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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미친 아담>과 조각 'La Nature se dévoilant'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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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미친 아담>과 조각 'La Nature se dévoilant'

OneTiger 2019. 12. 25. 20:06

※ 이 게시글에는 마가렛 앳우드가 쓴 소설 <미친 아담>의 치명적인 내용 누설, 결말 누설이 있습니다.

 

 

베일은 젊은 여자를 휘감습니다. 베일 때문에, 사람들은 젊은 여자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합니다. 여자는 베일을 벗고 얼굴과 두 젖가슴을 드러냅니다. 여자는 비단 얼굴만 아니라 두 젖가슴을 드러냅니다. 여자는 일반적인 호모 사피엔스 여자가 아닙니다. 이 여자는 자연입니다. 왜 자연이 얼굴을 드러내고 두 젖가슴을 보여주나요? 과학이 자연을 밝혀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자연이고, 과학은 여자의 얼굴과 두 젖가슴을 확인해야 합니다. 과학은 모든 베일을 벗기고 여자의 육체를 완벽하게 확인해야 합니다. 과학이 여자의 옷을 벗겨야 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과학은 남자 같습니다.

 

과학은 남자이고, 자연은 여자입니다. 남자(과학) 앞에서 여자(자연)는 옷을 벗고 육체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루이-에른스트 베리어스는 젊은 여자를 조각하고 "La Nature se dévoilant à la Science"라고 명명합니다. 하지만 이건 너무 이상합니다. 왜 과학이 남자가 되어야 하고, 왜 여자가 자연이 되어야 하나요? 여자가 생명체를 낳고 생명체를 먹이기 때문에, 여자와 자연이 비슷하고, 그래서 여자가 자연이 되어야 하나요? 여자-자연이 논리적인 비유라고 해도, 왜 과학이 남성적인 시선이 되어야 하나요? 왜 자연으로서 여자가 옷을 벗어야 하나요? 왜 자연과 과학이 모두 여자가 아닌가요?

 

 

자연이 여자가 되는 것처럼, 과학은 여자가 될 수 있습니다. 과학 덕분에, 인류 문명은 자연을 훨씬 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과학 덕분에, 인류 문명은 스테고사우루스를 연구할 수 있습니다. 과학 덕분에, 인류 문명은 지구가 아주 장대한 생체 우주선이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지구가 생명의 요람이기 때문에, 지구에서 수많은 생명체들이 번성하기 때문에, 지구는 정말 감동적인 모성입니다. 과학은 모성을 이야기합니다. 과학이 모성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과학과 모성은 가깝습니다. 그래서 과학은 여자입니다. 자연이 여자가 되고, 과학이 자연을 깊이 이해하기 때문에, 과학은 여자가 되어야 합니다.

 

자연과 과학이 모두 여자임에도, 루이-에른스트 베리어스는 남자(과학) 앞에서 여자(자연)가 두 젖가슴을 드러낸다고 조각합니다. 왜 자연-과학 관계가 이런 장면(남자는 지켜보고, 여자는 옷을 벗는다)이 되어야 하나요? 왜 두 여자 친구가 대화하거나, 엄마가 어린 딸에게 젖을 먹이거나, 여자 드루이드가 자연의 여신을 숭배하는 조각이 아닌가요? 캐롤린 머천트는 이 조각상에 가부장적인 편견, 차별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게 사실인가요? 정말 이 조각상에 가부장적인 편견이 있나요? 하지만 이 조각상은 여자보다 남자가 우월하고 남자가 여자를 차별해야 한다고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건 모성적인 게임 플레이입니다. 이런 표현이 상징이라고 해도, 여기에 아무 편견이 없나요?]

 

 

마가렛 앳우드가 쓴 소설 <미친 아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마가렛 앳우드가 <시녀 이야기>를 썼기 때문에, 독자는 마가렛 앳우드가 페미니즘을 <미친 아담>에 집어넣거나 적어도 <미친 아담>이 성 평등을 어느 정도 존중할 거라고 기대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섹스와 임신, 출산입니다. 성 해방 운동에서 섹스, 임신, 출산, 육아는 가장 민감한 문제입니다. 여자와 남자 사이에서 가장 커다란 차이가 이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여자만 임신합니다. 아내와 남편이 2세를 평등하게 합의한다고 해도, 오직 여자만 임신합니다. 임신은 제약이 될지 모르고, 태생적으로 여자와 남자 관계는 너무 불평등합니다.

