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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소설 <홍수>와 복수극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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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홍수>와 복수극들

OneTiger 2019. 6. 1. 20:22

마가렛 앳우드가 쓴 <홍수>에서 소설 주인공 토비는 고아와 비슷합니다. 세상은 망해가고, 집안은 풍지박산이 났고, 환경 오염들은 극심합니다. 토비는 성인 여자이나, 가부장적인 폭력들이 휘몰아치는 상황에서 토비에게는 의지하기 위한 곳이 없습니다. 토비는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고 빈번하게 폭력배들과 마주칩니다. 자꾸 폭력배들은 토비에게 직접대고, 점차 위기는 다가옵니다. 갈등이 심각해지고 토비가 위기에 빠질 때, 신의 정원사들이라는 생태주의 종교 집단은 토비를 구합니다. 비록 신의 정원사들은 대단한 집단이 아니나, 정원사들은 토비를 보호합니다.


더 이상 폭력배들은 토비에게 피해를 끼치지 못합니다. 토비는 신의 정원사들에게 목숨을 빚졌다고 생각하고 생태주의 종교 집단 속에서 점차 생태주의를 몸에 익힙니다. 나중에 토비가 신의 정원사들과 헤어진 이후에도 토비는 생태주의 습관을 버리지 않습니다. 토비는 생태주의 종교를 믿지 않았고 심지어 생태주의 교리들이 바보 같다고 생각했으나, 생태주의 종교가 습관이 되었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토비는 동물들을 함부로 죽이지 않고, 기념일을 지키고, 폭력을 자제합니다. 심지어 폭력배들이 여자를 납치하고 성 폭행함에도, 토비는 폭력배들을 처치하기 원하지 않습니다.



한때 토비가 폭력배들에게 시달렸음에도, 토비가 폭력배들에게 분풀이할 수 있음에도, 토비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토비는 분풀이할 수 있으나, 분풀이하지 않습니다. 이건 전형적인 복수극에서 벗어납니다. 흔히 복수극은 얼마나 심하게 주인공이 폭력에 시달리는지 보여줍니다. 폭력은 주인공을 계속 괴롭힙니다. 주인공에게 아무 잘못이 없음에도, 폭력은 주인공을 계속 괴롭힙니다. 이제까지 주인공은 일방적으로 당했습니다. 이제까지 주인공은 엄청난 울분을 쌓았습니다. 그래서 주인공은 폭력에게 복수하기 위한 명분을 얻습니다. 이제 주인공은 폭력을 되갚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인공이 명분을 얻고, 마침내 주인공이 복수하기 시작할 때, 복수극은 카타르시스를 터뜨릴 수 있습니다.


주인공은 폭력에게 저항하고 폭력을 끝내기 원합니다. 주인공이 관계를 거꾸로 뒤집고 폭력을 분쇄하는 동안, 이건 카타르시스가 됩니다. 복수극은 카타르시스를 당장 터뜨리지 못합니다. 카타르시스를 터뜨리기 위해 복수극에게는 준비 과정이 필요합니다. 움베르토 에코는 이걸 '서성거리기'라고 부릅니다. 복수극이 카타르시스에 곧바로 돌입하지 않고 카타르시스 문턱에서 서성거리는 동안, 폭력은 주인공을 계속 괴롭혀야 합니다. 주인공에게 아무 잘못이 없음에도, 폭력은 주인공을 괴롭히고 괴롭히고 괴롭히고 다시 괴롭혀야 합니다. 주인공이 울분을 쌓기 때문에, 주인공은 명분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마침내 주인공이 폭력에게 저항하고, 관계를 거꾸로 뒤집고, 폭력을 두들겨팰 때, 이건 짜릿한 감성이 됩니다. 약자는 더 이상 약자가 아니고, 강자는 더 이상 강자가 아닙니다. 이제 약자는 강자가 되고, 강자는 얻어맞습니다. 관계는 뒤집어집니다. 이건 전복입니다. 주인공은 폭력에게 복수하고 관계를 전복시킵니다. 언제나 전복은 짜릿합니다. 복수극에는 짜릿한 전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복수극은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합니다. 영화 <마스크 오브 조로>는 이런 전형적이고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보여줍니다. 영화 주인공 돈 디에고와 알레한드로 뮤리에타는 유럽 폭정에 시달립니다.


