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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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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게임보다 SF 소설

OneTiger 2017. 11. 1. 20:00

[이런 바다 괴수들과 싸울 때, 어떻게 사람들의 관념들이 바뀔까요? SF 게임들은 그걸 자세히 말하지 않아요.]



게임 <비욘드 어스>에는 여러 괴수들이 등장합니다. 게임 속에서 인류는 외계 행성을 찾아가고, 새로운 문명을 일구기 원해요. 하지만 이미 토착 생명체들은 이 행성에서 장대한 생태계를 구성했어요. 공성벌레나 크라켄은 행성 생태계에서 정점을 찍는 거대 야수들입니다. 크라켄은 언뜻 섬처럼 보이나, 사실 어마어마한 촉수 괴수입니다. 뭐, 바다 괴수와 촉수 괴수는 서로 떨어지지 못하는 사이죠. 고전적인 크라켄 설화와 <백경>이나 <바다의 노동자> 같은 주류 소설들 역시 바다 괴수가 촉수 괴수라는 특징을 강조했고, <비욘드 어스>는 그런 관념을 그대로 써먹었을 겁니다.


특히, 영어권에서 가장 유명한 SF 해저 괴수들 중 하나는 크툴루일 테고, 크툴루는 문어 괴수죠. <비욘드 어스>에 등장하는 크라켄은 크툴루와 하등 닮은 점이 없으나, 게임 제작진은 바다 괴수가 촉수 괴수라는 통상적인 관념에서 크게 벗어난 것 같지 않습니다. 반면, 공성벌레는 <듄>에 등장하는 모래벌레에게 바치는 찬사입니다. 모래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오고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모래벌레는 SF 독자들에게 지우지 못할 인상을 남겼고, 수많은 창작가들은 모래벌레에게 찬사를 보내왔습니다. 게임 제작진 역시 이 위대한 생명체를 그저 간과하지 않는군요.



한편으로 <비욘드 어스>는 인공적인 거대 괴수를 선보입니다. 바로 제노 타이탄이죠. 공성벌레나 크라켄이 천연적인 괴수라면, 제노 타이탄은 인공적인 괴수입니다. 인류 중에서 조화 분파는 행성 생태계와 어울리기 바랐고, 그래서 생태학과 생물학을 열심히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 조화 분파는 생태학 지식을 무기로 사용할 수 있었고, 마침내 자연을 인위적으로 진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다른 세력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조화 분파는 거대 괴수를 만들어야 했고, 제노 타이탄은 그런 염원이 빚어낸 성과입니다. 제노 타이탄은 아주 전형적인 절지류 괴수입니다.


절지류가 워낙 육상 척추 동물들과 다르게 생겼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절지류를 싫어하거나 혐오합니다. 그래서 외계 생명체를 설정하는 창작가들은 절지류를 유용하게 써먹죠. 제노 타이탄은 그런 외계 절지류 생명체들 중 하나입니다. 비록 설정은 크게 다르나, 제노 타이탄은 <스타십 트루퍼스>가 강조한 거미 괴수에게서 별로 벗어나지 않은 괴수죠. 스페이스 오페라 소설들을 뒤적거린다면, 이런 혐오스러운 절지류 괴수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겁니다. 아주 못생긴 외계인을 이야기하기 위해 <노인의 전쟁>은 그런 고정 관념을 빌렸죠.



하지만 아무리 제노 타이탄이 상투적인 절지류 괴수라고 해도 저는 제노 타이탄이 꽤나 마음에 들었습니다. 행성 생태계를 보존하는 분파가 생태적인 지식으로 만든 결전 병기. 뭔가 모순적이군요. 하지만 저는 그런 모순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이런 거대 괴수 병기는 SF 전략 게임에서 그리 흔한 설정이 아닙니다. 절지류 괴수들은 많으나, 인류 분파가 만든 결전 괴수 병기를 찾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 괴수가 인상적이라고 생각했고, 자세한 설정을 찾아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몇 번 게임을 플레이해도 자세한 설정을 읽지 못했습니다. 당연할 겁니다. <비욘드 어스>는 소설이 아닙니다. 비디오 게임입니다. 비디오 게임은 전술이나 조작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설정이 아니라. 멋진 설정은 플레이어를 게임 속으로 유도하나, 결국 정말 중요한 요소는 전술이나 조작입니다. 게임 플레이가 재미있다면, 설정 따위는 그리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만약 어떤 게임이 어드벤처 장르나 롤플레잉 장르나 이머시브 심 장르라면, 그 게임은 설정을 중요하게 여길지 모르죠. 하지만 <비욘드 어스>는 4X 전략 게임이고, 설정보다 전술이나 수치 계산을 훨씬 중요하게 여깁니다.



