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변종>, SF 소설들을 언급하지 않는 SF 소설 본문
[게임 <엔들리스 스페이스>의 한 장면. 분명히 이런 외계 식생은 진부한 상상력입니다. 하지만….]
프랑크 쉐칭이 쓴 <변종>은 바다와 인류 문명, 환경 오염, 미지와의 조우를 다룬 소설입니다. 갑자기 바다에서 기이한 사건들이 터지고, 그것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이나 위험한 상황으로 몰아갑니다. 마침내 그런 사건들은 인류 전체를 위협하기에 이르러요. 사건들 뒤에 무엇이 있는지 연구하기 위해 수많은 과학자들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진실에 조금씩 다가갑니다. 그러는 동안 과학자들은 이런 사건들이 우연적인 사고가 아니라 계획적인 공격이라는 확신을 느끼죠.
과학자들은 인류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다른 존재들을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들 이 지구에 우리 인류만 아니라 다른 지성이 존재할지 모른다고 생각해요. 아마 그런 시각을 대변하는 인물이 어떤 SETI 연구원일 것 같습니다. 이 연구원은 우리 인류가 너무 인간적인 시각 속에서 살아간다고 비판합니다. 외계 문명을 찾으려는 연구원답게 이 인물은 인간이 모든 사건의 중심이 아니라고 말해요. 이 인물은 과학자들이 그런 시각을 버리지 못한다면, 각종 위험한 사건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밝히지 못할 거라고 경고하죠. SETI 연구원은 소설 주제를 함축하는 인물들 중 하나일 겁니다.
아울러 이 SETI 연구원은 각종 SF 영화들을 비판합니다. 이 연구원은 <미지와의 조우>를 비롯해 수많은 SF 영화들이 외계인을 너무 인간적으로 그린다고 이야기해요. 다양한 SF 영화들은 다양한 외계인들을 이야기하나, 그들은 인간적인 시각에서 별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저 인간적인 영역이 확장한 결과에 불과하죠. SETI 연구원은 외계인을 이야기하는 SF 영화조차 인간적인 시각에 머문다고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저는 이 부분을 꽤나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SF 소설이 SF 영화를 비판하는 대목이기 때문입니다.
<변종>은 SF 소설입니다. 게다가 미지와의 조우를 다루는 SF 소설입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온갖 SF 영화들에게 별로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소설은 그런 영화들이 진부한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호통을 칩니다. 아예 유명한 영화들을 직접 언급하고, 그런 영화들이 엉터리라고 말해요. SF 영화를 비판하는 SF 소설…. 글쎄요, 흔히 볼 수 있는 대목은 아니죠. 그래서 저는 SF 소설 속에서 SF 영화들을 비판하는 형식이 재미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죠. 수많은 SF 영화들은 틀에 박힌 상상력을 열심히 반복합니다.
아마 SF 감독들 중에 정말 기발하거나 도발적인 상상력을 펼치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모든 SF 감독이 뻔한 고정 관념을 되풀이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히 거대하고 유명한 영화들 중 상당수는 뻔한 고정 관념에서 쉽게 나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진지한 것처럼 폼을 잡으나, 그런 영화들에 등장하는 외계인들은 그저 좀 더 이상적이거나 이질적이거나 추악한 인간들에 불과해요. 더 중요한 점은 그런 확장된 인간들을 이용해 수많은 대작 SF 영화들이 뻔한 사건들을 전개한다는 점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이언스 픽션이 무조건 엄중하고 치밀한 하드 SF가 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저는 좋은 사이언스 픽션이 무조건 하드 사이언스 픽션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른바 소프트 사이언스 픽션이나 스페이스 오페라나 사이언스 판타지 역시 멋진 사이언스 픽션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SF 창작가가 (자연 과학적이거나 사회 과학적인) 상상 과학을 이용해 주류적인 사고 방식을 타파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점은 그거죠. 주류적인 사고 방식을 깰 수 있는 이야기와 주제와 철학. 그게 외계인이든, 인공 지능이든, 돌연변이 괴수든, 중점은 그겁니다.
진 울프가 쓴 <케르베로스의 다섯 번째 머리>가 하드 SF 소설인가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소설은 일반적인 하드 SF 소설과 많이 다릅니다. 설사 이 소설이 하드 SF 장르라고 해도 저는 이 소설에서 그런 부분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정말 중요한 점은 작가가 <케르베로스의 다섯 번째 머리>를 어중간한 고정 관념으로 쓰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 소설은 그저 인간에게서 좀 더 확장된 그 무엇을 말하지 않아요. 이 소설은 그저 평범한 인간들이 주류적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늘어놓지 않아요.
솔직히 저는 제가 <케르베로스의 다섯 번째 머리>를 완전히 이해했는지 확신하지 못하겠습니다. 작가가 뭐라고 이야기하는지 이해하기 어렵고, 어쩌면 제가 소설을 완전히 잘못 이해했을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 소설은 뻔한 담론들을 늘어놓지 않고, 저는 그 점이 인상적이라고 느꼈습니다. SF 소설 속에서 뭔가 다른 존재를 이야기하고 싶다면, 이런 상상력을 발휘해야 할 겁니다. 비슷한 사례를 줄줄이 열거할 수 있겠죠. 필립 딕이나 옥타이바 버틀러가 하드 SF 작가인가요? 하지만 이런 작가들이 외계인을 이야기하는 방식은 꽤나 도발적이고 참신합니다. 종종 이런 작가들은 외계인을 이용해 우리 인류와 인류 문명의 본질을 꿰뚫죠.