돈 디에고는 가족을 잃었고, 알레한드로 뮤리에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알레한드로에게는 복수하기 위한 명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돈 디에고는 알레한드로를 만류합니다. 알레한드로는 고작 일개 도둑에 불과하고, 알레한드로가 총독 및 장교와 직접 싸운다면, 알레한드로는 비명횡사할 겁니다. 돈 디에고는 자신이 알레한드로를 훈련시킬 수 있다고 약속하고, 알레한드로는 훈련을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훈련은 쉽지 않습니다. 아무나 쉽게 조로가 되지 못합니다. 돈 디에고는 인내가 필요하다고 계속 이야기합니다. 알레한드로는 당장 복수하지 못하고 계속 울분을 쌓습니다.



알레한드로는 폭력에 시달렸으나, 영화 <마스크 오브 조로>는 알레한드로가 당장 조로가 되고 복수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훈련 과정을 자세하게 보여줍니다. 한참 동안 시간이 흐른 이후, 마침내 관객들은 조로를 볼 수 있습니다. 알레한드로가 더 이상 울분을 참지 못할 때, 이제 인내가 한계에 다다랐을 때, 돈 디에고는 검은 복면을 보여주고 준비가 끝났다고 말합니다. 이제 남은 것은 복수입니다. 돈 디에고가 검은 복면을 보여주는 순간, 관계는 뒤집히고, 알레한드로 뮤리에타는 더 이상 약자가 아닙니다. 이제 알레한드로 뮤리에타는 조로가 되고 신나게 복수를 실행합니다.


<마스크 오브 조로>는 마스터 휠로 '서성거리기'를 보여줍니다. 만약 알레한드로 뮤리에타가 이런 '준비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면, 짜릿한 관계 전복은 없었을 테고, 아무리 조로가 훨훨 날아다닌다고 해도, 복수는 통쾌한 카타르시스가 되지 못했을 겁니다. 영화 <람보 First Blood>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베트남 침략 전쟁 이후, 존 람보는 전우가 사는 시골 마을로 옵니다. 하지만 전우는 이미 죽었습니다. 존 람보는 울적하다고 느낍니다. 베트남 침략 전쟁이 상당한 트라우마가 되었고 전우가 죽었기 때문에, 존 람보는 음울한 기분에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을 보안관은 존 람보가 불량한 떠돌이라고 간주하고 존 람보를 괴롭힙니다.



존 람보는 당장 마을을 떠나지 않습니다. 전쟁 트라우마와 죽은 전우가 머릿속을 헤집기 때문에, 존 람보에게는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한 여유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마을 보안관은 여유를 주지 않습니다. 마을 보안관은 존 람보가 누구인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마을 보안관에게 존 람보는 그저 불량한 떠돌이에 불과합니다. 존 람보는 그린 베레 소속이었으나, 마을 보안관에게 그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마을 보안관과 부하들은 계속 존 람보를 괴롭힙니다. 존 람보에게 잘못이 없음에도, 마을 보안관과 부하들은 존 람보를 괴롭히고 괴롭히고 괴롭히고 다시 괴롭힙니다. 이건 움베르토 에코가 말하는 '서성거리기'입니다.


이건 '준비 과정'입니다. 보안관 부하들이 존 람보를 열심히 괴롭히는 동안, 영화 <람보>는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준비합니다. 마침내 존 람보가 보안관 부하들을 공격하기 시작할 때, 관계는 뒤집어집니다. 이제 존 람보는 더 이상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습니다. 이제 보안관 부하들은 일방적으로 당하기 시작합니다. 존 람보는 관계를 전복했고, 이건 짜릿한 복수와 통쾌한 카타르시스가 됩니다. 만약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존 람보가 보안관 부하들을 줄줄이 썰고 다닌다면, '준비 과정'은 없을 테고, 짜릿한 복수와 통쾌한 카타르시스 역시 없을 겁니다. 복수극에게 '준비 과정'은 필수적입니다.



