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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판타지 '소설'로서 <업루티드>에서 주문 시전 묘사 본문

감상, 분류, 규정/소설을 읽다

판타지 '소설'로서 <업루티드>에서 주문 시전 묘사

OneTiger 2019. 10. 4. 20:56

[스톰은 두 눈을 하얗게 빛내고 벼락을 내리꽂습니다. 이런 강력한 초능력에 아무 '느낌'이 없나요?]



많은 여자들에게 월경은 불쾌한 경험입니다. 개인적인 차이들이 영향을 미친다고 해도, 많은 여자들은 월경이 힘들다고 말합니다. 왜 여자들이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나요? 여자가 엄마가 되고 아기를 뱃속에 품을 때,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관점에서 여자에게 아기는 기생 생명체입니다. 예전에 듀나님은 '아기가 엄마에게 기생한다'고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이건 다소 혐오스러운 표현이나, 이건 완전히 틀린 표현이 아닙니다. 아기 유전 형질 절반은 아빠에게서 비롯했습니다. 엄마는 이런 아기를 뱃속에 품어야 합니다. 엄마 몸은 생체 식량 공장이 됩니다.


엄마는 몸으로 뱃속의 아기에게 영양분을 먹여야 합니다. 엄마 몸은 아기를 위한 생체 식량 공장이 되나, 아기는 완전한 엄마 유전 형질이 아닙니다. 아기에게는 다른 유전 형질이 있고, 그래서 엄마 몸은 자신이 이런 아기를 건강하게 품을 수 있을지 파악해야 합니다. 대략적으로 이런 과정은 월경으로 이어집니다. 이건 모든 엄마가 월경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 여자가 아기 하나를 뱃속에 품을 때, 암컷 장수 거북은 훨씬 많은 알들을 뱃속에 품습니다. 하지만 동물학자들은 장수 거북이 월경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만약 장수 거북에게 어떤 배란 현상이 있다고 해도, 이것과 월경은 다를 겁니다.



비록 월경이 인간 여자의 거의 고유한 특성이라고 해도, 분명히 월경 덕분에 엄마는 아기를 건강하게 품을 수 있습니다. 월경 덕분에, 인류는 번성할 수 있습니다. 종종 가부장적인 편견은 월경을 비하하고 모욕합니다. "씨발, 왜 이렇게 아줌마 성깔이 사나워? 오늘이 그 날인가?" 이런 욕설들은 드물지 않습니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월경은 왜곡되고 추락하고 욕설이 됩니다. 하지만 여자들이 '그 날'을 겪기 때문에, 인류 문명은 번성할 수 있습니다. 여자들이 '그 날'을 겪지 않았다면, 인류 문명은 번성하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그 날'은 욕설보다 경이로운 생명 현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많은 여자들에게 월경은 힘든 경험입니다. 남자들이 이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월경은 모욕이 됩니다. 심지어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생리대를 상품화합니다. 월경은 귀중한 생명 현상이고, 이것 때문에 인류 문명이 번성함에도, 자본주의에게 생리대는 그저 상품에 불과합니다. 자본주의는 고귀한 생명 현상보다 이윤을 추구합니다. 이런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월경이 왜곡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건 이상할 겁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얼마나 월경이 힘든지 이야기하기 원합니다. 종종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얼마나 뱃속이 뒤집어지는지 이야기합니다.



여자가 월경이 뱃속을 뒤집는다고 이야기하는 동안, 여자는 언어를 동원합니다. 여자는 말(語)을 이용해 자신의 고통, 느낌을 표현합니다. 어떤 여자들은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연주하거나, 춤을 추거나, 조각을 만들거나, 다른 방법들을 이용할지 모릅니다. 뭐, 어쩌면 어떤 여자들은 남자의 배때기에 펀치를 날리고 "어때? 아프지? 월경은 이런 것이야."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많은 여자들은 말과 글을 이용해, 언어를 이용해 느낌을 표현할 겁니다. 왜 언어인가요? 인간에게 여러 표현 형식들, 그림, 음악, 춤, 조각, 기타 다른 것들이 있음에도, 왜 여자들이 언어를 이용해 느낌을 표현하기 원하나요?


