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아서 클라크 단편 전집 (2) 본문
※ 이 글은 <아서 클라크 단편 전집 1953~1960>의 두 번째 소감문입니다.
※ 첫 번째 소감문: http://sfecology.tistory.com/68
※ 세 번째 소감문: http://sfecology.tistory.com/80
소설 <달을 향한 모험>은 여러 모로 아서 클라크다운 작품입니다. <달을 향한 모험>은 연작 단편인데, 영국과 소련과 미국 우주 승무원들이 지구를 출발하고 달에 착륙하고 여러 실험을 거치고 마침내 귀환하는 과정을 담았습니다. 유머와 재치, 반전이 돋보이지만, 전반적으로 진중하고 경외적인 분위기를 내뿜습니다. 인류가 외계 위성으로 진출했다는 벅찬 기쁨, 우주를 바라보는 경건한 마음, 낯선 세계의 놀라움과 신비스러움이 잘 드러납니다.
지구와 달이 물리적으로, 문화적으로, 심리적으로 얼마나 먼지 강조하고, 그런 물리적·문화적·심리적 차이가 소설의 주된 재미를 이루죠. 한편으로 과학자들의 엉뚱한 실험이나 우주 경쟁 또한 빼놓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우주 탐사가 거창하고 성스럽게 보여도 결국 이건 인류의 여러 사업들 중 하나입니다. 규모가 제일 클 뿐이고, 당연히 여러 요소들이 개입하기 마련이죠. 애국심, 상업 자본주의, 사심이나 애정, 개인적인 야망은 우주 탐사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달을 향한 모험>에는 그런 여러 가지 것들이 한데 뒤섞였습니다.
모든 이야기가 골고루 재미있지만, 개인적으로 '녹색 손가락' 이야기가 제일 기억에 남는군요. 달에 생명체(식물)를 퍼뜨리는 이야기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외계 위성에 새로운 생명체를 퍼뜨린다…. 새로운 생태계의 길을 여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사실 아무리 외계 위성이라고 해도 달 탐사 과정은 어차피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사람 이외에 다른 생물은 나오지 않습니다. 과학자도 사람이고, 정치인도 사람이고, 일반 시민들도 사람입니다.
그에 비해 '녹색 손가락' 이야기는 유일무이하게 인간 이외의 생명체를 이야기하는 부분입니다. 자고로 사이언스 픽션은 사람만이 아니라 다른 생명체에게 눈을 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라면, 어느 문학이 다른 생명체에게 주목하겠어요. 자연 문학이나 생태 문학이 그럴 수 있지만, 그런 문학들도 외부 세계까지 바라보지 않죠. 그런 점에서 외부 세계의 생명체를 바라보는 '녹색 손가락'은 사이언스 픽션의 본질에 충실하지 않나 싶고, 그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한편으로 '이 우주를 보라'는 참 씁쓸한 이야기로군요. 결국 아무리 우주 탐사가 대단하게 보여도 자본주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과학자들이 열심히 우주를 연구하고 싶어도 우주 탐사는 결코 개인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과학자들이 우주로 나가고 싶다면, 그들이 나갈 수 있도록 사회 전체가 과학자들을 힘껏 밀어줘야 합니다. 인간이 보금자리 지구를 떠나 머나먼 우주로 나가는 건 그리 만만한 과정이 아니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과학자들은 사회의 주역이 아닙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당연히 대기업이 주인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돈이 안 되는 우주 탐사 등은 뒤로 밀려나기 일쑤이고, 그래서 과학자들은 연구비나 우주 탐사 비용을 달라고 애원하죠.
심지어 우주 탐사가 자본주의 논리의 일환으로 변할 수 있어요. 그제 말한 것처럼 '이 우주를 보라'를 읽고, <안드로메다 성운>이 떠올랐습니다. <안드로메다 성운>에서 과학자들은 예산이나 비용을 달라고 애원하지 않습니다. 공산주의 공동체는 대기업의 사적 이익 따위에 눈꼽만큼 관심도 없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 공동체는 대기업이 아니라 인류의 미래를 위해 투자하고, 덕분에 과학자들은 악조건 속에서도 우주로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이 우주를 보라'와 <안드로메다 성운>은 정반대의 상황 같습니다. 자본주의 논리 속의 우주 탐사와 공산주의 공동체의 우주 탐사…. 자본주의 논리가 지속된다면, 아무리 경건한 우주 탐사도 결국 착취와 수탈로 이어지겠죠.
