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SF 생태주의

수경 재배 실험실 그림을 둘러싼 여러 요소들 본문

감상, 분류, 규정/자연과 문명

수경 재배 실험실 그림을 둘러싼 여러 요소들

OneTiger 2019. 5. 3. 21:10


※ 이미지 출처: Oliver Guiney, https://www.artstation.com/artwork/JgYGn



위 그림은 우주 수경 재배를 보여줍니다. 우주 수경 재배에는 여러 목적들이 있습니다. 만약 장거리 우주선에서 승무원들이 식물들을 기를 수 있다면, 식물들은 식량들을 공급할 수 있을 겁니다. 우주선 창고에 다른 식량들이 있다고 해도, 수경 재배는 신선한 먹거리들을 추가할 수 있을 겁니다. 넓은 수경 재배 구역에서 식물들이 충분한 산소를 뿜는다면, 수경 재배 구역은 산소 공급 공장이 되고, 우주선 승무원들은 숨쉴 수 있을 겁니다. 수경 재배 구역은 비단 농장만 아니라 산소 공급 공장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 우주 탐사물들과 스페이스 오페라들에서 수경 재배 구역은 식량 공급과 산소 공급을 담당합니다.


수경 재배 구역에서 우주선 승무원들은 싱그러운 녹색과 생생한 생명력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장거리 우주선은 삭막할 겁니다. 사방에는 오직 기계들뿐일 겁니다. 장거리 우주선에서 싱그러운 자연을 찾기는 어려울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수경 재배 구역은 생생한 녹색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우주선 승무원들은 수경 재배 구역이 신선한 공원이나 정원이라고 느낄지 모릅니다. 영화 <에일리언 2>에서 사람들은 일부러 녹색 식물들 홀로그램을 관람합니다. 삭막한 우주 기지에서 사람들은 싱그러운 녹색 식물을 찾습니다. 홀로그램 영화보다 수경 재배 구역은 훨씬 현실적입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수경 재배 구역은 커다란 관심을 끕니다. 과학자들은 우주 수경 재배가 가능한지 실험하고, 화가들 역시 다양한 상상도들을 그립니다. 포털 사이트에서 인터넷 유저들이 우주 수경 재배를 검색한다면, 인터넷 유저들은 다양한 수경 재배 상상도들을 구경할 수 있을 겁니다.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들 역시 식물 재배 구역들을 빼놓지 않습니다. 비디오 게임 <스테이시스>에서 게임 주인공 존 마라첵은 정체 불명의 우주선 속을 방황합니다. 우주선에는 여러 구역들이 있고, 그것들 중에는 식물 재배 구역이 있습니다. 테아라는 식물학자는 여기가 싱그럽고 풍성하고 생태적이라고 좋아합니다.


물론 <스테이시스>는 우주 공포 게임이고, 식물 재배 구역은 별로 아름답지 않습니다. 식물들은 기괴하게 성장했고 곳곳을 뒤덮었습니다. 아무리 풍요로운 번성이 생명 현상의 미덕이라고 해도, 여기는 풍요로운 자연보다 기이한 비경 밀림에 가깝습니다. 이상한 생명체와 벌레들이 있기 때문에, 기이한 밀림은 존 마라첵을 죽일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분명히 식물 재배 구역은 독특합니다. 거대한 우주선과 기이한 밀림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첨단 우주선에는 각종 기계 장치들이 어울립니다. 기이한 밀림은 첨단 우주선보다 19세기 비경 탐험이나 외계 식생 탐험이나 공룡 이야기에 어울립니다.