 

오직 여자만 임신하기 때문에, 오직 여자만 아기에게 젖을 먹일 수 있습니다. 인간은 포유류이고, 게다가 다른 많은 포유류들과 달리, 인간 여자에게는 젖가슴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자가 아기를 먹이고 여자가 아기를 돌봐야 한다고 착각할지 모릅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여자와 육아를 너무 쉽게 연결합니다. 남자 역시 모성이 얼마든지 될 수 있음에도, 많은 사람들은 남자와 모성을 연결하지 못합니다. 남자는 자신이 강하다고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고, 누군가를 때리고, 뭔가를 부숴야 합니다. 남자는 죽이고, 부수고, 때리고, 소리를 버럭버럭 질러야 합니다. 남자는 누군가를 품어줘서는 안 됩니다.

 

 

이런 착각들과 오해들은 온갖 차별들과 억압들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소설, 만화, 영화, 게임 같은 창작물들이 섹스, 임신, 출산, 육아를 다룰 때, 창작물들은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서 <미친 아담>이 주의를 기울이나요? 소설 속에서 가장 커다란 사건들 중에서 하나는 아만다 임신입니다. 아만다는 임신합니다. 하지만 왜 아만다가 임신하나요? 크레이커 남자들 때문입니다. 크레이커 남자들은 아만다와 섹스했고, 아만다는 임신합니다. 하지만 아만다는 크레이커 남자들과 섹스하기 원하지 않았습니다. 크레이커 남자들은 아만다가 섹스하기 원한다고 착각했고 아만다와 섹스합니다. 이건 섹스가 아닙니다.

 

적어도 이런 섹스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여자(아만다)와 남자(크레이커들)는 평등하게 합의하지 않았습니다. 아만다가 무력하기 때문에, 크레이커 남자들은 일방적으로, 집단적으로 아만다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이건 성 폭행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만약 인간 남자들이 이런 짓거리를 저지른다면, 독자는 이게 성 폭행이라고 판단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미친 아담>은 이 폭행 사건을 대충 넘어갑니다. <미친 아담>은 크레이커 남자들을 부정적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크레이커 남자들은 선량합니다. 크레이커 여자들과 남자들은 미래 인류입니다. 그들은 자연과 소통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이룩할 겁니다.

 

 

크레이커들은 인간에 가까우나, 크레이커와 호모 사피엔스는 다릅니다. 크레이커에게는 성 폭행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다른 인간을 성 폭행한다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모든 섹스는 쾌락입니다. 만약 (크레이커) 여자가 성숙한다면, 크레이커 남자는 여자와 섹스할 겁니다. 그들에게 이건 일상입니다. 여기에는 아무 폭력과 강요가 없습니다. 아만다는 크레이커가 아니나, 크레이커와 인간이 아주 비슷하기 때문에, 크레이커들이 인간 문화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아만다가 원하지 않았음에도, 크레이커 남자들은 아만다와 섹스했습니다. 그래서 이건 성 폭행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합의 없이, 크레이커 남자들이 무력한 아만다와 섹스했다고 해도, <미친 아담>은 이게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소설 속에서 여러 등장인물들은 크레이커 남자들이 아만다를 성 폭행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묘사가 옳은가요? 아무리 생물적으로 문화적으로 크레이커들과 인간들이 다르다고 해도, 분명히 크레이커들과 인간들은 아주 비슷합니다. 크레이커 남자 역시 남자입니다. 아만다가 동의하지 않았음에도, 크레이커 남자들은 아만다에게 일방적으로 성기들을 들이댔습니다. 이런 묘사가 옳은가요? 독자가 이런 묘사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이해해야 하나요?

 

 

초월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독자는 <미친 아담>을 읽지 않습니다. 가부장적인 현실 속에서 독자는 <미친 아담>을 읽습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가부장적입니다. 본질적으로 자본주의는 가부장 제도입니다. 가부장 제도는 여자들을 차별하고 왜곡합니다.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지배 계급은 잉여 생산물들, 사회적인 재화들을 독차지해야 합니다. 잉여 생산물들을 독차지하기 위해 지배 계급은 피지배 계급 노동들을 착취해야 합니다. 지배 계급은 돌봄 노동들을 착취합니다. 돌봄 노동들을 착취하기 위해 지배 계급은 돌봄 노동이 댓가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돌봄 노동은 노동이 아닙니다.