영화 <마스크 오브 조로> 및 <람보>와 달리, 어떤 복수극은 너무 뜸을 들이고, 너무 서성거리고, 준비 과정을 길게 늘입니다. 희곡 <햄릿>은 복수극이나, <햄릿>은 준비 과정을 지루하게 늘입니다. 햄릿은 계속 괴로워하고, 복수를 다짐하고,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이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햄릿은 실천하지 못합니다. 마침내 햄릿이 복수하기 시작했을 때, 이건 별로 짜릿하지 않습니다. 관계는 별로 뒤집어지지 않습니다. <마스크 오브 조로> 및 <람보>와 달리, 햄릿은 완벽하게 관계를 전복하지 못합니다. <마스크 오브 조로> 및 <람보>와 달리, 사실 희곡 <햄릿>에게 통쾌한 카타르시스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햄릿은 우유부단하고, 중요한 것은 이런 우유부단함입니다. 희곡 <햄릿>은 독자가 통쾌한 복수보다 우유부단한 망설임에 주목하기 원하는 것 같습니다. 만약 디즈니 애니메이션 <라이온 킹>이 우유부단한 망설임에 주목한다면, 어린 관객들은 <라이온 킹>에 실망할 겁니다. 심바는 다소 우유부단하나, 햄릿과 달리, 심바는 복수해야 합니다. 이런 복수가 짜릿한 카타르시스가 되지 않는다고 해도, 심바는 관계를 뒤집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라이온 킹> 역시 '준비 과정'을 보여줍니다. 특히, 노래 <하쿠나 마타타>는 우유부단한 망설임을 달랩니다. "뭐, 세상 만사에 별 게 있나? 그냥 느긋하게 살아. 하쿠나 마타타~♪"



소설 <몽테크리스토 백작>에서 에드몽 당테스는 하쿠나 마타타를 흥얼거리지 않으나, 소설 <몽테크리스토 백작>에서도 '서성거리는 부분'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알렉상드르 뒤마는 '준비 과정'과 짜릿한 카타르시스가 중요하다고 인식했습니다. 소설 <몽테크리스토 백작>은 얼마나 심하게 에드몽 당테스가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는지 보여줍니다. 에드몽 당테스는 수많은 것들을 잃었습니다. 에드몽 당테스에게 아무 잘못이 없음에도, 에드몽 당테스는 수많은 것들을 잃어야 했습니다. 에드몽 당테스는 원수들에게 당장 복수하지 못합니다. 에드몽 당테스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에드몽은 (억울한) 죄수이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에드몽에게는 복수하기 위한 수단들이 없습니다. 이것들은 기나긴 '준비 과정'이 됩니다. 기나긴 준비 과정 동안 에드몽 당테스는 파리스 신부를 만나고 많은 것들을 배우고 갖춥니다. 마침내 에드몽 당테스는 복수하기 시작하고, 이건 통쾌한 카타르시스가 됩니다. 이런 복수극은 대중적인 인기를 끕니다. 어떤 관점에서 <마스크 오브 조로>는 <몽테크리스토 백작>과 비슷합니다. 파리스 신부가 늙고 노련한 스승이고 에드몽 당테스가 젊고 어리숙한 제자인 것처럼, 돈 디에고와 알레한드로 뮤리에타 역시 그렇습니다. <마스크 오브 조로>는 조로 이야기와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합친 것 같습니다.



<햄릿>과 <몽테크리스토 백작>부터 <라이온 킹>과 <마스크 오브 조로>까지, 복수극들은 커다란 인기를 끕니다. 전복적인 관계 역전이 통쾌함을 선사하기 때문입니다. <햄릿>은 별로 통쾌하지 않으나, <햄릿>이 통쾌함을 버리고 우유부단함을 내세우기 때문에, <햄릿>은 유명한 복수극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몽테크리스토 백작>과 <람보>와 <라이온 킹>과 <마스크 오브 조로>처럼, 이 세상에서 숱한 복수극들이 통쾌한 관계 역전을 내세우기 때문에, <햄릿> 같은 우유부단한 복수극 역시 필요한지 모릅니다. 하지만 <햄릿>이 우유부단하다고 해도, 복수극으로서 햄릿은 칼을 찌릅니다.