유력한 대답은 추상일 겁니다. 느낌이 추상적이기 때문일 겁니다. 느낌은 가시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느낌을 두 눈으로 직접 파악하지 못합니다. 이건 비유이나, 마음 속에는 느낌이 있습니다. 느낌은 영혼과 비슷합니다. 우리는 느낌을 만지거나, 느낌의 색깔을 확인하거나, 느낌의 형태를 확인하거나, 느낌의 질량과 부피, 무게를 측정하지 못합니다. 분명히 우리는 감정을 느끼나, 우리는 감정을 보거나 만지거나 측정하지 못합니다. 현대 의학은 여러 장비들을 동원하고 감정을 수치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수치들을 관찰한다고 해도, 이건 시각화가 아닙니다. 감정과 사고 같은 것들은 숫자가 되지 못합니다.



감정과 사고 같은 것들이 시각적이지 않다면, 이런 것들이 추상적이라면, 이것들을 표현하기 위해 우리는 추상적인 표현 형식을 동원해야 합니다. 그건 언어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음악 역시 추상적이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분명히 언어와 음악은 똑같이 비가시적인 매체, 추상적인 매체입니다. 그림, 조각, 동영상이 시각적인 매체라면, 언어와 음악은 추상적인 매체가 될 겁니다. 문제는 음악이 내용을 구체적으로 '서술'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음악은 서술보다 연주입니다. 음악에 내용이 있다고 해도, 음악은 내용을 가락으로 변형합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똑같은 음악에 다른 내용들을 덧붙일 수 있습니다.


<가브리엘 오보에>에는 가사가 없습니다. 이 음악에 가사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가브리엘 오보에>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서술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사라 브라이트만은 여기에 가사를 덧붙이고 노래합니다. <넬라 판타지아>에는 서술이 있고, 그래서 우리는 <넬라 판타지아>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압니다. 하지만 <가브리엘 오보에>와 <넬라 판타지아>는 다릅니다. <가브리엘 오보에>가 보여주는 것처럼, 우리는 음악이 무엇을 서술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영화 <미션>이 이 음악을 들려주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가브리엘 오보에>가 서구 제국주의 침략과 열대 밀림 파괴를 서술한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이런 느낌이 옳은가요? 정말 <가브리엘 오보에>가 열대 밀림 파괴를 서술하나요? 이 음악이 사실 대항해 시대가 대학살 시대라고 서술하나요?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서구 문명이 식민지들을 악랄하게 수탈했기 때문에 서구 자본주의가 막대한 부를 끌어모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하지만 엔리오 모리코네는 이 음악에 가사를 덧붙이기 원하지 않았습니다. <가브리엘 오보에>는 영혼을 정말 애잔하게 감싸안는 감동적인 연주이나, 여기에는 내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음악이 영혼을 '애잔하게' 감싸안는다고 느낄 뿐입니다. 그래서 월경이 어렵고 불쾌하고 힘들다고 표현하기 위해 여자들은 음악들을 연주하지 않을 겁니다.


여자들은 말하거나 씁니다. 여자들은 언어를 이용합니다. 언어가 비가시적인 감정과 사고와 다른 많은 추상적인 것들을 서술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음악보다 언어가 우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무리 시인들이 운율을 이용해 음악을 만들기 원한다고 해도, 어떻게 언어가 <가브리엘 오보에> 같은 환상적인 음악이 될 수 있나요. 음악에 내용이 없다고 해도, 이건 언어와 음악에 다른 특성들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는 감정과 사고와 다른 추상들이 있고, 이것들을 표현하기 위해 우리는 언어를 이용합니다. 만약 우리가 다른 형식들을 이용한다면, 우리는 추상적인 것들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애잔함'은 언어입니다.



[이런 음악에 구체적인 내용이 있나요? 이런 연주는 영혼을 '애잔하게' 어루만지나, 여기에는 서술이 없습니다.]



우리는 애잔함이 무엇인지 사회적으로 합의했습니다. 우리가 합의하지 않았다고 해도, '애잔함'은 지배적인 기호입니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애잔함'이 존재했고, 그래서 애잔함이 우리를 장악하고 지배한다고 해도, 남한 사회에서 단어 '애잔함'은 추상적인 감정을 직접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건 모든 남한 사람이 단어 애잔함을 들었을 때 모두 똑같은 감정을 마음 속에 떠올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언어는 계속 바뀝니다. 언어가 계속 바뀌기 때문에, 단어 애잔함은 상당히 많은 의미들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가 언어를 이용할 때, 우리는 언어에 주관적인 경험들을 덧붙입니다.