하지만 <스테이시스>는 거대한 우주선 안에 기이한 밀림이 있다고 묘사합니다. 이건 꽤나 독특한 조합입니다. 그래서 식물 재배 구역은 인상적입니다. 사람들은 첨단 우주선과 기계 장치들을 쉽게 연결합니다. 사람들은 식물 재배가 대단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시골 마을에서 나이든 할머니 역시 얼마든지 텃밭을 가꿀 수 있습니다. 식물 재배가 대단합니까? 감히 식물 재배 따위가 첨단 우주선에 비빌 수 있습니까? 그래서 첨단 우주선과 식물 재배 구역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게임 <스테이시스>를 비롯해 여러 우주 탐사물들과 스페이스 오페라들은 우주 주거지에 식물 재배 구역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이런 생태적인 상상력들은 첨단 시설들과 녹색 식물들을 함께 보여줍니다. 어쩌면 어떤 SF 작가들은 이걸 바이오 돔이라고 부를지 모릅니다. 식물 재배 구역이 반구 형태가 아니라고 해도, 첨단 시설들 속에서 녹색 식물들이 자라기 때문에, SF 작가들은 이것을 바이오 돔이라고 부를지 모릅니다. 바이오 돔에는 인공 생태계가 있어야 합니다. SF 작가들이 이런 식물 재배 구역을 바이오 돔이라고 부른다고 해도, 식물 재배 구역이 인공 생태계에 속할 수 있나요? 식물 재배 구역이 인공 생태계인가요? 소설 <위기의 지구 돔을 구하라>가 보여주는 것처럼, 첨단 건물 속에 살아있는 상호 작용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이 인공 생태계라고 말할 수 있어요.



하지만 식물 재배 구역에 살아있는 상호 작용이 있나요? 사람들이 '생태계'라는 단어를 들을 때, 사람들은 먹이 그물망을 머릿속에 떠올릴 겁니다. 식물은 햇빛과 물과 기름진 토양을 이용해 영양분을 만듭니다. 식물(속의 광합성 요소들)은 생산자입니다. 초식동물은 식물을 먹습니다. 육식동물은 초식동물을 잡아먹습니다. 식물과 동물이 죽는다면, 미생물들과 균류는 식물과 동물을 분해할 겁니다. 사람들은 이런 먹이 그물망이 생태계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먹이 그물망에서 폭력과 죽음을 분리하고 오직 피에 물든 이빨만이 자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연이 적자생존, 약육강식, 끊임없이 전쟁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수많은 생명체들은 끊임없이 투쟁합니다. 자연 생태계는 정말 전쟁터입니다.


하지만 끊임없는 전쟁은 살아있는 상호 작용의 전부가 아닙니다. 미니어처 게임 <워해머 40K>는 "There is Only War!"라고 외치나, 끊임없는 전쟁은 자연 생태계를 대표하지 못합니다. 왜 생명 현상이 신비하고 아름다운가요? 생명 현상이 특정한 화학 질서를 구축하고, 의도적으로 움직이고, 번성하기 때문입니다. 생명 현상은 번성합니다. 끊임없는 전쟁 뒤에는 번성이라는 본질적인 현상이 있습니다. 번성하기 위해 생명 현상이 끊임없이 싸움에도, 사람들이 번성보다 전쟁을 우선시한다면, 이건 오류일 겁니다. 이런 오류는 자연 생태계를 근본적으로 파악하지 못해요. 이런 오류는 그저 자연 생태계를 이용해 싸움박질을 즐기고 싶어할 뿐입니다.



[이런 거대한 바이오 돔 생태계가 수경 재배 실험실과 함께 인공 생태계가 될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해도 우주선 속의 수경 재배 구역에 먹이 그물망은 없습니다. 밀림 속에서 나무는 영양분을 생산하고, 사슴은 나뭇잎을 뜯어먹고, 호랑이는 사슴을 사냥하고, 버섯은 죽은 호랑이를 분해합니다. 이건 서클 오브 라이프, 자연의 섭리입니다. 수경 재배 구역에는 이런 자연의 섭리가 없습니다. 수경 재배 구역에는 호랑이가 없습니다. (사자 역시 없습니다.) 하지만 가시적인 먹이 그물망이 없다고 해도, 분명히 수경 재배 구역에는 살아있는 상호 작용이 있습니다. 적어도 여기에는 생명 현상이 있습니다. 수경 재배 구역에서 식물들은 빛과 물과 다른 것들을 이용해 광합성하고 열매들을 맺습니다. 따라서 이건 인공 생태계가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이오스피어 건물과 달리 수경 재배 구역이 인공 생태계가 아니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비록 수경 재배 구역이 인공 생태계가 아니라고 해도, 수경 재배 구역은 생태적인 상상력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생태적인 상상력에는 외계 식생, 테라포밍, 바이오스피어 건물, 개조 생명체, 생체 우주선, 거대 괴수, 기후 변화를 비롯해 환경 오염들, 친환경 에너지, 삼림 건물, 기타 등등이 있습니다. 수경 재배 구역은 이런 것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거에요. 게임 <스테이시스>가 개조 생명체와 돌연변이 괴물과 (기이한 밀림 같은) 수경 재배 구역을 함께 보여주는 것처럼, 수경 재배 구역은 다른 생태적인 상상력들과 어울릴 수 있습니다.



