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어떻게 거대 괴수와 생태 사회주의는 짝궁이 되는가 본문
"게임을 영화화하기 위해서는 큰 설정 변화들이 필요해졌다. 사람이 괴물로 변한다는 설정보다는 무고한 동물들이 거대 괴수로 변신한다는 설정이 그렇다. '인간이 야욕을 위해 자연을 이용한 대가를 톡톡히 치른다'라는 의미를 더욱 강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3년 전, <쥬라기 월드>에서 유전자 복합으로 태어난 '인도미누스 렉스'를 떠올리게 한다. 심지어, 인간을 습격하는 '랄프'의 모습은 <쥬라기 월드>에서 나온 기습 장면과 유사하다. 도마뱀에서 플로리다에 사는 악어로 설정이 바뀐 '리지'가 시카고에서 시민들을 공격하는 장면은 <쥬라기 월드>의 익룡 습격을 보는 것 같다."
영화 비평 사이트 키노라이츠에서 <램페이지>를 비평할 때, 양기자라는 리뷰어는 위와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양기자 리뷰어는 전반적으로 <램페이지>를 혹평합니다. 이 영화가 오직 때려부수는 행위에만 몰두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상업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거대 괴수를 원하는 이유는 이것 때문일 겁니다. 도시 파괴. 다른 괴수나 거대 로봇과의 싸움박질. 도시 파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블록버스터 영화들은 구태여 거대 괴수를 끌어들이지 않을 겁니다. <고지라: 괴수 행성> 시리즈 같은 예외는 없지 않겠으나, <고지라> 시리즈 중에서 <괴수 행성> 3부작은 다소 이례적입니다.
그래서 어떤 거대 괴수 팬들은 <괴수 행성> 3부작이 엉터리라고 욕하죠. 그들은 거대 괴수가 도시를 엄청나게 때려부수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블록버스터 배급사들 역시 그걸 원하겠죠. 거대 괴수가 도시를 엄청나게 때려부술 때, 관객들은 비싼 돈을 지불할 테고, 영화 배급사들은 그걸 반길 겁니다. 거대 괴수 이외에 보행 병기나 우주 함선 역시 무지막지하게 도시를 날려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도시를 파괴한다고 해도, 그건 거대 괴수와 다른 감성을 풍기겠죠. 거대 괴수는 흉악한 이빨들과 발톱들을 드러냅니다. 거대 괴수는 피에 젖은 야성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2005년 영화 <킹콩>에서 킹콩과 바스타토사우루스 렉스들이 싸울 때, 배경 음악 제목은 '이빨과 발톱'이었습니다. 브이-렉스가 킹콩을 물어뜯고 할퀴기 때문에 배경 음악 제목은 '이빨과 발톱'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이런 추측이 옳지 않다고 해도, 이빨과 발톱은 야생을 가리키는 진부한 문구입니다. 구태여 알프레드 테니슨을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야생은 적자생존이고, 살아남기 위해 야생은 누군가를 물어뜯고 할퀴어야 합니다. 심지어 우생학은 이런 개념을 인류 사회에 적용합니다. 우생학은 우월한 백인들이 열등한 원주민들을 물어뜯고 할퀼 수 있다고 말합니다. 물어뜯고 할퀴는 야생과 자연은 훨씬 처절하고 원초적입니다.