 

여자는 아기를 갖고, 아기를 낳고, 아기를 먹입니다. 임신과 출산과 수유를 위해 여자의 육체는 존재합니다. 여자는 육아를 반드시 맡아야 합니다. 여자가 육아를 맡는다고 해도, 여자는 댓가를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태생적으로 여자가 육아를 맡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엄마에게 육아는 의무입니다. 의무는 댓가를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아니면 이건 개인적인 선택이 됩니다. 육아는 그저 개인적인 선택에 불과합니다. 인류 사회는 개인적인 선택에게 댓가를 지불해서는 안 됩니다. 돌봄 노동은 의무가 되거나 개인적인 선택이 됩니다. 돌봄 노동이 무엇이 되든, 돌봄 노동은 댓가를 절대 요구하지 못합니다.

 

 

돌봄 노동이 댓가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돌봄 노동이 부차적이고 보조적이라고 간주합니다. 돌봄 노동이 인류 문명을 원초적으로 뒷받침함에도, 수많은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들이 번성과 재생산과 진화를 구구절절 강조함에도, 사람들은 돌봄 노동이 부차적이고 보조적이라고 간주합니다. 그리고 많은 돌봄 노동자들은 여자들, 엄마들입니다. 엄마가 돌봄 노동을 맡기 때문에, 아빠와 달리, 엄마는 부차적이고 보조적입니다. 여자가 엄마이기 때문에, 여자 역시 부차적이고 보조적입니다. 남자는 주된 존재이고, 여자는 부차적이고 보조적입니다. 이런 사고 방식은 온갖 억압들, 폭력들로 이어집니다.

 

지배 계급이 돌봄 노동들을 착취하기 때문에, 여자들은 온갖 억압들, 폭력들에 부딪힙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 역시 돌봄 노동들을 착취합니다. 착취를 막기 위해 인류 사회는 돌봄 노동 사회화(의무화)를 실천해야 하나, 자본주의는 사회화를 싫어합니다. 보수 우파 지식인들이 두 눈을 까뒤집고 민영화, 사유화를 찬양하는 것처럼, 자본주의는 사회화보다 민영화, 사유화를 좋아합니다. 자본주의 속에서 돌봄 노동 사회화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착취 경제이고, 본질적으로 자본주의는 가부장 제도입니다. 이건 개인적이고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이건 사회 구조 문제입니다.

 

 

이건 돌봄 노동 착취가 성 차별의 전부라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돌봄 노동 착취와 성 폭력 문화 사이에 직접적인 연결 고리가 없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분명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 폭력은 심각한 사회 문제입니다. 이런 사회 속에서 독자는 <미친 아담>을 읽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 폭력은 심각한 문제이고, 이런 문제 속에서 독자는 <미친 아담>을 읽습니다. 사회 구조에서 개인은 절대 자유롭지 못합니다. 사회 구조는 개인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가부장 제도이고, 가부장 제도가 여자들을 왜곡하기 때문에, 가부장 제도는 성 폭행 문화를 미화합니다.

 

이런 폭력 미화 속에서 독자는 <미친 아담>을 읽습니다. <미친 아담>에서 (크레이커) 남자들은 아만다에게 일방적으로 커다란 성기들을 들이댑니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은 이게 성 폭행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소설 분위기 역시 이게 성 폭행이 아니라고 간주하는 것 같습니다. 이게 올바른 묘사인가요? 동의 없이, 남자가 무력한 여자에게 일방적으로 성기를 들이댔음에도, 이런 묘사에 아무 문제가 없나요? 분명히 크레이커 남자는 호모 사피엔스 남자가 아닙니다. 생물적으로 문화적으로 크레이커 남자와 인간 남자는 다릅니다. 하지만 사이언스 픽션에서 비인간 존재는 인간을 얼마든지 비유할 수 있습니다.