<평화주의자>는 어느 소심한 과학자와 고집불통 장군의 갈등을 이야기합니다. 과학자와 군인은 서로 대비되는 존재 같습니다. 검마 판타지에 전사와 마법사가 있다면, 사이언스 픽션에는 과학자와 군인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평화주의자>가 지성과 무력의 대결을 그린다는 뜻은 아닙니다. <평화주의자>는 하얀 사슴 시리즈답게 해학적인 성격이 강하고, 과학자와 군인의 이미지는 그런 해학성을 부각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기계 때문에 소외를 받는 인간도 잠깐 나오지만, 그건 그렇게까지 중요한 주제가 아닌 듯합니다.
<육식 식물> 역시 하얀 사슴 시리즈이고, 반전과 해학이 두드러집니다. 제목 그대로 식인 식물(?)이 주된 소재입니다. 여느 식물과 달리 고기를 잡아먹는 식물은 비경 탐험물이나 괴수물의 오래된 소재입니다. 허버트 웰즈의 단편 소설이 떠오르는데, 사실 <육식 식물>도 허버트 웰즈를 언급하는군요. 하지만 <육식 식물>은 그저 식물 괴수의 공포만 아니라 사람들의 엇갈린 관계에도 주목합니다. 아니, 오히려 그게 훨씬 중요한 대목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아서 클라크는 거시적이고 장대한 묘사에 일가견이 있지만, 사람들 간의 기묘한 관계도 놓치지 않습니다.
<주동자>도 하얀 사슴 시리즈이고, 희한한 발명품을 보여줍니다. 과학자들이 자신의 전문 분야를 이용해 위기를 무사히 빠져나갑니다. 전문가들의 작업은 언제나 뭔가 로망을 자극합니다. 아주 어렵고 불가능한 사건도 전문가의 손에서 술술 풀립니다. 그래서 전문가의 작업을 지켜보는 과정은 즐겁니다. 그 전문가들이 다소 엉뚱하고 희극적이라면, 즐거움은 훨씬 커지겠죠. <주동자>는 알코올 폭탄을 이용해 그런 즐거움을 자극하는 이야기입니다. <어민트루드 인치 내던지기>도 해리 퍼비스의 이야기로군요. 음성 분석 장치가 나오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듯합니다. 그보다 말 많은 여자와 과묵한 남자의 갈등이 아주 웃기게 그려집니다.
두 사람의 말싸움, 아니, 아내의 속사포 공격과 남편의 방어적인 침묵은 웃긴 대조를 이루고, 그게 소설의 가장 큰 재미를 차지합니다. 어쩐지 사이언스 픽션보다 그냥 희극이라는 느낌이 더 강합니다. <궁극의 멜로디>는 왜 사람들이 특정한 음악에 열광하는지 묻습니다. 우리 인간은 어떤 특정한 곡조에 매료되는데, 만약 누군가가 그 곡조를 찾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그야말로 불후의 명곡을 완성할 수 있겠죠. 흠, 비록 <궁극의 멜로디>는 하얀 사슴 시리즈이고, 그래서 엉뚱한 구석이 많지만, 소설의 질문 자체를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합니다. 정말 궁극의 멜로디가 존재한다면?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하루 종일 그 노래만 따라 부르느라 정신이 없겠군요. 어쩌면 인류 문명을 파괴할 무기가 될 지도….
<지구의 다음 세입자>는 <더 이상 아침은 없다>처럼 회의주의적인 내용입니다. 인류는 지구에서 유일한 지적 생명체가 자신들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소설에서 새로운 지적 존재가 등장하고, 어쩌면 그 존재가 지구의 다음 주인이 될지 모르죠. 중요한 건 그런 설정이나 상상력이 아니라 인류 문명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입니다. 커트 보네거트 같은 양반이 인류를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아서 클라크도 가끔 인류에게 회의적인 시선을 보냅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끊임없는 정복 전쟁과 무기 개발과 제국주의와 환경 오염과 생물 다양성 멸종을 보면, 누구라도 인류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싶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류 전체가 잘못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겁니다. 이 세상에는 착취만 당하는 밑바닥 사람들도 있고, 그런 밑바닥 사람들을 돕는 좌파적인 활동가들도 있으니까요. 이왕이면 인류 전체를 회의적으로 보는 것보다…. 그런 좌파 활동가들의 사상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더 좋을 듯합니다. 그게 더 논리적이고 현실적이죠. 인류가 당장 사라지거나 새로운 지적 생명체가 등장할 리 없으니까요. 뭐, 우리가 유전자를 조작하거나 특이점을 넘으면, 그런 존재가 정말 등장할 수 있겠지만, 그건 아직 머나먼 이야기입니다.