이웃집 영희와 옆동네 철수가 단어 애잔함을 이용해 대화한다고 해도, 이웃집 영희와 옆동네 철수는 다른 것들을 가리킬지 모릅니다. 만약 두 사람이 단어 애잔함을 이용해 너무 다른 것들을 가리킨다면, 이건 대화보다 말싸움이 될지 모릅니다. "아이고, 답답해! 왜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지?" 이웃집 영희와 옆동네 철수는 크게 외치고 싸울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어떤 특정한 감정을 직접 가리키기 원할 때, 다른 무엇보다 단어 애잔함은 가장 효과적일지 모릅니다. 제도권 교육에서 사람들은 단어 애잔함을 배웁니다. 하지만 제도권 교육에서 사람들은 그림 애잔함, 음악 애잔함, 조각 애잔함, 동영상 애잔함을 배우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웃집 영희는 옆동네 철수를 애잔하게 쳐다봤다."라고 쓸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문장을 쓸 수 있고, 이 게시글을 읽는 여러분 역시 이 문장을 쓸 수 있습니다. 이 문장은 사회적이거나 보편적이거나 지배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문장을 똑같이 쓰고, 똑같이 읽고, 비슷하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비록 해석들이 완전히 똑같지 않다고 해도, 사람들이 이 문장을 읽었을 때, 사람들은 이웃집 영희가 "앗싸, 가오리!"라고 떠들지 않았을 거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다른 형식들입니다. 우리가 이 문장을 그릴 수 있나요? 어떻게 우리가 '애잔하게 쳐다본다'고 그릴 수 있나요? 우리는 슬픈 얼굴을 그릴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표정에 예민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남한 사회에 슬픈 얼굴을 그리기 위한 특정한 공식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상당히 보편적(이거나 지배적)인 방법을 이용해 슬픈 얼굴을 그리고, 파악하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웃는 얼굴, 화난 얼굴, 아픈 얼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문자 메시지를 보낼 때, 우리는 이모티콘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에게는 희노애락 이외에 다른 많은 추상적인 것들이 있습니다. 슬픈 얼굴과 달리, 애잔한 시선은 특정한 공식이 되지 못합니다. 제가 애잔한 영희 눈빛을 그린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은 영희가 다른 감정들을 느낀다고 해석할지 모릅니다.



이렇게 감정과 사고와 다른 많은 추상적인 것들을 표현하기 위해 우리는 언어를 이용합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언어를 이용해 월경 느낌을 설명할 겁니다. 언어는 비단 감정과 사고만 아니라 이론, 연대기, 사상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우리가 언어를 이용한다고 해도, 현실 속에 어떤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언어로 이것을 표현할 수 있나요? SF 소설들과 판타지 소설들에는 여러 초능력자들과 마법사들이 있습니다. 초능력자들과 마법사들이 초능력을 발휘하거나 마법 주문을 시전할 때, 그들은 어떤 고유하고 특정한 느낌을 받을지 모릅니다. 신체가 초능력과 마법에 영향을 미친다면, 초능력자와 마법사는 어떤 느낌을 받을지 모릅니다.


식물 초능력자와 드루이드가 덩굴을 조종한다면, 식물 초능력자와 드루이드는 신체가 초능력을 내뿜거나 마법이 덩굴에게 영향을 미치는 '느낌'을 받을지 모릅니다. 소설 <영원한 전쟁>에서 몇몇 초능력 병사가 아픔을 느끼거나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초능력과 마법에는 독특한 느낌, 고유한 느낌이 있을 겁니다. 이건 모든 초능력 설정과 마법 설정에 고유한 느낌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SF 작가는 아무 느낌 없이 식물 초능력자가 덩굴을 조종한다고 설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우리가 뭔가를 할 때, 우리는 어떤 느낌을 받습니다. 이게 정신적인 행위라고 해도, 우리는 어떤 느낌을 받습니다. 아니, 초능력과 마법이 정신적인 행위인가요? 이게 순수하게 정신적인 행위인가요?



식물 초능력자가 덩굴을 움직일 때, 이게 정신적인 행위인가요, 아니면 이게 육체적인 행위인가요? 사실 신체는 '정신적인 행위'에 개입합니다. 우리가 뭔가를 '정신적으로' 고민한다고 해도, 우리는 우리의 '몸'을 이용해야 합니다. 두뇌를 비롯해 몸은 하드웨어입니다. 하드웨어 두뇌와 몸 없이, '정신적인 행위'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소설 <기시감>은 로가디아와 게이트 우주선을 설정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식물 초능력자와 삼림 드루이드가 덩굴을 조종한다면, 초능력자와 드루이드 신체는 초능력과 마법을 발휘할 테고, 초능력자와 드루이드는 뭔가를 느낄지 모릅니다. 이게 느낌적인 느낌이라고 해도, 초능력자와 드루이드는 뭔가를 느낄지 모릅니다.


