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식스 웨이크>, 자본주의 디스토피아 속의 복제인간 기술 본문
복제인간, 인조인간, 인간형 로봇. 이런 것들이 인간이 될 수 있나요? 인조인간에게 진짜 인간과 똑같은 천부권이 있나요? 만약 미래 사람들이 인조인간을 만든다면, 소설 <프랑켄슈타인>처럼 인조인간이 인간과 똑같다면, 인조인간에게 천부권이 있나요? 이건 많은 논란들을 일으킬 겁니다. 논란들은 엄청난 폭력들로 이어질지 모릅니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 사람들은 인조인간을 차별하고 심지어 죽이기 원했습니다. 아무리 인조인간이 선의로 사람들에게 다가간다고 해도, 사람들은 인조인간을 내쫓고 죽이기 원했습니다. 인조인간은 분노합니다.
인조인간이 인간과 똑같음에도, 인조인간은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못합니다. 인조인간이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음에도, 사람들은 인조인간을 죽이기 원합니다. 그래서 인조인간은 분노합니다. 인조인간은 사람들을 향해 복수하고 싶어하고, 인조인간은 정말 몇몇 살인을 저지릅니다. 인조인간은 "내가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음에도, 왜 모든 사람이 나를 죽이고 싶어하는가? 왜 오직 나만 죄인이 되어야 하는가?"라고 절규합니다. 만약 현실 속에서 미래 사람들이 인조인간을 만든다면, 미래 사람들과 인조인간들은 충돌할지 모릅니다. 인조인간들은 해방을 부르짖고 이건 엄청난 폭력이 될지 모릅니다.
무르 래퍼티가 쓴 <식스 웨이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소설 <식스 웨이크>는 복제인간을 이야기합니다. 소설 속에서 사람들은 복제인간들을 이용해 수명을 연장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복제인간이 된다면, 이 복제인간이 인간이 될 수 있을까요? 옆동네가 철수가 복제인간 철수-1을 만들고, '진짜' 철수가 죽고 '복제인간' 철수-1이 철수의 유산을 이어받는다면, 복제인간 철수-1이 진짜 철수가 되나요? 우리가 복제인간 철수-1을 진짜 철수라고 불러야 하나요? 소설 <식스 웨이크>에는 마인드맵 기술이 있습니다. 미래 사람들은 마인드맵 기술을 이용해 기억과 인격을 전송할 수 있습니다.
진짜 철수는 자신의 기억과 인격을 철수-1에게 전송할 수 있고, 철수-1 역시 자신의 기억과 인격을 철수-2에게 전송할 수 있습니다. 철수-2는 철수-3에게 전송할 테고, 철수-3은 철수-4에게 전송할 겁니다. 철수의 기억과 인격은 철수-10에게 이어질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철수와 철수-10이 똑같나요? 철수가 철수-10으로 이어졌다고 우리가 인식할 수 있나요? 많은 사람들은 고개들을 저을 겁니다. 어떤 사람은 철수-10에게 영혼이 없다고 말할 겁니다. 어떤 사람은 철수-10이 자연스럽지 않다고 말할 겁니다. 철수-10이 인간과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그것 자체가 문제라고 말할 겁니다.
소설 <식스 웨이크>에서 이런 논란은 폭력이 됩니다. 복제인간 문제는 엄청난 폭력들로 이어지고, 심지어 이건 국가 전쟁으로 확장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복제인간 문제는 또 다른 문제들로 이어집니다. 만약 미래 기술이 마인드맵을 만들 수 있다면, 마인드맵 기술은 정신을 조종하거나, 기억을 조작하거나, 인격을 통제할지 모릅니다. 만약 철수-3이 철수-4에게 기억과 인격을 전달할 때, 마인드맵 해커가 조작된 기억을 철수-4에게 몰래 집어넣는다면? 철수-4는 조작된 기억이 자신의 진짜 기억이라고 착각할 겁니다. 이건 철수-4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칠지 모릅니다. 조작된 기억 때문에 철수-4는 진짜 철수와 크게 멀어질지 모릅니다.