보행 병기와 우주 함선은 이런 감성을 풍기지 못합니다. 보행 병기가 로켓들을 날리거나 우주 함선이 매스 드라이버를 쏜다고 해도, 그것들은 처절하고 원초적인 야생에 닿지 못합니다. 아무리 매스 드라이버가 광범위하게 도시를 파괴한다고 해도, 매스 드라이버는 이빨과 발톱이 아니죠. 아무도 우주 함선에 이빨과 발톱을 매달지 않습니다. 아무도 보행 병기에게 이빨과 발톱을 매달지 않아요. 하지만 거대 괴수에게 그건 기본 옵션입니다. 설사 거대 괴수가 물어뜯거나 할퀴지 않는다고 해도, 거대 괴수가 그저 빔을 뿜는다고 해도, 거대 괴수에게 이빨과 발톱은 기본 옵션입니다. 그래서 거대 괴수는 원초적인 감성을 풍길 수 있어요.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요. 흔한 오해와 달리, 자연은 처절한 이빨과 발톱이 아닙니다. 분명히 처절한 이빨과 발톱은 자연의 일부분이나, 그건 전부가 아닙니다. 불곰이 사슴을 물어뜯는 장면은 자연계의 전부가 아닙니다. 거대한 레드 우드들, 녹색으로 빛나는 에버 글레이즈, 응고롱고로가 보여주는 진화 역사, 형형색색의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 장엄한 긴수염고래, 육중하고 우아한 장수 거북, 황금 색깔을 반짝이는 꿀벌들, 풍성하고 탐스러운 복숭아들 역시 자연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미생물들을 직접 볼 수 없으나, 미생물들은 다양한 생명 현상들에 관여하고, 우리는 그런 현상들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미생물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지구 생태계는 원활하게 순환하지 못할 겁니다. 이런 생명체들 역시 생존 투쟁에서 벗어나지 못하나, 이런 생존 투쟁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이빨과 발톱이 아니죠. 생존 투쟁을 머릿속에 떠올릴 때, 우리는 양지를 차지하기 위해 식물들이 치열하게 다투는 장면을 머릿속에 떠올리지 않습니다. 그런 장면은 별로 역동적이지 않고, 그래서 우리는 그게 치열하다고 느끼지 못하죠. 우리는 시각적입니다. 우리가 시각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슴을 물어뜯는 불곰이 생존 경쟁을 대표한다고 간주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자연 생태계를 왜곡합니다.
자연 생태계에는 치열하고 끔찍한 생존 투쟁들이 있습니다. 인류 역시 거기에서 절대 멀어지지 못해요. 하지만 동시에 자연 생태계에는 아름답고 풍성한 장관들이 있습니다. 그게 인간 중심적인 장관이라고 해도, 우리가 낭만적인 세계관을 경계한다면, 우리는 그걸 즐길 수 있을 겁니다. 게다가 과학 혁명 덕분에 우리는 생명 현상을 조절할 수 있고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죠. 어떤 관점에서 자연 생태계는 더 이상 이빨과 발톱이 아니라 '젖과 꿀'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제대로 결심한다면, 자연 생태계는 풍성한 젖과 꿀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비단 지구 생태계만이 젖과 꿀이 될까요? 그건 아니겠죠.
우리는 지구 밖으로 나갈 수 있어요. 달과 화성과 여러 행성들과 소행성들에서 우리는 생명의 씨앗들을 뿌릴 수 있을 겁니다. 구태여 태양계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생명들이 꿈틀거리는 별들의 시대를 열 수 있겠죠. 현대 과학 기술은 더 이상 야생 동물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호랑이, 불곰, 늑대, 악어, 상어, 뱀은 더 이상 악마가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제대로 결심한다면, 자연 생태계는 이빨과 발톱이 아니라 젖과 꿀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제대로 결심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현대 산업 문명이 자연 생태계를 파괴할 때, 우리는 그걸 숭배하죠.
양기자 리뷰어가 지적한 것처럼, <램페이지>는 야욕을 위해 인간이 자연을 멋대로 이용한다고 주장합니다. 양기자 리뷰어가 언급한 <쥬라기 월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원작 소설 <쥬라기 공원>은 노골적으로 상업화된 과학 기술을 비판합니다. 비단 <램페이지>와 <쥬라기 월드> 이외에 숱한 거대 괴수 이야기들은 환경 오염을 언급합니다. 거대 괴수들은 야생 동물들입니다. 적어도 거대 괴수들은 야생 동물 형체입니다. <램페이지>는 고릴라, 늑대, 악어를 보여줍니다. 세 가지 모두 야생 동물들이죠.
