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소설 <상흔>과 다양한 문학 해석들 본문
모스라는 엄마 괴수입니다. 고지라, 킹 기도라, 안기라스, 에비라, 헤도라 같은 숱한 일본 특촬 거대 괴수들 중에서 모스라는 거의 유일하게 엄마 괴수입니다. 수컷 거대 괴수들이 치고 박고 싸우는 상황에서 모스라는 특별하게 엄마 괴수입니다. 그래서 모스라는 mothra일 겁니다. 영어 이름 mothra는 아주 중요합니다. 왜 이게 중요한가요? mothra가 엄마를 가리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mothra는 엄마를 가리키기 위한 아나그램인지 모릅니다. 여기에서 'moth'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ra'에서 'r'은 가장 끝으로 움직입니다. 'mothra'는 'mothar'가 됩니다.
여기에서 'a'가 뒤집힌다면, 'a'는 'e' 같을 겁니다. 'a'가 'e'가 된다면, 'mothar'는 'mother'가 됩니다. 오직 'a'와 'r'만 움직인다고 해도, 'mothra'는 'mother'가 될 수 있습니다. 포털 사이트에서 사람들이 mothra를 검색한다면, 포털 사이트 검색창은 자동 검색 기능으로 mothra와 mother를 함께 보여줄 겁니다. 이렇게 mothra와 mother 사이에는 커다란 유사성이 있습니다. 어쩌면 이런 아나그램 효과 때문에 영화 <모스라> 제작자들은 엄마 나방 괴수를 mothra라고 불렀는지 모릅니다. 영화 제작자들은 고지라와 안기라스와 킹콩 같은 수컷들과 달리 모스라가 엄마 괴수라고 강조하고 싶었을 겁니다.
만약 이렇게 옆동네 철수가 주장한다면, 이웃집 영희와 뒷동네 말자 할머니와 아랫집 수진이 이런 해석을 받아들일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이웃집 영희와 뒷동네 말자 할머니와 아랫집 수진은 옆동네 철수가 틀렸다고 지적할 겁니다. 철수는 다시 반박할 겁니다. 분명히 철수에게는 논리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mothra'에서 오직 'a'와 'r'만 움직인다면, mothra는 mother가 됩니다. 심지어 포털 사이트 검색창 역시 자동 완성 기능을 이용해 mothra와 mother를 함께 보여줍니다. 수두룩한 일본 특수 촬영 거대 괴수들은 수컷들입니다. 모스라는 기념비적인 엄마 괴수입니다.
모스라가 특수 촬영 영화보다 애니메이션이 되든, 비디오 게임이 되든, 대형 블록버스터가 되든, 엄마 괴수는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모스라는 비단 알만 낳지 않습니다. 엄마가 아기를 품는 것처럼, 모스라는 사람들을 품습니다. 가메라가 나오기 전에, 이미 모스라는 사람들을 품었습니다. 이렇게 모스라가 중요한 엄마 괴수이기 때문에, 영화 제작자들은 엄마 나방 괴수를 mothra라고 불렀을 겁니다. 여기에는 논리적인 오류가 없습니다. 분명히 옆동네 철수에게는 논리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이웃집 영희와 뒷동네 말자 할머니와 아랫집 수진 역시 옆동네 철수에게 논리적인 근거가 있다고 인정합니다.
만약 철수에게 논리적인 근거가 있다면, 왜 영희와 말자 할머니와 수진이 철수가 틀렸다고 생각하나요? 왜 철수가 mothra와 mother를 옳게 해석하지 못하나요? 이것보다 훨씬 간단하고 확실한 해석이 있기 때문입니다. 1954년 <고지라> 이후, 1961년 <모스라>는 개봉했습니다. 모스라는 고지라 이름을 모방했을 겁니다. 고지라가 gojira인 것처럼, 모스라는 'moth'와 'ra'를 합쳤을 겁니다. 사실 모스라 이외에 에비라, 헤도라, 킹 기도라 역시 비슷하게 이름들을 짓습니다. 이건 훨씬 논리적인 이유입니다. 옆동네 철수는 가설을 제안했으나, 철수의 가설보다 이건 훨씬 논리적인 설명입니다. 모스라 이외에 고지라, 에비라, 헤도라, 기도라가 비슷하게 이름들을 짓기 때문에, 옆동네 철수는 틀렸습니다.
