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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자연 신학>과 유사성 기준들 본문

감상, 분류, 규정/자연과 문명

<자연 신학>과 유사성 기준들

OneTiger 2019. 12. 17. 20:51

[유사성이 해석 기준이 될 때, 여기에는 의도, 관념, '배후'가 있습니다. 해석보다 '배후'는 중요합니다.]



"겨울비처럼 슬픈 노래를 이 순간 부를까~♬" 아니, 왜 겨울에 비가 내리나요? 겨울은 눈입니다. 겨울 왕국이 눈송이들을 뿌리는 것처럼, 겨울은 빗줄기보다 눈송이입니다. "숨겨진 세사아아아아앙~♬"은 빗줄기들을 뿌리지 않습니다. "숨겨진 세상~♬"은 눈송이들을 휘날립니다. 하지만 왜 가수가 겨울비를 노래하나요? 겨울이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자랑함에도, 왜 가수가 겨울비를 노래하나요? 왜 겨울 하늘이 빗줄기들을 뿌리나요? 어쩌면 기후 변화 때문인지 모릅니다. 기후 변화 때문에, 지구 온도가 올라가기 때문에, 겨울은 따뜻하고, 겨울 하늘은 눈송이들보다 빗줄기들을 뿌립니다.


"겨울비처럼 슬픈 노래를~♬" 이 가사는 지구 온난화를 걱정합니다. 그래서 이 노래는 애절합니다. 기후 변화가 심각한 환경 오염이기 때문에, 노래 <겨울비>는 애절합니다. 김종서가 기후 변화를 걱정했기 때문에, 김종서는 <겨울비>를 불렀을 겁니다. 하지만 이건 너무 과잉 해석일 겁니다. 아무리 김종서가 <겨울비>를 애절하게 부른다고 해도, <겨울비>와 기후 변화 사이에는 필수적인 연결 고리가 없습니다. 어쩌면 김종서는 정말 기후 변화를 걱정했는지 모르나, <겨울비>에서 심각한 환경 오염을 증명하기 위한 단서들은 너무 부족합니다. 이 노래는 환경 오염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기후 변화와 <겨울비>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습니다. <겨울비>는 애절하고, 따뜻한 겨울 하늘은 눈송이들보다 빗줄기들을 뿌립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김종서가 기후 변화를 걱정한다고 해석할지 모릅니다. 정말 김종서는 기후 변화를 걱정하는지 모르나, 그렇다고 해도 <겨울비>에는 환경 오염들을 비판하기 위한 단서들이 별로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겨울비>가 기후 변화보다 서글픈 사랑을 노래한다고 해석할 겁니다. 기후 변화와 <겨울비>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고 해도, 유사성은 만능 열쇠가 아니고 장땡이 아닙니다. 유사성은 모든 해석이 옳다고 완벽하게 보장하지 않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유사성을 만능 열쇠라고 간주한다면, 이건 유사성의 함정이 될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유사성을 너무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유사성을 너무 쉽게 찾기 때문에, 우리는 유사성의 함정에 너무 쉽게 빠질지 모릅니다. 책상에는 네 다리들이 있습니다. 아무르 호랑이에게는 네 다리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책상과 아무르 호랑이는 비슷한 부류가 됩니다. 아무르 호랑이가 겨울 숲 속의 사냥꾼이기 때문에, 책상 역시 겨울 숲 속의 사냥꾼이 됩니다. 우리는 겨울 숲 속에서 책상이 잠복할 거라고 기대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건 유사성의 함정입니다. 겨울 숲 속에서 책상은 잠복하지 않습니다.