본문 위의 수경 재배 실험실 그림은 하드 SF에 가깝습니다. SF 팬들은 이 그림이 하드 SF에 가깝다고 생각할 겁니다. 어슐라 르 귄이나 옥타비아 버틀러나 반다나 싱은 이런 것을 이야기하지 않을 겁니다. 어슐라 르 귄은 수경 재배 실험실보다 평화롭고 웅장한 외계 식생을 이야기하고 싶어할 겁니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기이하고 지성적인 외계 식물을 이야기하고 싶어할 겁니다. 반다나 싱은 어떻게 유전자 조작 실험이 수경 재배를 기이하게 바꾸는지 이야기하고 싶어할 겁니다. 킴 스탠리 로빈슨 같은 하드 SF 작가에게 수경 재배 실험실은 어울릴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비디오 게임 <산소 미포함 Oxygen Not Included>이 수경 재배 농장을 보여주는 것처럼, 수경 재배 구역은 반드시 하드 SF 작가의 전유물이 아닐 겁니다.


사실 <산소 미포함>은 하드 SF보다 코믹 SF에 가깝습니다. <산소 미포함>은 진지한 그림체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스페이스 오페라가 사이언스 판타지에 가까운 것처럼, 과학자들이 진지하게 수경 재배 구역을 실험한다고 해도, 창작물은 현실을 다르게 반영할 수 있습니다. 만약 중세 판타지 게임 속에서 드루이드가 식물들을 심고 키우고 관리한다고 해도, 이런 게임은 <산소 미포함>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길지 모릅니다. <산소 미포함>과 드루이드 게임 모두 생태계에 상상력을 덧붙입니다. 사실 창작물이 언제나 현실 그 자체를 반영한다면, 사람들은 창작물을 만들지 않을 겁니다. 이미 현실이 존재함에도, 왜 우리가 현실을 또 다시 만들어야 하나요? 창작물은 특정한 표현 방법으로 현실이 아니라 현실과 비슷한 뭔가를 만듭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수경 재배 그 자체를 말하지 않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수경 재배 실험을 이용해 다른 뭔가를 표현합니다. 본문 위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화가는 그림체를 고민했을 겁니다. 화가는 무슨 그림체가 수경 재배 실험에 어울리는지 고민했을 겁니다. 만약 사람들이 진짜 수경 재배 실험실보다 위 그림을 훨씬 좋아한다면, 사람들은 수경 재배 그 자체보다 그림이 선사하는 그림체, 분위기, 주제를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수경 재배 구역을 묘사하기 위해 화가는 수직 시점(top-down view)이나 비스듬한 시점(isometric view)이나 측면 시점(side view)를 고민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화가는 3D 그래픽을 이용해 전방위 파노라마를 구현할 수 있습니다. 이런 3D 그래픽은 훨씬 많은 시간과 노력과 비용을 요구하고, 그래서 3D 그래픽을 시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위 그림에 고요하고 신비로운 신디사이저 연주가 어울린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신디사이저 연주에는 내용이 없습니다. 그 자체로서 신비로운 신디사이저 연주는 우주선 속의 수경 재배 구역을 가리키지 못합니다. 그 자체로서 수경 재배 실험은 신디사이저 연주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진보적인 과학 기술과 정교한 그림체와 신디사이저 음악 사이에서 유사성을 찾아내고 세 가지를 연결할 수 있습니다.



수경 재배 실험실은 진보적인 과학입니다. 진보적인 과학은 정교합니다. 그래서 추상적인 화풍이나 마술적인 화풍보다 사실주의(리얼리즘)적인 화풍은 수경 재배 실험실과 훨씬 잘 어울립니다. 프리다 칼로나 파블로 피카소는 추상적이고 마술적인 화풍을 선보입니다. 이런 화풍들과 수경 재배 실험실은 별로 어울리지 않을 겁니다. 이건 추상적인 화풍이 반드시 수경 재배 실험실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흔히 사람들은 진보적인 과학이 정교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림이 진보적인 과학을 묘사할 때, 그림체는 정교하고 사실주의적이어야 합니다.