진짜 철수가 다소 적극적이었다면, 조작된 기억 때문에, 철수-4는 아주 소심해질지 모릅니다. 만약 이런 마인드맵 해킹들이 들끓는다면, 인류 사회는 너무 혼란스러워질 겁니다. 어쩌면 복제인간 문제보다 마인드맵 해킹 문제는 훨씬 심각할지 모릅니다. 마인드맵 해킹들과 조작된 기억들과 통제된 인격들이 횡횡한다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쉽게 믿지 못할 겁니다. 언제나 사람들은 누군가가 자신을 해킹했는지 모른다고 의심할 겁니다. 전날 밤에 철수-4가 황홀한 꿈을 꾸었다고 해도, 철수-4는 해커가 의도적으로 황홀한 꿈을 조작했는지 모른다고 의심해야 합니다. 인생은 의심이 되어야 합니다. 심지어 황홀한 꿈조차 의심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문제들이 극심한 디스토피아와 만난다면, 결과는 절대 좋지 않을 겁니다. 소설 <식스 웨이크>는 전형적인 시장 경제 디스토피아를 묘사합니다. 거대 자본가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들을 뒤흔듭니다. 아무도 거대 자본가의 권력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미 현실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들은 거대 자본가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 자체로서 이미 이건 사이언스 픽션이 아닙니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거대 자본가들은 복제인간과 마인드맵 기술을 이용해 사람들을 통제할 수 있습니다. 거대 자본가가 시장 경제를 통제하고, 사람들에게 조작된 기억들을 집어넣고, 마인드맵 해커들을 매수한다면?
거대 자본가는 훨씬 쉽게 자신의 권력을 강화할 수 있을 겁니다. 현실 속에는 마인드맵 기술이 없으나, 이미 우리는 거대 자본가에게 충성합니다. 이미 우리는 세뇌를 따릅니다. 우리는 임금 노동자들이 거대 자본가에게 충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거대 자본가들이 임금 노동자들을 해고한다고 해도, 극심한 시장 경제 속에서 해고가 죽음이라고 해도, 우리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자본가가 임금 노동자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권력자가 약자를 죽일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시장 경제가 절대적으로 옳다고 우리가 믿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 속에서 부잣집 강아지들은 잘 먹고 잘 삽니다. 부잣집 강아지들은 비싼 사료들을 먹고, 비싼 의료 혜택들을 받고, 편안한 집에서 오염 없이 삽니다.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굶주려야 하고, 병들어야 하고, 거리에서 추레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한쪽에서 애완견은 사치를 누릴 수 있으나, 다른 한쪽에서 인간은 굶주리고 병들고 추레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애완견보다 인간은 비참합니다. 애완견보다 인간은 비참해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병듬에도, 부잣집 애완견들은 잘 먹고 잘 살아야 합니다. 생물종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생물종은 중요한 기준이 되지 않습니다. <식스 웨이크>처럼, 수두룩한 SF 소설들은 생물종이 차별 기준이라고 떠드나, 이건 착각인지 모릅니다.
이미 현실 속에서 생물종은 차별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생물종이 정말 중요한 차별 기준이라면, 왜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고 병듬에도, 고작 애완견 따위가 잘 먹고 잘 살아야 하나요? 이건 애완견이 굶어죽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애완견 역시 생명체이고, 애완견 역시 고통을 느낍니다. 인간이 개를 비롯해 동물들을 키운다면, 인간은 동물들에게 애정을 쏟아야 할 겁니다. 문제는 인간으로서 인간이 살아가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으로서 인간이 살아가지 못함에도, 부잣집 애완견들은 비싼 돈으로 비싼 사료들과 비싼 의료 혜택들을 누립니다. 우리는 이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시장 경제가 절대적으로 옳기 때문에.
인간보다 애완견이 잘 먹고 잘 산다고 해도, 자본주의 시장 경제 속에서 굶어죽는 인간과 배부른 애완견이 있다고 해도, 우리는 이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시장 경제가 절대적으로 옳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고통들에 몰리고 죽어나간다고 해도, 자본주의는 반드시, 절대적으로, 언제나 옳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믿습니다. 자본주의 체계가 우리를 세뇌하기 때문입니다. 제도권 교육, 사회화 과정, 언론 매체들은 자본주의 세뇌 과정입니다. 제도권 교육 속에서 우리는 자본주의가 세상의 전부라고 배웁니다. 경제학 교과서들은 인간이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개인이라고 못을 받습니다.
