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안드로메다 성운>과 인종 다양성 본문
소설 <안드로메다 성운>에는 므벤 마스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우주 연구소 소장을 맡을 만큼 중요한 인물이고, 이름처럼 아프리카계 흑인입니다. 그런데 작가는 므벤 마스를 묘사할 때마다 아프리카인, 흑인, 건장하고 야성적인 체격 등을 자꾸 강조합니다. 다른 남자 캐릭터들은 그렇지 않지만, 유독 므벤 마스만 그 육체적인 야성을 강조해요. 이와 비슷한 인물이 차라입니다.
므벤 마스가 남자들 중에서 야성적으로 돋보인다면, 차라는 여자들 중에서 이질적인 미모를 자랑합니다. 짙은 피부와 뚜렷한 이목구비와 풍만한 가슴 등등. 다른 여자들, 가령, 니자는 빨강 머리의 발랄한 아가씨로 나오고 베다는 자애롭고 우아한 여자로 나올 뿐이지만, 차라는 등장할 때마다 그 이질적인 용모에서 광휘를 내뿜습니다. 베다는 차라를 보고 인도계가 분명하다고 여기죠. 이 밖에 작가는 몽골로이드 인물의 외모도 유럽인과 많이 다르다고 강조합니다. 작가가 아프리카, 인도, 일본 계통의 인물들을 외양적으로 뭔가 다르다고 강조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안드로메다 성운>이 아프리카나 인도 계통을 차별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므벤 마스와 차라는 신체적으로 제일 돋보이는 인물이고, 게다가 연구소 소장이나 예술가가 될 정도로 지성과 감성도 뛰어납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작가가 유럽 계통 이외의 인물들을 좀 더 다르게 바라본다는 점은 사실입니다. 어쩌면 러시아 작가의 한계일 수 있겠죠. 작가 이반 예프레모프는 인종 차별주의자는 아니었으나, 흑인이나 황인을 바라보는 시야에 태생적인 한계가 있었을 겁니다. 이런 점은 비판을 받아야 마땅하겠으나, 그래도 저는 예프레모프를 다른 제국주의적이거나 인종 차별적인 장르 작가들보다 훨씬 진취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예프레모프는 잘난 백인이 흑인이나 황인을 지배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여타 장르 작가들과 비교해본다면, 19세기 아서 코난 도일이나 20세기 초반의 에드가 라이스 버로우즈, 하워드 러브크래프트만큼 인종 차별 색깔을 뿜어내지 않았어요. 검마 판타지로 비교해봐도 존 로널드 톨킨의 설정보다 예프레모프의 설정이 훨씬 낫죠. 존 로널드 톨킨은 검마 판타지의 대부로 존경을 받지만, 계급 의식이나 남녀 관계, 인종 관계 등은 너무 전형적인 영국인답다고 할까요. 톨킨 본인은 제국주의자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반지 전쟁>이 뭔가 급진적인 사상을 담았다고 할 수 없겠죠.
저는 <반지 전쟁>의 설정이나 톨킨의 사상이 무조건 나쁘다고 비판할 마음이 없습니다. 하지만 검마 판타지의 대부라는 소설가가 여자 캐릭터를 등한시하거나 백인 위주로만 등장시키는 장면은…. 많이 아쉬웠습니다. 신분 차이나 혈통 차이를 계속 강조하는 계급 의식도 아쉬웠고요. 이왕 작가가 새로운 세계를 설정한다면, 그 세계는 현실의 여러 모순을 해소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픽션은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것들을 이룰 수 있고, 그게 바로 로망이잖아요. 그저 신비롭고 낯선 세계가 아니라 현실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세상….
저는 작가가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설정한다면, 그리고 그 세계를 아름답게 그리고 싶다면, 그 세계가 현실의 모순을 좀 타파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톨킨 본인은 <반지 전쟁>에서 아름답고 울창한 숲과 우아한 엘프들과 인심 좋은 호비트들과 한적하고 평화로운 샤이어를 그렸습니다. 그것들은 분명히 톨킨의 이상을 반영했겠죠. 칙칙한 공업화보다 싱그러운 녹음이 톨킨의 이상에 맞았겠죠.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그 이상 나가지 못했어요. 혈통이나 신분을 꾸준히 부각했고, 여자 캐릭터들은 쥐구멍에 숨었는지 제대로 보이지 않았죠.