본문 위의 수경 재배 실험실 그림은 진보적인 과학을 정교하게 표현했습니다. 왜 여기에 신디사이저 음악이 어울리나요? 신디사이저 음악은 기계 설비를 이용해 연주들을 합성합니다. 첨단 기술 없이, 신디사이저 음악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신디사이저 음악은 라이브 연주와 충돌할 수 있습니다. 중세 음유 시인은 기계 합성 음악을 꿈꾸지 못했습니다. 기계 합성 음악은 미래적입니다. 그래서 진보적인 과학과 신디사이저 음악은 어울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유사성들(진보적인 과학, 사실주의적인 그림, 기계 설비 음악)을 연결하고 생태학 SF 그림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식물들을 재배하고 이용하는 생존 상황. 생태학 SF는 얼마든지 현실을 다르게 표현할 수 있어요.]



수경 재배 실험실 그림과 신디사이저 음악이 어울릴 때, 이건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이 되고 현실을 다르게 반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수경 재배 실험 그 자체보다)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을 즐깁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훨씬 근본적인 것을 원할지 모릅니다. "우주선 속의 수경 재배 실험이 그저 재미있는 생태학 모식도에 불과한가? 킴 로빈슨이 쓴 소설 <오로라>처럼, 세대 우주선과 인공 생태계 같은 생태적인 상상력이 환경 오염을 지적한다면, 여기에 훨씬 중요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이런 물음에는 근거가 없지 않습니다. 우주선 속의 녹색 정원은 허구입니다. 우주 녹색 정원을 비롯해 첨단 바이오 돔, 테라포밍, 거대 괴수 같은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들은 허구입니다.


중요한 것은 허구보다 현실입니다. 아무리 그림이 아름답다고 해도, 그림은 그저 그림에 불과합니다. 이건 우리가 생태학 SF 그림에 감탄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태학 SF 그림에 감탄한다고 해도, 우리는 현실 속의 환경 오염들을 인식해야 할 겁니다. 현실 속에서 자본주의는 자연 생태계를 심각하게 파괴하는 중입니다. 자본주의에게는 식민지가 필수적입니다. 식민지 수탈 때문에 자본주의는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과잉 자본을 해소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비자본 영역에 시장 경제를 퍼뜨려야 합니다. 자본주의가 식민지를 원하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자연 환경을 식민지화하고 수탈하기 때문에, 기후 변화 같은 환경 오염들은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인류가 평등하게 자연 환경을 공유하고 관리한다면, 인류 문명은 심각한 환경 오염들을 줄일 수 있을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가부장적인 차별과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타파하고 새로운 사회 구조를 이룩해야 합니다. 수경 재배 실험실 그림은 자본주의 문제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생태학 사이언 픽션에게 평등한 사회 구조는 가장 중요한 주제인지 모릅니다. 현실 없이 창작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이 있기 때문에 창작물은 존재합니다. 수많은 예술 사조들은 사회적으로 파생합니다. 현실이 있기 때문에 생태학 SF 그림은 존재할 수 있고, 생태학 SF 사조 역시 사회적으로 파생합니다.