책상은 겨울 숲 속의 사냥꾼이 아닙니다. 이건 너무 황당무계합니다. 우리는 이게 너무 황당무계한 분류라고 조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상황이 훨씬 복잡해진다면, 우리는 책상과 아무르 호랑이가 비슷한 부류라고 착각할지 모릅니다. 훨씬 복잡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책상이 겨울 숲 속의 사냥꾼이라고 오해할지 모릅니다. 18세기 서구 성직자 윌리엄 페일리는 <자연 신학>을 썼습니다. <자연 신학>은 지적 설계를 주장합니다. 만약 우리가 시계를 본다면, 우리는 누군가가 시계를 만들었을 거라고 추정할 겁니다. 시계는 자연 발생하지 않았을 겁니다. 시계는 정교하고 복잡합니다.


시계가 정교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이런 정교하고 복잡한 체계는 자연 발생하지 않았을 겁니다. 분명히 누군가는 시계를 만들었을 겁니다. 아무도 이것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아무도 시계가 자연 발생한다고 주장하지 못합니다. 누군가는 시계를 만들었습니다. 시계에게 시계공이 있는 것처럼, 정교하고 복잡한 체계에는 설계자가 있어야 합니다. 자연 생태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연 생태계는 아주 정교하고 복잡한 체계입니다. 심지어 생태학자들은 어떻게 자연 생태계가 순환하는지 완벽하게 분석하지 못합니다. 이런 아주 정교하고 복잡한 체계가 자연 발생할 수 있나요? 이건 불가능합니다.



자연 생태계는 절대 자연 발생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건 불가능합니다. 자연 생태계는 아주 복잡하고, 그래서 자연 생태계에게는 설계자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누가 자연 생태계를 설계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설계자를 제대로 밝히지 못할지 모릅니다. 어떻게 감히 인간이 위대한 설계자를 밝힐 수 있나요? 만약 어떤 설계자가 자연 생태계를 만들었다면, 설계자는 아주 위대할 겁니다. 감히 인간은 위대한 설계자에게 범접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 분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이렇게 <자연 신학>은 위대한 설계자가 복잡하고 정교한 체계를 만들었다고 주장합니다. 비단 <자연 신학>만 아니라 여러 지식인들은 위대한 설계자를 지지했습니다.


분명히 시계와 자연 생태계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습니다. 양쪽 모두 복잡하고 정교한 체계입니다. 시계공이 시계를 만드는 것처럼, 설계자는 복잡하고 정교한 체계를 만들었을 겁니다. 자연 생태계는 복잡하고 정교합니다. 누군가는 자연 생태계를 만들었을 겁니다. 자연 생태계는 절대 자연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논리가 옳은가요? 분명히 이 주장은 뚜렷한 유사성을 제시합니다. <자연 신학>이 뚜렷한 유사성을 제시하기 때문에, <자연 신학>이 옳은가요? 누군가가 자연 생태계를 만들었나요? 하지만 왜 시계와 자연이 비슷해야 하나요? 왜 다른 유사성들보다 설계자가 중요한 기준이 되어야 하나요? 이런 유사성 기준에 '배후'가 없나요?



시계와 자연 생태계처럼, 우리는 유사성을 계속 찾을 수 있습니다. 자연 생태계는 오직 시계와만 비슷하지 않습니다. 사실 시계가 나타나기 전부터, 사람들은 자연이 다른 뭔가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연은 여자와 비슷합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자연은 생명체들을 낳습니다. 자연은 생명력을 자랑합니다. 자연이 생명체들을 낳고 생명력을 자랑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을 예찬합니다. 만약 어떤 골짜기가 아주 방대하고 웅장하다고 해도, 만약 골짜기에 생명체가 없다면, 우리는 웅장한 골짜기를 '자연'이라고 부르지 않을 겁니다. 골짜기가 자연이 된다고 해도, 이 자연은 '자연'이 아닙니다.