이건 모든 사이언스 픽션과 판타지가 이런 느낌을 표현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화 <엑스맨>에서 찰스 자비에 교수는 세레브로를 이용할 수 있고, 스톰은 벼락을 내리꽂을 수 있고, 매그니토는 자동차를 들어올릴 수 있습니다. 찰스 자비에와 스톰과 매그니토는 이것들이 무슨 느낌인지 표현하지 않습니다. 신체가 병들고 아프다면, 찰스 자비에는 세레브로를 이용하지 못할 겁니다. 사실 세레브로는 건강한 신체를 요구합니다. 이건 텔레파시 초능력과 신체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초능력과 신체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찰스 자비에가 세레브로를 이용한다면, 찰스 자비에는 뭔가를 느낄지 모릅니다. 영화 <엑스맨>은 이런 느낌을 구체적으로 서술하지 않습니다.



미스틱은 몸을 바꿉니다. 미스틱이 수많은 비늘들을 움직일 때, 미스틱은 뭔가를 느낄 겁니다. 산들바람이 머리카락을 흩날릴 때, 우리가 뭔가를 느끼는 것처럼, 미스틱 역시 뭔가를 느낄지 모릅니다. 미스틱이 비늘들을 이용해 스톰으로 변신하거나 사이클롭스로 변신한다면, 미스틱은 이런 느낌이 간지럽거나 따끔거린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하지만 영화 <엑스맨>은 이런 느낌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할리 베리가 스톰을 연기하는 동안, 할리 베리가 이런 '느낌'을 고민하나요? 스톰이 두 눈을 하얗게 빛내고, 벼락을 내리꽂고, 하늘로 떠오를 때, 할리 베리가 초능력 발현 '느낌'을 연기하나요?


할리 베리는 그랬는지 모릅니다. 할리 베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심지어 할리 베리가 초능력 발현 '느낌'을 연기했음에도, 할리 베리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저도 모르게 뭔가를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겁니다. 할리 베리가 초능력 발현 느낌을 고민했든 고민하지 않았든, 할리 베리가 이것을 연기했든 연기하지 않았든, 영화 <엑스맨>은 이것에 많은 비중을 할애하지 않습니다. 이 영화는 추상화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엑스맨>이 이것을 표현하기 원한다고 해도, 어떻게 <엑스맨>이 표현할 수 있나요? 여자들이 월경을 설명할 때, 여자들은 '언어'를 동원합니다.



[이런 게임이 충만한 감동을 선사함에도, 만약 자연 신성 주문이 무덤덤하다면, 이게 이상하지 않나요?]



월경을 표현하기 위해 여자들은 격렬하게 춤을 추거나, 바닥에서 뒹굴거나, 잔뜩 인상을 찌푸릴 수 있습니다. 소설 <해저 2만리>에서 네드 랜드는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고 해도 몸짓이 세계 공용어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이 입맛을 다시고 자신의 입과 배를 가리킨다면, 이건 배가 고프다는 뜻일 겁니다. 아기가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아기가 입을 오물거릴 때, 엄마는 젖꼭지를 물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몸짓이 추상적이고 복잡한 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나요? <엑스맨>은 영화입니다. 영화는 영상 매체입니다. 언어와 영상은 다릅니다. 영상은 시각적인 측면을 중시합니다. 영상은 추상적인 느낌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영상은 온갖 추상 기법들을 동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들과 '서술'은 다릅니다.


영상은 느낌을 서술하지 못합니다. 여자들이 월경을 설명하는 것처럼, 언어는 느낌을 서술할 수 있습니다. 영화 <엑스맨>은 이런 느낌을 구체적으로 서술하지 못할 겁니다. 게다가 <엑스맨>은 여기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비단 <엑스맨>만 아니라 많은 사이언스 픽션들, 판타지들은 초능력 발현과 마법 시전 '느낌'을 서술하지 않습니다. 마블 스튜디오 덕분에, 관객들은 여러 초인 영웅 영화들을 구경할 수 있으나, 이런 영화들은 초능력 발현 '느낌'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블록버스터 판타지 게임들은 온갖 마법 주문들을 자랑하나, 이런 게임들은 마법 시전 '느낌'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게임들이 이것을 표현한다고 해도, 게임들은 이것을 수치화, 규칙화합니다.



