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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기이한 생태학 연구원들과 매체 차이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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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한 생태학 연구원들과 매체 차이들

OneTiger 2020. 2. 11. 19:56

[디드리 스카이는 SF 등장인물입니다. 게임 규칙과 외계 격자 지리 속에서 디드리 스카이는 존재합니다.]

 

 

안얀우는 가상의 인물입니다. 이건 현실 속에서 우리가 안얀우를 직접 만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안얀우처럼, 제인 에어는 가상의 인물입니다. 하지만 안얀우와 제인 에어는 다릅니다. 제인 에어는 19세기 유럽 여자이고, 우리는 현실 속에서 19세기 유럽 여자들이 존재했다고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반면, 안얀우는 동물 변신술사이고, 현실 속에서 동물 변신술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동물 변신술사가 존재한다고 확인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제인 에어가 가상의 인물이라고 해도, 제인 에어는 19세기 유럽 여자에 속하고, 이런 범주는 존재합니다. 안얀우는 다릅니다.

 

제인 에어와 달리, 안얀우는 동물 변신술사에 속하고, 현실 속에서 이런 범주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안얀우처럼, 소설 <소멸의 땅>에서 여자 생물학자와 영화 <아바타>에서 그레이스 오거스틴과 비디오 게임 <알파 센타우리>에서 디드리 스카이는 가상의 인물들입니다. 여자 생물학자는 X 구역을 탐사합니다. 그레이스 오거스틴은 외계 식물학자입니다. 디드리 스카이는 외계 생태주의 대표자입니다. 현실에서 세 범주(X 구역 탐사대, 외계 식물학자, 외계 생태주의 단체)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레이스 그 자체는 일반적인 백인 여자이나, 그레이스는 단순한 백인 여자가 아닙니다.

 

 

그레이스 오거스틴은 백인 여자이고, 현실 속에서 우리는 수두룩한 백인 여자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제인 에어처럼, 그레이스 오거스틴은 비일상적인 상상력, SF 설정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레이스 오거스틴은 영화 <아바타> 주연 등장인물이고, 만약 그레이스에게 오직 일반적인 백인 여자 속성만 있었다면, 영화 <아바타>에서 그레이스는 주연 등장인물이 되지 못했을 겁니다. 그레이스 오거스틴이 유능한 외계 식물학자이고, 원주민 부족과 친숙하고, 영리 기업과 환경 파괴에 반대하기 때문에, 스페이스 오페라 <아바타>에서 그레이스는 주연 등장인물입니다.

 

영화 <아바타>가 그레이스 오거스틴을 표현하는 동안, <아바타>는 오직 일반적인 백인 여자만으로서 그레이스를 묘사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백인 여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레이스 오거스틴이 동남 아시아 트랜스젠더나 흑인 남자나 아라비아 여자라고 해도, 중요한 것은 외계 식물학자 역할입니다. 외계 식물학자로서 그레이스는 외계 행성 생태계를 연구하고, 외계 부족에게 친숙하고, 영리 기업과 환경 파괴에 반대합니다. 영화가 그레이스를 표현하는 동안, 영화는 비단 그레이스만 아니라 외계 열대 밀림을 함께 보여줍니다. 그레이스와 외계 열대 밀림은 함께 존재합니다.

 

 

외계 식물학자로서 그레이스 오거스틴은 외계 열대 밀림과 함께 존재합니다. 영화 <아바타>는 화려한 시각 효과를 동원하고 SF 설정을 표현합니다. 화려한 시각 효과 속에서 그레이스 오거스틴은 존재합니다. 만약 <아바타>가 촌스럽고 시시하고 어설픈 시각 효과를 연출했다면, 관객들은 <아바타>에 별로 감탄하지 않았을 겁니다. 외계 열대 밀림이 시시하고 어설프기 때문에, 외계 식물학자로서 그레이스 오거스틴 역시 시시하고 어설플 겁니다. 외계 열대 밀림 없이, 그레이스 오거스틴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외계 열대 밀림 없이, 그레이스 오거스틴 역할은 너무 희미해질 겁니다.