뭐, 오죽하면 <반지 전쟁>에서 제일 인상적인 여자 캐릭터는 쉴로브라는 말이 있죠. 에오윈도 나름대로 활약했지만, 반지 원정대 수준만큼은 아니었습니다. 아웬은 아예 안 보이는 인물이었고…. 영화 <스마우그의 폐허>에는 타우리엘이라는 여자 엘프가 나옵니다. 원작 <호비트>에 없는 인물이죠. 영화 감독이 그런 인물을 만들 만큼, <호비트>는 여자 캐릭터에게 인색했습니다. 유색 인종은 말할 것도 없어요. 그런 점에 비한다면, <안드로메다 성운>은 정말 다양한 인종과 성별을 보여줍니다. <안드로메다 성운>도 혈통이나 민족에 얽매이는 경향이 많지만, 그게 불평등이나 계급 차별로까지 이어지지 않아요.
무엇보다 이 소설은 공산주의 유토피아니까요. <반지 전쟁> 같은 검마 판타지에서는 고귀한 혈통과 그에 따른 특권이 있지만, <안드로메다 성운>에는 특권 따위 없습니다. 모두 똑같은 인민인데, 고귀한 혈통이나 신분 따위가 어디에 있겠어요. 므벤이나 차라가 인종 때문에 튀어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어떤 차별을 받거나 불평등에 빠지지 않습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인민들이 동등하게 계획 경제에 참가하니까요. 차라가 어디 태생이든 자신이 원하는 일에 종사할 기회를 얻었을 테고, 그래서 훌륭한 예술가로 성장할 수 있었겠죠. 여전히 카스트 제도가 인도에서 불합리하게 작용함을 생각한다면, 예프레모프의 이상이야말로 인류가 추구할 길이 아닐까 싶을 정도입니다.
게다가 이 소설이 공산주의 유토피아임을 감안하면, 예프레모프의 사상은 유럽의 사회 민주주의나 페이비언 사회주의보다 훨씬 낫다고 봅니다. 에두아르 베른슈타인이나 조지 버나드 쇼는 사회주의자였으나, 식민지 지배에 찬성했다고 하죠. 솔직히 좀 웃긴 이야기입니다. 사회주의는 인민들을 평등하게 바라보는 사상인데, 식민지 지배에 찬성하다니요. 베른슈타인의 논리가 딱 그거였죠. 원주민들은 야만적이고 미개하기 때문에 문명화되고 똑똑한 유럽인들이 지배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뭐, 이리저리 좋은 말로 빙빙 돌려서 말했으나, 속내는 그거였죠. '백인의 짐'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유럽 사회 민주주의의 거두라는 양반이 왜 그렇게 말했을까요. 베른슈타인은 사회주의가 식민 지배를 반대해야 한다는 걸 몰랐을까요. 설마 이처럼 똑똑한 양반이 그걸 몰랐겠어요. 문제는 베른슈타인 같은 유럽 사회주의자들이 이른바 제3세계의 천연 자원을 탐냈다는 사실입니다. 그게 있으면 자본가들도 성장할 수 있고, 그 돈으로 노동자 복지를 확대할 수 있기 때문이죠. 원주민들에게 안 된 일이었으나, 유럽 사회주의자에게 유럽 노동자의 복지가 먼저였습니다.
물론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이 모두 식민지 지배에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로자 룩셈부르크 같은 인물은 식민지 지배에 절대 찬성할 수 없다고 못을 박았습니다. (러시아를 유럽이라고 본다면) 블라디미르 레닌은 제국주의 논쟁에 본격적으로 불을 지폈어요. 그리고 룩셈부르크와 레닌은 모두 혁명을 지지하는 공산주의자였죠. 베른슈타인은 혁명에 반대하는 사회 민주주의자였고요. 예프레모프가 <안드로메다 성운>에서 제국주의를 드러내지 않은 까닭은 예프레모프의 성향이 로자 룩셈부르크나 블라디미르 레닌에 가까웠기 때문일 겁니다.