'느낌'이 수치, 규칙이 되어야 하나요? <던전스 앤 드래곤스>를 비롯해 판타지 롤플레잉 게임들은 많은 인기들을 끕니다. 이런 판타지 롤플레잉 게임들에는 마법사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던전 마스터들과 게임 플레이어들은 마법 시전 느낌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마법사가 주문 서적을 읽고 마법 주문을 기억(메모라이즈)할 때, 이게 무슨 느낌인가요? 여기에 아무 느낌이 없나요? 울창한 숲 속에서 드루이드가 명상하고 자연 신성 주문들을 기억할 때, 드루이드가 풍요롭고 충만한 자연을 느끼나요? 저는 이런 것들을 물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여러 롤플레잉 게임 플레이어들과 던전 마스터들에게 물었으나, 그들은 이런 '느낌'을 별로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이건 개인적인 경험이 아닐지 모릅니다. 어쩌면 다른 수많은 던전 마스터들, 게임 플레이어들 역시 어떻게 드루이드가 느끼고 사고하는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지 모릅니다. 판타지 세상 속에서 뭐라고 마법사들이 느끼든, 게임 플레이어들은 상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판타지 세상 속에서 드루이드가 상처를 치료하거나, 덩굴을 조종하거나, 호랑이를 부를 때, 드루이드는 풍요롭고 충만한 자연의 힘을 느끼는지 모릅니다. 게임 플레이어들은 <쉘터 2> 같은 게임이 정말 감동적인 자연을 보여준다고 호평합니다. <쉘터 2> 같은 비디오 게임이 진한 감동을 선사한다면, 신비로운 마법 주문이 훨씬 풍요로운 감성을 선사하지 않을까요?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보다 자연 신성 주문이 무덤덤한가요?



이건 모든 사이언스 픽션과 판타지가 초능력 발현 느낌과 주문 시전 느낌을 반드시 표현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좋은 글을 읽을 때, 우리는 커다란 감정을 느낍니다. 흔히 우리는 이런 글을 문학이라고 부릅니다. 문학이 커다란 감정을 선사한다면, 마법 서적 역시 그럴지 모릅니다. 판타지 작가는 이런 느낌, 감정을 서술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판타지 작가가 이것을 서술한다면, 판타지 세상은 훨씬 풍요로워질 겁니다. 드루이드는 일반적인 마법사, 성직자가 아닙니다. 일반적인 마법사, 성직자와 달리, 드루이드는 자연의 힘을 느낍니다. 만약 판타지 작가가 자연 신성 주문을 이용해 이런 느낌을 표현한다면, 판타지 설정은 훨씬 풍요로워질 겁니다.


특히, 판타지 '소설'에서 이것은 훨씬 중요할 겁니다. 아무리 소설이 시각적인 흥미를 추구한다고 해도, 결국 글자들은 시각 매체가 아닙니다. 글자 매체에게는 다른 장점이 있습니다. 여자들이 언어를 이용해 설명하는 것처럼, 글자 매체는 감정을 구체적으로 서술할 수 있습니다. 판타지 작가가 글자들을 이용해 주문 시전 '느낌'을 서술한다면, 판타지 만화, 판타지 영화, 판타지 비디오 게임보다 판타지 소설은 고유한 장점을 자랑할 수 있을 겁니다. 사실 오래 전부터 여러 SF 소설들, 판타지 소설들은 이런 측면을 중시했습니다. 나오미 노빅이 쓴 <업루티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판타지 '소설'로서 <업루티드>는 마법사가 주문을 시전하는 동안 뭐라고 마법사가 느끼는지 구체적으로 서술합니다.



소설 <업루티드>는 마법 주문 시전을 이용해 소설 화자 속으로 깊게 들어갑니다. <업루티드>는 1인칭 주인공 시점입니다. 만약 이 소설이 3인칭 관찰자 시점을 선택했다면, 3인칭 관찰자 시점은 마법사 내면으로 깊게 들어가지 못했을 겁니다. 어쩌면 마법사 내면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위해 <업루티드>는 1인칭 시점을 선택했는지 모릅니다. 나오미 노빅이 이것을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1인칭 주인공 시점 덕분에, 소설 <업루티드>는 주문 시전 느낌을 아주 생생하게 서술하고 묘사할 수 있습니다. 만약 SF 작가들, 판타지 작가들이 초능력 발현 느낌, 주문 시전 느낌을 풍부하게 서술하기 원한다면, 소설은 가장 효과적인 매체일 겁니다.