경제학 교과서들은 태생적으로 인간에게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적합하다고 못을 박습니다. 학생들이 경제학 교과서들을 읽는 동안, 학생들은 자본주의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고 배웁니다. 언론 매체들은 얼마나 자본주의 국가들이 심각한 폭력들을 저지르는지 절대 강조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언론 매체들이 폭력들을 떠든다고 해도, 언론 매체들은 진짜 폭력들을 감춥니다. 21세기 초반에서 기후 변화가 가장 심각한 환경 오염이고, 산업 자본주의가 기후 변화를 일으켰음에도, 언론 매체들은 이걸 지적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에게 기후 변화가 불리한 화제이기 때문에, 언론 매체들은 기후 변화를 제대로 조명하지 않습니다. 언론 매체들은 그저 폭염이 심각하다고 떠들 뿐입니다.
우리는 뉴스들을 보고 이것들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신문들을 읽은 이후, 우리는 언론 매체들이 세상의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합니다. 언론 매체들이 정말 심각한 문제들을 회피함에도, 우리는 언론 매체들이 세상의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고 착각하고, 우리는 언론 매체들을 믿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자본주의 노예가 되고 자본주의에게 충성합니다. 북한이 뭔가 문제를 일으킬 때, 남한 언론 매체들은 열심히 이것들을 떠들고, 남한 사람들은 게거품을 물고 북한을 비난합니다. 하지만 서구 산업 자본주의는 기후 변화를 일으켰고, 북한 문제보다 기후 변화 문제는 훠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얼씨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인 심각합니다. 기후 변화는 장난이 아닙니다. 북한 문제는 그저 한반도 문제에 불과하나, 기후 변화는 '행성급 환경 오염'입니다.
아무리 기후 변화가 '행성급 환경 오염'이라고 해도, 남한 사람들은 절대 기후 변화가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합니다. 남한 사람들은 그저 북한만 물어뜯을 뿐입니다. 우리는 심각하고 중대한 환경 오염보다 사소한 폭력에 집착합니다. 심지어 북한조차 자본주의 폭력에서 비롯했습니다. 17세기 서구 자본주의가 열대 밀림들을 파괴하고, 플랜테이션 농장들을 늘어놓고, 흑인 노예들을 거래했을 때, 북한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19세기 서구 자본주의가 열심히 매연과 산업 폐기물과 온실 가스를 버렸을 때, 북한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20세기 서구 자본주의가 전략 병기를 만들고 민간인 지역에 전략 병기를 떨어뜨렸을 때, 북한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북한이 나타나기 전에, 이미 서구 자본주의는 폭력적으로 전세계를 수탈하는 중이었습니다.
17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서구 자본주의는 온갖 학살들, 침략들, 환경 오염들, 경제 공황들에 관여했습니다. 이렇게 폭력적인 상황 속에서 북한은 나타났습니다. 북한은 대단한 폭력이 아닙니다. 북한은 훨씬 파생적이고 사소한 폭력입니다. 이건 북한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북한 문제는 중요합니다. 우리는 북한의 수많은 인권 문제들을 비판해야 합니다. 하지만 북한 문제가 중요하다면, 기후 변화 문제는 훨씬 중요할 겁니다. 기후 변화는 전세계 생물 다양성을 절반 가까이 파괴할지 모르고, 지구 생태계를 바꿀지 모르고, 세계 지리를 바꿀지 모릅니다. 이런 급격한 생태계 변화 속에서 빈부 격차는 훨씬 극단적일 테고, 심지어 이건 3차 세계 대전을 촉발할지 모릅니다.
수많은 빈민들에게 카트리나 같은 재해는 절대 유리하지 않습니다. 세계 지리가 바뀐다면, 영토 개념은 바뀔 테고, 이건 세계 전쟁으로 이어질지 모릅니다. 이렇게 기후 변화가 심각함에도, 사람들은 심각한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북한이 파생적인 폭력임에도, 오히려 사람들은 근본적이고 선천적이고 심각한 문제보다 파생적인 폭력을 물어뜯느라 바쁩니다. 사람들은 아주 게거품을 물고 파생적인 폭력을 물어뜯습니다. 남한 사람들이 북한을 물어뜯을 때, 이건 정상이 아닙니다. 행성급 환경 오염이 들이닥침에도, 사람들이 사소한 폭력을 물어뜯는다면, 이건 미친 짓거리일 겁니다. 수많은 남한 사람들은 미쳤습니다. 남한 사회는 미쳤습니다. 남한 사회는 미쳐 돌아갑니다.
