡 사파리가 자연 생태계를 교란한다고 해도,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쥬라기 공원이 엄청난 수익을 올릴 수 있다면, 홍보 문구들이 멋지게 쥬라기 공원을 광고할 수 있다면, 아무리 공룡 사파리가 자연 생태계를 교란한다고 해도, 에드 리지스는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아무리 자주 에드 리지스가 공룡 사파리를 방문하고 저녁 노을을 감상한다고 해도, 그건 그저 멋진 그림을 감상하는 행위와 다르지 않겠죠.
에드 리지스는 대자연이 아니라 그저 거대하고 멋진 그림을 좋아할 뿐인지 모릅니다. 이건 '자연을 사랑하는' 행위가 아니겠죠. 사실 이건 꽤나 애매한 문구입니다. '자연을 사랑한다'는 문구가 무엇일까요? 어떻게 사람이 자연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생태학자들이 자연을 사랑할까요? 환경 운동가들이 자연을 사랑할까요? 재벌 기업 총수들이 자연을 사랑할까요? 가난한 시골 할머니들이 자연을 사랑할까요? 커다란 초식 공룡들과 저녁 노을과 열대 밀림이 환상적인 조합이 될 때, 생태학자들과 환경 운동가들과 재벌 기업 총수들과 가난한 시골 할머니들은 모두 환상적인 대자연에 감탄할 수 있을 겁니다. 이게 자연을 사랑하는 행위일까요?
흔히 사람들은 자연이 어떤 독립적인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류 문명 밖에서 자연은 존재합니다. 자연과 인류 문명 사이에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자연은 자연입니다. 그 자체로서 자연은 자연이 될 수 있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는 자연 생태계를 가공해야 합니다. 자연 생태계 속에서 인간은 노동하고 먹고 살아야 합니다. 인간은 포도를 따거나 옥수수를 기르거나 명태를 낚거나 꿀벌을 키워야 합니다. 인간은 자연 생태계에 영향을 미치고, 자연 생태계 역시 인간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시대와 장소에 따라 영향력들은 바뀝니다. 그렇다고 해도 자연 생태계는 독립적이지 않습니다. 자연 생태계와 인류 문명은 서로 계속 영향들을 미칩니다. 특히, 17세기 이후, 유럽 문명은 적극적으로 열대 밀림을 파괴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럽 문명이 열대 밀림을 파괴하기 이전, 남아메리카 문명 역시 열대 밀림을 파괴했습니다. 하지만 유럽 문명은 플랜테이션 농업이라는 새로운 환경 오염을 저질렀습니다. 적어도 환경 오염을 저지르기 위해 남아메리카 문명은 대양을 건너지 않았죠. 하지만 유럽 문명은 대양을 건넜고 새로운 환경 오염을 저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건 현대적인 환경 오염에 속합니다. 사실 플랜테이션 농업은 초기 자본주의를 뒷받침했습니다.
19세기 이후, 산업 자본주의는 자연 생태계를 훨씬 심각하게 파괴하기 시작합니다. 자본주의 강대국들은 막대한 부를 얻었고 자신들이 대단하다고 떵떵거렸습니다. 당연히 다른 문명들 역시 산업 자본주의를 따라가고 싶어했습니다. 산업 자본주의는 제국주의 및 파쇼주의와 결합했고,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고, 수많은 지역들을 쑥대밭으로 짓밟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먹고 살기 위해, 산업 자본주의와 싸우기 위해, 산업 자본주의를 따라가기 위해, 여러 문명들은 산업 개발에 박차를 가합니다.
그것들은 심각한 환경 오염들로 이어졌습니다. 기후 변화, 미세 먼지, 핵 폐기물, 쓰레기 섬은 이런 여파에 속합니다. 자본주의가 발달했기 때문에, 기후 변화, 미세 먼지, 핵 폐기물, 쓰레기 섬 같은 현대적인 환경 오염들은 나타났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멋진 저녁 노을을 감상한다고 해도, 그게 '자연을 사랑하는' 행위가 될 수 있을까요? 재벌 기업 총수는 저녁 노을과 열대 밀림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후 변화가 열대 밀림을 파괴한다고 해도, 재벌 기업 총수는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이윤을 축적하기 위해 재벌 기업 총수는 훨씬 열심히 온실 가스를 뿜고 싶어하겠죠. 그렇게 재벌 기업 총수는 '자연을 사랑'하겠죠.
사람들은 대양에 쓰레기 섬이 있다고 생각하나, 쓰레기 섬은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진짜 심각한 문제는 미세 쓰레기들입니다. 바다에는 미세 쓰레기들이 널렸고, 이것들을 일일이 수거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쓰레기 섬보다 미세 쓰레기들은 훨씬 심각한 문제입니다. 물론 분명히 커다란 쓰레기 덩어리들은 있습니다. 미세 쓰레기들처럼, 커다란 쓰레기 덩어리들 역시 만만하지 않은 문제입니다. 이런 쓰레기들을 언급할 때, 과학자들은 인류의 탐욕이 바다를 오염시켰다고 말할 겁니다. 숱한 과학자들은 인류가 탐욕스럽게 산업을 개발했고 쓰레기들을 버렸다고 말할 겁니다.
시내 도서관의 자연 과학 서가에서 사람들은 얼마든지 그런 주장들을 찾아볼 수 있겠죠. 하지만 정말 인류가 탐욕스럽게 산업을 개발했나요? 유럽 백인들과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똑같이 탐욕스럽게 플랜테이션 농장들을 만들었나요? 19세기 유럽 공장들이 매연을 뿜었을 때, 부유한 자본가들과 가난한 하층민 여자들이 똑같이 탐욕스럽게 이득을 얻었나요? 20세기 미국이 엄청난 에너지를 탐욕스럽게 소모할 때, 인도의 시골 할머니들이 똑같이 탐욕스럽게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할 수 있었을까요? 인류는 똑같이 인류가 아닙니다. 인류 사회에는 수직적인 계급이 있습니다. 숱한 과학자들은 이걸 언급하지 않고 부유한 서구 남자 자본가들과 가난한 인도 할머니들이 똑같이 탐욕스럽다고 말합니다.
이건 심각한 계급 차별이고 성 차별이고 인종 차별입니다. 숱한 과학자들은 계급 차별, 성 차별, 인종 차별을 저지릅니다. 그렇게 숱한 과학자들은 '자연을 사랑'합니다. 인류 사회에게 그 자체로서 자연은 자연이 아닙니다. 인류 사회에 수직적인 계급 구조가 있기 때문에, 자연을 바라볼 때, 우리는 계급 구조를 고민해야 할 겁니다. 자연 생태계를 바라보고 싶다면, 우리는 어떻게 계급 구조가 자연 환경을 오염시키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아무리 재벌 기업 총수와 자연 과학자가 자연을 사랑한다고 해도, 그런 자연 사랑은 절대 환경 오염을 막지 못하겠죠. 그들이 계급 구조를 파악할 수 있을 때, 그들은 환경 보호에 훨씬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