게다가 아무리 모스라가 엄마 괴수라고 해도, 엄마 괴수가 중요한 특징이라고 해도, 고지라 및 모스라 시리즈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엄마, 모성을 별로 강조하지 않습니다. 고지라 및 모스라 시리즈는 가부장 사회를 자세하게 비판하지 않습니다. 등장인물들이 엄마, 모성을 별로 강조하지 않기 때문에, 고지라 및 모스라 시리즈 속에서 비판적인 시각이 부족하기 때문에, 'mothra'와 'mother' 사이에는 커다란 유사성이 없습니다. 옆동네 철수는 유사성이 있다고 생각하나, 이건 그저 우연에 불과합니다. 옆동네 철수는 그저 우연히 아나그램 효과를 착각했을 뿐입니다. 이런 유사성은 우연입니다. 그래서 영희와 말자 할머니와 수진은 철수에게 동의하지 않습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 역시 옆동네 철수에게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mothra'와 'mother' 해석은 다소 유치합니다. 이런 해석은 별로 진지하지 않습니다. 영희와 말자 할머니와 수진이 이런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은 이런 주장이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옆동네 철수가 우연이 유사성이라고 착각하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은 우연과 유사성을 헛갈립니다. 사람들이 뭔가를 해석할 때, 사람들은 우연과 유사성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우연이 유사성이라고 주장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여기에 반박할 테고, 이런 반박은 또 다른 반박에 부딪힐 테고, 계속 반박들은 늘어납니다.
이건 혼란스러운 싸움으로 치닿습니다. 결국 해석은 혼란스러운 싸움이 됩니다. 심지어 학술 회의장에서도 사람들은 혼란스러운 싸움을 구경할 수 있을 겁니다. 온갖 철학자들, 기호학자들, 언어학자들, 평론가들, 예술가들은 무엇이 올바른 해석인지 끊임없이 논의합니다. 어떤 사람은 텍스트 그 자체가 옳다고 믿고, 어떤 사람은 작가 의도를 중시하고, 어떤 사람은 작가보다 텍스트가 낫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독자에게 너무 커다란 권한을 줍니다. 이런 혼란스러운 싸움 속에서 사람들은 무엇이 올바른 해석인지 쉽게 납득하지 못할 겁니다. 심지어 이런 싸움은 그저 말장난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
스트루가츠키 형제는 <노변의 피크닉>을 썼습니다. 이 소설에서 외계인들은 지구를 방문합니다. 외계인들은 지구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떠납니다. 지구에는 오직 이상한 외계 물품들만 남습니다. 이것들은 인류 문명에 엄청난 영향을 미칩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왜 외계인들이 지구에 방문했나요? 왜 외계인들이 지구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았나요? 왜 그들이 오직 이상한 물품들만 남겼나요? 이런 물품들에 무슨 용도가 있나요? 아무도 대답을 알지 못합니다. 어떤 등장인물은 외계인들이 소풍을 왔고 쓰레기들을 치우지 않았을 거라고 추측합니다. 이건 그저 추측에 불과합니다. 이건 확실한 대답이 아닙니다.
독자가 확실한 대답을 알기 원한다고 해도, <노변의 피크닉>은 대답을 말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노변의 피크닉>에는 온갖 의문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스트루가츠키 형제조차 왜 외계인들이 이상한 물품들을 남겼는지 알지 못할지 모릅니다. 사무엘 베케트는 자신이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고도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중절모를 썼으나, 이것 이외에 다른 사항들은 알쏭달쏭합니다. 고도가 확실하지 않은 것처럼, <노변의 피크닉>에서 외계 물품들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독자들은 소설 <노변의 피크닉>을 읽고 수많은 해석들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어떤 독자는 불가해한 우주를 운운할 테고, 어떤 독자는 근대 문명이 인간을 억압한다고 설명할 테고, 어떤 독자는 자유 의지를 의심할 겁니다. <노변의 피크닉>이 의도적으로 자세한 대답을 회피하기 때문에, 독자들은 수많은 해석들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이런 해석들 중에서 무엇이 우연이고 무엇이 유사성인가요? 소설 <노변의 피크닉>이 정말 우주가 불가해하다고 주장하나요? 만약 이렇게 옆동네 철수가 해석한다면, 이런 해석에 문제가 없나요? 소설 속의 외계인들과 불가해한 우주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습니다.
