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SF 생태주의

<소멸의 땅>과 <서브머지드>, 상상 과학을 담는 그릇 본문

감상, 분류, 규정/다른 세계와 여러 관점들

<소멸의 땅>과 <서브머지드>, 상상 과학을 담는 그릇

OneTiger 2017. 12. 12. 19:55

[이런 장면은 비경 탐험 소설들과 비슷하나, <서브머지드>는 소설이 아니라 영상 중심적인 매체죠.]



제프 밴더미어가 쓴 <소멸의 땅>은 SF 소설일까요. 흠, 어쩌면 사람들은 서로 다른 의견들을 내놓을지 모릅니다. 사실 이 소설에 치밀한 상상 과학은 없습니다. 그런 것을 찾고 싶어도 절대 찾지 못할 겁니다. 아예 작가가 그걸 집어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소멸의 땅>은 뻔한 사이언스 판타지 소설들과 다릅니다. 이 소설은 외계인 같은 요소들을 함부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소설 속에서 탐사대는 X 구역에 들어가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닐 뿐입니다.


그들은 뭔가를 논의하나,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합니다. 그들이 무엇을 논의하든, 결론은 허공으로 소멸할 뿐입니다. 탐사대는 수많은 현상들을 목격하나, 논리적인 설명을 전혀 붙이지 못합니다. 탐사대는 그저 장대한 밀림과 슾지를 돌아다니고 돌아다니고 또 돌아다닐 뿐입니다. 그들은 광할한 밀림들과 기이한 땅굴과 정체 모를 문구들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이 책에 명확한 개연성이나 선형적인 줄거리 따위는 없습니다. 아마 누군가는 왜 이런 희한한 책을 읽는지 반문할 겁니다. <소멸의 땅>은 모든 것이 모호하고 정확한 줄거리나 설정이 없는 소설입니다.



이런 소설이 재미있을까요? 누군가는 재미가 없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많은 인기를 끌었고, 결국 실사 영화가 나왔죠. 그리고 여러 평론가들과 작가들과 독자들은 이 책이 SF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치밀하지 않다고 해도 <소멸의 땅>은 어느 정도 상상 과학을 담았습니다. 비록 그 원인이나 논리는 명확하지 않으나, <소멸의 땅>은 함부로 신화나 전설에 기대지 않습니다. 대신 아직 인간이 파악하지 못하는 뭔가가 있다고 말하죠. 이 책은 인류가 세상 만물을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책은 SF 소설이 될 수 있습니다. 비록 상상 과학은 옅으나, 상상력이 신화나 전설이 아니라 자연 과학에서 비롯하기 때문입니다. 하워드 러브크래프트는 본격적인 SF 작가가 아니나, SF 울타리 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러브크래프트처럼 <소멸의 땅>은 본격적인 SF 소설이 아니나, SF 울타리 안에 들어갈 수 있어요. 그리고 독자는 소설 속에서 압도적이고 이상하고 야릇한 자연 환경을 헤맵니다. 그런 자연 환경은 적막하고 이질적이고 웅장합니다. 그런 분위기가 소설 전체를 지배합니다. 독자는 그런 분위기를 즐깁니다. 이 소설을 읽는 이유는 그런 분위기를 느끼기 위해서죠. 뚜렷한 설정이나 줄거리 때문이 아니라.



이런 시각을 <서브머지드> 같은 비디오 게임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서브머지드>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이야기입니다. 인류 문명은 멸망했고, 바다는 도시를 삼켰습니다. 고층 건물들만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건물들 위에 여러 나무들과 풀들이 자랍니다. 바닷속에는 돌연변이 해양 동물들이 헤엄칩니다. 어떤 소녀는 남동생과 함께 쪽배를 타고 이 홍수 도시를 방문합니다. 이 게임에 특정한 줄거리나 설정은 없습니다. 게임은 정확한 줄거리를 설명하지 않고, 소녀는 그저 홍수 도시를 여기저기 기웃거릴 뿐입니다.