소설 <업루티드>는 모범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주문 시전 느낌이 정말 풍부하고 생생하기 때문에, 오히려 마법 효과보다 주문 시전 과정은 훨씬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흔한 던전 탐험 게임들과 달리, 이 소설에서 파괴적인 마법 위력보다 내면 서술은 훨씬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나오미 노빅 역시 이런 묘사에 많은 공을 들이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나오미 노빅이 주문 시전 과정을 묘사하는 동안, 나오미 노빅은 자신의 필력이 대단하다고 즐거워했는지 모릅니다. 나오미 노빅이 이것을 즐기지 않았다고 해도, <업루티드>에는 필력을 발휘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주문 시전 과정은 이것을 보여줍니다. SF 작가들과 판타지 작가들은 <업루티드>를 참고할 수 있습니다.



좋은 텍스트는 창작 욕구를 자극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이런 텍스트는 가장 뛰어난 텍스트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좋은 텍스트를 선별할 때, 우리는 여러 기준들을 내세울 수 있습니다. 텍스트가 창작 욕구를 자극한다면, 이것 역시 기준이 될 겁니다. 이것은 가장 뛰어난 기준이 될지 모릅니다. <업루티드>는 이런 기준에 부합합니다. 주문 시전 과정을 표현하기 위해 <업루티드>는 풍성한 문장들과 미사여구들을 늘어놓습니다. 이런 필력은 진수성찬 같습니다. 단어들, 문장들, 묘사들이 계속 마법이라는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생생하게 뒷받침하기 때문에, 독자는 글자들을 읽고 이것들을 해석해야 합니다. 이런 필력에는 포만감이 있습니다.


어떤 독자들은 나오미 노빅이 지루한 서술들과 묘사들을 늘어놓는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분명히 <업루티드>는 마법사 내면으로 깊게 들어가고 주문 시전 과정에 많은 비중을 할애합니다. 흔한 던전 탐험 게임들과 달리, 이 소설에서 마법은 액션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마법은 추상적이고 광범위한 내면 묘사, 심리 묘사로 이어집니다. 어떤 독자들은 내면 묘사를 과장하기 위해 나오미 노빅이 마법 시전을 이용한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업루티드>에서 내면 묘사가 마법 시전을 과장하나요, 아니면 마법 시전이 내면 묘사를 과장하나요? 무엇이 우선인가요? 아니면 양쪽이 변증법적인 관계를 맺고 서로 계속 영향을 미치나요?



[이 소설은 언어를 이용해 풍요로운 진수성찬을 차리고, 화려한 꽃송이들을 피우고, 울창한 삼림을 키웁니다.]



나오미 노빅에게 이런 의도가 없다고 해도, <업루티드>에서 마법 시전과 광범위한 내면 묘사 사이에는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작가 의도가 무엇이든, 독자는 내면 묘사가 마법 시전을 과장하거나, 그 반대거나, 양쪽이 변증법적 관계를 맺고 서로 계속 영향을 미친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정답이 무엇이든, 정답보다 이런 풍성한 묘사는 훨씬 중요할 겁니다. <업루티드>는 깊고 풍부합니다. 심지어 마법 시전 과정은 격정적인 섹스 욕구로 이어집니다. 마법 시전 과정이 감정을 깊고 광범위하게 울리고 자극하기 때문에, 두 마법사가 함께 마법을 시전하는 동안, 이건 격정적인 섹스 욕구로 이어집니다.


여기에서 독자는 다시 물을 수 있습니다. 마법 시전 과정이 섹스 욕구를 직접 만드나요? 아니면 이미 두 마법사가 섹스를 원했고, 마법 시전 과정이 이것을 자극하나요? 섹스를 아주 환상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나오미 노빅이 마법 시전을 동원하지 않나요? "와, 어젯밤 섹스는 정말 마법 같았어." 이건 비유입니다. 하지만 소설 <업루티드>에서 이건 비유가 아닙니다. 독자들이 다르게 해석한다고 해도, 소설 속에서 마법과 섹스 사이는 가깝습니다. 소설 <업루티드>에서 섹스와 마법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다. 소설로서 판타지로서 <업루티드>가 언어를 멋지고 아름답게 동원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업루티드>는 판타지와 소설을 연결합니다.