외계인들이 머나먼 우주에서 왔기 때문에, 외계인들은 우주를 상징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태여 노래 <디비딥>을 듣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외계인이 우주를 상징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외계인을 만나기 원한다면, 노래 가사처럼, 우리가 디비딥 디비딥~♬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떠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외계인은 우주입니다. 소설 <노변의 피크닉>에서 외계인은 불가해합니다. 아무리 지구 과학자들이 노력한다고 해도, 지구 과학자들은 외계인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지구 과학자들이 외계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지구 과학자들은 우주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 인류 문명에게 우주는 너무 장대합니다.
소설 속에서 지구 과학자들이 외계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인류 문명에게 우주는 너무 장대합니다. 이렇게 옆동네 철수는 유사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만약 이렇게 옆동네 철수가 유사성을 찾는다면, 이게 올바른 유사성인가요, 아니면 그저 우연에 불과한가요? 옆동네 철수는 'mothra'와 'mother'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고 엉뚱하게 주장했으나, 분명히 <노변의 피크닉>과 불가해한 우주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습니다. 옆동네 철수는 틀리지 않을 겁니다. 비단 스트루가츠키 형제만 아니라 여러 SF 작가들은 우주가 장대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웃집 영희와 뒷동네 말자 할머니와 아랫집 수진은 다른 SF 작가들을 이용해 <노변의 피크닉>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영희와 말자 할머니와 수진은 철수가 틀리지 않다고 인정합니다. 영희와 철수와 말자 할머니와 수진은 계속 여러 소설들을 해석하고, 우연들을 지적하고, 유사성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낸시 크레스가 쓴 <스페인의 거지들>은 다른 도시들과 달리 코뮨들이 평화롭다고 이야기합니다. 공산주의(코뮤니즘)는 코뮨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그래서 <스페인의 거지들>과 공산주의 사이에 유사성이 있나요? <스페인의 거지들>이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비판하나요? 소설 속에서 코뮨이 무슨 사회인가요? 이게 그저 우연에 불과하지 않나요? 케이트 윌헬름이 쓴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는 공동체보다 개인주의를 강력하게 긍정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소설이 공동체를 부정하고 오직 개인만 강조하나요? 아니면 이 소설이 그저 복제 인간 이야기에 불과한가요? 만약 옆동네 철수가 <노래하던 새들도>와 개인주의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철수가 우연이 유사성이라고 착각하나요? 로이스 맥마스터 부졸드는 <마일즈의 전쟁>을 썼습니다. <마일즈의 전쟁>은 밀리터리 SF 소설입니다. <마일즈의 전쟁>은 전쟁을 이야기합니다. 전쟁은 가부장 문화입니다. 왜 여자 작가가 가부장 문화를 이야기하나요? 로이스 맥마스터 부졸드가 가부장적인 수구 세력인가요? 만약 이렇게 옆동네 철수가 주장한다면, 영희와 말자 할머니와 수진은 귀가 막히고 코가 막히고 입이 막힌다고 느낄 겁니다.
귀가 막히고 코가 막히고 입이 막히기 때문에, 수진은 제대로 반박하지 못할 겁니다. 옆동네 철수는 우스꽝스럽게 해석했으나, 정말 우연과 유사성을 구분하기가 쉬운가요? 옥타비아 버틀러는 <블러드 차일드>를 썼습니다. 옆동네 철수가 이 단편 소설이 노예 제도를 가리킨다고 해석한다면, 이게 우연인가요, 아니면 유사성인가요? 아랫집 수진은 <블러드 차일드>가 노예 제도보다 성 차별을 이야기한다고 주장합니다. 뒷동네 말자 할머니는 <블러드 차일드>가 비단 노예 제도와 성 차별만 아니라 다른 수많은 억압들과 세뇌들을 상징한다고 주장합니다.
만약 <블러드 차일드>가 노예 제도와 성 차별을 비롯해 다른 수많은 세뇌들을 상징한다면, <블러드 차일드>가 자본주의 체계를 상징할 수 있나요? 자본주의는 자신이 옳다고 사람들을 세뇌합니다. 사람들은 세뇌에 빠지고 자본주의가 반드시 옳다고 믿습니다. 아무리 자본주의가 인종 차별을 저지르고, 아무리 자본주의가 끔찍한 가부장 문화가 되고, 아무리 지질학적 단위에서 자본주의가 행성급 환경 오염을 일으킨다고 해도,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반드시 옳다고 믿습니다. 이런 맹목적인 믿음 앞에서 인종 차별과 성 폭행과 행성급 환경 오염은 부차적인 문제가 됩니다. 이런 광신 앞에서 모든 것은 부차적인 문제가 됩니다.