쓰나미, 지진, 화산 폭발, 허리케인이 자연의 힘, 포스 오브 네이처가 되는 것처럼, 자연은 생명 현상을 반드시 가리키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풍요로운 자연을 예찬할 때, '자연'은 생명 현상을 가리킵니다. 심지어 작은 텃밭에서조차 우리는 '자연의 힘', 번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만화 수필 <독립 생활 다이어리>에서 다카기 나오코는 차조기 화분을 키우고 생명력을 느낍니다. 작은 화분에서 차조기는 쑥쑥 자라고 무성한 잎들을 펼칩니다. 다카기 나오코는 생명 현상, 번성, 자연을 느낍니다. 비단 다카기 나오코만 아니라 많은 예술가들, 이론가들, 철학자들은 자연이 생명력, 번성이라고 예찬합니다.



자연이 생명력, 번성인 것처럼, 여자 역시 생명력, 번성입니다. 여자는 아기를 낳습니다. 여자와 남자에게 가장 커다란 차이는 생명력, 번성입니다. 남자는 아기를 낳지 못합니다. 반면, 여자는 아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엄마는 자신의 육체를 이용하고 뱃속의 아기에게 지속적으로 영양분을 공급합니다. 엄마는 아기를 낳고 젖가슴으로 아기를 먹일 수 있습니다. 엄마의 육체는 정말 생태계 같습니다. 자연 생태계가 먹이 그물망인 것처럼, 엄마가 아기를 계속 먹이기 때문에, 엄마의 육체는 먹이 그물망입니다. 대지에서 새싹들이 쑥쑥 자라는 것처럼, 엄마는 대지와 비슷합니다. 대지모신은 엄마와 대지를 연결합니다.


대지는 흙입니다. 인류 문명의 고향별, 이 행성은 地球입니다. 우리는 이 행성을 地球라고 부릅니다. 地球는 둥근 흙이라는 뜻입니다. 地는 흙입니다. 그래서 지구는 어머니 행성입니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지구가 어머니 행성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렇게 자연, 여자, 엄마, 대지, 생명력, 번성, 지구는 줄줄이 이어집니다. 여기에는 아주 뚜렷하고 강력하고 커다란 유사성들이 있습니다. 아무도 이것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많은 예술가들, 이론가들, 철학자들은 아주 뚜렷하고 강력하고 커다란 유사성들을 인정했습니다. 심지어 프랜시스 베이컨 같은 계몽주의 지식인들조차 이것(여자와 자연)을 인정합니다.



다카기 나오코가 여자이기 때문에, 어쩌면 다카기 나오코는 무성한 차조기 잎들이 자신과 비슷하다고 느꼈는지 모릅니다. 만약 다카기 나오코가 이것을 느끼지 않았다고 해도, 다카기 나오코는 여자로서 자신이 번성, 생명력이라고 느꼈을 겁니다. 그래서 다카기 나오코는 만화 수필 <서로 40대에 결혼>을 그렸을 겁니다. <서로 40대에 결혼>에서 다카기 나오코는 임신을 직접 느끼기 원합니다. 다카기 나오코가 임신을 직접 느끼기 원하는 것처럼, 여자는 번성, 생명력이고, 여자와 자연은 비슷합니다. 하지만 '자연'은 많은 것들을 가리킵니다. 아무르 호랑이와 차조기 잎들은 모두 '자연'입니다. 아무르 호랑이와 차조기 잎들은 모두 생명 현상입니다.


그래서 여자가 무엇과 비슷한가요? 호랑이와 차조기 중에서 여자가 무엇과 비슷한가요? 대답은 차조기입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여자가 수동적이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대지입니다. 대지에서 식물들은 자랍니다. 여자와 식물은 비슷합니다. 생물학적으로도 수동적인 여자와 수동적인 식물은 비슷합니다. 섹스를 보세요. 아내와 남편이 섹스하는 동안, 남편은 성기를 적극적으로 쑤십니다. 아내는 쑤시지 못합니다. 남편의 성기가 쑤시기 때문에, 아내의 음문은 그저 남편의 성기를 수동적으로 받아줄 뿐입니다. 수동적인 측면은 중요한 유사성 기준입니다. 시계와 설계자처럼, 우리는 수동적인 측면이 중요한 기준이라고 반드시 간주해야 합니다.