이건 나오미 노빅이 언어를 이용해 마법 시전 과정을 '정확하게' 묘사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마법은 비일상적입니다. 현실에는 마법이 없습니다. 나오미 노빅은 미국 영어를 동원합니다. 미국 영어가 비일상적인 마법 현상을 정말 제대로 표현할 수 있나요? 현실에 마법사가 없음에도, 나오미 노빅이 마법사 심리를 묘사할 수 있나요? 13세기 언어는 생체 우주선을 표현하지 못합니다. 13세기 인류 문명에서 아무도 생체 우주선을 표현하지 못합니다. 생체 우주선은 20세기 산업 문명 상상력입니다. 13세기 인류 문명에는 산업 발전이 없었고, 유전 공학을 비롯해 생명 과학 분야가 없었고, 그래서 13세기 사람들은 생체 우주선을 비롯해 생체 탈것들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13세기 사람들이 생체 우주선(과 비슷한 어떤 것)을 상상했다고 해도, 이것과 21세기 사이언스 픽션 속의 생체 우주선은 다릅니다. 사회가 달라질 때, 언어 역시 달라지고, 언어는 특정한 개념을 표현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현실 속의 서구 문명과 소설 <업루티드> 속의 중세 문명은 다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현실 속의 미국 영어가 소설 속의 마법을 설명할 수 있나요? 나오미 노빅이 소설 속의 마법을 '번역'했다고 해도, 이게 완전한 번역인가요? 번역은 제2의 창작에 가깝습니다. 나오미 노빅은 제1의 소설 작가보다 제2의 창작가에 가까운지 모릅니다. 아무리 나오미 노빅이 진수성찬 같은 풍성한 필력을 발휘했다고 해도, 결국 나오미 노빅은 제2의 창작가인지 모릅니다.



어떤 카발라 집단은 나중에 세상이 엄청나게 바뀌고 신이 어떻게 경전을 읽는지 가르칠 거라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경전을 읽을 수 있으나, 이건 충분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경전 속의 여백들은 뭔가를 의미하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것을 읽지 못하나, 신은 읽을지 모릅니다. 만약 <업루티드>에 어떤 마법 주문이 있고, 나오미 노빅이 그것을 '번역'했다고 해도, 우리와 소설 속의 마법사들은 주문을 다르게 외울지 모릅니다. SF 작가들과 판타지 작가들은 이런 문제에 부딪혀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문제를 풀기 위한 대안은…. 글쎄요, 대안이 존재할 수 있나요? 신이 강림하지 않는다면, 토라 해석자들은 무엇이 가장 올바른 읽기인지 알지 못할 겁니다. SF/판타지 독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소설 속의 마법사 역시 언어에 영향을 받을지 모릅니다. 소설 주인공 마법사가 마법을 시전하는 동안, 아름다운 꽃송이들은 피어납니다. 이건 환상적인 장면이나, 정말 이게 마법 시전 과정을 정확하게 묘사하나요? 소설 <해저 2만리>에서 노틸러스 승무원이 프랑스어로 "사람 살려!"라고 소리친 것처럼, 사고 방식과 언어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만약 이 승무원이 이집트 사람이었다면, 이 승무원은 프랑스어로 "사람 살려!"라고 외치지 않았을 겁니다. <업루티드>에서 주인공 마법사는 시골 소녀입니다. 시골 소녀가 마법을 시전했기 때문에, 주문 시전 과정이 꽃송이들이 되지 않았나요? 시골 소녀, 언어, 사고 방식, 마법 시전 사이에 아무 관계가 없나요? 환상적인 꽃송이들이 보편적인 시전 과정인가요?



"젠장, 수구 꼴통 정치인들은 개념을 안드로메다에 버렸을 거야." 이렇게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정말 수구 꼴통 정치인들은 개념을 안드로메다에 버린 것 같습니다. 수구 꼴통 정치인들에게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좀비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체계, 지배적인 관념이 그들을 세뇌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업루티드>에서 귀족 놈팽이들이 수구 꼴통 짓거리들을 저지른다고 해도, 주인공 마법사는 안드로메다를 운운하지 못할 겁니다. 주인공 마법사가 20세기 천문학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인공 마법사는 시골 소녀입니다. 한창 때의 소녀로서 소설 주인공은 예민한 감수성을 드러냅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시골 소녀에게 아름다운 꽃송이들은 가장 환상적인 장면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마법 시전 과정은 아름다운 꽃송이들인지 모릅니다. 결국 언어 활동은 비유이고, 주인공 마법사 소녀에게도 이건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시골 소녀와 환상적인 꽃송이 사이에는 아무 관계가 없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업루티드>는 언어를 이용해 주문 시전 과정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독자는 어떻게 언어가 주문 시전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지 의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인공 마법사 소녀가 마법 시전 과정을 풍부하게 묘사하고, 나오미 노빅이 이것을 '번역'한다고 해도, 이것은 충분하지 않은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런 한계 속에서 (섹스가 마법이 되는 것처럼) 나오미 노빅은 정말 훌륭하고 풍성한 필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래서 어슐라 르 귄은 마법 묘사가 정말 생생하다고 호평했을 겁니다.