약자들이 저항한다고 해도, 이건 저항보다 테러가 됩니다. 민영화가 아이들을 굶겨죽임에도, 생산 수단 국유화는 미친 헛소리가 됩니다. 성 폭행들이 여자들을 억압한다고 해도, 여자들이 트라우마에 빠지고 정신병에 걸리고 미쳐버린다고 해도, 이건 그저 개인적인 문제들에 불과합니다. 어두운 골목길에서 여자들이 그림자들과 처절하게 숨바꼭질을 벌인다고 해도, 성 폭행들은 절대 사회 문제가 되지 못합니다. 자본주의 체계는 저항을 테러라고 왜곡하고, 민영화를 찬양하고, 생산 수단 국유화를 저주하고, 끔찍한 성 폭행들이 그저 개인적인 문제에 불과하다고 간주합니다. 19세기 이후, 자본주의는 가장 혐오스럽고 막강한 세뇌가 되었습니다. <블러드 차일드>가 이것을 지적할 수 있나요?
단편 소설 <블러드 차일드>에서 지구 사람들은 스스로 외계인들에게 복종합니다. 외계인들이 지구 사람들에게 피칠갑 고통을 준다고 해도, 지구 사람들은 스스로 외계인들에게 복종합니다. 이건 노예 근성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여자들이 가부장 문화를 숭배한다면, <블러드 차일드>는 이런 여자들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옥타비아 버틀러는 노예 제도와 가부장 문화를 비판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계는 어떤가요? 옥타비아 버틀러가 자본주의 체계를 비판하나요? <블러드 차일드>가 자본주의 체계를 비판하나요? 만약 <블러드 차일드>가 자본주의 체계를 비판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 단편 소설은 맹목적인 믿음을 비틉니다.
말자 할머니는 <블러드 차일드>에게서 주제(맹목적인 믿음)를 이끌어내고 이것을 다시 자본주의 체계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블러드 차일드>와 자본주의 광신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습니다. 이게 그저 우연에 불과한가요, 아니면 논리적인 유사성인가요? 말자 할머니가 우연이 논리적인 유사성이라고 착각했나요? 평소에 말자 할머니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적극적으로 비판합니다. 어쩌면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말자 할머니는 우연이 유사성이라고 빡빡 우기는지 모릅니다. 옥타비아 버틀러가 아주 유명한 SF 작가이기 때문에, 말자 할머니는 옥타비아 버틀러를 '이용'하기 원하는지 모릅니다.
이웃집 영희와 옆동네 철수와 뒷동네 말자 할머니와 아랫집 수진은 우연과 유사성을 구분해야 합니다. 동시에 영희와 철수와 말자 할머니와 수진은 유사성을 너무 확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킴 스탠리 로빈슨이 쓴 <오로라>는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이야기합니다. 첨단 과학 기술들이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설계하는 동안, 과학 기술들은 인공 생태계들을 배치하고 조성합니다. 비디오 게임 <심파크>는 생태계 시뮬레이션입니다. <심파크> 같은 생태계 시뮬레이션들은 자연 생태계를 배치하고 조성합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에서 과학자들이 식생들과 동물상을 조절하는 것처럼, <심파크>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식생들과 동물상을 조절합니다.
아랫집 수진은 소설 <오로라>와 게임 <심파크>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고 파악합니다. 아랫집 수진이 <오로라> 감상문을 쓰는 동안, 수진은 <심파크>를 비롯해 여러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들을 참고합니다. <심파크>에서 아랫집 수진이 자연 생태계를 직접 조성하기 때문에, 수진은 이런 특징을 소설 <오로라>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수진이 <심파크>를 참고하고 <오로라>를 평가하기 때문에, 옆동네 철수는 <오로라>와 <심파크>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심파크>를 비롯해 여러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들은 사이언스 픽션이 아닙니다. 아무리 수진이 <심파크>를 참고하고 <오로라>를 평가한다고 해도, 정말 <오로라>와 <심파크>가 비슷한가요?