난자와 정자를 보세요. 정자는 열심히 움직입니다. 열심히 움직이기 위해 정자에게는 꼬리가 있습니다. 반면, 난자는 기다립니다. 난자는 정자를 수동적으로 기다립니다. 난자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식물 역시 움직이지 않습니다. 식물은 수동적입니다. 여자와 식물은 똑같이 수동적입니다. 그래서 여자가 '자연'이라고 해도, 여자는 아무르 호랑이보다 차조기 잎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자가 수동적이기 때문에, 여자보다 남자는 주된 역할을 맡아야 합니다. 여러 사이언스 픽션들은 이것을 증명합니다. 제목이 가리키는 것처럼, 단편 소설 <식물 아내>는 여자가 수동적인 식물이라고 노골적으로 주장합니다.


패트리스 머피는 인상적인 SF 작가입니다. 패트리스 머피가 <식물 아내>를 썼기 때문에, 여자가 식물이기 때문에, SF 독자들은 여자가 수동적이라고 인식해야 합니다. 비단 <식물 아내>만 아니라 우주 개척 게임 <판도라: 퍼스트 콘택트>에서 테라 살붐 대표자 비비안은 연두색 복장을 입습니다. 테라 살붐은 환경 보호 세력이고, 테라 살붐 문양은 녹색 나뭇잎입니다. 비비안은 여자이고, 여자로서 비비안과 식물 같은 연두색 복장과 녹색 나뭇잎은 딱딱 맞아떨어집니다. <판도라: 퍼스트 콘택트> 역시 여자가 수동적인 식물이라고 증명합니다. SF 팬들은 수많은 비슷한 사례들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소설 <붉은 화성>에서 히로코는 우주선 바이오 돔을 관리합니다. 영화 <선샤인>에서 코라존은 우주선 산소 정원을 관리합니다. 비디오 게임 <스테이시스>에서 테아는 우주선 식물 재배 구역을 좋아합니다. 심지어 애니메이션 <월-E>에서 로봇 이브조차 식물을 품습니다. 이브 뱃속에는 녹색 식물 문양이 떡하니 있습니다. 아, 물론 월-E보다 이브는 훨씬 강하고 튼튼하고 빠르고 똑똑합니다. 하지만 이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월-E보다 이브가 훨씬 강하고 튼튼하고 빠르고 똑똑하다고 해도, 이브 뱃속에 녹색 식물 문양이 떡하니 있기 때문에, 오직 이것만 중요합니다. 이브는 수동적입니다.


월-E보다 이브가 훨씬 강하고 튼튼하고 빠르고 똑똑하다고 해도, 이브는 수동적입니다. 왜? 이브 뱃속에 식물 문양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비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비비안은 지구 환경 오염을 '적극적으로' 비판하나, 테라 살붐 문양이 녹색 나뭇잎이기 때문에, 비비안은 수동적입니다. 아무리 비비안이 지구 환경 오염을 비판한다고 해도, 이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 <식물 아내>에서 식물 아내는 플랜테이션 남자 농민을 몰아냅니다. 하지만 이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자 그대로 식물 아내는 수동적인 식물입니다. 식물 아내가 플랜테이션 남자 농민을 몰아낸다고 해도, 이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로맨스 판타지조차 약초 생태학과 젊은 여자를 연결합니다. 아, 물론 배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소설 <붉은 화성>에서 우주선 바이오 돔 관리자 히로코는 급진적인 혁명가 아르카디 보그다노프를 편듭니다. 히로코와 아르카디 사이에는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화성 테라포밍에서 히로코가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고 해도, 이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소설 <쥬라기 공원>을 보세요. 앨런 그랜트는 공룡을 연구하고, 엘리 새틀러는 식물을 연구합니다. 오오, 이건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왜 앨런 그랜트가 적극적인 동물을 연구하고, 엘리 새틀러가 수동적인 식물을 연구하나요? 여자가 수동적이기 때문입니다. 엘리 새틀러는 여자가 수동적이라고 증명합니다.