 

외계 식물학자로서 그레이스 오거스틴과 외계 열대 밀림이 떨어지지 않고, 영화 <아바타>가 환상적인 외계 열대 밀림을 연출하기 때문에, 환상적인 외계 열대 밀림 속의 식물학자로서 그레이스 오거스틴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례가 보여주는 것처럼, 그 자체로서 SF 등장인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외계 식물학자가 존재한다고 추상적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인 에어와 달리, 현실 속에서 외계 식물학자 범주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현실 속에서 아직 우주 생물학이 외계 식생 그 자체를 찾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특정한 매체를 동원하고 외계 식물학자를 표현합니다.

 

 

스페이스 오페라 <아바타>는 블록버스터 영화입니다. <아바타>는 비단 스페이스 오페라일 뿐만 아니라 블록버스터 영화입니다. SF 울타리에는 수많은 스페이스 오페라들이 있으나, <아바타>는 아주 특별한 위상을 차지합니다. 이 영화가 아주 놀라운 시각 효과를 자랑하기 때문입니다. 관객들은 <아바타>에 감탄하나, 관객들은 오직 스페이스 오페라 설정에만 감탄하지 않습니다. 관객들은 놀라운 시각 효과에 감탄합니다. 사실 <아바타>는 2009년 영화입니다. 반면, <시드 마이어의 알파 센타우리>는 1999년 비디오 게임입니다. <아바타>처럼, <알파 센타우리>는 스페이스 오페라입니다.

 

<아바타>처럼, <알파 센타우리>는 외계 자연 환경을 보여줍니다. <아바타>처럼, <알파 센타우리>에서 인류 문명은 외계 행성을 개척하나, 가이아 생태주의 단체는 외계 자연 환경과 공존합니다. 디드리 스카이는 가이아 단체를 대표하고, 어떤 관점에서 <아바타>와 <알파 센타우리>에서 그레이스 오거스틴과 디드리 스카이는 비슷한 역할을 맡습니다. 비록 그레이스 오거스틴과 디드리 스카이가 비슷한 역할을 맡지 않는다고 해도, <아바타>와 <알파 센타우리>에게는 여러 유사성들이 있습니다. 양쪽에게는 여러 유사성들이 있고, 2009년 <아바타>보다 1999년 <알파 센타우리>는 우선합니다.

 

 

하지만 <알파 센타우리>보다 <아바타>는 훨씬 특별한 위상을 차지합니다. 적어도 <알파 센타우리>보다 <아바타>는 훨씬 유명하고 대중적인 흥행작입니다. <알파 센타우리>는 4X 게임입니다. 영화 관람과 달리, 4X 게임 플레이어는 훨씬 마이너합니다. 6살짜리 아이가 <아바타> 설정과 줄거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6살짜리 아이는 환상적인 열대 밀림을 관람하고 감탄할 수 있습니다. 반면, 6살짜리 아이에게 기술 사다리는 너무 복잡합니다. 6살짜리 아이는 4X 게임을 능동적으로 플레이하지 못합니다. 1999년 게임으로서 <알파 센타우리>는 멋진 그래픽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2016년 비디오 게임 <스텔라리스>는 압도적이고 웅장하고 환상적인 우주 풍경을 자랑합니다. 6살짜리 아이는 우주 함대와 에테르 드레이크가 웅장하고 환상적으로 항해한다고 감탄할지 모릅니다. 1999년 게임으로서 <알파 센타우리>는 그저 몇몇 (어설픈) 동영상을 보여줄 뿐입니다. 6살짜리 아이는 감탄하지 않을 겁니다. 만약 <알파 센타우리>가 놀라운 시각 효과를 동원하고 외계 생태계와 첨단 장비들을 보여준다면, 6살짜리 아이는 감탄하겠으나, <알파 센타우리>는 <스텔라리스>가 아닙니다. 어떤 관점에서 <아바타>보다 <알파 센타우리>는 훨씬 거시적인 생태학 SF 설정을 자랑합니다.

 

 

하지만 <아바타>보다 <알파 센타우리>가 거시적인 설정을 자랑한다고 해도, 매체와 표현 형식 때문에, 6살짜리 아이는 <알파 센타우리>보다 <아바타>에 감탄할 겁니다. 이건 모든 사람이 <알파 센타우리>보다 <아바타>에 감탄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생태학 SF 덕후들에게 표현 형식보다 생태학 설정은 훨씬 중요할지 모릅니다. 이런 SF 덕후들에게 <아바타>보다 <알파 센타우리>는 훨씬 특별한 위상이 됩니다.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블록버스터 영화 관람보다 4X 게임 플레이를 훨씬 선호할지 모릅니다. 극장은 영화를 일방적으로 보여주고, 관객은 영화를 일방적으로 관람합니다.