사실 제가 제노 타이탄의 설정을 자세히 읽는다고 해도 그건 게임 플레이에 절대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그것보다 제노 타이탄의 공격력이나 이동력이나 가격이 훨씬 중요한 정보겠죠. 이런 특징은 비단 <비욘드 어스>에만 해당하지 않을 겁니다. 사실 <비욘드 어스>를 비롯한 대부분 게임들은 전술이나 조작을 설정이나 이야기보다 중요하게 취급합니다. 이건 소설과 게임의 가장 큰 차이점들 중 하나일 겁니다. 소설 <솔라리스>를 읽을 때, 독자는 솔라리스의 각종 설정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소설 속의 비현실적이고 비일상적인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독자는 그런 설정들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스타니스와프 렘이 솔라리스가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았다면, 독자는 왜 켈빈이 그렇게 두려워했는지, 왜 하라가 그렇게 슬퍼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죠. 즉, SF 소설은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해 설정을 이야기 안으로 끌어들여야 합니다. 설정을 일일이 나열할 필요는 없겠으나, 이야기는 설정을 품어야 합니다. 반면, SF 게임은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설정은 그저 게임 플레이를 돋보이게 하는 들러리에 불과합니다. 제노 타이탄의 설정을 모른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에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게임보다 소설이 좀 더 사이언스 픽션에 어울리는 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테이블 게임이든 비디오 게임이든, 설정은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설정을 줄줄이 외운다고 해도 플레이어가 게임 플레이를 잘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가령, 어떤 게임 플레이어는 이너 스피어의 역사를 줄줄이 외울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 게임 플레이어가 <배틀테크> 미니어쳐 게임에 능숙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게임을 잘 하고 싶다면, 설정이 아니라 게임 규칙을 잘 외워야 합니다.


SF 소설은 다릅니다. 이야기는 소설에서 상당히 중요한 요소이고, 작가는 독특한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해 반드시 설정을 디딤돌처럼 깔아야 합니다. 이야기와 설정의 경계선을 되도록 흐릿하게 지운다면 좋겠으나, 어쨌든 작가는 설정을 이야기 속에 잘 눌러 담아야 합니다. 위에서 <솔라리스>를 언급했습니다. 이 소설에는 아예 설정을 줄줄이 읊조리는 장이 따로 있습니다. 그런 기법이 필수적입니다. 만약 어떤 창작가가 과학적 상상력을 펼치고 싶다면, 소설이 제일 좋은 방법일 겁니다. 게임은 그리 좋은 그릇이 아닙니다. 게임 플레이어들은 상상 과학보다 게임 규칙과 조작과 전술과 수치 계산과 타격감에 연연할 겁니다.



이는 SF 게임이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SF 게임은 자신만의 가치가 있습니다. <스텔라리스> 같은 게임을 들여다보면, 왜 SF 게임이 매력적인지 알 수 있죠. 장엄한 우주 풍경을 바라보고, 이런저런 우주선들을 조작하고, 각종 정책들을 결정하면, 마치 거대한 은하계 문명을 이끄는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아무리 <스텔라리스>가 매력적인 게임이라고 해도 결국 과학적 상상력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게임 규칙들, 그러니까 종족 특성이나 기술 그물망이나 미사일의 파괴력이나 함선의 수치 등이 훨씬 중요하죠.