아, 물론 소설 속에서 엘리 새틀러는 식물이 수동적이지 않다고 설명합니다. 사람들은 식물이 수동적이라고 생각하나, 이건 착각입니다. 사실 식물은 적극적입니다. 생존 전략이 다르다고 해도, 식물은 적극적인 생존자입니다. 엘리 새틀러는 사람들이 착각한다고 꾸짖습니다. 사실 식물들이 독성을 적극적으로 생성하기 때문에, 인간은 식물 독성을 응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수동적이어야 합니다. 동물학자 앨런 그랜트보다 식물학자 엘리 새틀러가 스테고사우루스를 치료한다고 해도, 이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엘리 새틀러는 수동적인 식물이 반드시 되어야 합니다.



<빨강 머리 백설 공주>는 사이언스 픽션이 아닙니다. <빨강 머리 백설 공주>는 중세 판타지 로맨스에 가깝습니다. 이 만화/애니메이션에서 백설은 약초 생태학을 연구하고, 그래서 백설은 식물학자와 어느 정도 비슷합니다. 하지만 백설이 식물학자와 비슷하다고 해도, 백설과 엘리 새틀러는 다릅니다. 엘리 새틀러는 스테고사우루스를 치료할 수 있으나, 백설은 스테고사우루스를 알지 못합니다. 중세 판타지 등장인물로서 백설은 진화 이론을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진화 이론은 서구 근대화에 속합니다. 어떻게 군주 제도 사회의 판타지 약초 치료사가 근대적인 진화 이론과 스테고사우루스를 연구할 수 있나요?


하지만 엘리 새틀러처럼, 백설은 식물 독성을 이야기합니다. 식물은 수동적이지 않습니다. 식물은 적극적으로 곤충들을 물리칩니다. 식물들이 독성을 적극적으로 이용함에도, 사람들은 식물/동물이 수동/능동이라고 해석합니다. 분명히 식물은 움직이지 못하나, 왜 운동성이 기준이 되어야 하나요? 우리 호모 사피엔스가 동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동물이기 때문에, 운동성이 기준이 되어야 하나요? 호모 사피엔스가 육상 동물이기 때문에, 이 행성의 70%가 바다임에도, 이 행성이 Earth가 되는 것처럼, 호모 사피엔스가 동물이기 때문에, 식물이 수동적인가요? 게다가 왜 이런 수동적인 측면이 여자에게 들러붙어야 하나요?



월-E보다 이브가 압도적으로 강하든, 식물 아내가 플랜테이션 남자 농민을 몰아내든, 엘리 새틀러가 착각을 비판하든, 비비안이 지구 환경 오염을 꾸짖든, 이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수동적인 여자와 수동적인 자연은 비슷합니다. 이른바 다윈 추종자들이 수동적인 여자를 지지한 것처럼, SF 팬들은 수동적인 여자를 지지해야 합니다. 영장류 과학자 세라 블래퍼 허디는 이게 빅토리아 시대 성 차별이라고 비판했으나, 알 게 뭡니까. 성 차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이브와 식물 아내와 엘리 새틀러와 비비안은 여자와 자연(식물)이 비슷하다고 증명합니다. 심지어 빨강 머리 아가씨 백설조차 이것을 증명합니다.


아, 물론 가부장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SF 팬들은 살아갑니다. 빅토리아 시대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이고, 빅토리아 시대 이후에도 이른바 강대국들은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가부장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SF 팬들은 이브와 식물 아내와 엘리 새틀러와 비비안(과 백설)을 바라봅니다. 하지만 알 게 뭡니까. 이브와 식물 아내와 엘리 새틀러와 비비안 가디니어는 여자와 자연 사이에 아주 커다란 유사성이 있다고 증명하고, <에밀>에서 수동적인 여자와 수동적인 자연이 비슷해지는 것처럼, 여자는 주된 역할을 맡아서는 안 됩니다. 가부장적인 현실 속에서 SF 팬들이 이것을 해석한다고 해도, 현실이 중요한가요?



