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심연의 노래>와 SF 장르 소외 본문
위 장면은 비디오 게임 <심연의 노래 Song of the Deep> 스크린샷입니다. 게임 주인공 메리는 바다 소녀입니다. 해안에서 아빠와 메리는 즐겁게 살아갑니다. 아빠는 어선 선장이나, 어느 날, 바다에서 아빠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메리는 하염없이 기다리나, 아빠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메리는 아빠가 사고를 당했다고 생각하고 아빠를 찾기 위해 구식 잠수함을 뚝딱뚝딱 건조합니다. 메리는 구식 잠수함을 타고 바닷속에 들어갑니다. 바닷속에서 전설적인 고대 유적들과 함정들과 바다 괴수들은 메리를 기다립니다. 메리가 여러 위기들을 돌파할 수 있을까요? 메리가 아빠를 찾을 수 있을까요?
비디오 게임 <심연의 노래>는 이 줄거리를 전개합니다. 이게 SF 장르에 속하나요? 구식 잠수함, 해저 고대 문명, 바다 괴수들은 SF 장르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특히, 구식 잠수함과 고대 문명이 스팀펑크 분위기를 풍기기 때문에, <심연의 노래>는 SF 게임이 될 수 있습니다. <마일즈의 전쟁>이 SF 소설이고, <2001 우주 대장정>이 SF 영화이고, <마스터 오브 오리온>이 SF 게임인 것처럼, <심연의 노래>는 SF 게임입니다. 하지만 어떤 골수 하드 SF 독자들은 반대할지 모릅니다. SF 장르에서 가장 중요한 매체는 소설입니다. 어떻게 고작 비디오 게임 따위가 감히 SF 장르에 들어올 수 있나요?
다른 매체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림,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 연극, 테이블 게임 같은 형식들과 매체들은 진정한 SF가 아닙니다. 오직 소설만 진정한 SF 형식, 매체가 될 수 있습니다. 왜 오직 소설만 진정한 SF 형식인가요? 왜 비디오 게임보다 소설이 우월한가요? 소설이 세계관과 설정을 구체적으로 서술하기 때문입니다. SF 장르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비(非)현실입니다. SF 장르는 비현실을 이야기합니다. 소설 <마일즈의 전쟁>은 스페이스 오페라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인류 문명은 다른 행성들로 항해하지 않습니다. 아직 고향별 지구에서 인류 문명은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현실에서 인류 문명은 이웃 행성 화성조차 구체적으로 연구하지 못했습니다. 인류 문명에게 우주 항해는 머나먼 염원입니다. 인류 문명은 우주를 향해 고개를 들지 못합니다. 현실에서 장거리 우주선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들은 비현실입니다. 이것들이 비현실이기 때문에, <마일즈의 전쟁>은 SF 소설입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비단 우주 항해만 아니라 다른 여러 설정들은 비현실입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는 생체 우주선을 묘사할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보스토크 1호를 비롯해 여러 우주선들은 존재하나, 이 우주선들은 기계입니다. 현실에서 생체 우주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단 <마일즈의 전쟁>만 아니라 다른 수많은 SF 소설들은 비현실들을 이야기합니다. 현실에서 뭔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비현실입니다. 현실에서 이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현실에서 사람들은 이것을 직접 겪지 못합니다. 그래서 SF 작가는 비현실 설정을 '설명'합니다. SF 작가가 비현실 설정을 '설명'하는 동안, SF 작가는 언어, 글자를 동원합니다. 소설은 언어, 글자 매체입니다. 글자는 추상적입니다. 글자는 기호에 가깝고, 그래서 글자는 시각적이지 않습니다. 적어도 그림보다 글자는 시각적이지 않습니다. 글자는 뭔가를 직접 보여주지 못합니다. 글자에게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글자는 서술할 수 있습니다. 그림은 서술하지 못합니다. 그림은 그저 보여줄 뿐입니다. 글자는 추상적인 측면을 구체적으로 서술합니다. 글자 매체로서 소설은 비현실 설정을 구체적으로 서술합니다. 그래서 SF 장르에서 다른 매체들보다 소설은 우월합니다. 게다가 SF 등장인물들은 다르게 사고합니다. 현실 속의 인간과 SF 속의 인간은 다르게 사고합니다. 만약 장거리 생체 우주선이 일상이 된다면, 인간 사고 방식은 크게 바뀔 겁니다. 비단 <마일즈의 전쟁>만 아니라 수많은 SF 소설들은 수많은 비현실들을 상상하고, 수많은 비현실들 속에서 인간 사고 방식들은 아주 크게 바뀝니다.