 

극장에서 관객은 영화에 개입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블록버스터 영화가 화려한 시각 효과를 동원하고 4D 효과를 동원한다고 해도, 관객은 영화 서사에 개입하지 못합니다. 반면, <알파 센타우리>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게임 서사에 관여할 수 있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외계 생태학을 우선적으로 연구하거나, 침략 전쟁보다 내정과 외교에 치중하거나, 외계 동물상과 적극적으로 교감하거나, 삼림보다 해안을 먼저 탐험할 수 있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가이아 단체보다 다른 개척 세력들을 선택하고 게임 진행과 결말을 바꿀 수 있습니다. <아바타>에서 관객은 영화 진행을 바꾸지 못합니다.

 

 

영화와 달리, 게임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적극적으로 개입합니다. 심지어 테이블 게임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규칙을 바꿀지 모릅니다. 테이블 게임에서 게임 플레이어가 주사위 5를 굴렸음에도, 게임 플레이어는 5가 6이라고 착각할지 모릅니다. 게임 카드가 저항 판정 4를 제시했음에도, 게임 플레이어는 4가 5라고 착각할지 모릅니다. 게임 보드에서 협곡 타일과 해안 타일이 이어지지 않음에도, 게임 플레이어는 협곡과 해안이 이어진다고 착각하고 협곡에서 해안으로 탐험대를 움직일지 모릅니다. 만약 해안 타일에서 탐험대가 귀중한 자원을 찾는다면, 게임 플레이어는 아주 의기양양할 겁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주사위 6과 저항 판정 5와 해안 타일 경로를 착각하기 때문에, 게임 서사는 너무 크게 바뀝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실패해야 함에도, 이런 착각들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는 승리할지 모릅니다. 테이블 게임에서 이런 사례들은 드물지 않습니다. 만약 게임 규칙이 복잡하고, 기물들과 카드들이 많고, 보드 게임 까페가 떠들썩하고 산만하다면, 이런 착각들은 드물지 않을 겁니다. 이렇게 테이블 게임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규칙을 바꿀 수 있습니다. 비디오 게임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규칙을 함부로 바꾸지 못하나, 게임 플레이어는 게임 서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결말을 바꿀 수 있습니다.

 

 

[아무리 관객이 외계 식물학자를 직접 조종하기 원한다고 해도, 영화 매체에서 이건 불가능합니다.]

 

 

영화에서 이건 불가능합니다. <알파 센타우리>에서 가이아 단체 대표자로서 게임 플레이어는 외계 개척에 개입할 수 있으나, 영화 <아바타>에서 관객은 서사에 직접 개입하지 못합니다. 관객은 그저 그레이스 오거스틴이 영리 기업에게 저항한다고 관람할 뿐입니다. 이건 쌍방향 상호 작용보다 그저 일방적인 관람에 불과합니다. 어쩌면 어떤 관객들은 영화 서사가 영리 기업을 훨씬 적극적으로 견제하기 원할지 모릅니다. 비록 그레이스가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구체적으로 분석하지 않는다고 해도, 사실 녹색 자본주의는 미친 헛소리입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환경 보호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생태 사회주의 서적 <생태 혁명>이 지적한 것처럼, 자본주의는 오직 불모지만 남깁니다.

 

에코 페미니스트로서 마리아 미스가 지적한 것처럼, 자본주의는 자연을 수동적인 여자라고 간주합니다. 가부장 문화가 수동적인 여자를 정복하는 것처럼,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자연-인간 연결 고리는 부서집니다. 자연은 그저 외부 효과에 불과하고, 자본주의는 무한 경제 발전을 외칩니다. 자본주의가 자연-인간 연결 고리를 파괴하기 때문에, 녹색 자본주의는 미친 헛소리입니다. 만약 우리가 기후 변화에 정말 대처하기 원한다면, 자본주의는 하루 빨리 사라져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관객들은 영화가 자본주의를 훨씬 비판하기 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관객들은 영화를 바꾸지 못합니다. 영화 <아바타>와 달리, 게임 <알파 센타우리>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서사에 개입할 수 있습니다.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자연 환경을 반드시 파괴해야 합니다. 자본주의와 환경 보호는 절대 공존하지 못합니다. 자본주의는 환경 보호를 반드시 억압하고, 왜곡하고, 고립시켜야 합니다. 탄소 배출권 같은 헛소리처럼, 자본주의 시장 경제 속에서 환경 운동은 지배 계급을 떠받들기 위한 얄팍한 포장지가 됩니다. 계급 사회에서 가장 지배적인 관념은 지배 계급 관념입니다. 환경 운동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환경 운동은 지배 계급을 떠받들기 위한 환경 운동이 됩니다. 그래서 환경 운동가들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감싸고 돕니다.