윌리엄 페일리와 <자연 신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육체적인 측면에서 정신적인 측면은 비롯하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모든 것은 뚝 떨어집니다. 이미 현상은 존재합니다. 우리는 왜 현상이 나타나는지 묻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 분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가부장적인 자본주의에서 성 차별이 나타납니까? 이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수동적인 여자는 뚝 떨어졌습니다. 이미 수동적인 여자는 존재합니다. 우리는 왜 수동적인 여자 관념이 나타나는지 묻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를 따라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자본주의를 따르지 않는다면, 이건 신성 모독, 불경일 겁니다!


노래 <겨울비>와 기후 변화는 유사성의 함정입니다. 하지만 만약 사람들이 유사성의 함정을 인식한다고 해도, 음악 방송이 <겨울비>를 들려준다면, 어떤 사람들은 기후 변화를 머릿속에 떠올릴지 모릅니다. 지질학적인 단위에서 기후 변화가 행성급 환경 오염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유사성의 함정을 인식한다고 해도, 어떤 사람들은 <겨울비>와 기후 변화를 저도 모르게 연결할지 모릅니다. 여기에서 문제는 유사성의 함정보다 환경 오염입니다. 행성급 환경 오염에서 관념, 해석이 비롯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왜 현상이 나타나는지 묻지 말아야 합니다. 행성급 환경 오염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유사성들이 있음에도, 왜 우리가 어떤 특정한 유사성에 훨씬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가? 우리가 여자와 자연을 연결할 때, 왜 우리가 다른 측면들보다 수동적인 측면에 훨씬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가?" 이렇게 우리는 묻지 말아야 합니다. 하늘에서 유사성이 뚝 떨어지고, 이미 유사성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자연 신학>은 이런 관념론을 주장합니다. 나중에 이런 관념론은 토마스 맬서스와 <인구론>으로 이어집니다. 토마스 맬서스는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식량이 산술적으로 늘어난다고 주장합니다. 사람들은 토마스 맬서스를 비판하고 근거를 물으나, 근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근거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미 현상은 존재합니다. 인구는 반드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야 하고, 식량은 반드시 산술적으로 늘어나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현상입니다. 인구 대비 식량은 반드시 모자라야 합니다. 이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식량은 반드시 모자라야 합니다. 그래서 가난한 애새끼들이 굶어뒈진다고 해도, 이건 당연한 현상입니다. 토마스 맬서스는 가난한 애새끼들이 굶어뒈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건 그 분의 뜻입니다. 하늘에서 그 분의 뜻은 뚝 떨어졌습니다. 이미 그 분의 뜻은 존재합니다. 우리는 그 분의 뜻 너머 '배후'를 묻지 말아야 합니다. '배후'는 신성 모독, 불경입니다!



토마스 맬서스가 가난한 애새끼들을 개무시하고 지배 계급을 떠받든다고 해도, '배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직 그 분의 뜻만 따라야 합니다. 윌리엄 페일리와 토마스 맬서스는 성직자이나, 이건 기독교 문제가 아닙니다. 여전히 21세기 초반 오늘날에도 수많은 비(非)기독교 신자들은 가난한 애새끼들이 굶어뒈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빈익빈 부익부는 당연합니다. 우리는 빈부 격차 '배후'를 묻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임금 기금설을 비판하고 자본주의가 경제 공황을 필연적으로 일으킨다고 파악한다면, 토마스 맬서스는 이게 신성 모독이라고 게거품을 물고 지랄지랄할 겁니다.


어머니 자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연과 여자가 비슷한가요? 네, 좋습니다. 자연과 여자 사이에는 아주 뚜렷한 유사성이 있습니다. 자연과 여자에게 재생산 과정은 뚜렷한 유사성입니다. 그리고 자연이 소중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을 공유해야 합니다. 여자와 자연이 비슷하고, 여자가 재생산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우리가 자연을 공유하는 것처럼, 우리는 재생산 과정을 공유해야 합니다. 재생산 과정을 공유하기 위해 우리는 돌봄 노동 사회화(의무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돌봄 노동 사회화를 추구한다면, 토마스 맬서스는 이게 신성 모독, 불경이라고 지랄 염병할 겁니다.



