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스페이스 오페라가 할 수 있다면, 검마 판타지 역시 할 수 있다 본문
[이런 그림처럼, 중세 판타지의 스팀펑크는 화려한 공중 함선 전투를 펼칠 수 있을 겁니다.]
종종 하드 SF 독자들은 스페이스 오페라를 스페이스 판타지라고 비꼬곤 합니다. 사실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용어 자체가 조롱을 담았죠. 스페이스 오페라는 SF 소설의 과학적 고증보다 상상력만을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기 SF 비평가들은 이 장르를 신나게 씹었습니다. 하지만 스페이스 오페라는 어마어마한 인기를 자랑했고, 시장의 많은 부분을 독차지했어요. 스페이스 오페라를 뺀다면, 아마 SF 소설 시장이 꽤나 작아졌을지 모릅니다.
물론 스페이스 오페라가 무조건 유치하거나 단순하다는 생각은 커다란 오해입니다. 이 장르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것만큼 여러 변화를 거쳤습니다. 이안 뱅크스, 피터 해밀튼, 댄 시몬스 같은 작가는 스페이스 오페라를 중후장대한 장르로 발전시켰고, 이런 흐름은 최근의 <사소한 정의>나 <익스펜더스> 같은 소설까지 이어졌습니다. 이런 소설을 보고 유치하다거나 단순하다고 말하는 독자는 없을 겁니다. 사실 이안 뱅크스나 댄 시몬스 같은 작가는 워낙 광대한 상상력을 펼치기 때문에 독자가 그걸 일일이 따라가기 벅찹니다. 어떤 독자는 <대수학자> 같은 책을 읽기 어렵다고 불평하죠.
그렇다고 해서 스페이스 오페라가 (과학적 고증이 아니라) 상상력의 장르라는 점은 바뀌지 않습니다. 사이언스 픽션 모두가 상상력의 장르지만, 스페이스 오페라나 슈퍼 히어로 장르에서 그런 특징이 유독 두드러집니다. 이런 장르들은 당대의 과학 혁명을 반영하는 것보다 영웅 신화나 고대 전설에서 출발했기 때문일 겁니다. 흔한 스페이스 오페라는 당대의 과학 혁명이나 패러다임에 별로 관심이 없고, 그보다 영웅적인 일대기나 기괴한 모험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런 관점에서 스페이스 오페라는 검마 판타지와 많이 닮았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스페이스 오페라를 내놓는다면, 판타지는 검마 판타지를 내놓을 수 있겠죠.
스페이스 오페라와 검마 판타지는 양쪽 세계에서 가장 큰 인기를 자랑하고, 장르의 대표 주자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검마 판타지와 서사 판타지는 서로 다르지만, 이 글에서는 그 두 가지를 뭉뚱그리겠습니다.) 두 장르는 각각 미래(우주 시대)와 과거(중세 유럽)를 논하지만, 기술력이나 사상의 차이는 별로 없을 겁니다. 스페이스 오페라가 뭔가를 할 수 있다면, 검마 판타지 역시 그걸 할 수 있습니다. 스페이스 오페라가 할 수 있는 것을 검마 판타지 역시 할 수 있습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병사들이 기관총을 쏜다고요? 검마 판타지의 병사들도 연발 쇠뇌를 쏠 수 있습니다.
연발 쇠뇌는 기관총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작가가 마음만 먹는다면, 드워프 연발 쇠뇌가 기관총보다 더 무시무시한 무기가 될지 모릅니다. 누군가는 검마 판타지에서 항공 전력이 없다고 비판할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검마 판타지의 장인들은 비행선을 만들곤 합니다. 종종 이런 비행선은 공중 전함(!)으로 발전하죠. 오오, 공중 전함…. 거대한 기낭을 매달고 하늘을 누비는 구축함이나 검은 연기를 푹푹 뿜어내는 공중 전함은 검마 판타지에서 그리 드문 설정이 아닙니다.
물론 이런 설정들은 스팀펑크의 영역이나, 검마 판타지는 거리낌 없이 스팀펑크에서 각종 설정을 빌려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검마 판타지는 로봇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오토마톤이나 아이언 골렘, 호문쿨루스가 그런 사례입니다. 검마 판타지의 아이언 골렘은 스페이스 오페라의 인간형 로봇과 다르지 않아요.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인공 지능이 로봇을 조종하는 것처럼 검마 판타지에서 인공 자아가 골렘을 조종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인공 자아는 마법 장검이나 마법 갑옷에 들어갈 수 있고요. <드래곤 라자>에 나오는 그 마법 장검의 자아는 인공 지능과 마찬가지죠.
스페이스 오페라의 우주선들이 함대전을 펼치는 것처럼 검마 판타지의 비행선 편대들도 함대전을 펼칠 수 있습니다. 우주 구축함들이 어뢰와 미사일과 빔을 날리는 것처럼 전투 비행선들도 대형 화살과 포탄과 마법을 날릴 수 있고요. 전투 비행선들의 싸움은 우주 구축함들의 싸움보다 훨씬 치열하고 화려할지 몰라요. 만약 드래곤이나 그리폰이 이런 함대전에 끼어든다면, 교전의 양상은 훨씬 복잡하고 다채로워지겠죠. 우주 구축함에서 우주 전투기가 출격하는 것처럼 전투 비행선은 자이로콥터를 날릴지 모릅니다. 뭐, 이렇게 비교를 한다면, 밑도 끝도 없을 것 같군요.
그렇다고 해서 스페이스 오페라와 검마 판타지의 감수성이 완전히 똑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무리 스페이스 오페라가 우주 판타지라고 해도 결국 SF 울타리 안에 있기 때문이죠. 스페이스 오페라는 기술적 진보와 우주를 향한 동경을 담을 수 있어요. 형식적인 측면에서 스페이스 오페라는 검마 판타지보다 자유롭고요. 그래서 검마 판타지는 톨킨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비판을 듣죠. 검마 판타지에는 이안 뱅크스 같은 작가가 없을 겁니다.
스페이스 오페라가 검마 판타지보다 낫다는 뜻은 아닙니다. 비판을 받는다고 해도 검마 판타지에는 검마 판타지만의 재미가 있습니다. 양쪽이 완전히 똑같다는 뜻도 아니고요. 저는 그저 그 두 가지를 비교하는 게 재미있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개인적으로 검마 판타지와 스팀펑크의 독특한 조합을 좋아합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와 검마 판타지를 비교하면, 검마 판타지의 스팀펑크 요소가 좀 더 분명하게 눈에 들어와요.
※ 이미지 출처: https://www.deviantart.com/real-sonkes/art/Sky-Battle-II-6434142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