 

 

옵티머스 프라임은 변신 로봇입니다. 하지만 많은 시청자들은 옵티머스 프라임이 오직 로봇 그 자체만이라고 간주하지 않을 겁니다. 시청자들은 옵티머스 프라임이 강하고 건장한 남자 지도자라고 생각할 겁니다. 남자는 강해야 합니다. 남자는 건장해야 합니다. 남자는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자는 강하지 않고 건장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지도자가 되지 못합니다. 아무리 옵티머스 프라임이 변신 로봇이라고 해도, 시청자들은 강하고 건장한 남자 지도자를 옵티머스 프라임에게 대입할 겁니다. 크레이커 남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크레이커 남자는 인간 남자가 되고, 인간 남자는 성기를 들이댑니다.

 

남자가 여자에게 일방적으로 성기를 들이대기 때문에, 여자는 임신합니다. 아만다는 임신합니다. 아만다는 인간-크레이커 아기를 낳습니다. 비록 인류 문명이 멸망했고, 거의 대부분 인간들이 사라졌다고 해도, 인간 여자와 크레이커 남자가 아기를 낳기 때문에, 인류는 명맥을 잃지 않을 겁니다. 비록 크레이커들이 번성한다고 해도, 크레이커 핏줄에는 인류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결론이 감동적이라고 해도, 임신 그 자체가 옳은가요? 아만다가 억지로 임신했음에도, 여기에 아무 문제가 없나요? 이게 감동적인 출산이 되어야 하나요? 결론적으로 출산이 축복이기 때문에, 일방적인 섹스가 긍정인가요?

 

 

이런 시각은 여자가 인간보다 생체 인큐베이터라고 주장하는지 모릅니다. 아기(인간-크레이커)가 필요하기 때문에, 여자(아만다)는 아기를 낳아야 합니다. 아기를 낳기 위해 (크레이커) 남자는 여자(아만다)와 섹스해야 합니다. 아기를 위해 남자는 여자와 섹스해야 합니다. 게다가 남자에게는 아주 커다란 성기가 있습니다. 남자 성기는 끝내주게 커다랗습니다. 이렇게 <미친 아담>은 일방적인 섹스를 주장하는지 모릅니다. 독자는 <미친 아담>이 성 폭력 문화를 미화한다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가부장 제도로서 자본주의 사회가 성 폭행을 미화함에도, 왜 <미친 아담>이 일방적인 섹스를 보여줘야 하나요?

 

자본주의가 성 폭행을 미화함에도, 왜 <미친 아담>이 크레이커 남자들이 아만다에게 달려든다고 이야기하나요? 하지만 또 다른 독자는 <미친 아담>이 성 폭력을 미화하지 않는다고 반박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미친 아담>은 성 폭행이 옳다고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크레이커 남자들이 아만다에게 일방적으로 달려든다고 해도, <미친 아담>은 섹스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지 않습니다. <미친 아담>은 이게 그저 돌발적인 상황에 불과하다고 묘사합니다. 크레이커 남자들이 아만다에게 달려든다고 해도, 이 장면은 너무 짤막합니다. 이건 우연한 사건이고, <미친 아담>은 우연한 사건을 반영합니다.

 

 

문학은 인생을 반영합니다. 인생에 희노애락이 있기 때문에, 문학에도 희노애락이 있습니다. 문학은 희노애락이 옳다고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거울로서 문학은 희노애락을 반영합니다. 문학으로서 <미친 아담>은 우발적인 사건을 반영합니다. 이건 성 폭력 미화가 아닙니다. 크레이커 남자에게 남근 신화를 충족하는 끝내주게 커다란 성기가 있다고 해도, 이건 그저 바이오펑크 설정에 불과합니다. <미친 아담>에서 소설 시점은 크레이커 여자의 육체를 음흉하게 더듬지 않습니다. 마가렛 앳우드는 성 해방 운동을 존중합니다. 작가가 성 해방 운동을 존중하기 때문에, 소설 역시 성 폭력을 미화하지 않을 겁니다.