토마스 맬서스가 보수적인 관념론을 추구하는 것처럼, 우리는 섭리, 그 분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배후가 무엇인가?"라고 묻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북한이 악랄한 독재 국가라고 말합니다. 이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왜 북한이 악랄한 독재 국가인가요? 하늘에서 악랄한 독재 국가가 뚝 떨어졌나요? 이게 섭리, 그 분의 뜻인가요? 네, 이건 그 분의 뜻입니다. 사회주의는 빌어먹을 악랄한 빨갱이 씨발 것들입니다. 이건 그 분의 뜻입니다. 북한 너머 '배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북한을 반드시 욕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악랄한 독재 왕조 국가가 비롯했는지 파악하지 말아야 합니다.


소비에트 연방이 파쇼주의 나치를 몰아냈고, 사람들이 사회주의를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했고, 미국이 민간인 피해를 개무시했고 전략 병기를 허겁지겁 떨어뜨렸고, 좌파적인 독립 운동가들이 탄압을 받았다고 해도, 이건 절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악랄한 사회주의는 뚝 떨어졌습니다. 이건 섭리, 그 분의 뜻입니다. 수동적인 여자가 섭리인 것처럼, 악랄한 빨갱이들은 섭리입니다. 음문과 난자와 섹스와 임신은 여자의 전부가 아니나, 우리는 음문과 난자와 섹스와 임신에 아주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여자가 수동적이라고 해석해야 합니다. 해석에는 '배후'가 없습니다. 그 자체로서 해석은 존재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 자체로서 해석이 존재하나요? 하늘에서 해석이 뚝 떨어지나요? 만약 어떤 해석이 존재한다면, 우리가 그저 존재 그 자체만 파악해야 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독자는 소설을 읽고 해석합니다. 독자가 해석할 때, 독자는 유사성을 적용합니다. "빨강 머리 아가씨의 눈동자는 에메랄드이다." 이 문장이 빨강 머리 아가씨의 눈동자가 아름다운 녹색라고 설명하지 않는다고 해도, 독자는 아가씨의 눈동자가 아름다운 녹색이라고 해석합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독자가 에메랄드, 녹색 빛깔, 아름다운 상징, 비유 형식을 연결하기 때문입니다. 해석은 연결입니다. 해석은 어떤 것과 어떤 것을 묶습니다.


인간이 어떤 것과 어떤 것을 묶을 때, 이건 분류가 됩니다. 해석은 분류입니다. SF 평론가는 <식물 아내>와 <선샤인>과 <스테이시스>와 <월-E>가 유사하다고 해석하고, 이것들은 사이언스 픽션이 됩니다. <식물 아내>와 <선샤인>과 <스테이시스>와 <월-E>가 사이언스 픽션이 되는 것처럼, 해석은 분류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것과 어떤 것을 묶을 때, 여기에는 유사성 기준이 존재합니다. <월-E>는 애니메이션입니다. <월-E>는 픽사 애니메이션입니다. 픽사는 디즈니 소속입니다. <모아나>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입니다. <월-E>가 사이언스 픽션이기 때문에, <모아나>는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이게 논리적인 해석인가요? <모아나>가 사이언스 픽션이 되기 때문에, <겨울 왕국 2>는 사이언스 픽션이 될 겁니다. "숨겨진 세사아아아아앙~♬"은 SF 노래입니다. 이런 해석이 논리적인가요? 단편 소설 <식물 아내>에는 어머니 자연 감성이 있습니다. <모아나>에도 어머니 자연 테 피티가 있습니다. <식물 아내>와 <모아나>는 모두 여자가 자연을 돌본다고 말합니다. <식물 아내>는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식물 아내>와 <모아나>가 비슷하고, <식물 아내>가 사이언스 픽션이기 때문에, <모아나>는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이런 해석이 옳은가요? 당연히 이건 과잉 해석입니다. <모아나>는 사이언스 픽션이 아닙니다.