왜 남한 사회가 미쳐 돌아가나요? 사람들이 바보 머저리이기 때문에? 민중들이 개돼지이기 때문에? 그건 아닙니다. 자본주의 체계가 우리를 세뇌시키기 때문입니다. 이미 현실에는 마인드맵 해킹 기술이 있는지 모릅니다. 제도권 교육, 사회화 과정, 언론 매체들은 마인드맵 해킹과 별로 다르지 않을지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진짜 마인드맵 기술이 나타난다면, 거대 자본가들이 마인드맵 기술을 이용할 수 있다면, 거대 자본가들은 민중들을 훨씬 쉽게 지배할 수 있을 겁니다. 민중들은 정말 꼭두각시가 될 겁니다. 임금 노동자들은 마인드맵 해킹에서 벗어나지 못할 테고, 임금 노동자들은 노동 조합을 만들지 못하고 파업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아무리 자본가 계급이 임금 노동자들을 끔찍하게 착취한다고 해도, 임금 노동자들은 파업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이미 현실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파업 노동자들을 모욕합니다. "씨발, 파업 노동자 개나리들, 저런 신발 새끼들 때문에 국가 경제는 망할 거야. 저것들은 악랄한 빨갱이들이야. 요즘에는 페미니즘이네 뭐네 하면서 계집년들까지 지랄하지. 어휴, 염병할 페미 나치 미친년들. 이런 보슬아치 페미년들은 전부 인천 앞바다에 빠져죽어야 해." 이런 저주는 마도서 <네크로노미콘>에서 비롯하지 않았습니다. 21세기 남한 사회에서 평범한 민중들은 아무렇지 않게 이런 저주를 떠들 수 있습니다.
이런 저주를 떠들기 위해 <네크로노미콘> 같은 마도서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체계는 얼마든지 민중들에게 저주 능력을 부여합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자본주의 광신도가 되고 파업 노동자들을 신나게 저주할 수 있습니다. 미래에 마인드맵 기술이 나타난다면, 마인드맵 기술은 정말 기술적으로 자본주의 광신도들을 만들 수 있을지 모릅니다. 적어도 소설 <식스 웨이크>는 암울하고 폭력적이고 산만한 사회를 묘사합니다. 소설 속의 사회는 암울하고 폭력적이고 산만하고 가볍습니다. 소설 속의 인류 문명은 비단 암울하고 폭력적이고 산만할 뿐만 아니라 아주 가볍습니다.
소설 <식스 웨이크> 속에서 옆동네 철수는 자신의 목숨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옆동네 철수가 죽는다고 해도, 철수-1은 철수의 인생을 이어갈 겁니다. 철수-1이 죽는다고 해도, 철수-2는 철수의 인생을 계속 이어갈 겁니다. 철수-2가 죽는다고 해도, 철수-3은 철수의 인생을 또 다시 이어갈 수 있습니다. 옆동네 철수를 비롯해 여러 철수들이 기억과 인격을 제대로 저장한다면, 철수는 계속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인간은 더 이상 유한한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유한성을 우회할 수 있습니다. 중세 판타지 속의 엘프들과 달리, 인간은 무한히 살아가지 못하나, 대신 인간은 복제인간 기술과 마인드맵 기술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드웨어 기술과 소프트웨어 기술을 모두 갖추었습니다. 옆동네 철수가 엘프가 아니라고 해도, 옆동네 철수는 무한한 인생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인간이 유한자가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그저 농담거리에 불과합니다. 심지어 암살자들조차 암살이 그저 유희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암살자가 주요 인사를 처치한다고 해도, 이건 그저 한바탕 소동에 불과합니다. 더 이상 죽음이 무겁지 않기 때문에, 인생은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복제인간 기술이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인생을 만들었다고 생각할 겁니다.