하지만 얼마나 많은 대작 SF 영화들이 이런 상상력을 펼칠까요. <미지와의 조우>를 비롯해 얼마나 많은 대작 영화들이 도발적인 철학을 시도하거나 본질을 꿰뚫을 수 있을까요. 저는 뻔한 이야기들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이야기들 역시 감동적이거나 재미있을 수 있어요. 창작물을 즐기는 이유가 뭘까요. 재미나 감동 때문입니다. 재미와 감동을 느낄 수 있다면, 뻔한 이야기를 풀어놓아도 좋을 겁니다. 하지만 사이언스 픽션을 이용한다면, 외계인이나 로봇이나 돌연변이 괴수를 이용한다면, 창작가는 일반적인 재미와 감동에서 더 멀리 나갈 수 있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경우가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스티븐 소더버그가 감독한 <솔라리스>처럼 원작 소설을 아예 거꾸로 해석하는 경우조차 있습니다. 스타니스와프 렘은 소설 속에서 우리가 미지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할 거라고 주장했으나, 영화는 그런 주장을 쏙 빼먹고 다른 소리들만 떠듭니다. 뭐,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만든 영화 역시 소설을 제대로 살린 영화는 아니었죠. 하지만 소더버그는 타르코프스키보다 훨씬 더 심합니다. 아마 도발적인 이야기를 주저하는 SF 영화로서 소더버그의 <솔라리스>는 좋은 사례가 될 겁니다.
프랑크 쉐칭이 쓴 <변종>은 그런 SF 영화들을 비판하는 책입니다. 그건 핵심적인 주제가 아니나, SETI 연구원이 SF 영화들을 비판하는 부분은 나름대로 가치가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사이언스 픽션이 무엇을 핵심으로 내세우는지 알고 싶다면, 그런 대목을 읽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하지만 <변종> 역시 심각한 결함이 있습니다. <변종>은 (자신이 SF 소설임에도) SF 소설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소설 속에서 SETI 연구원은 온갖 SF 영화들을 비판합니다. 그리고 숱한 사이언스 픽션들 역시 주류적인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SETI 연구원은 중요한 SF 소설들을 전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 좀 어이가 없더군요. 왜 그 연구원은 다양한 SF 영화들을 거론하는 반면, SF 소설들을 거론하지 않을까요. 정말 주류적인 시각에서 벗어나고 도발적인 상상력을 펼치는 소설들이 많음에도 왜 그 연구원은 전혀 언급하지 않을까요. <라마와의 랑데부> 같은 소설은 외계 존재를 이용해 고정 관념을 타파합니다. 이런 소설은 독자를 인류 문명과 지구에서 놀랍고 머나먼 세계로 데려가죠. 왜 프랑크 쉐칭은 <변종>에서 <라마와의 랑데부> 같은 소설을 언급하지 않았을까요.
정말 사이언스 픽션을 이야기하고 싶다면, 당연히 SF 소설들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SF 소설 없이 사이언스 픽션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그게 가능할까요. 저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무엇인지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수많은 작가들, 독자들, 평론가들은 서로 다르게 정의할 겁니다. 누군가는 SF 만화나 영화나 게임 역시 사이언스 픽션이 될 수 있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은 장르를 더 이상 원론적인 울타리에만 가두지 말라고 말하겠죠. 다른 누군가는 여전히 SF 소설만 사이언스 픽션이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사이언스 픽션이 자랑하는 정수는 소설 속에만 들어있다고 생각하겠죠.
두 사람은 서로 사이언스 픽션을 다르게 정의합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SF 소설이 사이언스 픽션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을 겁니다. 사이언스 픽션을 뭐라고 정의하든, 결국 핵심은 SF 소설이죠. 설사 누군가가 SF 게임들을 이용해 사이언스 픽션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SF 소설에 기반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갈피를 잡지 못할 겁니다. SF 영화나 SF 게임만 언급하는 사람들은 정말 열심히 헛다리를 짚습니다. 저는 여러 잡지들과 인터넷 커뮤니티들에서 그런 광경을 흔히 봤어요.
따라서 <변종>이 정말 사이언스 픽션과 외계와 고정 관념 탈피를 논하고 싶었다면, SF 소설을 이야기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변종>은 SF 영화들을 실컷 떠드는 반면, SF 소설을 이야기하지 않아요. 저는 왜 프랑크 쉐칭이 그랬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라마와의 랑데부> 같은 소설을 읽었다면, 사이언스 픽션과 고정 관념 탈피를 훨씬 더 깊이 논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변종>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프랑크 쉐칭이 사이언스 픽션에 관해 '절반만 비평했다'고 생각합니다.
<변종>이 제대로 사이언스 픽션을 비평하고 싶었다면, SF 소설을 이야기했어야 했습니다. 희한한 점은 <변종>이 SF 소설이라는 점입니다. 왜 사이언스 픽션을 비평하는 SF 소설이 SF 소설을 언급하지 않고 SF 영화들만 줄창 늘어놓았을까요. 헛다리를 열심히 짚는 수많은 SF 영화 비평들과 SF 게임 비평들처럼 왜 <변종>은 SF 소설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을까요. 저는 <변종>이 나름대로 재미있는 책이라고 생각하나, 이런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더군요.
[하지만 이런 SF 소설은 정말 외계 생명체를 진지하게 고민하죠. <변종>은 이걸 빼먹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