 

자연 환경을 걱정한다고 자청하는 얄팍한 진보들은 자본주의를 감싸고 돕니다. 얄팍한 진보들은 탐욕스럽고 멍청한 인류가 자연 환경을 파괴한다고 주장하나, 얄팍한 진보들은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않습니다. 이미 19세기 사회주의자들이 "가난한 노동자들에게는 병들고 죽기 위한 권리 이외에 다른 권리가 없다."고 자본주의 환경 오염을 비판했음에도, 얄팍한 진보들은 자본주의를 애지중지 떠받듭니다. 이건 흑인 인권 운동가가 노예 제도 사회를 감싸고 도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자본주의가 지배적인 관념을 세뇌하기 때문에, 얄팍한 진보들은 망상을 주장합니다. 

 

 

만약 게임 플레이어가 자유 시장 경제를 밀어내기 원한다면, 게임 플레이어는 다른 경제 체제를 선택하고, 외계 생태계와 공존하고, 게임 서사를 바꿀 수 있습니다. <알파 센타우리>에서 이건 가능합니다. 정신적인 계승작 <문명: 비욘드 어스>에서도 이건 가능합니다. 알 팔라 조화 세력은 아메리카 기업 순수 세력을 우선적으로 배척하고 밀어낼 수 있습니다. <문명: 비욘드 어스>와 달리, <아바타>에서 관객은 그레이스 오거스틴을 직접 조종하지 못합니다. "언제나 영리 기업은 오직 이윤만 노릴 뿐입니다! 영리 기업은 환경 보호에 관심을 절대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관객은 그레이스를 조종하지 못합니다.

 

<문명: 비욘드 어스>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알 팔라와 조화 친화도를 선택하고 아메리카 기업 순수 세력을 적극적으로 견제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알 팔라 조화 세력은 아메리카 기업 순수 세력에게 첩보원을 보내고, 알 팔라 조화 첩보원은 거대 괴수 공성 벌레를 부를 수 있습니다. 순수 도시에서 공성 벌레는 난리법석을 피우고 건물들을 파괴합니다. 4X 게임 <비욘드 어스>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이런 서사를 계획하고 진행할 수 있습니다. 영화 <아바타>에서 이건 불가능합니다. 관객은 영화 서사를 계획하지 못하고 진행하지 못합니다. 관객이 그레이스를 좋아한다고 해도, 관객은 그레이스를 조종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알파 센타우리>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다른 개척 단체들을 선택하고 외계 생태계를 의도적으로 파괴할 수 있습니다. 4X 게임으로서 <알파 센타우리>는 열린 결말을 보장하고, 게임 플레이어는 개척 세력들이 외계 생태계를 파괴한다고 진행할 수 있습니다. <아바타>에서 이건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관객이 간절하게 원한다고 해도, 영리 기업은 판도라 위성을 장악하지 못합니다. 어떤 관객들은 시장 경제가 외계 열대 밀림을 장악하기 원할지 모르나, 판도라 자연 생태계는 영리 기업 용병들을 밀어냅니다. 자본주의 용병들은 반드시 패배합니다. 영화와 게임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한편으로 영화와 게임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레이스 오거스틴과 디드리 스카이는 외계 생태계를 연구합니다. 외계 생태계는 낯선 자연, 신비로운 자연, 기이한 자연입니다. 그레이스와 디드리는 낯설고 신비롭고 기이한 자연을 연구합니다. 이건 낯설고 신비롭고 기이한 심상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바타>와 <알파 센타우리>는 등장인물 심상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양쪽은 구체적인 심상 묘사를 중시하지 않습니다. 영화 <아바타>에서 구체적인 심상보다 화려한 시각 효과는 훨씬 중요합니다. 비디오 게임 <알파 센타우리>에서 구체적인 심상보다 게임 규칙은 훨씬 중요합니다.