인간 사고 방식이 아주 크게 바뀌기 때문에, SF 독자는 고정 관념을 돌파하고 인식의 지평선을 확장할 수 있습니다. SF 독자들은 이것을 경이로움, 센스 오브 원더라고 부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인식의 지평선'이라는 용어를 선호하나, 용어가 무엇이든, SF 독서에서 고정 관념 돌파, 인식의 지평선, 경이로움, 센스 오브 원더는 가장 커다란 기쁨입니다. 이것을 느끼기 위해 독자들은 SF 소설들을 찾습니다. 이건 모든 독자가 인식의 지평선을 똑같이 느낀다는 뜻이 아닙니다. 독자들은 소설들을 다양하게 해석합니다. 독자들에게 다양한 주관적인 경험들이 있기 때문에, 해석들은 똑같지 않습니다.
독자들이 소설을 읽는 동안, 독자들은 주관적인 경험들을 동원하고, 그래서 소설 해석들은 똑같지 않습니다. "코스톨리츠의 말투에는 질투의 씨앗이랄까, 계급 의식에서 비롯한 의혹이 깔렸다. 코스톨리츠는 특권의 냄새를 맡았고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피 냄새를 맡은 상어처럼." 어떤 독자는 이 문구들을 좋아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이 문구들이 등장인물 코스톨리츠를 상어에 비유하기 때문에, 독자는 이 문구들을 싫어할지 모릅니다. "아니, 왜 이 문단이 코스톨리츠를 상어에 비유하지? 이 장면에서 코스톨리츠는 야비한 느낌을 풍겨. 하지만 상어는 멋진 동물이야." 이렇게 독자는 주장할 수 있습니다.
독자가 상어를 좋아하고, 소설 문구들이 등장인물 코스톨리츠를 상어에 비유하기 때문에, 독자는 이 문구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석합니다. 이건 사소한 사례입니다. 만약 소설 주제와 주관적인 경험이 부딪힌다면, 독자는 소설 그 자체를 인정하지 못할 겁니다. 주관적인 경험이 독서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모든 독자는 인식의 지평선을 똑같이 확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SF 독서에서 인식의 지평선은 가장 커다란 기쁨입니다. SF 소설은 인식의 지평선을 선사합니다. 다른 SF 만화들, 영화들, 게임들 역시 인식의 지평선을 선사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관건은 글자입니다.
SF 만화들, 영화들, 게임들은 글자에게 기반하지 않습니다. 이것들은 시각적인 정보들에게 기반합니다. 인간 사고 방식은 시각적이지 않으나, SF 게임들은 시각적인 정보들에게 기반합니다. 그래서 인식의 지평선은 강렬해지기보다 희미해집니다. 적어도 SF 게임보다 SF 소설은 인식의 지평선을 훨씬 강렬하게 선사합니다. 소설이 글자에게 기반하고, 글자가 추상적인 측면을 구체적으로 서술하기 때문에, 다른 형식들보다 소설과 SF 장르는 잘 어울립니다. <심연의 노래>는 비디오 게임입니다. 이 게임에서 글자들은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이 게임은 시각적인 정보들에게 기반합니다.