현실에서 자연 생태계는 기후 변화를 비롯해 숱한 환경 오염들에 직면합니다. 기후 변화는 생물 다양성을 무지막지하게 파괴할지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에게 기후 변화는 가장 중요한 소재가 될 겁니다. 자본주의가 기후 변화를 초래하기 때문에,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들이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않는다면,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들은 피상적으로 환경 오염을 이야기할 겁니다. 하지만 많은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들은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비판하지 못합니다. 숱한 자연 과학자들, 환경 운동가들은 자본주의가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본주의가 옳다고 믿고, 자본주의 안에서 그들은 해결 방법을 찾습니다. 그들이 자본주의가 옳다고 믿기 때문에, 그들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선행을 외칩니다. 그들은 개인적인 근검절약을 말합니다. 어떤 환경 운동가들은 인류가 사라져야 한다거나 인류 문명이 중세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칩니다. 모두 자본주의가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합니다. 현실 속에서 자연 과학자들과 환경 운동가들이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않기 때문에,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들 역시 지배적인 관념을 따라갑니다. SF 팬들이 이런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들을 본다면, SF 팬들은 지배적인 관념을 재생산하고 계속 자본주의를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사실 생태학 SF 작가가 자본주의를 비판한다면, SF 팬들은 그 작가가 빨갱이라고 외면할지 모릅니다. SF 동호회에서 회원들은 테라포밍이나 수경 재배 실험이나 첨단 바이오 돔이나 거대 괴수를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SF 동호회에서 어떤 회원이 자본주의를 맹렬하게 비판한다면, 이건 커다란 갈등과 논란을 부를 겁니다. 자본주의가 지배적인 체계이기 때문에, SF 동호인들은 자본주의를 지지할 겁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전복적인 장르이나, SF 동호인들은 얼마든지 지배적인 관념에 충성합니다. JoySF 같은 SF 동호회는 별로 전복적이거나 파격적이지 않습니다.


예전에 메갈리아가 사회적인 화제였을 때, JoySF 동호회는 메갈리아를 힐난했습니다. 가부장적인 사회가 훨씬 폭력적이고 먼저 폭력을 휘둘렀음에도, 메갈리아가 그저 극단적으로 저항했을 뿐임에도, JoySF는 게거품을 물고 가부장적인 사회보다 메갈리아를 헐뜯었습니다. 메갈리아가 화제가 되기 전에, 아무리 가부장적인 자본주의가 폭력을 휘두른다고 해도, JoySF 회원들이 눈썹 하나라도 깜빡했나요? 아니, 그들은 절대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않았어요. 그저 몇몇 회원만 마르크스주의를 의논했을 뿐이에요. 하지만 메갈리아가 막대한 온실 가스를 뿜거나 핵 폐기물을 버리거나 미세 플라스틱 쓰레기들을 버리지 않았음에도, 많은 JoySF 회원들은 아주 게거품을 물고 지랄탕을 끓였습니다.


SF 동호회가 전복적인가요? 아니, 애석하게도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사이언스 픽션에는 위대한 잠재력이 있으나, 사이언스 픽션이 급진적인 사상과 만나지 못한다면, 사이언스 픽션은 지배 계급에게 충성할 겁니다. 가부장 문화가 지배적인 관념이기 때문에, JoySF 회원들 역시 가부장 문화가 잘못이라고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생태학 SF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들에게 평등한 사회 구조가 가장 중요한 주제임에도, 다들 지배적인 관념에 충성하기 때문에,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들은 가장 중요한 주제를 가장 작게 이야기합니다. 이건 너무 안타까운 모순입니다.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사회 구조를 분석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도덕적인 선행이 해답이라고 생각합니다. 각종 구호 광고들을 보세요. 구호 광고들은 아이들이 죽어가고 굶주리고 병든다고 떠듭니다. 그래서 구호 광고들이 평등한 사회 구조를 외치나요? 그건 아닙니다. 구호 광고들은 "매달마다 당신은 2만원으로 굶주리는 아이를 후원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결론은 돈타령입니다. 구호 광고들은 영리 기업 광고들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양쪽 모두 결론은 돈타령입니다. 구호 광고들과 영리 기업 광고들은 사람들이 돈을 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구호 광고들은 사람들이 평등한 사회를 이룩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지배적인 체계가 그걸 허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배 계급이 생산 수단을 차지해야 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굶어뒈지든 말든, 사람들은 돈을 내야 합니다. 사람들은 생산 수단을 공유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 구호 광고들은 사회 구조보다 도덕적인 선행, 돈타령에 매달립니다. 만약 사람들이 후원금을 지불한다고 해도, 자본주의는 계속 자연 환경을 수탈하고 사람들을 착취할 겁니다. 이건 밑빠진 독에 물붓기입니다. 이렇게 구호 광고들은 지배 계급의 충실한 앞잡이가 됩니다. 현실 속에서 수많은 것들이 지배적인 관념에 충성하기 때문에,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 역시 지배적인 관념에 충성합니다.