비록 햄릿이 어리버리하다고 해도, 결국 햄릿은 칼을 찌릅니다. <몽테크리스토 백작>과 <람보>와 <라이온 킹>과 <마스크 오브 조로>와 달리, <햄릿>이 통쾌하지 않다고 해도, 결국 <햄릿>은 복수극이고 복수를 보여줍니다. 복수극에게 복수 장면은 필수적입니다. 복수 장면으로서 복수극은 막을 내려야 합니다. 막이 내려갈 때, 복수극은 복수 장면을 보여줘야 합니다. 복수극에게 이건 공식입니다. 수많은 복수극들은 이런 공식을 따릅니다. <햄릿>과 <몽테크리스토 백작>과 <람보>와 <라이온 킹>과 <마스크 오브 조로> 역시 이런 공식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소설 <홍수>는 어떤가요? 당연히 <홍수>는 복수극이 아닙니다. <햄릿>과 <몽테크리스토 백작>과 <람보>와 <라이온 킹>과 <마스크 오브 조로>와 달리, <홍수>에서 복수는 핵심 과정이 아닙니다. 복수극에서 주인공은 복수하기 위한 준비 과정을 거치고, 이건 핵심 줄거리가 됩니다. 햄릿과 심바와 알레한드로 뮤리에타가 다르다고 해도, 세 등장인물들은 똑같이 복수하기 위한 준비 과정을 거칩니다. <햄릿>과 <라이온 킹>과 <마스크 오브 조로>에게 이건 핵심 줄거리입니다. 반면, <홍수>는 이런 복수 과정에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토비는 자신이 복수해야 한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폭력배들이 토비를 괴롭히고 협박하고 성 희롱한다고 해도, 토비는 복수심을 불태우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소설 <홍수>는 토비에게 기회를 줍니다. 소설 초반부에서 불량배들은 토비를 괴롭혔고, 소설이 끝나기 전에 토비는 불량배들에게 분풀이하기 위한 기회를 얻습니다. 토비가 불량배들을 처치한다면, 이게 복수가 되지 못한다고 해도, 적어도 이건 응징이 될 겁니다. 토비는 자신의 고통을 갚아줄 수 있습니다. 이게 핵심 줄거리가 되지 못한다고 해도, 이건 꽤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복수(응징)인가, 아닌가. 이것으로서 소설 <홍수>는 막을 내리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햄릿>과 <몽테크리스토 백작>과 <람보>와 <라이온 킹>과 <마스크 오브 조로>와 <홍수>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막판에서 모두 복수(응징)하기 위한 기회를 부여합니다. 복수(응징)로서 모두 막을 내리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홍수>는 전형적인 복수극에서 벗어납니다. <홍수>에는 '준비 과정'이 없고, <홍수>는 복수하기 위한 기회를 활용하지 않습니다. 아니, <홍수>에는 '준비 과정'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복수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 아니라 포용하기 위한 준비 과정입니다. 생태주의 종교 집단에서 토비는 복수보다 포용하기 위한 준비 과정을 거칩니다. 토비는 복수의 칼날을 닦지 않습니다.


토비는 포용하기 위한 넉넉한 품을 준비합니다. 그래서 토비가 폭력을 휘두를 수 있음에도, 이건 완벽한 복수가 아닙니다. 토비는 복수한 것 같으나, 이건 복수가 아닙니다. 복수로서 복수극은 막을 내리나, <홍수>는 복수를 넘고 훨씬 멀리 바라봅니다. 에드몽 당테스는 복수 이후가 공허하다고 느끼나, 토비는 복수 이후를 바라봅니다. <햄릿>과 <몽테크리스토 백작>과 <람보>와 <라이온 킹>과 <마스크 오브 조로>처럼, 분명히 복수(응징)로서 <홍수>는 막을 내리기 원하는 것 같습니다. <홍수>가 전형적인 복수극이 아니라고 해도, <마스크 오브 조로>처럼, 막판에서 <홍수>는 복수하기 위한 기회를 부여합니다. 하지만 토비는 통쾌하게 복수하지 못합니다.



소설 <홍수>에서 복수(응징)는 대단원이 아닙니다. 복수와 응징 이후, 훨씬 넓은 것은 토비와 다른 등장인물들을 기다립니다. 복수와 응징은 세상의 끝이 아닙니다. 일반적인 복수극은 복수를 이용해 막을 내리나, 오히려 <홍수>는 복수와 응징이 끝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비록 막이 내린다고 해도, 무대 너머에는 훨씬 넓은 뭔가가 있을 겁니다. <햄릿>과 <몽테크리스토 백작>과 <람보>와 <라이온 킹>과 <마스크 오브 조로>처럼, 복수와 응징으로서 <홍수>가 마지막을 장식한다고 해도, 약자에서 응징자로 토비가 역할을 바꾼다고 해도, 토비가 관계를 전복한다고 해도, 막판에 관계 역전이 나타난다고 해도, <홍수>는 일반적인 복수극들과 다릅니다.