아무리 하드 SF 설정을 잘 이해하는 사람도 게임 규칙을 외우지 않는다면, 결국 그 사람은 <스텔라리스>를 플레이하지 못할 겁니다. 비단 이런 전략 게임만 아니라 액션 게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헤일로>는 상당한 인기를 자랑하는 SF 일인칭 사격 게임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게임 플레이어가 묠니르 강화복의 설정을 연구한다고 해도 그건 게임 플레이에 절대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얼마나 빨리 트리거 버튼을 누르고 방향 패드를 돌리는지가 중요하죠. <헤일로>가 얼마나 방대한 설정을 자랑하든,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트리거 버튼과 방향 패드가 훨씬 중요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SF 게임은 사실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다."라고 말한다면, 그 말은 틀리지 않을 겁니다. 맞아요. SF 게임은 사이언스 픽션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스페이스 엠파이어>를 플레이하든 <메트로이드>를 플레이이든, 결국 그 사람은 게임을 플레이할 뿐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이 상상 과학을 즐긴다고 말하지 못하겠죠. 자원 수치를 외우거나 버튼을 빨리 누르는 것이 훨씬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스페이스 엠파이어>나 <메트로이드>에게서 뭔가 상상 과학을 느낀다고 해도 그건 핵심이 아닙니다. 그런 상상 과학은 고작 게임 플레이가 돋보이도록 뒷받침할 뿐이죠.


사이언스 픽션이 상상 과학을 부차적으로 취급한다면, 그건 말이 되지 않을 겁니다. 상상 과학은, 설사 그게 인문학적이거나 사회학적인 상상력이라고 해도, 작품의 중심에 와야 합니다. 그래서 SF 게임은 사이언스 픽션이 되지 못하죠. 물론 어떤 SF 게임들은 상상 과학을 중심에 놓을지 모릅니다. 전략 게임이나 액션 게임과 달리 어드벤처 게임이나 이머시브 심 게임이나 롤플레잉 게임은 상상 과학을 중요하게 여길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어드벤처, 이머시브 심, 롤플레잉 게임들은 소설적인 부분을 간직했습니다.



가령, 어떤 이머시브 심 게임 속에서 주인공이 경비 로봇을 지나간다고 가정하죠. 하지만 경비 로봇은 주인공을 쉽게 보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인공은 대화를 시도하고, 로봇의 논리 연산을 비틀어야 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논리 연산을 비틀 수 있는 대화를 선택해야 하고, 만약 게임 플레이어가 로봇의 설정을 잘 모른다면, 그런 대화를 제대로 선택하지 못하겠죠. 이런 게임 플레이는 어드벤처와 이머시브 심과 롤플레잉 게임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따라서 게임 플레이어는 자연스럽게 상상 과학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게임 플레이는 전술이나 조작보다 '텍스트를 읽고 상상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즉, 전형적인 게임 플레이가 아니죠. 이런 어드벤처, 이머시브 심, 롤플레잉 게임들은 텍스트를 중요하게 여기고, 소설 독자처럼 게임 플레이어는 방대한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고 상상해야 합니다. 이런 게임들은 캐릭터를 움직일 수 있는 소설과 비슷합니다. 비슷한 사례로 게임북이 있죠. 게임북은 전형적인 소설이 아니나, 소설적인 특성을 많이 간직했습니다. 즉, 게임이 뭔가 상상 과학을 핵심적으로 담아야 한다면, 그 게임은 소설적인 특성에 접근해야 합니다.



다른 게시글에서도 말한 것처럼 이는 게임이 소설보다 뒤쳐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떻게 어느 매체가 다른 매체들보다 우월하다고 가릴 수 있겠어요. 상상 과학을 전개하고 싶다면, 소설이 게임보다 낫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사이언스 픽션을 좀 더 제대로 즐기고 싶다면, 콘솔 게임기보다 책을 집어들어야 할 겁니다. 아무리 SF 게임이 깊은 전술을 자랑하거나 방대한 우주 풍경을 선사해도, SF 게임은 사이언스 픽션이 아닐 겁니다. 적어도 상상 과학이 매우 옅을 겁니다. 따라서 소설을 읽는 편이 낫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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