무엇보다 <심연의 노래>는 첨단 과학 분위기를 풍기지 않습니다. 비록 <스텔라리스>가 비디오 게임이라고 해도, <스텔라리스>가 온갖 첨단 과학 기술들을 줄줄이 늘어놓는 동안, <스텔라리스>는 SF 분위기를 아주 팍팍~ 풍깁니다. 만약 고리 건축물이 항성을 둘러싼다면, 게임 플레이어는 "캬아~, 진보뽕에 취한다."라고 읊조릴 겁니다. <스텔라리스>와 달리, <심연의 노래>는 기술 진보 분위기를 풍기지 않습니다. 주연 잠수함과 고대 문명은 구닥다리 스팀펑크 분위기를 풍기고, 그림체는 동화에 가깝고, 줄거리 역시 동화와 비슷합니다. 몇몇 바다 괴수는 사이언스 픽션보다 판타지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심연의 노래>는 사이언스 픽션보다 판타지 같습니다. 전반적인 게임 분위기는 사이언스 픽션보다 판타지로 흘러갑니다. 하지만 분명히 게임 주인공 메리는 잠수함을 뚝딱뚝딱 건조했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잠수함을 조종합니다. 게임 시작부터 게임 결말까지, 잠수함에서 메리는 떠나지 않고, 게임 플레이어는 잠수함을 계속 조종합니다. 아무리 주연 잠수함이 구닥다리 스팀펑크라고 해도, 잠수함은 판타지보다 사이언스 픽션에 가깝습니다. 중세 사람들은 인간이 기계를 만들고 잠수한다고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중세 사람들이 상상했다고 해도, 이 상상은 별로 구체적이지 않았습니다.
반면, 19세기 이후, (서구) 사람들은 잠수함을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중세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상상하지 못했으나, 19세기 (서구)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소설 <해저 2만리>가 대표적인 초기 사이언스 픽션이라고 간주합니다. <해저 2만리>는 스팀펑크 잠수함 소설입니다. <심연의 노래> 역시 스팀펑크 잠수함을 보여줍니다. <해저 2만리>가 SF 울타리에 들어가는 것처럼, <심연의 노래>는 SF 울타리에 들어갑니다. 적어도 스팀펑크 잠수함은 SF 설정이고, <심연의 노래>에서 SF 설정(스팀펑크 잠수함)은 핵심 비중을 차지합니다. 이건 명백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심연의 노래>에서 전반적인 분위기가 판타지에 가깝기 때문에, 여전히 골수 하드 SF 독자들은 어떻게 고작 <심연의 노래> 따위가 SF 장르에 속하는지 반박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SF 팬들은 물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SF 장르가 나타났는가?" 만약 SF 장르에게 어떤 고정적이고 절대적인 기준이 있다면, <심연의 노래>가 이 기준을 충족할 때, <심연의 노래>는 SF 울타리에 들어갈 겁니다. 만약 <심연의 노래>가 이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다면, <심연의 노래>는 SF 울타리에 들어가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SF 장르에게 고정적이고 절대적인 기준이 있나요? 언제, 어떻게 절대적인 SF 기준이 나타났나요?
문제는 이겁니다. SF 장르에게는 고정적이고 절대적인 기준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몇몇 유사성을 이용하고 SF 장르를 임의적으로 형성합니다. SF 장르는 선천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19세기 서구 근대화 이후, 어떤 작가들은 어떤 소설들을 썼고, 그들은 이것들이 사이언티픽 로망스라고 인식했고, 나중에 20세기 평론가들은 이것들을 SF 장르라고 분류했습니다. SF 장르는 후천적으로, 임의적으로 나타났습니다. SF 장르가 선천적으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메리 셸리는 SF 시초이나, 메리 셸리는 자신이 SF 소설을 쓴다고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SF 장르가 선천적이라고 착각합니다.
루트비히 포이에르바하는 종교가 인간을 소외시킨다고 비판했습니다. 인간은 신을 만듭니다. 인간은 신에게 여러 욕구들을 반영합니다. 불멸(immortal)은 대표적인 욕구입니다. 필멸자(mortal) 인간은 불멸자 신을 만듭니다. 신이 불멸자이기 때문에, 신은 위대합니다. 필멸자 인간은 불멸자 신을 부러워합니다. 인간은 보잘것없으나, 신은 위대합니다. 신이 위대하기 때문에, 인간은 신을 떠받듭니다. 인간은 신을 만들었으나, 이제 신은 인간을 지배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만든 것에 종속됩니다. 인간은 신을 만들었으나, 인간은 신에게 종속됩니다. 그래서 종교는 인간을 '소외'시킵니다. SF 장르 역시 비슷합니다.