그러는 동안 장대한 혹등고래를 만나고, 건물 옥상에서 석양을 감상하고, 울창한 숲을 구경합니다. 그것뿐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적막하고 이질적이고 웅장한 분위기를 즐깁니다. 다른 전략 게임이나 액션 게임과 달리 열심히 주사위를 굴리거나 트리거 단추를 빨리 누를 이유는 없습니다. 쪽배를 타고 물에 잠긴 도시를 돌아다니는 동안 소녀는 아련하고 기이한 자연 환경을 구경할 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사위를 굴리거나 트리거 단추를 누를 필요는 없겠죠. 이런 관점에서 <서브머지드>는 <소멸의 땅>과 매우 비슷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이틀 전에 <광기의 산맥>과 <다키스트 던전>을 비교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주사위를 굴리거나 트리거 단추를 누르는 게임이 상상 과학을 담기에 적당한 그릇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키스트 던전>은 열심히 수치를 계산하거나 주사위를 굴려야 하는 게임이고, 따라서 상상 과학보다 전술적인 수치와 주사위가 우선이죠. 하지만 <서브머지드>는? 이런 게임은 분명히 <소멸의 땅>과 비슷합니다. <소멸의 땅>이 상상 과학을 담는 그릇이 된다면, <서브머지드> 역시 그렇겠죠. <소멸의 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면, <서브머지드> 역시 재미있게 플레이할 수 있겠죠.


하나는 텍스트 매체이고, 다른 하나는 종합 영상 매체입니다. 하지만 텍스트 매체만 사이언스 픽션이라고 우길 이유는 없을 겁니다. 듀나나 박상준, 고장원 같은 SF 고수들 역시 종합 영상 매체인 SF 영화를 자주 언급합니다. 영화가 사이언스 픽션이 될 수 있다면, 게임 역시 그럴 수 있을 겁니다. 게다가 <서브머지드>는 게임 플레이어가 주사위를 굴리거나 전술적인 수치를 계산하거나 트리거 단추를 빨리 누르는 게임이 아닙니다. 이 게임에서 중요한 요소는 이질적이고 적막한 자연 환경입니다. 따라서 <서브머지드> 역시 상상 과학을 담는 그릇이 될 수 있겠죠.



저는 <서브머지드> 같은 게임이 일반적인 전략 게임이나 액션 게임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많은 사람들이 "<압주>는 게임이 아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압주> 역시 화려하고 웅장한 자연 환경을 둘러보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마스터 오브 오리온>이나 <헤일로>와는 전혀 다르죠. <압주>가 내세우는 주된 요소는 (수치 계산이나 트리거 단추가 아니라) 이질적인 자연 환경 그 자체입니다. <압주>는 상상 과학을 내세우는 게임이고, 따라서 사이언스 픽션이 될 수 있겠죠.


적어도 <서브머지드>나 <압주>는 <마스터 오브 오리온>이나 <헤일로>에 비해 상상 과학에 훨씬 치중했습니다. <마스터 오브 오리온>이나 <헤일로>에서 우주 함대 전투나 총격전이 쏙 빠진다면, 저 두 게임이 그저 외계 행성을 둘러보는 게임이었다면, 지금과 같은 명성을 얻지 못했을 겁니다. <마스터 오브 오리온>과 <헤일로>는 거대한 SF 설정을 자랑하나, 핵심은 SF 설정이 아니라 수치를 계산하거나 트리거 단추를 빨리 누르는 행위입니다. 이와 달리 <압주>나 <서브머지드>는 이질적인 자연 환경이라는 상상력 자체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걸 제외한다면, 구태여 이 게임을 플레이할 이유가 없겠죠.)