아무리 관객들이 어머니 섬 테 피티를 감동적으로 관람한다고 해도, 관객들은 <모아나>가 사이언스 픽션이라고 해석하지 못하고 분류하지 못합니다. 여자가 식물을 돌본다고 해도, 이건 SF 장르를 분류하기 위한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다카기 나오코와 차조기 화분은 SF 설정이 아닙니다. 디즈니-픽사 애니메이션은 SF 장르를 분류하기 위한 기준이 아닙니다. "숨겨진 세사아아아아앙~♬"은 SF 노래가 아닙니다. 이렇게 유사성보다 유사성 '배후'는 훨씬 중요합니다. 우리가 뭔가를 해석, 분류할 때, 우리는 '배후'를 파악해야 합니다. 북한과 나치가 똑같이 악랄한 독재 국가라고 해도, 유사성보다 '배후'는 훨씬 중요합니다.



[식물 탐사 로봇 이브가 SF 등장인물인 것처럼, "숨겨진 세사아아아아앙~♬"이 SF 노래인가요?]



하지만 보수적인 관념론은 그 자체로서 유사성이 존재한다고 간주합니다. 북한과 나치는 똑같이 악랄한 독재 국가입니다. 이건 장땡입니다. 여기에는 '배후'가 없습니다. 유사성은 만능 열쇠이고, 유사성은 전부입니다. 하늘에서 유사성이 뚝 떨어졌기 때문에, 유사성이 섭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배후'를 절대 묻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왜 수동적인 측면이 여자와 자연을 해석하고 분류하는지 절대 묻지 말아야 합니다. 그 자체로서 수동적인 측면, 여자, 자연은 존재합니다. 토마스 맬서스가 가난한 미혼모들이 굶어뒈져야 한다고 지랄한다고 해도, 우리는 이런 지랄염병을 떠받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어디에서 유사성이 비롯하는지 묻지 말아야 합니다. 그 자체로서 유사성은 존재합니다. 책상과 아무르 호랑이에게 네 다리들이 똑같이 있기 때문에, 책상과 아무르 호랑이는 비슷합니다. 우리는 왜 신진 대사보다 네 다리들이 유사성 기준이 되는지 묻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유사성 너머 '배후'를 묻는다면, 이건 불경일 겁니다! '배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자체로서 유사성은 존재하고, 책상과 호랑이는 비슷합니다. 아무르 호랑이가 겨울 숲 속의 사냥꾼인 것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하얗고 차가운 시호테알린 겨울 숲 속 어딘가에서 책상은 은밀하게 활보하는 중일 겁니다.



이 행성에서 70% 면적은 바다입니다. 바다가 70% 면적을 차지하기 때문에, 지구는 파랗습니다. 스페이스 오페라 게임들에서 게임 플레이어가 우주선을 조종하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는 파란 지구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게임 플레이어는 파란 지구를 Earth라고 부를 겁니다. Earth가 흙을 가리킴에도, 게임 플레이어는 70% 바다가 흙이라고 말할 겁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이것을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지구는 지구입니다. 여기에는 기준이 없습니다. 여기에는 '배후'가 없습니다. 지구는 그저 지구에 불과합니다. 아무 이유 없이, 지구는 지구가 되고, 바다는 흙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바다가 흙이 아닌 것처럼, 게임 플레이어는 왜 이 행성이 해구(둥근 바다)보다 지구(둥근 흙)인지 물어볼 수 있습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왜 바다가 흙인지 묻는 것처럼, 우리는 왜 기준이 나타나고, 왜 유사성 기준이 북한과 나치를 똑같이 묶고, 왜 메갈리아가 페미 나치가 되는지 물어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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