이런 사람들은 복제인간 기술을 혐오할 겁니다. 복제인간 기술이 혐오스럽기 때문에, 복제인간 역시 혐오가 될 수 있습니다. 이건 폭력들을 부를 겁니다. 소설 <식스 웨이크>는 복제인간 기술과 마인드맵 기술과 극심한 빈부 격차를 이용해 이런 난장판을 벌입니다. 문제는 연출 방법입니다. 주제가 똑같다고 해도, 연출 방법이 바뀐다면, 감상 역시 바뀔 수 있습니다. "우와, 굉장해! 동굴은 정말 거대하고 어마어마해!"와 "우와, 동굴은 엄청나게 거대해! 그래서 사람들은 던전 속의 무시무시한 드래곤을 이야기할 거야!"는 모두 똑같은 주제를 말합니다. 양쪽 문구는 모두 동굴이 거대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첫째 문구와 달리, 둘째 문구는 동굴의 거대함을 무시무시하고 압도적인 드래곤에게 비유합니다. 인간이 환선굴 같은 동굴에 들어간다면, 인간은 저도 모르게 광대한 동굴 속의 압도적인 드래곤을 머릿속에 떠올릴지 모릅니다. 동굴은 인간을 초월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동굴에게 뭔가 초월적인 것을 대입하기 원할지 모릅니다. 이런 감성 표현은 동굴을 훨씬 강조할 수 있습니다. 동굴 속의 드래곤처럼, 연출 방법은 주제를 다르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소설 <식스 웨이크>는 어떤가요? 이 소설은 장거리 우주선을 보여줍니다. 새로운 행성을 개척하기 위해 장거리 우주선은 지구를 떠났습니다.
흔한 장거리 우주선들처럼, <식스 웨이크>에서 우주선은 폐쇄 공동체입니다. 승무원들은 오직 여섯에 불과하고, 아무도 우주선을 나가거나 우주에서 우주선으로 들어오지 못합니다. 이건 무인도 저택과 다르지 않습니다. 장거리 우주선 속에서 살인 사건이 나타난다면, 이건 밀실 살인이 될 겁니다. 그래서 <식스 웨이크>는 애거사 크리스티가 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비슷합니다. 양쪽 모두 밀실 살인을 이야기합니다. <식스 웨이크>에는 장거리 우주선과 항법 인공 지능과 여섯 복제인간 승무원들과 마인드맵 기술과 온갖 미래 상상력들이 있고, 동시에 <식스 웨이크>에는 (우주선) 밀실 살인이 있습니다.
<식스 웨이크>는 밀실 살인을 이용해 복제인간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식스 웨이크>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이용해 (낸시 파머가 쓴) <전갈의 아이>를 이야기합니다. <식스 웨이크>에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전갈의 아이>가 함께 있습니다. 이 소설은 밀실 살인을 이용해 복제인간 문제를 조명합니다. 밀실 살인은 폐쇄 공간에 치중합니다. 배경 무대와 등장인물들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제한적인 배경 무대와 등장인물들이 살인을 저지르기 때문에, 밀실 살인은 갈등 관계를 훨씬 부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복제인간 소설들보다 <식스 웨이크>는 복제인간 문제를 훨씬 부각할 수 있습니다.
인류 사회는 거대합니다. 인류 사회가 거대하기 때문에, 여기에는 복제인간 이외에 다른 많은 문제들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장거리 우주선은 폐쇄 공간이고, 배경 무대가 제한적이기 때문에, <식스 웨이크>는 제한적인 문제(복제인간)에 치중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장거리 우주선이라는 폐쇄 공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것처럼, <식스 웨이크>는 다른 것들을 차단하고 오직 복제인간 갈등 관계에만 치중할 수 있습니다. 자연 과학자들이 뭔가를 실험할 때, 과학자들은 온갖 변수들을 통제하고 싶어합니다. 다른 변수들이 끼어들지 못하는 제한적인 상황에서 과학자들은 실험하고 싶어합니다. 이런 실험처럼, <식스 웨이크>는 제한적인 상황으로 복제인간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이런 시도가 성공적인가요? 추리 소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처럼, <식스 웨이크>가 놀라운 밀실 살인을 구현하나요? 밀실 살인은 다소 인위적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가 보여주는 것처럼, 밀실 살인에는 아주 세심하고 치밀한 사전 계획이 필요합니다. 만약 추리 소설이 허술한 사전 계획을 연출한다면, 독자들은 실망하고 소설을 탓할 겁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비롯해 온갖 추리 소설들처럼, <식스 웨이크>는 어떻게 밀실 살인이 벌어지는지 보여줍니다. 문제는 장거리 우주선이 너무 거창한 사업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는 오직 외딴 저택을 보여줄 뿐입니다.