예프레모프가 저들과 똑같은 공산주의자라는 뜻은 아닙니다. 엄연히 다르죠. 사실 룩셈부르크와 레닌의 사상도 달라요. 하지만 이들은 모두 혁명적 사회주의자였고, 모든 인민들의 자치적인 공동체를 원했습니다. 사회 민주주의자들처럼 자본가와 적당히 협력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바로 이 점이 중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자본가와 적당히 협력하느냐, 인민들의 자치를 지지하느냐…. 자본가와 적당히 협력한다면, 당연히 제국주의로 흘러갈 수 밖에 없을 겁니다. 그런 이윤 착취와 확장이야말로 자본주의의 특징이기 때문이죠.
이렇게 생각해본다면, 스탈린의 체제나 소수 민족을 압박하는 중국 공산당이 정말 공산주의인지 의문이 듭니다. 사회주의는 당연히 식민지 지배나 전쟁을 반대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회주의 중에서도 각별히 인민 공동체를 강조하는 공산주의가 소수 민족을 압박한다면, 그게 과연 제대로 된 공산주의인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평화롭고 온건하다고 알려진 유럽 사회 민주주의가 정말 과연 겉보기만큼 평화로운지 따져봐야 할 겁니다. 사회주의자는 자기 몸을 바치고 앞장서서 식민지 지배에 반대해야 할 텐데, 사회 민주주의는 천연 자원을 탐내고 원주민들이 미개하다고 모욕했으니까요.
결국 어떤 경제 구조를 지지하느냐에 따라 행동이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인민들의 혁명적인 자치를 원하는 사람들은 식민지 지배에 반대했고, 자본주의와 적당히 타협하는 사람들은 식민지 지배를 찬성했죠. 따라서 이런 경제 구조야말로 식민지 지배나 제국 침략의 근본 문제임을 인식할 수 있겠죠. 베른슈타인은 정말 원주민들이 미개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식민지 지배에 찬성했을까요. 아니죠, 그보다 자본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해 천연 자원을 탐냈다고 해야 옳겠죠. 철학자 강신주의 말처럼 사회 민주주의는 일단 자본주의를 키워주는 걸 좋아하니까요.
사실 현실의 국제 관계를 봐도 언제나 경제적인 요소가 우선합니다. 문화적이고 종교적이고 인종적인 갈등도 문제지만, 그에 앞서 경제적인 요소가 우선합니다. 아프리카 국경선이 바둑판처럼 딱딱 나뉘는 이유는 아프리카 부족들이 내전을 치르렀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이전에 유럽 강대국들이 식민지를 지배했기 때문이죠. 미국인들은 처음에 스시를 혐오스러운 날생선이라고 여겼으나, 일본이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스시는 고급 문화로 바뀌었습니다.
마틴 루터 킹은 흑인들이 백인만큼 동등해지기 원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흑인이 동등해져도 결국 돈이 없으면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산업 쓰레기는 흑인들이 사는 가난한 마을로 흘러왔어요. 인종적 다양성이나 문화 상대주의나 정치적 올바름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경제적 요소죠. 사람은 먹고 살아야 합니다. 밥그릇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문화 상대주의나 정치적 올바름은 아무 소용이 없을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미국의 블록버스터 영화에 소수 민족들이 등장하는 걸 칭찬합니다. 그게 정치적으로 올바르기 때문이죠. 네, 반가운 일이긴 합니다. 하지만 블록버스터 영화에 아무리 소수 민족이 나오고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해도 그것만으로 부족하죠. 현실에서는 여전히 미국의 대기업들이 온실 가스를 퍼뜨리고, 소수 민족들은 환경 오염의 피해를 고스란히 입는 걸요. 그렇다면 그런 블록버스터 영화가 대기업 규제를 외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소수 민족만 출현할 뿐이죠. 대기업이 소수 민족의 자연 환경을 오염시키지만, 그 영화의 소수 민족은 대기업 규제나 자본주의 타파를 외치지 않죠.
그게 바로 정치적 올바름의 한계일 겁니다. 표면적인 차별에만 항거하고, 근본적인 착취를 건드리지 않죠. 그렇다고 해서 그런 정치적 올바름을 무시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 것도 우리 사회에 필요합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접근하고 싶다면, 그것만으로 부족하다는 겁니다. 이반 예프레모프는 <안드로메다 성운>에서 정치적 올바름과 함께 인민들의 계획 경제를 주장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근본적인 문제에 접근하는 시도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