이건 과잉 해석, 확대 해석입니다. 옆동네 철수는 과잉 해석, 확대 해석에 빠집니다. <오로라>를 설명하기 위해 수진이 <심파크>를 참고한다고 해도, 이건 <오로라>와 <심파크>가 비슷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참고는 그저 참고에 불과합니다. 옆동네 철수는 유사성을 확대하고 '참고(參考)'가 '일치(一致)'라고 착각합니다. 철수가 참고와 일치를 헛갈리기 때문에, 철수는 <오로라>와 <심파크>가 일치한다고 착각합니다. 참고서는 교과서가 아니나, 철수는 참고서가 교과서라고 헛갈립니다. <오로라>와 <심파크>는 쉬운 사례이나, 훨씬 어려운 사례들에서 사람들은 참고와 일치를 헛갈릴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교과서와 참고서를 구분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말자 할머니가 <블러드 차일드>를 이용해 자본주의 광신을 비판한다면, 이게 과잉 해석인가요, 아니면 논리적인 해석인가요? 분명히 <블러드 차일드>는 맹목적인 믿음을 비판합니다. 자본주의 체계는 맹목적인 믿음을 주입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블러드 차일드> 속의 맹목적인 믿음과 자본주의 체계가 비슷해질 수 있나요? 말자 할머니가 <블러드 차일드>를 이용해 자본주의 광신을 비판한다면, 이건 착각일지 모릅니다. 생태학 SF 소설 <오로라>와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 <심파크>가 다른 것처럼, 말자 할머니는 교과서와 참고서를 구분해야 합니다.
차이나 미에빌은 스팀펑크 판타지 <상흔>을 썼습니다. <상흔>에서 해적 선단 도시 아르마다는 뉴크로부존 선박을 기습하고 사람들을 납치합니다. 주연 등장인물 벨리스 콜드와인은 아르마다가 뉴크로부존 사람들을 납치했다고 비난합니다. 벨리스 콜드와인은 아르마다가 그저 해적 소굴에 불과하다고 비난합니다. 벨리스는 아르마다보다 뉴크로부존이 낫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뉴크로부존 선박에는 리메이드 노예들이 있었습니다. 뉴크로부존 선박은 노바 에스페리움으로 향하는 중이었습니다. 노바 에스페리움은 뉴크로부존의 식민지입니다.
노바 에스페리움은 끔찍한 식민지이고, 식민지에서 리메이드 노예들은 가혹한 운명에 부딪힐 겁니다. 아르마다는 노예 수송선을 기습했고 리메이드 노예들을 풀어줬습니다. 아르마다에서 리메이드들은 노예가 아닙니다. 그들은 시민입니다. 노예 족쇄에서 리메이드들이 풀려났기 때문에, 그들은 기뻐합니다. 리메이드 노예들과 달리, 벨리스 콜드와인은 노예가 아니었고, 그래서 벨리스 콜드와인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벨리스는 계속 아르마다를 비난합니다. 동물학자 요하네스 티어플라이는 벨리스 콜드와인을 비판합니다. 요하네스 티어플라이는 아르마다보다 뉴크로부존이 도적 떼거리라고 비판합니다. 뉴크로부존은 식민지 노바 에스페리움을 끔찍하게 수탈합니다.
노바 에스페리움에서 리메이드 노예들 역시 끔찍하게 수탈을 당합니다. 아르다마는 이것을 막았고, 그래서 요하네스 티어플라이는 아르마다를 변호합니다. 뉴크로부존을 비롯해 여러 국가들은 천민들, 난민들, 빈민들을 차별합니다. 아르마다는 천민들, 난민들, 빈민들을 받아줍니다. 이건 아르마다가 이상적인 천국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르마다는 추악하고 더럽고 지저분하고 비열합니다. 뉴크로부존이 더럽고 비열한 것처럼, 아르마다 역시 그렇습니다. 아르마다는 절대 천국이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히 아르마다는 천민들, 난민들, 빈민들을 받아줍니다. 아르마다에서 리메이드들은 노예가 아닙니다.