외딴 저택은 별로 거창하지 않습니다. 반면, 장거리 우주선은 문자 그대로 우주급입니다. 장거리 우주선은 첨단 설비입니다. 장거리 우주선은 엄청난 인력과 비용과 물자를 요구합니다. 이런 거창한 우주 사업과 밀실 살인이 맞물릴 수 있나요? <식스 웨이크>는 그걸 시도합니다. 여기에는 설득력이 없지 않으나, 어떤 관점에서 이건 다소 억지입니다. 외계 행성을 개척하기 위한 장거리 우주선은 절대 만만한 사업이 아닐 겁니다. 하지만 <식스 웨이크>는 외계 행성 개척을 너무 안일하게 다룹니다. 소설 전개 과정은 흥미진진하나, 소설이 외계 행성 개척을 안일하게 다루기 때문에, 어떤 독자들은 김이 샌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밀실 살인 추리 소설로서 <식스 웨이크>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 크게 의존합니다. 이 소설은 아주 노골적으로 거대 자본가를 밀어줍니다. <식스 웨이크>는 "자, 여기에 거대 자본가가 있어. 거대 자본가는 아주 똑똑하고 막강해. 그래서 거대 자본가가 아주 거창한 음모를 꾸민다고 해도, 그건 절대 이상하지 않아."라고 아주 노골적으로 복선을 깝니다. 복선이 너무 노골적이기 때문에, 어떤 독자들은 빠르게 눈치를 챌지 모릅니다. 어떤 관점에서 밀실 살인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주선 밀실 살인보다 암울하고 폭력적이고 산만하고 가벼운 인류 사회입니다.
그래서 <식스 웨이크>는 주기적으로 인류 사회 이야기들을 우주선 이야기들 속에 끼워넣습니다. <식스 웨이크>가 밀실 살인을 이용해 복제인간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이 소설은 오직 장거리 우주선만 주목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거대 자본가와 우주선 밀실 살인 사이에 중요하고 필수적인 관계가 있음에도, <식스 웨이크>는 두 가지를 근본적으로 고찰하지 않습니다. <식스 웨이크>는 그저 거대 자본가가 마인드맵 기술을 비롯해 엄청난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른다고 말할 뿐입니다. 현실에서 거대 자본가가 엄청난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기 때문에, <식스 웨이크>는 미래 상상력을 이용해 현실을 반영합니다.
소설은 현실을 반영합니다. 소설이 현실을 판단하지 않는다고 해도, 소설은 현실을 반영합니다. 문제는 독자들입니다. 독자는 소설을 읽고 판단할 겁니다. <식스 웨이크>가 막강한 거대 자본가를 반영한다면, 독자는 <식스 웨이크>를 읽고 거대 자본가를 판단할 겁니다. 하지만 이미 독자가 자본주의 노예이기 때문에, 독자가 자본주의 광신도이기 때문에, 독자는 거대 자본가가 문제라고 판단하지 못할 겁니다. 소설 <식스 웨이크>는 온갖 문제들을 늘어놓으나, 결국 이 소설은 윤리와 도덕과 선행으로 흘러갑니다. 독자 역시 윤리와 도덕과 선행으로 흘러갈 겁니다.
