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언폴른 나무 외계인들과 나무 사이보그 우주선 본문
[언폴른 우주 전함. 유저 설정에 따르면, 이건 나무 우주선, 식물 사이보그, 살아있는 우주선입니다.]
어슐라 르 귄은 자신이 나무를 특별히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어슐라 르 귄은 몇몇 판타지 단편과 SF 단편에서 지적인 나무나 나무 마법사를 이야기했어요. 제목처럼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은 숲에게 바치는 찬가인 동시에 무분별한 벌목과 열대 우림 파괴를 비판하는 소설일 겁니다. 왜 어슐라 르 귄이 나무를 좋아할까요? 수필 <나무>에서 이양하는 나무에게 여러 미덕들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솔직히 그건 너무 인간 중심적인 관점입니다. 이양하는 나무가 고독함을 알고 불만을 늘어놓지 않고 스스로 만족한다고 말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식물이 수동적이라고 간주하죠. 우리가 동물이기 때문에 우리는 식물이 아주 수동적이라고 간주합니다. 사실 식물들은 움직이지 못하죠. 하지만 정말 식물이 움직이지 못할까요? 식물이 정말 수동적일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비록 식물이 동물과 다르다고 해도, 식물들 역시 아주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입니다. 생존하기 위해 식물들은 온갖 독소들을 연구하고, 단단한 씨앗들을 키우고, 집요하게 양지를 추구하고, 다른 식물들에게 기생합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식물은 수동적입니다. 이런 관점을 풍자하고 페미니즘에 적용하기 위해 패트리스 머피는 <채소 마누라>를 썼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식물들은 수동적이지 않습니다. 그저 동물들에 비해 식물들은 수동적일 뿐이죠. 따라서 이양하가 쓴 <나무>는 담백하고 잔잔한 수필이나, 인간 중심적인 편견에 빠졌는지 모릅니다. 존 로널드 톨킨이 무조건 우드 엘프들과 나무 거인들이 아름답다고 예찬한 것처럼, <나무>는 자연(식생)을 무조건 아름다운 대상으로 간주했어요. 엔트들과 <나무>는 인간 중심적인 시각에서 별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어슐라 르 귄이 그런 인간 중심적인 사고 방식에 빠져들었을까요? 글쎄요, 어슐라 르 귄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작가가 아닙니다. 종종 어슐라 르 귄은 온건한 타성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나, 꽤나 날카롭게 자연의 그림자를 헤집을 줄 알죠. 어슐라 르 귄은 자연에 기근과 고통과 죽음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어슐라 르 귄이 인간 중심적인 사고 방식에 빠졌다고 말한다면, 그건 과소평가일 겁니다. 자연을 무조건 예찬하지 않는다면, 인간으로서 우리는 나무가 아름답고 평화롭다고 감상할 수 있습니다. 엔트들과 이양하의 <나무>는 편협할지 모르나, 자연이 무조건 아름답다는 편견을 경계할 수 있다면, 우리는 나무에게서 평화로운 감성을 끄집어내고 그걸 즐길 수 있겠죠. 게임 <엔들리스 스페이스 2>에 나오는 언폴른은 그런 결과에 가까울 겁니다. 언폴른은 나무 외계인입니다. 숲 속에서 언폴른이 미동 없이 서있는다면, 사람들은 언폴른과 나무를 구분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사실 종족 소개 동영상에서 다른 외계인들은 숲 속에 서있는 언폴른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나무가 평화롭다는 인식처럼, 언폴른 종족은 평화주의자들입니다. 이건 언폴른이 무조건 비폭력 노선을 고집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른 외계인들과 만나기 전까지, (나무 종족으로서) 언폴른은 느리게 발전했습니다. 나무가 천천히 자라고 쉽게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언폴른은 빠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외계인들은 전쟁을 벌이고, 전쟁은 언폴른이 살아가는 행성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제 언폴른은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달았고 '불'을 이용하기 시작합니다. 나무에게 불은 파괴이고 동시에 새로운 창조입니다. 산불은 숲을 없애나, 잿더미 속에서 새로운 새싹들은 자라날 수 있어요.