시민으로서 그들은 사회 구성원이 됩니다. 벨리스 콜드와인은 반박하기 원하나, 벨리스는 요하네스 티어플라이에게 반박하지 못합니다. 벨리스 역시 노예 해방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르마다, 노예 해방, 뉴크로부존, 노바 에스페리움, 식민지 수탈, 노예 수송선. 소설 <상흔>은 이런 것들을 이용해 19세기 식민지 수탈을 비판하는 것 같습니다. <상흔>이 스팀펑크 판타지이고 19세기 서구 산업 문명에 기반하기 때문에, 아르마다와 뉴크로부존과 노바 에스페리움은 자본주의와 식민지 수탈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서구 자본주의가 식민지들을 수탈했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부유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갑자기 하늘에서 부유한 서구 자본주의가 뚝 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부유한 서구 자본주의를 맹목적으로 부러워합니다. 그들은 어떻게 서구 자본주의가 부를 얻었는지 절대 상관하지 않습니다. 서구 자본주의가 열대 밀림을 파괴하고, 야생 동물들을 멸종시키고, 대기와 토지와 수질을 오염시킨다고 해도, 사람들은 이런 사실들에 상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뉴크로부존이 노바 에스페리움을 끔찍하게 수탈하는 것처럼, 서구 자본주의는 식민지들을 끔찍하게 수탈했습니다. 그래서 서구 자본주의는 부유합니다. 식민지 독립 운동들은 서구 자본주의에게 저항하기 원했으나, 서구 자본주의는 식민지 독립 운동들을 폭력적으로 짓밟았습니다.
독립 운동들은 폭력적으로 저항하고, 서구 자본주의는 훨씬 폭력적으로 짓밟고, 독립 운동들은 다시 폭력적으로 저항합니다. 수탈과 저항은 폭력적인 악순환이 됩니다. 이건 그저 제3세계 이야기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미국이 조선 독립 운동가들을 탄압했기 때문에, 북한은 미국에게 저항합니다. 미국 제국주의는 북한을 봉쇄하고, 북한은 몰락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북한은 그 모양 그 꼬락서니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남한 사람들은 미국을 칭송하고 북한을 경멸합니다. 북한이 제국주의에 선구적으로 저항했기 때문에, 북한은 몰락했습니다. 많은 남한 사람들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남한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반드시 옳다고 맹목적으로 믿습니다.
영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에서 학교 일진 플래시 톰슨은 어떤 학생을 괴롭힙니다. 주변 학생들은 플래시 톰슨을 나무라지 않습니다. 다들 웃고 떠들고 박수를 칩니다. 플래시 톰슨이 약한 학생을 괴롭힌다고 해도, 이건 그저 서커스에 불과합니다. 학생들 중에서 유일하게 피터 파커는 플래시 톰슨을 지적합니다. 그래서 플래시 톰슨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오히려 플래시 톰슨은 피터 파커의 죽빵을 날립니다. 피터 파커는 신나게 얻어터집니다. 피터 파커는 정말 묵사발이 됩니다. 만약 그웬 스테이시가 말리지 않았다면, 피터 파커는 거미남보다 묵사발남이 되었을 겁니다.
다행히 이것 때문에 그웬 스테이시는 피터 파커에게 호감을 보이고, 나중에 두 사람은 연인으로 승화합니다. (훤칠한 앤드류 가필드는 찌질이 피터 파커보다 10대 로맨스 영화의 서브 남주 같습니다.) 하지만 이건 그저 영화에 불과합니다. 현실은 훨씬 참담합니다. 현실은 <어메이징 스파이더맨>보다 전아리 작가가 쓴 10대 소설 <한 달 간의 사랑>에 가깝습니다. 만약 찐따가 일진에게 덤빈다면, 일진은 찐따를 절반쯤 죽여놓을 겁니다. 찐따는 왕따가 될 테고, 온갖 수모들을 받을 테고,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을지 모릅니다. 마오쩌둥이 지적한 것처럼, 저항은 절대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은 저항이 낭만적이라고 믿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현실이 소설 <한 달 간의 사랑>보다 영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낭만적이지 않은 저항, 폭력적인 저항, 처절한 저항을 비난합니다. 사람들은 게거품을 물고 이런 저항들을 비난합니다. 사람들은 저항을 비난하고 강자, 권력자, 지배 계급을 편듭니다. 자본주의 체계는 이런 망상들을 계속 주입합니다. 이런 망상들이 저항을 원천봉쇄하기 때문입니다.