<홍수>에는 '준비 과정'이 있으나, 이건 막판 복수를 위한 준비 과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건 훨씬 넓은 곳으로 나가고 멀리 바라보기 위한 준비 과정입니다. 그래서 <홍수>는 의도적으로 마지막에 복수(응징)하기 위한 기회를 부여하는지 모릅니다. 소설 후반부에서 <홍수>는 의도적으로 복수극을 모방하나, <홍수>는 복수극이 아니고, 복수와 응징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폭력의 악순환은 끝납니다. 토비가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토비는 폭력의 악순환을 끝내고 폭력을 포용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독자들은 이런 결론을 긍정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어쩌면 토비는 폭력을 너무 만만하게 바라봤는지 모릅니다. 사실 <홍수>는 얼마나 많은 폭력들이 필요한지 고민합니다. 비록 <홍수>가 저항하기 위한 폭력들을 완전히 긍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홍수>는 저항하기 위한 폭력들을 완전히 무시하지 않습니다. 이게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홍수>는 토비에게 초점을 맞추고, 저항하기 위한 폭력들보다 약자들이 근근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폭력보다 포용을 선택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 소설은 현실을 완전히 외면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폭력과 포용은 어려운 선택입니다.


종종 포용하기 위해 우리는 폭력을 선택해야 할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은 중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소비에트 연방이 농민들을 수탈했다고 말합니다. 이건 어느 정도 사실입니다. 분명히 소비에트 연방은 농민들을 수탈했고 중공업을 발달시켰습니다. 문제는 소비에트 연방이 심각한 난관에 부딪혔다는 사실입니다. 시골 지역에서 이른바 쿨락(부유 농민)들은 빈농들을 억누르고 지배 계급이 되는 중이었습니다. 이름과 달리, 쿨락들은 별로 부유하지 않았습니다. 빈농들보다 쿨락들은 오직 좀 더 많은 재산들을 가졌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런 작은 재산조차 지배 계급의 권력 수단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러시아 시골 상황은 처참했습니다.



게다가 도시에서 노동자들은 굶주리는 중이었습니다. 자본주의 강대국들은 소비에트 연방을 압박하기 원했고, 소비에트 연방은 고립에서 벗어나야 했습니다. 이미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는 1차 세계 대전, 간섭 전쟁, 적백 내전을 겪었고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자본주의 강대국들은 경제 공황을 해소하지 못했고 파쇼주의에 동조했습니다. 언제 파쇼주의가 러시아를 침략할지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소비에트 연방은 빨리 중공업을 발전시키고 파쇼주의 침략에 대비해야 했습니다. 소비에트 연방은 한가하게 사회주의 노선을 계획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소비에트 연방이 쿨락들을 수탈했다면, 이게 정말 수탈인가요?


만약 이런 수탈이 정말 문제가 된다면, 우리는 소비에트 연방보다 파쇼주의에 동조하는 자본주의 강대국들을 훨씬 강하게 비판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자본주의 강대국들보다 소비에트 연방을 비난합니다.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파쇼주의에 동조했고, 파쇼주의가 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고, 소비에트 연방이 일방적으로 침략을 당했음에도, 사람들은 오직 소비에트 연방만을 헐뜯습니다. 사람들은 강자의 폭력에 관대하고 약자의 폭력을 사정없이 비난합니다. 강자가 지배적인 관념을 퍼뜨리고 사람들을 세뇌시키기 때문입니다.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열렬히 지배적인 관념에 협조합니다. 가부장 문화와 워마드 역시 비슷합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가부장 문화가 온갖 폭력들을 저질렀음에도, 남한 사람들은 가부장 문화가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남한 사람들은 워마드가 문제라고 착각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가부장 문화가 강자이고, 워마드가 약자이기 때문입니다. 가부장 문화는 국가 정부 권력을 움켜쥐고 피지배 계급을 탄압할 수 있습니다. 워마드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가부장적인 국가 정부와 달리, 워마드는 지배 계급이 되지 못합니다. 국가 정부는 동성애 합법 결혼을 금지하고 성 소수자들을 탄압할 수 있습니다. 워마드는 법률을 정하지 못합니다. 가부장적인 국가 정부와 달리, 워마드는 약자입니다.


하지만 남한 사람들은 국가 정부에 충성하고 워마드를 욕합니다. 사람들은 강자의 폭력에 관대하고 약자의 폭력을 사정없이 비난합니다. 그래서 현실 속에서 폭력과 포용을 선택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온갖 저항 운동들은 뻘짓들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폭력과 포용을 바라볼 때, 우리는 이런 모순적인 상황을 고려해야 할 겁니다. 우리가 모든 폭력을 똑같이 비난하고, 우리가 강자의 폭력에 관대하고 약자의 폭력을 사정없이 비난한다면, 약자들은 절대 저항하지 못할 겁니다. 지배 계급은 이런 상황을 아~주 좋아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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