누군가는 <소멸의 땅>과 <서브머지드>를 동시에 비판할지 모릅니다. <소멸의 땅>과 <서브머지드>는 분위기로 승부하는 창작물입니다. 치밀한 상상 과학은 부족하죠. 따라서 어떤 작가들이나 평론가들이나 독자들은 <소멸의 땅>과 <서브머지드> 양쪽 모두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라고 부정할지 몰라요. 흠, 하지만 따지고 보면, <크리스털 세계> 같은 소설 역시 분위기로 승부하는 창작물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아이작 아시모프 같은 작가들은 뉴웨이브 SF 소설을 좋아하지 않았죠. <크리스털 세계> 같은 SF 소설은 과학적인 고증이 아니라 이질적인 분위기를 띄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크리스털 세계>는 많은 사랑을 받는 SF 소설입니다. 이제 아무도 제임스 발라드를 SF 울타리에서 내쫓기 원하지 않아요. 뭐, 여전히 뉴웨이브 SF 소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있겠으나, 전반적으로 <크리스털 세계>가 SF 소설이라고 주장하죠. 그리고 <크리스털 세계>가 SF 소설이 될 수 있다면, <소멸의 땅> 역시 그럴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소멸의 땅>이 SF 소설이 될 수 있다면, <서브머지드> 역시 그럴 수 있겠죠. 그래서 저는 <서브머지드>가 좋은 사이언스 픽션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치밀한 자연 및 사회 과학적인 전망이 없다고 해도.



참고로 <서브노티카>나 <플래닛 익스플로러스>, <노 맨스 스카이>는 어떨까요. 이런 게임들에서 게임 플레이어들은 전술적인 수치를 계산하거나 트리거 버튼을 빨리 누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행위들은 핵심이 아닙니다. 진짜 핵심은 탐험과 수집과 건축이죠. <서브노티카>나 <플래닛 익스플로러스>, <노 맨스 스카이> 같은 게임들은 상상 과학을 제대로 담을 수 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게임들에서 핵심은 뭔가를 조립하는 규칙성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레고 놀이와 비슷하죠. 외계 행성들을 보여주고 우주 승무원들이 돌아다닌다고 해도 결국 핵심은 조립입니다. <서브노티카>나 <플래닛 익스플로러스>, <노 맨스 스카이> 모두 블럭 놀이죠. 레고 놀이를 사이언스 픽션이라고 부를 이유는 없을 겁니다. 물론 <서브노티카>나 <플래닛 익스플로러스>, <노 맨스 스카이>는 멋진 외계 행성들과 우주선들과 생명체들을 보여줍니다. 그런 설정들이나 풍경들은 환상적입니다. 하지만 그건 핵심이 아니죠. <서브노티카>나 <플래닛 익스플로러스>, <노 맨스 스카이>에 상상 과학이 아예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게임들의 핵심이 블럭 놀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죠. <압주>나 <서브머지드>는 좋은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하지만 이런 비디오 게임들을 볼 때마다, 저는 두 가지가 아쉽습니다. 첫째, 기술적인 문제입니다. <압주> 같은 비디오 게임을 플레이하고 싶다면, 좋은 하드웨어가 필수적입니다. 성능이 나쁜 하드웨어는 비디오 게임의 텍스쳐들을 제대로 살리지 못합니다. 따라서 게임 플레이어가 온전히 상상 과학을 즐기지 못하겠죠. SF 소설은 그런 기술적인 문제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SF 독자는 좋은 하드웨어를 장만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신 SF 소설은 주류적인 사고 방식을 벗어나라고 말합니다. SF 독자는 그런 사고 방식을 키워야 합니다. 그런 사고 방식을 키울 수 있다면, SF 소설은 독자를 환상적인 세계로 안내하겠죠. <서브머지드> 같은 비디오 게임을 플레이하기 위해 게임 플레이어는 사고 방식을 키울 뿐만 아니라 하드웨어 장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런 장비가 없다면, 게임이 보여주는 상상 과학을 온전하게 즐기지 못합니다. 저는 이게 불만입니다. 상상 과학이 하드웨어에 가로막힌다는 상황. 순전히 풍부한 사고 방식만으로 상상 과학을 즐기지 못하는 상황. <압주>는 좋은 하드웨어를 갖출 수 있는 사람들만을 위한 상상 과학이죠.



