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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형이상학 비판

<세븐이브스> 서평이 저지른 실수

OneTiger 2018. 11. 13. 20:14

인터파크 인터넷 사이트에는 듀나님이 연재하는 장르 소설 서평들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듀나님은 판타지 소설들과 추리 소설들과 SF 소설들을 주로 평가합니다. 9월 27일에 듀나님은 닐 스티븐슨이 쓴 소설 <세븐이브스>를 평가했죠. 소설 <세이븐이브스>는 하드 SF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달이 뽀개졌다고 상정하고 어떻게 인류가 지구 멸망 재난을 피할 수 있는지 그립니다. 우주로 대피하기 위해 인류는 방주 우주선을 만들고 방주 우주선에서 힘겹게 생활합니다.


대부분 내용은 방주 우주선 건설과 우주선 생활입니다. 소설 제목은 '세븐이브스'이나, 사실 세븐 이브스보다 방주 우주선은 훨씬 많은 비중, 아니, 대부분 비중을 차지합니다. 어쩌면 닐 스티븐슨은 제목을 잘못 지었을지 모르죠. 소설 제목이 세븐이브스인 이유는 일곱 여자들이 아이들을 낳고 그 아이들이 거대한 문명들을 이룩하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문명들은 일곱 여자들에서 비롯했고 그래서 소설 제목은 '세븐 이브스'입니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그런 내용은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소설은 일곱 여자들이 누구인지 보여주나, 그런 내용은 제목이 풍기는 느낌과 많이 동떨어졌어요. 심지어 일곱 여자들 중에서 일부는 별로 비중을 차지하지 못해요.



그래서 듀나님은 비율과 이야기가 맞지 않는다고 평가했습니다. 이 소설은 1부, 2부, 3부로 이루어졌습니다. 3부는 인류 멸망 이후 새로운 문명들을 묘사하고 그래서 꽤나 중요합니다. 하지만 3부는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1부와 2부는 3부를 압도하죠. 1부와 2부는 본론이고, 3부는 곁다리와 들러리 같아요. 어쩌면 닐 스티븐슨은 <세븐이브스> 속편을 쓸지 모릅니다. 속편이 나온다면, 속편은 일곱 문명들과 새로운 지구 문명을 이야기할지 모르죠. 사실 <세븐이브스>는 그런 이야기를 위한 전초일지 모릅니다. 속편이 나온다면, 닐 스티븐슨은 <세븐이브스>와 속편을 함께 묶고 연대기를 만들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독립적인 소설로서 <세븐이브스>는 좋지 않은 비율을 보여줍니다. 닐 스티븐슨은 1부와 2부를 줄이고 3부를 늘려야 했을지 모릅니다. 아니면 닐 스티븐슨은 아예 다른 주제를 잡았어야 했는지 모릅니다. 분명히 하드 SF 독자들에게 우주선 건조와 우주선 생활은 엄청난 재미를 제공하겠으나, 전반적인 구성은 너무 한쪽에 치중했습니다. 어쩌면 그건 닐 스티븐슨의 원래 목표였을지 모릅니다. 만약 그게 원래 목표라면, 설정과 주제와 이야기 사이에서 닐 스티븐슨은 어디로 자신이 가야 할지 헛갈렸을지 모릅니다. SF 소설은 설정 사전이 아니죠. <세븐이브스>는 좋은 설정을 보여줄지 모르나, 좋은 소설이 되기는 힘들겠죠.



하지만 오직 이것만 <세븐이브스>가 드러내는 단점일까요. <세븐이브스>에게는 아주 치명적인 결함이 있습니다. 예전에 이야기한 것처럼, 이 소설이 얄팍한 사회 생물학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은 유전 공학이 인간성을 개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소설 속에서 주연 등장인물들은 왜 인류 문명이 폭력적인지 논의합니다. 그런 논의는 유전 공학으로 흘러가요. 주연 등장인물들은 유전 공학이 인간성을 고칠 때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하죠.