충직한 자본주의 광신도로서 독자는 자본주의가 문제라고 생각하지 못할 겁니다. 독자는 오직 윤리만 따질 겁니다. 이건 심각한 착각입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윤리 문제인가요, 아니면 경제 문제인가요? 경제는 경제 문제입니다. 경제는 윤리가 아니라 경제 문제입니다. 장수 거북이 아프다면, 우리는 수의사를 불러야 할 겁니다. 아무리 우리가 세계 최고의 로봇 기술자를 부른다고 해도, 기술자는 병든 장수 거북을 치료하지 못할 겁니다. 병든 장수 거북에게는 로봇 기술자보다 수의사가 필요합니다. 병든 장수 거북에게 로봇 기술자보다 수의사가 필요한 것처럼,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는 윤리적인 처방보다 '경제학 처방'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광신도로서 독자는 시장 경제를 경제학보다 윤리학으로 해결하기 원할 겁니다. 기술자가 로봇을 고칠 수 있는 것처럼, 기술자가 장수 거북을 고칠 수 있다고 우리가 생각한다면, 이건 착각일 겁니다. 이건 아주 심각한 착각일 겁니다. 독자가 윤리학을 시장 경제에 대입할 때, 독자는 현실을 왜곡합니다. 소설 <식스 웨이크>는 복제인간 기술이 온갖 문제들을 일으킨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복제인간 기술이 나타납니까? 어떻게 복제인간 기술, 우주선 건조 기술, 마인드맵 프로그램 기술이 나타납니까? 어떻게 외계 행성을 개척하기 위한 장거리 우주선이 나타납니까? 하늘에서 우주선이 뚝 떨어지나요? 하늘에서 우주선이 뚝 떨어지고, 복제인간 기술이 뚝 떨어지고, 마인드맵 프로그램이 뚝 떨어지나요?
하늘에서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뚝 떨어지나요? 자본주의 광신도로서 독자는 그렇다고 믿습니다. 학교 경제학 교과서들이 노동 가치 이론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노동 가치 이론은 인간 노동이 장거리 우주선을 만든다고 이야기합니다. 노동자들이 만들지 않는다면, 장거리 우주선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임금 노동자들이 노동하지 않는다면, 자본가 계급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임금 노동자들이 거대 공장을 만들고, 거대 공장이 첨단 기계를 만들기 때문에, 첨단 기계는 복제인간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독자는 이걸 생각하지 못할 겁니다. 학교 경제학 교과서가 하늘에서 거대 공장이 뚝 떨어졌다고 설명하기 때문에.
학교 경제학 교과서는 노동 가치 이론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인간 노동에 주목한다면, 사람들은 자본가 계급보다 노동자 계급을 주목할 테고, 자본가 계급에게 이건 불리한 상황일 겁니다. 어떻게 미천한 개돼지 민중들이 지극, 지존, 지고, 지인, 지애로우신 자본가느님을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까? 우리 미천한 개돼지 민중들은 지극, 지존, 지고, 지인, 지애로우신 자본가느님을 숭배해야 합니다. 그래서 학교 경제학 교과서들은 노동 가치 이론을 무시하고 수요-공급 곡선을 강조합니다. 하늘에서 거대 공장은 뚝 떨어졌습니다. 미천한 개돼지 민중들은 하늘에서 거대 공장이 뚝 떨어졌다고 믿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건 개소리입니다. 인간 노동은 거대 공장을 만듭니다.
인간 노동은 우주선을 만듭니다. 인간 노동은 복제인간, 마인드맵, 메트로폴리스, 달 기지를 만듭니다. 그래서 뭔가를 만들기 위해 노동자들이 평등하게 논의한다면, 인류 사회는 여러 문제들을 없애거나 줄일 수 있습니다. 복제인간 기술이 문제인가요? 네, 좋습니다. 우리는 복제인간 기술이 옳은지 논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이건 불가능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미천한 개돼지 민중들은 지극, 지존, 지고, 지인, 지애로우신 자본가느님을 떠받들어야 합니다. 지극, 지존, 지고, 지인, 지애로우신 자본가느님이 복제인간 기술을 상품화한다면, 미천한 개돼지 민중들은 지극, 지존, 지고, 지인, 지애로우신 자본가느님을 따라야 합니다.
독자가 자본주의 노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독자가 자본주의 광신도가 된다면, 독자는 소설 <식스 웨이크>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할 겁니다. 소설 <식스 웨이크>가 자본주의 디스토피아를 반영할 때, 독자는 비판적으로 현실을 바라보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소설을 판단해야 합니다. 비단 <식스 웨이크>만 아니라 다른 창작물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창작물이 현실을 반영하기 때문에, 독자는 특정한 기준으로 창작물을 판단해야 합니다. 현실에 어떤 문제가 있다면, 현실에는 그 문제를 비판하기 위한 사상이 있을 테고, 독자는 그 사상을 이용해 창작물(이 반영하는 현실)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