<쥬라기 월드>에서 인도미누스 렉스를 비롯해 선사 시대 동물들은 야생 동물들입니다. 초자연적인 거대 괴수들 역시 야생 동물 형체에서 별로 멀지 않습니다. 거대 괴수를 상상할 때, 우리는 야생 동물에서 상상력을 끌어옵니다. 야생 동물들은 뮤즈입니다. 야생 동물들은 거대 괴수라는 영감을 전달하는 뮤즈입니다. 특히, 공룡과 상어와 대왕 오징어 같은 거대 야수들은 훨씬 직접적인 영감을 전달할 수 있어요. 야생 동물들은 자연 생태계에 속했습니다. 인간이 자연 생태계에 영향을 미칠 때, 인류 문명과 거대 괴수는 서로 부딪힙니다. 따라서 거대 괴수 이야기와 환경 오염 사이에는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어쩌면 양쪽 사이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있을지 모릅니다.
양기자 리뷰어는 지적하지 않았으나, 환경 오염은 무조건 인간에게서 비롯하지 않습니다. 기후 변화와 핵 발전소를 비롯해 현대적인 환경 오염은 산업 자본주의에서 비롯했죠. 어느 시대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인류 문명은 가장 심각하게 삼림을 훼손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반세기 동안 가장 강력하고 지배적인 사회 구조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였죠. 소비에트 연방, 중국 인민 공사, 기타 개발도상국들 역시 환경 오염들을 책임져야 합니다. 사실 그 어떤 산업 사회도 환경 오염이라는 막중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겠죠.
하지만 현대 산업 사회들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지배적인 사회는 자본주의입니다. 냉전 기간 동안 미국 매파들은 소비에트 연방이 미국을 침략할 거라고 길길이 날뛰었으나, 그건 기우였죠.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소비에트 연방의 생산력과 부유함은 미국을 압도하지 못했어요. 무리하게 미국을 압도하기 원했기 때문에 소비에트 연방은 낭떠러지로 떨어져야 했죠. 따라서 우리가 가장 심각한 책임을 묻는다면, 우리는 자본주의를 추궁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여러 사회 철학들 중에서 자본주의와 환경 오염을 가장 제대로 추궁할 수 있는 사회 철학은 생태 사회주의일 겁니다. 설사 사람들이 생태 사회주의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도, 생태 사회주의적인 시각은 날카로운 비판들을 선사할 수 있어요.
따라서 거대 괴수 이야기와 생태 사회주의 사이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있을지 모릅니다. 적어도 양쪽 사이에는 아주 깊은 관계가 있겠죠. 하지만 국내에 이런 담론들이 많을까요? 국내에 거대 괴수 이야기와 생태 사회주의를 연결하는 담론들이 많을까요? 예전에 네이버 검색창에서 저는 '거대 괴수 생태 사회주의'를 검색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다소 처참했습니다. 거대 괴수 이야기들은 넘쳐납니다. 반면, 거대 괴수를 생태 사회주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감상들, 리뷰들, 담론들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아니, 솔직히 그런 것은 아예 없습니다. 뭐, 세계 제일의 자랑스러운 반공 국가 대한민국에서 제가 사회주의 이야기를 바란다면, 그건 욕심일지 모릅니다. 거대 괴수 역시 꽤나 마이너한 취향입니다.
그래서 이런 감상들, 리뷰들, 담론들은 희귀 생물종 같습니다. 거대 괴수와 생태 사회주의가 아주 깊은 관계를 맺었음에도, 거대 괴수와 생태 사회주의가 아주 잘 어울리는 짝궁임에도, 아무도 소개팅 자리를 주선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환상적인 짝궁에게 소개팅 자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은 꽤나 서글픕니다. 번개 소개팅이 시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