<냉전>은 하얀 사슴 시리즈입니다. 유명한 사고 실험 중 하나를 이야기합니다. "빙하를 뜨거운 지역으로 옮길 수 있을까?" 종종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만약 거대한 빙하를 사막으로 옮길 수 있다면, 사막의 물 부족을 해결할 수 있고 사막도 풍성한 생산량을 자랑하겠죠. <냉전>이 그런 사고 실험을 그대로 반복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사고 실험처럼 이 소설은 빙하를 옮길 수 있는지 묻습니다. 물론 하얀 사슴 시리즈답게 사건은 엉뚱한 샛길로 빠지고, 물리적인 냉전은 문화적인 냉전으로 번집니다. 하여간 이 단편 소설 전집에는 저렇게 무모하고 기발한 경쟁 구도가 자주 튀어나오는군요.
<빛이 있으라>도 그렇고요. 이 단편 소설 전집의 뒷편에는 '엄격한 과학 묘사'라든가 '장대한 비전' 같은 홍보 문구들이 나오지만, 오히려 이 책에는 웃기고 골 때리는 이야기가 더 많습니다. (그런 홍보 문구가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잠자는 숲 속의 미녀>도 하얀 사슴 시리즈입니다. 하얀 사슴 시리즈가 참 많네요. 이 소설은 "만약 인간이 잠을 자지 않는다면?"이라고 묻습니다. 허허, 인간이 잠을 자지 않는다면, 활동 시간이 두 배로 길어지겠죠.
낸시 크래스 같은 작가는 잠을 자지 않는 불면인을 이용해 일종의 초인 공동체를 그렸습니다. 하지만 <잠자는 숲 속의 미녀>는 하얀 사슴 시리즈답게 그런 면모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엉뚱한 현상은 엉뚱한 사건으로 이어지고, 그 사건은 더욱 샛길로 빠집니다. 시간이 갈수록 엉뚱함이 점점 눈덩이처럼 커지죠. 그래도 소설이 너무 해학적이기 때문에 좀 아쉽더군요. '잠을 자지 않는 인간'은 많은 것들을 논할 수 있는 소재입니다. 제가 잠을 안 잘 수 있다면, 소설이나 게임 같은 취미에 좀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겠죠.
<보안 점검>은 <홍보 활동>이나 <무기 경쟁>처럼 SF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를 소재로 삼았습니다. 아서 클라크는 이런 특촬물 패러디가 재미있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사실 이런 패러디가 언제나 그렇듯 패러디의 원본을 안다면 훨씬 재미있게 즐길 수 있습니다. <스타 트렉>의 패러디를 즐기고 싶다면, 먼저 <스타 트렉>을 봐야 합니다. 그리고 패러디를 쓰는 작가도 SF 텔레비전 드라마에 애정이 있어야 합니다. 아마 아서 클라크도 그런 텔레비전 드라마에 애정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솔직히 내용 자체는 21세기 독자에게 신선하지 않으나, SF 텔레비전 드라마를 향한 애정이나 향수가 담겨있지 않나 싶어요.
<바다를 캐는 사람들>은 새로운 자원을 발굴하는 이야기입니다. 역시 하얀 사슴 시리즈입니다. 하지만 엉뚱함이나 해학은 약간 떨어지고, 논리적인 상상력이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 같습니다. <임계질량>은 미치광이 과학자의 대중적인 이미지와 과학의 부정적인 면모를 한껏 비트는 이야기입니다. 종종 사람들은 과학자들이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자들은 핵무기나 세균 병기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무 근거 없이 무조건 과학자를 불신하곤 하죠. SF 소설 속의 미치광이 과학자는 그런 불신을 부채질하는 설정이고요. 물론 과학은 많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그건 전적으로 과학자의 책임이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사회 체계입니다. 사회 체계가 착취적이기 때문에 과학 기술 역시 착취적으로 쓰입니다. 물론 <임계질량>은 그런 부분을 이야기하지 않지만, 과학자의 부정적인 면모를 어느 정도 세척하는 것 같습니다. 하얀 사슴 시리즈답게 엉뚱하고 기발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