언폴른은 불이 파괴이고 동시에 새로운 창조라고 간주합니다. 은하계에서 조화와 평화를 추구하고 싶다면, 언폴른은 불을 다뤄야 합니다. 평화주의자로서 언폴른은 행복도 보너스를 줄 수 있으나, 동시에 무장 함선들을 운용합니다. 이런 무장 함선들은 공격적이지 않습니다. 기동성은 좋지 않고 함선들은 공격적이기보다 방어적이죠. 게다가 나무 종족으로서 언폴른은 느리게 확장합니다. 다른 외계인들과 달리, 행성들 사이에서 언폴른 우주선들은 '뿌리'를 뻗습니다. 뿌리가 행성들을 연결할 때, 언폴른은 확장할 수 있어요. 그 덕분에 행성들이 잘못 배치되었다면, 언폴른은 말아먹기에 좋습니다. 속된 말로 중요한 것은 맵빨이죠.
사실 여러 전략 게임들에서 평화, 방어, 내정 중시 세력들에게는 이른바 맵빨이 중요합니다. 방어에 유리한 지형에서 평화, 방어, 내정 중시 세력들은 꾸준히 적들을 막고 승리 목표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공격적인 세력들과 달리, 이런 평화 세력들은 쉽게 밖으로 나오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변 지형은 훨씬 중요하죠. 물론 이건 이론이고, 게임 플레이는 다를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언폴른 설정은 나무 외계인으로서 언폴른이 무슨 종족인지 잘 드러냅니다. 어떤 사람들은 소설 <반지 전쟁>에 나오는 엔트들과 <엔들리스 스페이스 2>의 언폴른이 비슷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엔트들과 언폴른은 모두 나무 종족입니다.
양쪽 모두 느리게 발전하고, 공격보다 평화와 내정을 중시하고, 다른 종족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죠. 하지만 <엔들리스 스페이스 2>가 스페이스 오페라이기 때문에 언폴른에게는 (엔트들이 보여주지 못하는) 몇몇 흥미로운 특징이 있습니다. 당연히 언폴른 종족은 우주선을 건조합니다. 그리고 나무 외계인들이 건조한 우주선으로서 언폴른 우주선은 생체 우주선 같습니다. 이건 일종의 식물 사이보그입니다. 기계 장치들과 나무 껍질들과 잎사귀들은 서로 합치고 우주선이 되었죠. 언폴른 우주선이 항해할 때, 그건 우주 속을 떠다니는 나무 같습니다.
생체 나무 우주선은 다소 이상한 설정 같습니다. 우주선을 연상할 때, 흔히 사람들은 기계 우주선을 연상합니다. 설사 스페이스 오페라 소설이 우주선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나무 우주선은 흔하지 않아요. 하지만 <천지무용> 같은 애니메이션부터 <하이페리온> 같은 모던 스페이스 오페라 소설까지, 나무 우주선 설정은 아예 없지 않습니다. 언폴른 우주선이 그런 생체 우주선과 비슷할까요? 살아있는 나무들이 기계 함선을 휘감았을까요? 제가 <엔들리스 스페이스 2> 설정을 자세히 모르기 때문에 저는 확신하지 못하겠습니다.
