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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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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 판타지/스팀펑크, 사이언스 판타지

스팀펑크가 검마 판타지에 들어간다면

OneTiger 2017. 9. 3. 20:00

[게임 <메일스트롬>의 한 장면. 이런 증기 함선은 마법보다 색다른 분위기를 풍길 수 있겠죠.]



여기 검마 판타지 소설 속에 일련의 모험가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어느 어촌에 들렸고, 이상한 사교를 발견했습니다. 사교는 주민들을 홀리고 산 제물을 바치는 중이었죠. 사실 거대하고 교활한 크라켄이 어촌에 정신적 영향을 미치는 중이었고, 사교는 그런 크라켄을 섬기는 중이었습니다. 모험가 일행은 사교도들을 처치했으나, 아직 부족합니다. 여전히 거대한 악은 저 심연에서 꿈틀거리고, 모험가 일행은 그 악을 처치해야 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깊고 깊은 바닷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어떻게?


만약 이 모험가 일행이 해적 무리를 습격하기 원한다면, 범선을 타고 대해를 돌아다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해적과 크라켄은 다르죠. 모험가 일행은 크라켄이 머무는 해저 동굴로 내려가야 합니다. 알프레드 테니슨이 쓴 것처럼 그 교활한 바다 악마는 거대한 동굴 속에 거주하기 때문입니다. 마침 어느 어부가 해안 도시의 기계 공학자를 소개합니다. 이 기계 공학자에게 잠수함이 있습니다. 모험가 일행은 그 공학자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잠수함을 빌립니다. 그리고 크라켄을 처치하기 위해 잠수합니다.



이런 잠수함 모험은 일반적인 검마 판타지의 모험과 다를지 모릅니다. 차라리 하워드 러브크래프트의 <인스머스의 그림자>나 차이나 미에빌의 <크라켄>과 비슷하죠. 하지만 검마 판타지에는 엄연히 크라켄이나 사교도 같은 설정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잠수함(!)이나 기계 공학(!) 같은 설정도 있겠죠. 아, 물론 이런 것들은 검마 판타지만의 설정이 아닙니다. 사실 검마 판타지는 스팀펑크에게서 이런 설정들을 빌립니다. 검마 판타지에는 다채로운 마법이 있으나, 때때로 판타지 창작가들은 마법만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아니면 마법을 남발하기 싫기 때문에 뭔가 대안을 찾는지 모르죠.


하지만 검마 판타지 속에 현대의 디젤 잠수함이나 핵 잠수함을 집어넣지 못할 노릇입니다. 그런 현대적인 장비들은 고즈넉한 검마 판타지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창작가들은 다소 구닥다리 장비를 빌려야 합니다. 현대 잠수함들과 달리 스팀펑크의 투박한 잠수함들은 검마 판타지의 분위기에 그럭저럭 어울릴 겁니다. 아니, 어쩌면 누군가는 스팀펑크가 이질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검마 판타지와 스팀펑크의 조합은 드물지 않죠.



검마 판타지와 스팀펑크의 조합은 정말 어울리지 않는 한쌍일까요. 스페이스 오페라가 각종 과학 기술과 장비들을 동원하는 것과 달리, 검마 판타지는 마법이나 주문, 괴수들에게만 매달려야 할까요. 어쩌면 저 이야기 속에서 모험가 일행은 잠수함을 타지 말아야 할지 모릅니다. 잠수함은 너무 위화감을 조성할지 모릅니다. 장검과 화살과 로브와 갑옷과 수레와 마차. 이런 것들과 잠수함은 별로 어울리지 않는 조합일지 모릅니다. 설사 그게 구닥다리 잠수함이라고 해도 이런 기계 공학은 검마 판타지의 세계에 영원히 들어가지 못할지 모릅니다.


어쩌면 그래서 앤 매카프리나 잭 밴스, 어슐라 르 귄, 프랭크 허버트는 우주를 이야기했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판타지 같은 이야기를 전개했으나 우주를 이야기했습니다. 다들 위화감을 피하고 싶었는지 모르죠. 아무리 스페이스 오페라가 우주 활극이라는 비판을 받는다고 해도 적어도 스페이스 오페라는 각종 과학 기술과 장비들을 동원할 수 있어요. 스페이스 오페라에 잠수함이 등장한다면, 그건 별로 위화감이 들지 않을 겁니다. 보행 전차, 인공 지능, 컴퓨터, 사진기, 기타 등등.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겠죠.



만약 판타지를 쓰고 싶은 작가가 각종 기계 공학적 기술을 활용하기 원한다면…. 스페이스 오페라가 정답일지 모릅니다. 검마 판타지에서 모험가 일행이 던전 풍경을 종이에 일일이 그린다면, 그건 자연스러운 장면일 겁니다. 하지만 던전 풍경을 사진기로 찰칵 찍는다면, 그건 상당히 어색한 장면이 될 겁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우주선 승무원들이 행성 풍경을 사진기로 찰칵 찍는다면, 그건 상당히 자연스러운 장면이겠죠. 하지만 개인적으로 모험가 일행이 사진을 찍거나 잠수함을 타는 이야기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저는 그런 이야기가 좋다고 생각합니다. 기계 공학적 기술을 이용해 검마 판타지에서 새로운 주제나 설정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단 잠수함 같은 기계 공학만 아니라 개조 동물 같은 유전 공학도 고려할 수 있겠죠. <시리우스>나 <모로 박사의 섬> 같은 소설들이 개조 동물을 고민한 것처럼 검마 판타지 역시 그럴 수 있을 겁니다. 만약 검마 판타지가 이런 유전 공학과 결합한다면, 분위기나 주제가 크게 바뀌겠죠. 창작가는 그런 조합을 이용해 뭔가 새롭고 낯선 요소를 뽑아낼 수 있을 겁니다. 그것 역시 재미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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