만약 <업루티드>가 이런 묘사를 보여주지 않는다면, 독자는 어떻게 언어가 주문 시전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지 별로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업루티드>가 표면적인 행위들, 시각적인 측면들에 훨씬 치중한다면, 독자에게는 의심하기 위한 여지가 별로 없을 겁니다. 소설이 글자들을 가볍게 다룬다면, 독자 역시 그럴 겁니다. 그래서 모더니즘 작가들은 의도적으로 이상하고 어려운 문장들을 늘어놓습니다. (음, 솔직히 가끔 이런 시도는 삽질에 가깝습니다.) 독자는 모더니즘 소설을 (억지로) 읽고 언어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업루티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소설이 주문 시전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독자는 의심할 수 있습니다. 비록 나오미 노빅이 제2의 창작자에 가깝다고 해도, <업루티드>가 훌륭한 판타지 '소설'이기 때문에, 독자는 나오미 노빅이 제2의 창작자라고 인식할 수 있습니다.


비디오 게임 <네버윈터 나이츠 2>에서 까칠하기 짝이 없는 소서리스 콰라는 마법적인 기운이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비단 소서리스 콰라만 아니라 다양한 클래스들은 다양한 사상들을 설명합니다. <네버윈터 나이츠 2>는 상당한 대사들을 동원하나, 그렇다고 해도 <네버윈터 나이츠 2>는 비디오 게임입니다. 이런 비디오 게임은 언어를 이용해 풍요로운 진수성찬을 차리지 못하고 무성한 꽃송이들을 피우지 못합니다. 이건 비디오 게임보다 소설이 반드시 낫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건 소설과 비디오 게임에 고유한 특성들, 장점들이 있다는 뜻입니다. <업루티드>는 훌륭한 중세 판타지 '소설'이고, <네버윈터 나이츠 2>는 훌륭한 중세 판타지 '게임'입니다. 우리가 <업루티드>와 <네버윈터 나이츠 2>를 근본적으로 파악하고 싶다면, 우리는 형식 차이, 매체 차이를 파악해야 할 겁니다.



[나이트 엘프 드루이드 그림이 화려하고 멋지다고 해도, '서술'은 그림보다 글자 매체, 소설의 장점입니다.]



비록 <업루티드>가 중세 판타지 소설이라고 해도, SF 작가들 역시 <업루티드>를 참고할 수 있을 겁니다. 영화 <엑스맨>에서 스톰이 마법사와 다르지 않은 것처럼, 초능력과 마법사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적어도 초능력자와 마법사 사이에는 많은 유사성들이 있습니다. 만약 SF 작가가 초능력 발현 '느낌'을 자세히 서술하고 묘사하기 원한다면, <업루티드>는 좋은 참고 자료가 될 겁니다. 판타지 소설과 SF 소설 모두 '소설'이고, 소설은 언어를 동원해야 합니다. <업루티드>와 SF 초인 소설 사이에는 근본적인 공통점(비일상적인 능력과 글자 매체)이 있습니다. 이 게시글에서, 첫째 문단부터 일곱째 문단까지, 저는 SF 소설과 판타지 소설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언어와 감정 및 사고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초보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 게시글은 판타지 소설 감상문입니다. 왜 판타지 소설 감상문이 비단 판타지 설정만 아니라 언어를 함께 떠드나요? 판타지 소설이 '소설'이기 때문입니다. 매체 없이, 중세 판타지 설정은 존재할 수 있으나, 우리가 중세 판타지 설정을 논의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특정한 형식들(언어, 그림, 조각, 동영상, 음악, 기타 등등)을 동원해야 합니다. 판타지 '소설'로서 <업루티드>는 글자들을 동원합니다. 판타지 '소설'로서 <업루티드>는 글자들을 아주 훌륭하게 동원합니다.



※ 그림 <Druid from World of Warcraft> 출처: Dzikawa ❤,

https://www.artstation.com/artwork/NPkg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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