게다가 <엔들리스 스페이스> 시리즈는 설정을 자세히 공개하지 않는 것 같아요. <엔들리스 스페이스 2>를 비롯해 <엔들리스 스페이스>와 <엔들리스 레전드>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정말 언폴른 우주선들은 생체 나무 우주선들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행성과 행성 사이에서 언폴른 우주선들은 '뿌리'를 뻗고 행성들을 연결하는지 모르죠. 아니면 이건 그저 겉모습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나무 줄기들과 갈색 잎사귀 같은 부분들은 그저 또 다른 기계 장치들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행성들을 잇는 '뿌리'는 진짜 나무 뿌리가 아니라 전파를 나타내는지 모릅니다. 모든 것은 상징이고, 언폴른 우주선들은 나무 우주선과 아무 관계가 없을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런 설정은 재미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나무 우주선 설정을 만들고 싶다면, 언폴른 우주선은 좋은 참고가 될 수 있겠죠. 설사 오직 겉모습만 나무와 비슷하다고 해도, 그런 디자인은 좋은 영감의 원천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누군가가 언폴른 설정을 응용한다면, 그 사람은 정말 생체 나무 우주선을 설정할 수 있을 겁니다. 게다가 언폴른은 유저 창작 세력입니다. 언폴른 우주선을 창작한 유저는 언폴른 우주선이 식물 사이보그라고 말합니다. (언폴른 우주선 밑그림과 설정 링크) 언폴른 우주선은 생체 우주선이고, 생체를 유지하기 위해 언폴른 우주선은 태양열 돛을 이용합니다. 언폴른 우주선들이 장착한 커다란 갈색 잎사귀 같은 태양열 돛들은 정말 태양을 이용해 영양분을 생산하는 잎사귀인 동시에 태양풍을 받는 돛인지 모릅니다.
널리 알려진 전략 게임들 중에서 이런 설정은 드물 것 같습니다. 언폴른 우주선은 정말 살아있는 나무 우주선이고 드문 설정을 보여줍니다. <반지 전쟁>에서 엔트들은 이런 설정을 보여주지 않죠. 그들은 (당연히) 우주선을 만들지 않아요. 엔트들은 우주선은 고사하고 비행선이나 잠수정을 만들지 않아요. 존 로널드 톨킨은 이것저것 구상했으나, 생체 비행선 같은 설정을 떠올릴 여유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생체 비행선, 생체 선박, 생체 우주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엔트 설정은 다소 심심하고 밋밋하겠죠.
현실에서 생태주의자들은 연방 제도를 지지하나, <엔들리스 스페이스 2>에서 언폴른은 민주 제도입니다. 뭐, 생태주의자들은 인간이고, 언폴른은 인간이 아니죠. 어쩌면 뿌리가 행성들을 연결하기 때문에 언폴른에게는 연방 제도보다 민주 제도가 어울리는지 모릅니다. 게다가 이 뿌리가 정말 살아있는 나무 뿌리라면, 이야, 이건 세계수(world tree)를 넘어 우주수(space tree)가 되겠습니다. 참고로 이미 말한 것처럼 언폴른은 게임 제작진 앰플리튜드 스튜디오가 아니라 유저 창작 설정이죠. 전작 <엔들리스 스페이스>에서 평화주의 생태 세력 오토마톤 역시 유저 창작 설정이었어요. 앰플리튜드는 평화주의 생태 세력을 유저 창작으로 선택하기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토마톤은 기계 로봇들이고, 언폴른은 나무들이죠. 그래서 오토마톤에게는 생체 우주선과 우주 뿌리 같은 설정이 없습니다. 생체 우주선을 좋아하는 SF 팬에게 오토마톤보다 언폴른은 훨씬 매력적이겠죠. 흠, 그리고 만약 오토마톤과 언폴른이 서로 연합한다면, 양쪽은 평화롭고 생태적인 은하계 문명을 이룩할 수 있겠으나…. <엔들리스 스페이스 2>에는 오토마톤이 없습니다. 어쩌면 오토마톤이 유저 창작이기 때문에 앰플리튜드는 오토마톤을 빼먹었는지 모릅니다. 나중에 <엔들리스 스페이스 3>가 나온다면, 유감스럽게도 언폴른의 매력적인 생체 우주선들 역시 나오지 않을지 모르겠어요.
※ 이미지 출처: https://sketchfab.com/models/8356ada908de45a1a67759612c3f91e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