[이런 생태적인 상상력은 좋으나, 생태학 SF 소설은 수직적인 사회 구조를 고민해야 할 겁니다.]



따라서 SF 팬들은 오직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만으로 생태적인 상상력을 살피지 못합니다. SF 팬들이 오직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만으로 생태적인 상상력을 살핀다면, SF 팬들은 피상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SF 팬들은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과 자본주의 반대 운동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자본주의 반대 운동, 사회주의 혁명, 에코 페미니즘은 생태적인 상상력과 관계를 맺지 않는 것 같으나, 이것들은 생태적인 상상력을 파악하기 위한 중요한 밑거름입니다. 이런 중요한 밑거름 없이, SF 팬들은 생태적인 상상력을 피상적으로 훑어볼 겁니다.


솔직히 첨단 바이오 돔이나 수경 재배 실험실이나 거대 괴수를 떠드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이런 것들은 안전한 주제입니다. 사람들이 첨단 바이오 돔과 거대 괴수를 열심히 떠든다고 해도, 사람들은 비난을 받지 않아요. 하지만 자본주의 반대 운동은 엄청난 비난에 부딪혀야 합니다. 그래서 사회주의를 외치는 목소리는 중요합니다. 여기 <SF 생태주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블로그에 깊고 자세한 내용들이 없다고 해도, 사회주의를 외치는 목소리들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 블로그에는 어느 정도 가치가 있을 겁니다. 생태학 SF 덕질은 지배적인 관념을 넘고 평등한 사회 구조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해요.



본문 위의 수경 재배 실험실 그림이 이런 것을 말하나요? 그림 속에는 어떤 여자 식물학자(?)가 있으나, 여자 식물학자가 가부장적인 차별을 비판하는지 그건 확실하지 않습니다. 사고 방식은 가시적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수경 재배 실험실 그림이 사실주의적이라고 해도, 이 그림은 사고 방식을 구체적으로 나타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생태학 SF '소설'은 중요합니다. 소설이 언어를 이용하기 때문에, 소설은 사상과 철학을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림은 사상과 철학을 직접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림 속에서 여자 등장인물이 녹색 식물들을 돌본다고 해도, 이 그림이 '자연을 돌보는 여자'를 상징할 수 있나요?


수경 재배 실험실을 그린 화가 Oliver Guiney는 자신이 영화 <선샤인>과 코라존을 참고했다고 밝힙니다. 영화 <선샤인>에서 코라존은 우주선 식물 재배 구역을 맡습니다. 양쯔충이 말하는 것처럼, 코라존에게는 대지모신 같은 분위기가 있습니다. 여자 코라존이 식물 재배 구역을 맡는 것처럼, 식물과 녹색 자연은 여자로 이어집니다. 어머니 자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자의 몸이 생산적이기 때문에, 자연이 생산적이기 때문에, 수많은 예술 매체들은 녹색 식물과 여자를 혼합하고 어머니 자연을 그립니다. 그래서 수경 재배 실험실 그림이 대지모신, 어머니 자연 같은 분위기를 나타내기 원하나요?



어머니가 생명을 낳는 것처럼, 자연은 생명을 낳습니다. 넷째 문단이 말하는 것처럼, 번성은 자연의 가장 커다란 미덕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자와 자연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코라존처럼 여자 식물학자가 수경 재배 실험실을 관리한다면, 이런 생태적인 상상력은 어머니 자연을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어머니 자연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어머니 자연은 모성을 왜곡할지 모릅니다. 여자가 아기를 낳고 아기에게 젖을 먹이기 때문에, 가부장 문화는 여자를 돌봄 노동에 억지로 밀어넣을지 모릅니다. 여자가 아이를 갖기 때문에, 가부장적인 편견은 임신과 출산과 수유가 여자의 본질이라고 규정할지 모릅니다.