둘째, 표현 방식의 문제입니다. <소멸의 땅>은 텍스트 매체이고, <서브머지드>는 종합 영상 매체입니다. 상상 과학적인 설정을 풀어놓고 싶다면, 당연히 음향이나 영상보다 텍스트가 좋습니다. 텍스트는 압도적으로 유리합니다. 텍스트는 추상적인 사변을 구체적으로 서술할 수 있습니다. 텍스트는 상상력을 요구하나, 대신 추상적인 사변을 자세히 늘어놓을 수 있어요. 예전에 말한 것처럼 변증법적 논리를 음향이나 영상으로 들려주거나 보여줄 수 있나요? 글쎄요, 저는 그런 철학자를 본 적이 없습니다.


아니, 철학자들이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여전히 텍스트가 음향이나 영상보다 훨씬 나아요. 글자와 기호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변증법을 설명하기가 엄청나게 어려울 겁니다. 따라서 (과학적인 고증이 치밀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텍스트는 사변을 풀어놓기에 좋은 수단입니다. 따라서 SF 소설은 SF 게임보다 상상 과학을 담기에 좋습니다. 상상 과학은 과학적인 사변이죠. SF 게임이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저는 <압주>나 <서브머지드> 같은 게임이 정말 감동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구조적인 관점에서 SF 게임은 절대 SF 소설을 따라오지 못할 겁니다.



흠, 어쩌면 어떤 사람은 "왜 구태여 SF 소설과 SF 게임을 비교하는가?"라고 물을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는 SF 소설을 분석하는 수많은 글들이 있습니다. 저 역시 SF 소설을 분석하고 싶을 뿐입니다. 저는 SF 소설을 좋아하지 않고, 많이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제가 이 글에서 엄청나게 헛소리를 나열하거나 헛다리를 짚지 않았을 겁니다. 음…. 아마 그랬을 겁니다. 듀나나 고장원 같은 고수들이 이 글을 읽는다면, 제가 헛다리들을 짚는다고 비판할지 모르죠. 하지만 저는 제가 그렇게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글을 쓰기 전에 몇 번이나 논리를 점검했고, 그렇게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구태여 게임을 언급하는 이유는 게임이 소설, 만화, 희곡, 영화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소설, 만화, 희곡, 영화는 단편적인 체험입니다. 독자나 관객은 소설이나 희곡에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간혹 관객들은 연극 무대에서 배우와 소통하나, 일반적으로 소설, 만화, 희곡, 영화는 단편적인 체험이죠. 반면, 게임은 쌍방향 소통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캐릭터나 유닛을 조종할 수 있어요. 일부러 신나게 캐릭터나 유닛을 죽이는 플레이어 역시 있어요. 게임은 매우 독특한 매체이고, 그래서 저는 SF 소설과 SF 게임을 비교해보고 싶습니다.



SF 게임에서 상상 과학은 핵심이 아닙니다. 하지만 다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마스터 오브 오리온>이나 <헤일로>나 <폴아웃>이나 <서브노티카>를 SF 게임이라고 생각하죠. 저는 그런 현상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아울러 저는 그런 특징을 지적하는 글을 별로 본 적이 없습니다. 적어도 한국 인터넷에서 그런 글을 별로 읽은 적이 없어요. SF 게임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alt.SF 웹진 같은 곳조차 왜 SF 게임이 사이언스 픽션이 아닌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더군요. 듀나나 박상훈이나 고장원 같은 SF 고수님들도 마찬가지고요.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에 제가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어쩌면 그런 분석글이 있음에도 제가 찾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뭐, 이런 분석이 중복된다고 해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