 

<미친 아담>은 3인칭 시점을 유지합니다. 소설 주인공은 토비이고, 토비는 소설 시점과 가장 가깝습니다. 토비는 여자입니다. 소설 시점이 3인칭이고, 여자 등장인물이 소설 시점과 가장 가까움에도, 어떻게 소설이 성 폭력을 미화할 수 있나요? 하지만 자연과 여자가 생명체를 똑같이 먹이기 때문에, 여자가 자연이 되는 것처럼, 아만다 역시 아기에게 젖을 먹일 겁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상황에서 먹거리를 구하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에, 아기에게 모유는 필수적입니다. 아만다는 신의 정원사들에 속합니다. 정원사들은 자연 환경을 강조합니다. 자연-여자-아만다-수유는 이어집니다. 이건 착착 맞아떨어집니다.

 

 

이런 관계가 너무 착착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미친 아담>은 자연이 생명체를 돌보는 것처럼 여자가 육아를 반드시 맡아야 한다고 간접적으로 암시하는지 모릅니다. 캐롤린 머천트가 루이-에른스트 베리어스를 비판하는 것처럼, 독자는 마가렛 앳우드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마가렛 앳우드는 생태 유토피아를 쓰는 것 같으나, 이건 그저 위선과 가식에 불과하고, 사실 <미친 아담>은 성 차별을 간접적으로 암시하는지 모릅니다. 심지어 감각적이고 몽롱한 명상 속에서 토비는 엄마 돼지와 아기 돼지들을 봅니다. 엄마 돼지에게는 여러 젖퉁이들과 여러 아기들이 있습니다. 아아, 이건 너무 억압적입니다!

 

엄마 돼지, 여러 젖퉁이들, 여러 아기들은 여자, 임신, 출산, 양육을 연결합니다. 여자는 인간보다 엄마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엄마들이 육아 후유증에 시달린다고 해도, 아무리 엄마들이 힘든 임신과 출산과 양육을 맡아야 한다고 해도, 아무리 여자들이 사회적으로 진출하지 못한다고 해도, <미친 아담>은 여자와 임신, 출산, 양육을 연결합니다. 아아, 이건 너무 가부장적인 편견입니다! 그래서 어떤 독자는 <미친 아담>이 성 차별을 미화한다고 비판할 겁니다. 하지만 또 다른 독자는 <미친 아담>이 우발적인 사건을 반영한다고 반박할 수 있습니다. 양쪽 해석은 모두 옳습니다. 여기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이건 평화롭고 고요한 자연이거나 썰렁하고 외로운 자연입니다. 해석보다 중요한 것은 현실입니다.]

 

 

언제나 그러는 것처럼, 문학 해석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문학 해석에 정답이 없기 때문에, 다른 예술 해석들에도 정답이 없을 겁니다. 루이-에른스트 베리어스는 여자(자연)가 옷을 벗는다고 조각했으나, 이 조각상 해석에도 정답이 없을 겁니다. 캐롤린 머천트는 조각상을 비판했으나, 이런 비판은 정답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조각상이 부정적이지 않다고 반박할 수 있습니다. 여자가 자연이고, 자연 없이 인류 문명이 살지 못하기 때문에, 여자 없이 인류 문명은 살지 못합니다. 여자-자연 조각상은 여자가 우월하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어떤 사람들은 조각상을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자-자연 조각상을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정답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조각상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가부장적인 현실입니다. 초월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독자가 <미친 아담>을 읽지 않는 것처럼, 가부장적인 자본주의 속에서 사람들은 여자-자연 조각상을 바라봅니다. 조각상 그 자체는 나쁘지 않은지 모르나,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는 사람들을 세뇌합니다. 고등학교 경제학 교과서를 보세요. 경제학 교과서가 돌봄 노동 착취를 설명하나요? 아니, 경제학 교과서는 자본주의가 정당하다고 설명합니다.

 

 

경제학 교과서는 착취가 정당하다고 설명합니다. 학생들은 착취가 옳다고 배웁니다. 자본주의는 사람들을 세뇌합니다. 이런 세뇌 속에서 사람들이 SF 소설을 읽고 조각상을 감상한다고 해도, 사람들이 제대로 해석할 수 있나요? 우리가 다양한 해석들을 존중해야 하기 때문에, SF 소설과 조각상은 문제가 아닌지 모릅니다. 어머니 자연은 그저 상징에 불과합니다. 어머니 자연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가부장 제도로서 자본주의는 착취 경제이고, 자본주의는 사람들을 세뇌합니다. 분명히 이게 문제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여자-자연 조각상이 차별이라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비단 조각상에서 이런 문제는 그치지 않을 겁니다.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들에서 생물 다양성, 먹이 그물망, 진화는 핵심적인 소재입니다. 어쩌면 모든 인류 문화 매체 중에서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들은 번성, 모성을 가장 강조하는지 모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작은 신이 되고 대자연을 직접 퍼뜨립니다. 무슨 문화 매체가 이런 간접 경험을 제시할 수 있나요? 하드 SF 소설 속에서 개척 과학자들이 외계 행성을 열심히 테라포밍하고 웅장한 삼림 행성을 조성한다고 해도, 독자는 하드 SF 소설을 그저 일방적으로 읽을 뿐입니다. 반면, 게임 플레이어는 자연 환경을 직접 조성합니다.