분명히 유전 공학은 많은 한계들을 고칠 수 있을 겁니다. 유전 공학을 이용해 우리는 더 나은 인간성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아니, 아예 우리는 새로운 생물종이 될 수 있겠죠. 인간에게는 수많은 한계들이 있습니다. 왜 우리가 이것들을 버리지 말아야 할까요. 우리는 우리를 개량할 수 있고, 아예 우리는 새로운 생물종이 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인간성을 그리워하겠으나, 인간성은 신성이 아닙니다.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인간성을 신성이라고 간주할 뿐입니다. 만약 우리가 새로운 생물종이 된다면, 새로운 생물종은 인간성을 굴러다니는 돌멩이라고 취급할지 모릅니다. 우리가 인간성을 신성하다고 숭배한다면, 그건 너무 인간 중심적인 시각일지 모르죠.



하지만 오직 인간성만이 문제일까요? 오직 유전적인 인간성만이 문제일까요? 아니,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주장은 아주 중요한 사실을 빼먹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사회적인 존재들입니다. 인류는 사회적인 존재들입니다. 사회적인 자아라는 사회학 용어처럼, 인류 사회는 개인들에게 엄청나게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인간성은 사회에게 많은 영향들을 받습니다. 인간성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사회적인 관계가 바뀔 때, 인간성 역시 바뀝니다. 중세 여자들은 페미니즘이 뭔지 알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중세 여자들이 당당하게 나서고 싶다고 해도, 그들은 어떻게 여자들이 그럴 수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19세기 이후, 사회적인 관계들은 바뀌었고 그래서 여자들은 페미니즘을 외칠 수 있습니다. 13세기 여자와 19세기 여자는 다릅니다. 13세기 여자와 달리, 19세기 여자는 왜 여자와 남자가 평등한지 말할 수 있어요. 게다가 여자들은 비단 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위했고 집회들을 열었고 거리들을 행진했죠. 왜 13세기 여자들과 달리, 19세기 여자들이 시위할 수 있었을까요? 13세기에서 19세기까지, 여자들이 새로운 생물종으로 진화했나요? 새로운 유전 형질이 진화했나요? 그건 아니죠. 이유는 사회적인 관계들이죠.



사회 생물학은 이걸 무시합니다. 사회적인 관계들이 인간성에 엄청난 영향을 미침에도, 사회 생물학은 이걸 무시합니다. 사회 생물학은 오직 유전 형질에만 관심을 기울이죠. 이건 지배 계급에게 유리합니다. 우생학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인종 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해 백인들은 원주민들이 생물적으로 열등하다고 말했죠. 인구 폭발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이미 19세기에 지배 계급은 원주민들과 노동자들이 열등하기 때문에 폭발적으로 인구를 늘린다고 차별했어요. 아직 그런 시각은 사라지지 않았죠. 인구 폭발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백인들이 인구 폭발을 일으킨다고 말하지 않아요. 사실 유럽이나 북미나 호주 백인 인구들이 정말 압도적으로 많을까요? 그건 아니죠. 그래서 인구 폭발 이야기는 인종 차별론이죠.


게다가 사회 생물학은 성 차별을 저지릅니다. 사람들은 남자가 본능적으로 섹스에 미쳤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남자가 성 폭행을 저지른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게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여자와 남자는 똑같이 섹스를 좋아해요. 가부장 문화가 남성적인 폭력을 부추기기 때문에 남자들은 그저 성 폭행이 쾌락이라고 착각할 뿐이죠. 듀나님은 이걸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서평들에서 듀나님은 성 차별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한 마디씩 날렸어요. 하지만 사회 생물학이 성 차별을 조장하고, <세븐이브스>가 그런 성 차별을 따름에도, 듀나님은 그걸 언급하지 않았죠.



성 차별을 정말 비판하고 싶다면, 우리는 오직 여자의 당당한 정체성만 운운해서는 안 될 겁니다. 우리는 훨씬 깊이 들어가고 넓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할 겁니다. 우리가 오직 여자의 정체성만 운운한다면, 그건 그저 꼬투리 잡는 행위에 불과하겠죠. 고작 그게, 고작 꼬투리 잡기 따위가 성 평등 논의가 될 수 있겠습니까. 사회 구조와 지배 계급이 성 차별을 일으킬 때, 우리는 그걸 근본적으로 비판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우리는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고 전반적인 구조를 파악해야 할 겁니다. 그걸 잊는다면, 아무리 우리가 성 차별을 꼬집는다고 해도, 우리는 <세븐 이브스>와 똑같은 실수를 저지를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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