만약 임신과 출산과 수유가 여자의 본질이 된다면, 여자는 인간이라는 주체보다 생체 인큐베이터, 생체 식량 공장이 될 겁니다. 여자의 자궁은 여자의 것입니다. 여자의 두 젖가슴은 여자의 것입니다. 하지만 가부장 문화는 여자의 자궁을 생체 인큐베이터라고 취급합니다. 여자가 임산부가 되는 순간, 여자는 인간이라는 주체보다 걸어다니는 생체 인큐베이터가 됩니다. 가부장 문화는 여자의 자궁이 여자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여자를 통제하기 원할 겁니다. 가부장 문화는 임신 중절 권리에 반대합니다. 성 해방 운동가들이 난리법석을 부리지 않는다면, 가부장적인 국가 정부는 임신 중절 권리를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어머니 자연이라는 개념은 이런 왜곡으로 흐를지 모릅니다. 성 해방 운동이 어머니 자연을 묻어버려야 하나요? 성 해방 운동이 여자의 생산적인 몸을 소멸시켜야 하나요? 하지만 페미니즘 서적 <참을 수 없는 몸의 무거움>에서 수잔 보르도는 페미니즘이 여자의 생산적인 몸을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만약 페미니즘 운동이 여자의 생산적인 몸을 외면하거나 소멸시키기 원한다면, 가부장 문화는 이걸 뺏어가고 왜곡할 겁니다. 가부장 문화는 여성적인 측면을 모두 정복하고 지배하기 원합니다. 만약 페미니즘 운동이 여자의 생산적인 몸을 지키지 못한다면, 가부장 문화는 이걸 계속 왜곡하고 여자들을 가정 주부화시킬 겁니다.


그래서 <참을 수 없는 몸의 무거움>에서 수잔 보르도는 페미니즘 운동이 이런 논의를 지키지 못했고 주도권을 빼앗겼다고 안타까워합니다. 어머니 자연은 이런 논의를 언급할 수 있습니다. 수경 재배 실험실과 여자 식물학자 역시 이런 논의를 언급할 수 있을 겁니다. <참을 수 없는 몸의 무거움>이 포스트 모더니즘을 까는 것처럼, 수경 재배 실험실 그림 역시 포스트 모더니즘을 깔 수 있으나…. 수경 재배 그림이 포스트 모더니즘을 깐다면, 이건 너무 머나먼 여정일지 모릅니다. 문제는 수경 재배 실험실 그림이 사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생태학 SF 소설은 여자의 생산적인 몸을 논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 위의 수경 재배 그림은 사상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수경 재배 구역과 여자 식물학자는 가부장 문화를 비판하기 위한 상징이 될지 모릅니다.]



소설 <화성의 왕궁에서>는 화성 생존자들을 이야기합니다. 화성에서 생존하기 위해 생존자들은 생태적인 생산(농사)과 사회적인 생산(임신)을 중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회적인 생산이 논의가 되었을 때, 여자 생존자는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왜 방금 전에 당신이 여자를 천연 자원이라고 취급했지?" 여자 생존자는 묻습니다. 소설 <화성의 왕궁에서>가 보여주는 것처럼, 인류가 생존하고 싶다면, 생태적인 생산과 사회적인 생산은 필수적이고, 그래서 식물과 여자는 중요한 관계를 맺습니다. 어쩌면 이것 때문에 <화성의 왕궁>에서 생태학자와 생물학자는 모두 여자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본문 위의 그림은 이런 것들을 확실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화가 Oliver Guiney는 이런 것들을 알지 못했는지 모릅니다. 영화 <선샤인>에서 코라존이 식물 재배 구역을 관리하기 때문에, Oliver Guiney는 그저 우연히 수경 재배 실험실에 여자 과학자를 집어넣었는지 모릅니다. Oliver Guiney가 이런 것들을 인식했다고 해도, 그림은 사상을 설명하기에 어울리지 않는 수단입니다. 철학자에게는 그림 실력보다 말빨이 훨씬 중요해요. 그렇다고 해도 여자와 식물과 생산은 중요한 화제이고, SF 팬들이 수경 재배 그림을 감상할 때, SF 팬들은 이런 것들을 고려할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생태학 SF 그림에게는 여러 요소들이 있습니다. 여러 요소들은 생태학 SF 그림을 둘러쌌습니다. 생태학 SF 비평은 이런 요소들을 고려해야 할 겁니다. 비평가가 그저 몇몇 공학 지식만 늘어놓는다면, 이게 종합적인 비평이 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현실에서 기후 변화가 정말 심각한 문제임에도, 생태학 SF 비평이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않는다면, 이게 근본적인 비평이 될 수 있을까요? 그건 절대 아닐 겁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