 

 

소설 <소멸의 땅>에서 여자 생물학자는 X 구역을 탐사합니다. X 구역에는 낯설고 신비롭고 기이한 자연 환경이 있습니다. 여자 생물학자는 낯설고 신비롭고 기이한 자연 환경을 바라보고, 느끼고, 고민합니다. <소멸의 땅>은 여자 생물학자 심상을 구체적이고 지속적으로 묘사합니다. <소멸의 땅>에서 여자 생물학자 심상은 핵심적인 비중을 차지합니다. <소멸의 땅>은 소설입니다. 소설은 글자 매체입니다. 글자는 추상적인 심상을 구체적으로 서술할 수 있습니다. 영화와 게임보다 소설은 구체적인 심상 묘사에 훨씬 어울립니다. 그래서 어떤 독자들은 영화, 게임보다 소설을 좋아합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생각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이런 용어가 너무 거창하다고 해도, 분명히 우리는 생각하고, 느끼고, 말합니다. 이것들은 추상적입니다. 감성, 심상, 대화는 추상적입니다. 아무리 기계 장치가 뇌파를 기록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심상이 시각적이라고 간주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심상을 묘사하기 위한 가장 좋은 표현 형식은 언어입니다. 소설은 글자들을 동원하고 심상을 구체적으로 서술할 수 있습니다. 독자는 소설을 읽고 등장인물과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비단 생각하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존재, 호모 소시올로지쿠스(homo sociologicus)입니다.

 

 

'생각하는 존재' 호모 사피엔스와 '사회적인 존재' 호모 소시올로지쿠스로서 인간에게 다른 매체들보다 소설은 가장 좋은 매체인지 모릅니다. 소설이 등장인물 심상을 묘사하고 사회적인 관계를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영화와 게임 역시 등장인물 심상을 묘사하고 사회적인 관계를 제시할 수 있으나, 영화와 게임보다 소설은 훨씬 능숙합니다. 게임북 <공룡 박물관의 공포>처럼, 게임은 텍스트를 압도적으로 늘릴 수 있으나, 이런 게임에서 규칙보다 텍스트는 훨씬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게임북은 게임보다 소설에 가까울지 모릅니다. 흐음, 게임북이 게임에 속하나요, 아니면 소설에 속하나요?

 

수많은 페미니즘들이 모두 똑같은 페미니즘이 아닌 것처럼, 이런 분류는 헛갈립니다. 어떤 사람은 페미니즘이 남자 자지들을 뎅겅뎅겅~ 잘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페미니즘이 모성적인 사회, 돌봄 노동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페니미즘에게 대조적인 측면(뎅겅뎅겅과 모성 사회)이 있는 것처럼, 어떤 독자에게 <공룡 박물관의 공포>는 소설일 테고, 어떤 게임 플레이어에게 <공룡 박물관의 공포>는 게임일 겁니다. 어쩌면 소설과 게임 경계선에서 <공룡 박물관의 공포>는 존재하는지 모릅니다. <공룡 박물관의 공포>가 무엇이든, 글자 매체는 심상을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그래서 '소설' 등장인물과 '영화' 등장인물, '게임' 등장인물은 다릅니다. 소설 등장인물로서 여자 생물학자는 그레이스 오거스틴 및 디드리 스카이와 다릅니다. 하지만 글자 매체는 시각적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소멸의 땅>이 섬세하고 정교한 필력을 자랑한다고 해도, X 구역 생태계는 시각적이지 않습니다. '소설' <소멸의 땅>은 어떤 비일상적이고 혐오스러운 존재를 묘사하나, 독자는 이것을 시각적으로 확인하지 못합니다. '영화' <아바타>에서 화려한 외계 열대 밀림과 함께 그레이스 오거스틴은 존재합니다. '비디오 게임' <알파 센타우리>는 외계 생태계를 시각적으로 묘사합니다.

 

비록 1999년 게임으로서 <알파 센타우리>가 우중충한 그래픽을 보여준다고 해도, 분명히 '비디오' 게임 <알파 센타우리>는 외계 생태계를 시각적으로 묘사합니다. 반면, 소설 <소멸의 땅>에서 시각적인 정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표지 그림 이외에, 독자는 다른 시각적인 정보를 찾지 못합니다. 글자는 지배적인 기호, 사회적인 기호입니다. 글자는 대상을 보편적으로 묘사합니다. 아무리 소설 작가가 낯선 식생이 놀랍다고 쓴다고 해도, '놀라움'은 보편적인 일반 명사입니다. 보편적인 일반 명사는 놀라움을 정말 놀랍게 포착하지 못합니다. 반면, 영화와 비디오 게임은 묘사할 수 있습니다.