제3세계 독립 운동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는 제3세계 독립 운동을 대표하나, 체 게바라는 끔찍한 폭력들을 휘둘렀습니다.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는 낭만적인 혁명가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체 게바라가 잔인한 독재자라고 말합니다. 이런 비판은 틀리지 않습니다. 분명히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는 잔인한 독재자에 가깝습니다. 문제는 미국 제국주의가 너무 막강하다는 사실입니다. 체 게바라를 비롯해 사회주의 세력은 미국 제국주의에 격렬하게 저항해야 했고, 이건 폭력적인 악순환에 빠집니다. 끔찍한 탄압과 수탈 속에서 저항은 폭력적인 악순환에 빠집니다.
우리가 이런 악순환을 끊고 싶다면, 우리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해야 합니다. 그건 서구 자본주의와 식민지 수탈입니다. 이미 17세기부터 서구 자본주의는 식민지들을 수탈했습니다. 그때 사회주의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서구 자본주의가 수탈했기 때문에, 19세기 중반 이후, '나중에' 사회주의는 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이런 근본적인 문제를 인식한다면, 우리는 폭력적인 악순환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소설 <상흔>은 이런 근본적인 문제, 식민지 수탈을 지적하는 것 같습니다. 아랫집 수진은 <상흔>이 식민지 수탈을 지적한다고 해석합니다. 이게 논리적인 해석인가요?
뉴크로부존과 노바 에스페리움, 서구 자본주의와 남아메리카 식민지 사이에 유사성이 있나요? 아랫집 수진은 두 가지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고 판단합니다. 하지만 이게 그저 착각에 불과하지 않나요? 이게 그저 과잉 해석에 불과하지 않나요? 아랫집 수진은 <상흔>이 서구 자본주의를 비판한다고 해석하나, 이건 착각과 과잉 해석인지 모릅니다. 차이나 미에빌은 그저 노예 제도를 비판하기 원했는지 모릅니다. 차이나 미에빌은 서구 자본주의와 식민지 수탈을 인식하지 못했는지 모릅니다. 만약 차이나 미에빌이 서구 자본주의와 식민지 수탈을 인식하지 못했다면, 차이나 미에빌이 오직 노예 문제만 비판하기 원했다면, 아랫집 수진은 <상흔>을 이용해 서구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못할 겁니다.
아니, 잠깐. 차이나 미에빌이 서구 자본주의를 인식하지 못했다고 해도, 정말 아랫집 수진이 <상흔>과 서구 자본주의 문제를 연결하지 못하나요? 분명히 두 가지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습니다. 분명히 뉴크로부존과 노바 에스페리움, 서구 자본주의와 남아메리카 식민지 사이에 유사성이 있습니다. 비록 뉴크로부존과 노바 에스페리움이 직접 서구 자본주의를 까지 않는다고 해도, 차이나 미에빌이 악랄한 자본주의 시장 경제와 식민지 수탈 문제를 인식하지 못한다고 해도, 아랫집 수진은 <상흔>에서 주제(밑바닥 계급)를 이끌어내고 이것을 서구 자본주의 문제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아랫집 수진은 유사성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건 과잉 해석이 아닐 겁니다.
이렇게 아랫집 수진이 유사성을 이용한다면, 이웃집 영희와 옆동네 철수와 뒷동네 말자 할머니 역시 유사성을 이용할 겁니다. 리메이드 노예들은 오직 식민지 수탈만 상징하지 않습니다. 어떤 리메이드 노예들은 생체 개조를 거쳤습니다. 이웃집 영희는 유전 공학을 비판합니다. 어떤 리메이드 노예들은 사이보그입니다. 말자 할머니는 인간이 기계화한다고 해석합니다. 어떤 리메이드는 인간과 대구와 양서류를 합치고 양서 인간이 됩니다. 이런 설정은 알렉산드르 벨야예프가 쓴 <물고기 인간>과 비슷합니다. 러시아 제목은 <Человек-амфибия>이고, 이건 '양서 인간'을 가리킵니다. 옆동네 철수는 차이나 미에빌이 <물고기 인간>을 오마쥬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상흔>이 <물고기 인간>을 오마쥬하나요? <상흔>과 <물고기 인간>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고 해도, 이게 정말 오마쥬인가요? 어쩌면 <상흔>은 <물고기 인간>보다 <모로 박사의 섬>에 가까운지 모릅니다. 영희와 철수와 말자 할머니와 수진은 <상흔>의 양서 인간이 <물고기 인간>의 양서 인간을 오마쥬하는지 다시 논의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문학 해석들은 수많은 논의들을 거칩니다. 그래서 문학 비평은 재미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