 

 

만약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이 생생한 자연을 보여준다면, 게임 플레이어는 이게 모성적인 게임 플레이라고 느낄지 모릅니다. 모성적인 게임 플레이? 이런 표현에 아무 문제가 없나요? 누군가는 이런 표현이 가부장적이라고 느낄지 모르고, 누군가는 이런 표현이 그저 상징에 불과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상징이 뭔가를 직접 가리키지 않기 때문에, 모성적인 게임 플레이는 가부장적인 편견을 직접 가리키지 않습니다. 해석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이 게시글에서 둘째 게임 스크린샷은 겨울 자연 풍경을 보여줍니다. 어떤 게임 플레이어는 이런 풍경이 행복한 성탄절과 잘 어울린다고 느낄 겁니다.

 

스크린샷 속의 겨울 자연 풍경은 평화롭고 고요합니다. 겨울 하늘은 하얀 눈송이들을 뿌리고 숲 속을 하얗게 뒤덮습니다. 근본부터 글러처먹은 산업 자본주의가 기후 변화를 일으키기 때문에,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과거지사가 된다고 해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낭만적인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꿈꾸고, 행복한 성탄절과 하얀 겨울 숲 속은 잘 어울립니다. 한편으로 또 다른 게임 플레이어는 게임 속의 겨울 풍경이 썰렁하고 외롭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이런 풍경은 잭 런던이 쓴 단편 소설 <불을 지피다>와 리암 니슨이 주연한 영화 <더 그레이>에 가깝습니다. 두 가지 중에서 무슨 해석이 옳은가요?

 

 

겨울 자연 풍경이 행복한 성탄절에 가깝나요, 아니면 <불을 지피다>에 가깝나요? 여기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심지어 명석한 평론가들조차 정답을 가리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생태계 게임 속의 겨울 풍경이 무엇과 어울리든, 현실 속의 자연 생태계에서 겨울은 힘든 계절입니다. 해석들은 상대적이나, 현실은 유일합니다. '모성적인 게임 플레이'는 그저 상징에 불과합니다. 이 문구는 억압과 성 착취가 되거나 감동적인 생태 철학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유일한 현실입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돌봄 노동을 착취하고 남자가 모성이 되지 못한다고 억압합니다. 이건 상대적인 해석이 아닙니다.

 

착취와 억압은 상대적이지 않습니다. 이건 현실 문제입니다. 가부장적인 현실은 모성을 왜곡하고, 가부장적인 현실 속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자연과 모성을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문제를 비단 SF 소설과 조각상과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만 아니라 다른 상황들에 폭넓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화성 테라포밍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어쩌면 언젠가 인류 문명은 화성 테라포밍을 시도할지 모르고, 소설 <붉은 화성>과 게임 <테라포밍 마스>는 현실이 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가부장적인 자본주의가 자연을 왜곡하고 사람들을 세뇌함에도, 외계 행성 테라포밍이 순조로운 사업이 될 수 있나요?

 

 

이런 착취와 억압, 세뇌 속에서 외계 행성 테라포밍 사업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나요? 그건 아닐 겁니다. 개척 과학자들이 외계 행성을 테라포밍하기 전에, 인류 문명은 가부장 제도를 타파하고, 돌봄 노동 사회화를 실천하고, 성 해방 운동들을 대대적으로 지원해야 합니다. 이런 과정들 이후, 마침내 인류 문명은 외계 행성 테라포밍이 옳은지 논의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과정들과 논의들 없이, 외계 행성 테라포밍은 또 다른 기후 변화, 또 다른 행성급 환경 오염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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