 

 

[글자 매체는 신비로운 자연 환경을 시각적으로 묘사하지 못하나, 글자 매체는 심상 묘사에 어울립니다.]

 

 

하지만 소설이 그저 놀라움을 보편적으로 묘사할 뿐이라고 해도, 글자 매체로서 소설은 기호들 덩어리입니다. 문자 그대로 하얀 것은 종이고, 검은 것은 글자입니다. 독자가 소설을 읽는 동안, 독자는 기호들을 끊임없이 해독합니다. 특히, <소멸의 땅>이 사이언스 픽션이기 때문에, 독자는 보편적인 기호들을 읽고 비일상적인 자연 생태계 분위기를 스스로 연출합니다. 이런 과정은 독자 사고 방식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독자는 소설 속의 세계에 능동적으로 참가합니다. 이런 과정이 추상적이기 때문에, 이건 다소 어려울지 모르나, 독자가 능동적으로 참가하기 때문에, SF 독서는 정말 매력적입니다.

 

"풍경은 검은 물과 사이프러스 나무들의 회색 줄기들, 그리고 멈춰 있는 빗줄기 같은 이끼들뿐이었다. 들을 수 있는 소리는 낮은 신음뿐이었다. 그 효과는 직접 경험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다. 그 아름다움 또한 마찬가지다. 적막함 속에서 만나는 아름다움은 사람의 내면을 변화시킨다. 적막함에 사로잡히고 마는 것이다." 이 경이로운 문구들은 왜 독자가 만화, 영화, 연극, 게임보다 소설을 좋아하는지 멋지게 증명합니다. 이 문구들은 추상적인 심상을 묘사합니다. 영화는 기이한 자연 풍경을 시각적으로 보여줄 수 있으나, 영화는 어떻게 기이한 자연 풍경이 인간 심리를 바꾸는지 보여주지 못합니다.

 

 

인간 심리는 추상적이고, 영상 매체로서 영화는 추상적인 세계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지 못합니다. 영화는 표정 연기, 장면 전환, 배경 음악, 효과음, 독백과 대사, 다른 여러 방법들을 이용하고 심상 변화를 표현할 수 있으나, 이런 연출들은 인간 심리를 직접 드러내지 않습니다. 영화에서 여자 생물학자가 위 문구들을 직접 말하거나 독백으로 생각한다고 해도, 영상 매체로서 영화는 이런 문구들을 지속적으로 늘어놓지 못합니다. 만화, 연극, 게임 같은 다른 매체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노 드라마 연극에서 배우가 지속적으로 떠든다고 해도, 여기에서 다른 표현 형식보다 언어는 훨씬 중요합니다.

 

만약 울창한 숲 속에서 독자가 고요한 분위기를 즐기고 자연에 감응한 적이 있다면, 독자는 위 문구들을 생생하게 느낄 겁니다. 만약 한적하고 거대한 호수 주변에서 독자가 출렁거리는 물결과 깊고 깊은 물속을 명상한 적이 있다면, 독자는 위 문구들을 생생하게 느낄 겁니다. 만약 하얀 겨울 벌판에서 독자가 고독을 느낀 적이 있다면, 만약 낯설고 인적이 드문 해변에서 독자가 밤바다를 바라보고 장중한 심해가 전율적이라고 느낀 적이 있다면, 독자는 여자 생물학자에게 깊게 공감할 겁니다. 소설, 글자 매체 속에서 여자 생물학자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멸의 땅>은 매력적입니다.

 

 

여자 생물학자와 그레이스 오거스틴과 디드리 스카이는 모두 SF 등장인물입니다. 세 사람들은 낯설고 기이하고 신비로운 자연 환경을 연구하고, 탐사하고, 관찰합니다. 하지만 세 사람들은 모두 똑같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심상 묘사와 함께 여자 생물학자는 존재합니다. 화려한 시각 효과와 함께 그레이스 오거스틴은 존재합니다. 게임 규칙 및 그래픽 효과와 함께 디드리 스카이는 존재합니다.

 

 

※ 게임 <알파 센타우리> 스크린샷 출처: nweismuller,

https://lparchive.org/Sid-Meiers-Alpha-Centauri-(by-nweismuller)/Update%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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