SF 장르는 선천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SF 장르를 후천적으로, 임의적으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SF 장르가 널리 퍼졌기 때문에, 이제 사람들은 SF 장르가 선천적으로 존재한다고 착각합니다. 몇몇 유사성은 전형이 되고, 전형은 장르를 형성하나, 오히려 이건 역전됩니다. 이제 장르는 전형을 강요하고, 장르가 되기 위해 유사성은 전형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유사성→장르'는 존재하지 않고, '장르→유사성'은 지배적인 공식이 됩니다. 만약 루트비히 포이에르바하가 이것을 본다면, 루트비히 포이에르바하는 SF 장르가 SF 팬들을 소외시킨다고 비판할지 모릅니다. 장르 기준은 장르 팬을 소외시킵니다.
SF 장르가 SF 팬들을 '소외'시키기 때문에, SF 팬들은 SF 장르가 선천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고 인식해야 합니다. 그때 SF 팬들은 장르를 떠받들지 않을 겁니다. SF 장르가 선천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고 인식하기 위해 SF 팬들은 물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SF 장르가 나타났는가?" 분명히 중세 사람들은 잠수함을 구체적으로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19세기 (서구) 사람들은 잠수함을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왜 이 현상이 나타났나요? 19세기 서구 근대화가 SF 장르에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만약 19세기 서구 근대화가 SF 장르에게 영향을 미쳤다면, 어떻게 서구 근대화가 나타났나요? 왜 이게 나타났나요?
왜 근대화가 중국 근대화, 인도 근대화, 이슬람 근대화, 이집트 근대화, 아즈텍 근대화, 마야 근대화, 이로쿼이 근대화, 마오리 근대화보다 서구(유럽+미국) 근대화인가요? 19세기 세계 경제에서 서구보다 중국은 커다란 비중을 차지했으나, 왜 서구 문명이 근대화를 주도했나요? 근대화가 무엇인가요? 왜 우리가 근대를 근대라고 부르나요? 만약 SF 팬들이 '소외'를 피하기 원한다면, SF 팬들은 이것을 물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묻기는 쉽지 않습니다. 제국주의 사회에서 SF 팬들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서구 제국주의는 우리 관념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우리는 제국주의를 떠받듭니다.
"코로나 19 때문에, 전세계는 비참한 지경에 빠졌습니다. 전세계는 힘들게 살아갑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문구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코로나 19 사태가 터지기 전에, 이미 제3세계 민중들은 비참한 지경에 빠졌습니다. 코로나 19 사태가 터지기 전에, 서구 근대화 국가들이 잘 먹고 잘 사는 동안, 제3세계 민중들은 비참한 지경에 빠졌습니다. 그들이 비참한 지경에 빠졌기 때문에, 코로나 19 이후, 서구 근대화 국가들보다 제3세계 민중들은 훨씬 힘들게 살아갑니다. 제3세계 민중들은 훨씬 힘들게 살아가나, 서구 근대화 국가들에서 많은 사람들은 모두가 똑같이 힘들다고 운운합니다.
왜 사람들이 제3세계 비극들을 외면하나요? 왜 사람들이 가난한 제3세계를 인식하지 못하나요? 서구 제국주의가 지배적인 관념이기 때문입니다. 서구 제국주의는 오직 서구 근대화만 진정한 문명이라고 간주합니다. 제3세계는 야만이 되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야만(제3세계)을 외면합니다. 서구 제국주의가 지배적인 관념이기 때문에, 우리가 태어나고 죽을 때까지, 일생 동안, 지배적인 관념 속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언제나 지배적인 관념은 서구 제국주의가 필연적으로 옳다고 세뇌하고, 우리가 태어나고 죽을 때까지, 여기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SF 팬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SF 팬들이 이 장르를 근본적으로 덕질하기 원한다면, SF 팬들은 서구 근대화를 경계해야 합니다. <심연의 노래>가 SF 게임이든 아니든, 이건 그저 문화 해석에 불과합니다. <심연의 노래>가 스팀펑크이든 해양 판타지이든, 이 해석은 근본적이지 않습니다. SF 게임과 스팀펑크보다 서구 제국주의는 훨씬 근본적입니다. 서구 근대화가 나타난 이후, 사람들이 사이언티픽 로망스를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 '인식의 지평선'이라는 용어는 정말 멋집니다. 지평선이라는 단어가 아득하고 장대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국내 SF 문화에서 인식의 지평선이 공식 용어가 아니라고 해도, 저는 다른 용어들보다 인식의 지평선이 훨씬 마음에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